220. 극광 아래에서
#220
“자, 자이파? 나비로제 교관님?”
아데샨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보면서도 믿을 수 없었다. 갑작스러운 나비로제의 등장도 충분히 놀랄 만한 일이었지만, 정말 경악스러운 것은 그 옆에 있는 자이파였다.
“로난, 이, 이게 무슨 일이야? 자이파가 어떻게 북부에···!”
“내가 황제 폐하한테 편지를 썼거든요. 누군가는 북부를 바로잡아야 하니까.”
로난은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그는 자이파가 북부에 올 수 있도록 피의 맹약의 내용을 수정해 달라고 황제에게 요청했다.
바르카가 흙탕물로 만들어 놓은 북부를 안정시킬 인물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뿐이었으니까. 솔직히 무모한 부탁이라 생각했는데, 저기 걸어오는 모습을 보니 우리의 황제 폐하께서 자비롭게도 윤허해준 모양이었다. 아데샨이 두 손을 모으며 감탄했다.
“대, 대단해···그럼 나비로제 님은?”
“감시역이겠죠. 괜히 헛짓거리를 하면 곤란하니까.”
나비로제가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고 있었다. 한창 휴가를 즐기다가 끌려온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자이파같은 거물을 감시하고 유사시에 제압까지 시도할 수 있는 인재는 제국에 몇 명 되지 않았으니까. 가까워지는 두 사람을 지켜보던 로난이 굵직한 침을 삼켰다.
‘···갑자기 달려드는 건 아니겠지.’
그는 상당히 난처한 상황에 부닥쳐 있었다. 지금은 편지를 썼을 당시보다 아주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바르카의 악행은 생각보다 추악했고, 어쩌다 보니 로난은 자이파의 동생과 아들을 동시에 죽여 버리게 되었다. 물론 아들은 원래 죽어 있기는 했지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덧 두 사람과의 거리는 인사를 나눌 정도로 가까워졌다. 자이파가 먼저 손을 흔들었다.
“반갑군. 로난.”
“오랜만이야, 자이파.”
“얼마만에 밟는 고향 땅인 줄 모르겠군. 뭐라고 감사를···”
인사를 하던 자이파가 말꼬리를 끌었다. 그의 시선은 로난에게 업혀 있는 웨어타이거 소년에게 머물러 있었다. 아데샨이 눈을 질끈 감았다.
“···아라단?”
“많은 일이 있었어.”
자이파의 얼굴이 굳어졌다. 로난이 아라단의 시체를 그에게 내밀었다.
“받아.”
자이파는 말없이 아들의 시신을 건네받았다. 아라단도 제법 크다고 생각했는데 자이파의 손에 들려져 있는 걸 보니 그냥 소년이었다. 한참을 벙쪄 있던 그가 입을 열었다.
“···설명해라.”
“그러지. 잠깐 이리 올 수 있을까.”
아무래도 둘이서 대화해야 할 것 같았다. 아라단의 죽음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들이 있었으니까.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로난이 바르카의 연구실에서 찾은 편지 뭉텅이를 슬쩍 보여주었다.
“그건.”
“아는 편지지?”
자이파의 눈이 한순간 커졌다. 양피지 뒤로 비쳐 보이는 필적은 자신의 것이었다. 잠시 침묵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상관없다. 여기서 말하도록.”
“전부? 정말로?”
“내 아들 앞이다. 오히려 하나라도 빼놓으면 가만두지 않겠다.”
자이파가 으르렁거렸다. 원래 이런 작자였다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한숨을 푹 내쉰 로난이 편지를 꺼내들었다.
“좋아. 일단 제이거라는 놈 이야기부터 해야겠지. 그러니까···.”
나머지 세 사람의 이목이 쏠렸다. 로난은 북부에 온 이후로 벌어졌던 일을 하나씩 설명했다. 카라벨 상단과의 동행, 제이거와의 만남과 그의 죽음, 진정한 흑막인 바르카 터르겅과 벌인 처절한 추격전까지.
“그런가···바르카가 그 정도까지 타락한 건가.”
자이파가 혼잣말했다. 그는 예상외로 담담하게 로난의 이야기를 들었다. 물론 전신의 털은 당장이라도 쏘아져 나올 것처럼 곤두선 채였다.
