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 오로라 스칼(1)
#221
천천히 선회하던 그리폰이 착륙했다. 빙하를 깎아 만든 활주로는 은은한 백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먼저 내린 로난이 발로 바닥을 쾅쾅 두들겼다.
“햐, 진짜 얼음이네.”
직접 밟아 봐도 믿을 수 없었다. 어쩌다 이런 정신나간 발상을 했는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그리폰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준 그가 아데샨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 내려요.”
“고, 고마워···.”
머뭇거리던 아데샨이 로난의 손을 맞잡았다. 평소에도 행해지던 사소한 친절이었지만 이전과는 또 다르게 느껴졌다. 머리를 푹 숙인 그녀의 모습을 본 로난이 걱정스레 물었다.
“뭐야, 어디 아파요?”
“으응, 아니. 그냥.”
아데샨은 시선을 깐 채 고개를 내저었다. 도저히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행복하고 부끄러우면서도 살짝은 주눅들었다. 아직도 얼굴이 터질 것 같은 자신과는 달리 로난의 태도는 평소와 다름없이 태연했다. 그런 짓을 저질러 놓은 주제에.
‘분명 나 말고도 많이 사귀어 본 거겠지.’
어쩔 수 없는 걸 알면서도 조금은 분했다. 나는 지금까지 연애는커녕 짝사랑도 해보지 못했는데. 물론 로난은 나름대로의 고충을 겪고 있었다.
‘아씨, 큰일났네.’
한 번 의식하기 시작하니까 계속 예뻐 보였다. 무덤덤한 척을 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입맞춤을 한 직후 계속 이 상태였다. 애당초 로난은 두 번의 삶을 통틀어서 이성에 대한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었으니 어찌 보면 이 쪽이 더 심각했다.
마음만 같으면 대장간이고 뭐고 서로의 입술 감촉이나 마저 확인하고 싶었으나 그럴 수는 없었다. 뭔가 다른 곳으로 신경을 돌려야 했다. 심호흡으로 감정을 다스린 그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나저나 어디로 들어가야 하는 거야?”
광활한 얼음 평원 위에 출입구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규칙적인 망치질 소리가 발아래에서 들려오는 것을 보면 이 안에 대장간이 있는 것은 분명한데. 겨우 고개를 든 아데샨이 입을 열었다.
“일단 한번 돌아다녀 보자. 조금 걸릴지도 모르겠지만···.”
“네. 그게 좋겠네요.”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폰을 얼어 죽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얼른 입구를 찾아야 했다. 불현듯 두 사람의 뒤쪽에서 걸걸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손님인가?”
“엉?”
웬지 모르게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로난과 아데샨이 거의 동시에 몸을 돌렸다. 스무 걸음 정도 떨어진 곳, 자신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있는 거한이 반팔 차림으로 서 있었다.
“댁은···?”
“이거 참, 항해 중인데 여길 찾아내다니 운도 좋군.”
거한이 감탄하듯 중얼거렸다. 양쪽 손에는 큼직한 양동이가 하나씩 들려 있었다. 아무래도 마중을 나왔다기보다는 일을 하다가 우연히 마주친 것 같았다. 그가 말을 이었다.
“여긴 추워. 입구로 안내해 줄테니 따라와.”
험악한 인상과는 대비되는 친절한 태도였다. 거한이 발걸음을 돌리려는 차였다. 유심히 그를 뜯어 보던 로난이 눈썹을 치켜떴다.
“잠깐만, 너 디디칸 아니냐?”
“뭐야, 그 이름을 어떻게···.”
로난을 빤히 바라보던 그가 양동이를 떨어뜨렸다. 텅그렁! 용도를 알 수 없는 투명한 액체가 꿀렁이며 쏟아졌다. 거한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세상에, 로난?”
“역시 맞구만.”
당황하는 모습을 보니 더욱 명확해졌다. 거한의 정체는 그란 카파도키아에서 일하던 웨어울프 대장장이 디디칸이었다. 순간을 영원으로 바꿔 주는 기계를 만든 괴짜.
“이, 이게 얼마 만이야? 해주를 마치고 돌아왔다는 소식은 얼핏 들었는데.”
“2년 조금 넘었지. 수염 잘 길렀네.”
“하하, 어울리지? 옆의 아가씨도 오랜만이군.”
“핫, 안녕하세요···!”
벙쪄 있던 아데샨이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간만에 만나는 디디칸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수염을 북슬북슬하게 길러서 원체 험상궂던 인상이 다소 누그러져 보였다. 참으로 기묘한 재회였다. 로난이 그의 팔을 툭툭 두드렸다.
“그나저나 네가 왜 여기 있어? 그란 카파도키아랑 도론 영감님은 어쩌고?”
“그 도론이 좋은 공부가 될 거라며 보냈어. 이삼 년 정도 배우고 오라고 표정 하나 안 변하고 말하더라고. 나 참, 장수 종족의 시간 감각이란.”
디디칸이 질린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입가에 미소가 걸려 있는 걸로 봐서 딱히 불만이 있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양동이를 주섬주섬 챙긴 그가 몸을 돌렸다.
“일단 따라와. 우리 스승님께 안내해 주지.”
“스승님?”
“그래. 여기서 나를 가르쳐 주는 대장장이인데, 실력이 정말 대단해. 고삐는 나한테 줘.”
“아, 그래.”
로난은 그렇게 했다. 그리폰의 고삐를 건네받은 디디칸이 발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이 그 뒤