로난은 구원자와 엘시아의 정보를 제외한 모든 것을 그 자리에서 이야기했다. 자이파가 비교적 최근까지도 반란을 모의했다는 사실이나, 바르카는 네뷸라 클라지에의 주교였다는 것처럼 지극히 위험한 정보까지. 불현듯 칼자루에 손을 얹은 나비로제가 입을 열었다.
“그럼 지금은, 확실히 내통자가 아니라는 건가.”
“확실해요.”
로난이 긍정했다. 하지만 나비로제는 그에게 질문한 것이 아니었다. 들불 같은 살기가 그녀의 어깨 위로 일렁이고 있었다. 침묵하던 자이파가 고개를 끄덕였다.
“편지에 쓰여 있는 대로다.”
“···흠.”
그제야 나비로제가 칼자루에서 손을 뗐다. 살기가 한순간에 가라앉았다. 정상적으로 호흡할 수 있게 된 로난과 아데샨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뭐 어쨌든, 그렇게 된 거야.”
로난의 설명은 머지않아 끝났다. 끔찍하도록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자이파는 말없이 죽은 아들의 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런가.”
로난의 걱정과는 달리 자이파는 화를 내지도, 자신의 탓을 하지도 않았다. 불현듯 그가 등을 돌렸다. 품에는 아라단을 안은 채였다.
“아들을 묻고 돌아가겠다.”
“너···.”
뭐라 말하려던 나비로제가 이내 그만두었다. 원칙상 안 되는 일이었겠지만 그녀는 자이파를 제지하려 들지 않았다. 터벅터벅 걸어가던 자이파가 제자리에 멈춰 섰다.
“로난.”
“음?”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이파가 말했다.
“고맙다. 잊지 않으마.”
자이파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참으로 더러운 기분에 로난이 이를 악물었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기에 바람 소리와 멀어지는 자이파의 발소리만이 선명하게 들렸다. 처음으로 침묵을 깬 것은 나비로제였다.
“많은 일이 있었군. 너희가 무사해서 다행이다.”
“뭐, 그렇죠. 교관님은 잘 지냈어요?”
“남부에 한 번 다녀왔다. 제도의 여름은 영 미적지근해서 말이지. 돌아오자마자 이런 냉동고로 보내질 줄은 몰랐지만.”
어쩐지 피부가 조금 더 탔다 싶었다. 그때부터 세 사람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자이파의 일은 안타까웠지만, 언제까지고 우울해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것저것 질문하던 나비로제가 별안간 외투의 단추를 풀어헤치기 시작했다.
“후우···아무리 헤이란이라지만 이렇게 걸으니 덥군. 너무 많이 껴입었어.”
나비로제는 추위에 약한지 두터운 가죽옷을 세 겹이나 껴입고 있었다. 투덜거리던 그녀가 단추를 풀었다. 앞섶이 느슨해짐과 동시에 옷 안에 갇혀 있던 열기가 훅 올라왔다.
“오.”
로난이 입을 동그랗게 말았다. 땀으로 젖은 내의가 몸의 굴곡을 따라 들러붙어 있었다. 두 개의 덩어리가 자아내는 특유의 양감은 불의 어머니 바로 다음 가는 수준이었다. 옷깃을 흔들며 땀을 식히던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후, 이제 좀 낫군.”
“와아···.”
덩어리의 마력에 사로잡힌 것은 아데샨도 마찬가지였다. 문득 로난도 자신과 같은 것을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가 기겁하며 외쳤다.
“교, 교관님!”
황급히 손을 뻗은 아데샨이 그녀의 외투 단추를 채웠다. 재단사의 딸이라 그런지 옷을 다루는 손놀림이 굉장히 민첩했다. 나비로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냐, 갑자기.”
“하, 함부로 벗고 그러면 안돼요. 얼마나 추운데요.”
“아직 덥다.”
“그, 그래도 안 돼요. 누가 보면 어떡하려구요···!”
그리 말한 아데샨이 로난을 한 번 째려보았다. 찌르는 듯한 눈빛에 당황한 로난이 시선을 피했다. 자기도 실컷 봤으면서 치사하기는. 그런 두 사람을 귀엽다는 듯이 쳐다보던 나비로제가 입을 열었다.
“아데샨.”
“네?”
“고생 많았다. 힘든 일을 겪었구나.”
한순간 아데샨의 동작이 굳었다. 나비로제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단추를 채우기 위해 허리를 숙이고 있어서 가능한 동작이었다.
“교, 교관님? 갑자기 왜···.”
“복수라는 것은 통쾌하지만은 않은 일이지. 그것이 살인으로 귀결되었다면 더더욱. 나 역시 잘 알고 있다.”
바르카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데샨이 고장난 인형처럼 더듬거렸다.
“그···그건···.”
“사람은 울 수 있을 때 울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금새 망가져 버리니까. 쌓인 게 있거든, 지금 전부 털어 버리고 가라.”
나비로제가 말없이 팔을 벌렸다. 아데샨의 눈가가 파르르 떨려왔다. 그간 북부에서 겪은 고초와 송곳니의 밤에 벌어졌던 악몽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몇 초가 지났을까. 숨을 가쁘게 내쉬던 그녀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음?”
“괜찮아요. 이미 울 만큼 울었으니까.”
로난을 슬쩍 돌아본 아데샨이 미소지었다. 눈물이라면 아라단의 시신을 수습할 당시에 이미 충분히 흘렸다.
물론 그리 말하는 아데샨의 눈가에는 물기가 촉촉하게 고여 있었지만, 어쨌든 눈 밖으로 새나오지 않는 이상 그걸 눈물이라 부를 수는 없었다. 나비로제가 픽 웃었다.
“많이 컸구나.”
다시 한 번 스승 노릇을 하기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자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은 언제나 기쁜 일이다.
아데샨이 울 줄 알고 자리를 피해 있던 로난이 슬그머니 돌아왔다. 그의 머리도 쓰다듬어 준 나비로제가 입을 열었다.
“그래, 이제 어디로 갈 거냐.”
“글쎄요···대장간을 먼저 가봐야겠죠. 일이 커지기는 했지만 원래 목적지는 거기였으니까.”
“대장간? 헤이란에 있는 오로라 스칼을 말하는 거냐?”
“맞아요. 그런 이름이었던 거 같은데. 아는 곳이에요?”
“보나마나 파르잔의 늙은이들이 추천해줬겠군. 거리만 제외하면 최고의 대장간 중 하나지. 극광을 활용한 제련술은 대륙의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으니까.”
나비로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깐깐한 누님이 이렇게 말할 정도면 정말로 괜찮은 곳인 것 같았다. 막 떠나기 위해 채비하는 차였다.
“헌데, 문제가 있다.”
“뭔데요?”
“여기까지 오면서 북부의 사정을 대충 들었는데, 그 제이거라는 놈에게 풀려난 장인들이 대장간을 출항시켰다 하더군. 아마 지금쯤이면 북해 어딘가를 떠돌고 있을 거다.”
로난의 미간이 좁아졌다. 대장간을 뭐 어째? 내가 지금 잘못 들은 건가?
“잠깐만요. 대장간을 ‘출항’시켰다니. 그게 무슨 뜻이죠?”
“뭐야, 모르고 있었나. 오로라 스칼은 거대한 빙하를 통째로 개조해서 만든 대장간이다. 극광을 채집할 때나 이번 같은 위기 상황을 맞이했을 때는 헤이란을 떠나 바다로 향하지.”
“이런 시발.”
로난이 기가 막힌다는 듯이 웃었다. 살다살다 그란 카파도키아보다 얼척 없는 대장간이 존재할 줄은 몰랐다. 빙하를 개조해서 돌아다니다니, 그런 정신 나간 발상을 할 줄이야. 나비로제가 말했다.
“보아하니 너희는 배가 있는 것 같지는 않군. 운이 없다면 한참을 찾아 헤매야 할 수도 있는데 말이지.”
“그렇죠···제기랄, 다음에 다시 와야 하나.”
“그럴 필요 없다. 내가 타고 온 그리폰을 빌려 줄 테니 그걸 타고 가라.”
“네?”
별안간 나비로제가 주머니에서 호루라기 하나를 꺼내 물었다. 삐익-! 맑고 높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머지않아 그녀와 자이파가 걸어왔던 방향의 하늘에서 거대한 그리폰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휘요오!
로난과 아데샨의 눈이 커졌다. 부드럽게 선회한 그리폰이 세 사람의 앞에 착지했다. 털이 곱고 날갯짓이 예사롭지 않은 것이 야생 개체는 절대로 아니었다. 로난이 물었다.
“웬 그리폰이에요?”
“제국군에게서 빌렸다. 덕분에 편하게 올 수 있었지. 군용으로 훈련받은 놈이라 다루기 쉬울 거다.”
과연 널찍한 등에는 제국의 문장이 새겨진 안장이 얹혀져 있었다. 나비로제가 호루라기를 로난에게 건넸다.
“교관님은 어떡하고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지 마라. 안그래도 북부에 한 번 오고 싶었는데 잘 됐어.”
나비로제는 뭐 그런 걸 걱정하냐는 투로 손사래를 쳤다. 로난은 얼떨떨해하면서도 호루라기를 받아들었다.
확실히 배보다 훨씬 빠르고 효율적인 탈것이었다. 그리폰을 쳐다보던 아데샨이 절망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또 하늘이야···?”
“다녀와라. 나는 저 고양이와 함께 북부를 정리하고 돌아가겠다. 일이 끝나면 바르사에서 만나지.”
나비로제가 등을 돌려 걸어갔다. 두 사람의 감사 인사는 손을 슬쩍 들어 주는 것으로 응대했다. 너무 시원시원해서 헤이란의 추위도 잊어버릴 것만 같았다. 머지않아 두 사람을 태운 그리폰이 날아올랐다.
“캬아아아악!”
새된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로난은 고삐를 당기며 속도를 높였다.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것이, 오늘 밤에는 별이 아주 잘 보일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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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어디를 싸돌아다니고 있는 거야. 그쪽은 보여요?”
“아, 아니. 여기도 안 보여.”
아데샨이 벌벌 떨며 대답했다. 아무리 아래를 살펴봐도 시커먼 수면과 쭉정이 같은 유빙을 제외하고 보이는 것은 없었다. 그리폰이 날갯짓을 할 때마다 그녀의 앞머리가 사정없이 헝클어지고 있었다.
하늘을 배회한 지도 벌써 한나절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완연한 어둠이 북녘 바다에 내려앉아 있었다. 과연 별은 정말 잘 보였지만, 망령의 바다에 있었을 때와 같은 극광은 보이지 않았다.
“극광이라도 비치면 좋을 텐데···힘들면 이야기해요. 잠깐 빙하에 앉아서 쉬면 되니까.”
“고, 고마워. 그런데 아직 괜찮아.”
두 사람은 아직도 오로라 스칼인지 뭔지 하는 대장간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빙하 곳곳에 조명을 밝혀 놔서 찾기가 쉬울 거랬는데, 아직 코빼기도 안 비치는 걸 보면 어지간히 먼 곳을 배회하고 있는 듯했다.
그리폰을 몰던 로난이 뒤에 있는 아데샨을 힐끔 돌아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눈을 질끈 감은 채 자신의 등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죄책감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어쩌다 보니 갖은 생고생을 하게 됐지만, 이 사람은 어디까지나 안내역으로만 데려온 거였는데.
“너무 고생만 시켜서 미안해요. 어째 대장간에 가는 것도 쉽지 않네.”
“아, 아니야···나는 괜찮아. 덕분에 과거의 악연도 해결할 수 있었고, 오히려 너무 좋았어.”
“허.”
그 말을 들은 로난이 헛웃음을 쳤다. 경악스러울 정도의 선함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힘을 다루는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렇게 착하면 나중에 손해 보면서 살아요. 대장군이 되려면 악독한 면도 있어야지.”
“그, 그런가? 그래도 좋았던 걸 어떡해.”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요. 저도 선배랑 같이 다녀서 좋았어요.”
“···아하하.”
아데샨이 웃었다. 등에 얼굴을 묻고 있어서 목소리가 울렸다. 불현듯 그녀와 함께해온 기억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돌이켜 보면 두 번째 삶을 살게 된 이후 아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사람이었다.
‘정말 좋은 사람이지.’
착하고 예쁜데다 머리도 좋았다. 고된 일에도 굴하지 않고 맞서는 근성까지 있었다.
무엇보다 함께 있으면 집에 있는 것처럼 편안했다. 내가 지금까지 여자에게 이런 감정을 품은 적이 있던가? 아마 없던 것 같은데.
로난이 그녀에 대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와중이었다. 별안간 어두침침하던 머리 위가 확 밝아졌다. 눈을 휘둥그렇게 뜬 그가 아데샨을 불렀다.
“선배.”
“응?”
“눈 뜨고 고개 들어 봐요. 얼른.”
“가, 갑자기 왜? 찾았어?”
“그건 아닌데 빨리요. 겁내지 말고.”
로난이 그녀를 재촉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풍경이었다. 아데샨이 우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들었다.
“우으으으···응?”
그녀의 눈이 커졌다. 치맛자락을 연상케 하는 녹색 빛무리가 사방을 휘감고 있었다. 북부에서만 볼 수 있는 자연 현상인 극광이었다.
다만 어젯밤에 망령의 바다에서 본 것과는 규모가 차원이 달랐다.엘시아를 만났을 당시의 극광이 오두막집에나 겨우 다는 삼베 커튼이었다면, 지금은 황궁의 알현실에 달리는 거대하고 화려한 커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데샨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아아아···!”
“죽이죠.”
“응, 정말로···!”
그녀는 높은 곳에 대한 두려움도 잊고 사방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극광이 내려앉은 밤바다는 태어나서 본 그 어느 풍경보다 아름다웠다.
로난은 고개를 돌려 그런 아데샨을 바라보았다.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극광이 그녀의 얼굴을 몽환적인 색채로 물들이고 있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이 아름다웠다.
‘예쁘네.’
아데샨은 극광을 잡아 보기라도 할 것처럼 손을 이리저리 휘적이고 있었다. 한쪽 손은 자신의 허리를 휘감은 채였다. 불현듯 로난은 가슴 언저리가 쿡쿡 저려오는 것을 느꼈다.
‘뭐야?’
전생에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각이었다. 들뜨는 것 같으면서도 약간은 괴로운 느낌은 갈수록 고조되고 있었다.
굉장히 혼란스러웠지만 지금 해야 할 일은 알 것 같았다. 임기응변은 그의 주특기였으니까. 아데샨의 옆얼굴을 바라보던 로난이 입을 열었다.
“아데샨.”
“응?”
아데샨이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손을 뻗은 로난이 그녀의 뒤통수를 붙잡으며 가볍게 끌어당겼다. 아데샨의 눈이 커졌다.
“읍···!”
인공호흡을 할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맞닿은 입술을 통해 온기가 느껴졌다. 마르고 터져서 바삭거리는 입술에서는 피 맛이 났다. 로난은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삼 초도 되지 않는 찰나였지만 아데샨에게는 세 달처럼 길게 느껴졌다. 마침내 입술을 뗀 로난이 히죽 웃었다. 멈춰 있던 아데샨의 시간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로, 로, 로, 로난···지금 이게 무슨···!”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그녀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몸에 힘이 풀려서 목소리도 잘 나오지 않았다. 검지 끝에 닿아 있는 아랫입술에서는 아직도 온기가 남아 있었다.
아데샨의 얼굴은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붉어져 있었다.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던 로난이 다시 한 번 입을 맞췄다.
“아···아아아···.”
이번 기습 공격은 치명적이었다. 힘이 완전히 풀린 아데샨이 그리폰의 등 위에 엎어졌다. 충격이 너무 커서 더는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그냥, 예뻐서 했어요.”
로난이 웃었다. 남녘으로 굽이치며 이어지는 극광은 그들이 나아가야 할 길을 알려 주는 이정표처럼 보였다. 묵묵히 비행하던 그리폰이 포효했다.
-휘요오오오!
이후의 두 사람은 한참이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극광을 따라 한 시간 가량을 비행하던 와중이었다. 지금껏 본 적 없는 이질적인 물체가 로난의 시야에 들어왔다.
“어?”
전함처럼 거대한 빙하의 표면은 푸르스름한 은색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자연에 존재하는 것이 아닌, 마법을 이용한 조명이었다. 로난의 입이 나지막이 벌어졌다.
“찾았다.”
오로라 스칼이 분명했다. 로난은 빙하가 있는 방향으로 기수를 돌렸다. 가까이 가 보니 빙하의 정수리 부분이 평평하게 깎인 것이 눈에 들어왔다. 날아다니는 탈것을 위해 지어진 활주로인 것 같았다. 로난이 말했다.
“착륙할 테니까 꽉 잡아요.”
“···응.”
입맞춤 이후 첫 대화였다. 아데샨은 말없이 허리를 끌어안았다. 넓은 등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그녀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늘을 불사르고 있는 극광이 눈에 들어왔다.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광경은, 그녀가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닌지 헷갈리게 했다. 입술을 한 번 만지작거린 아데샨이 배시시 웃었다.
“아하하.”
꿈이 아니었다. 천천히 선회하던 그리폰이 얼음을 깎아 만든 활주로에 착륙했다. 규칙적인 망치질 소리가 빙하 안쪽으로부터 어렴풋이 들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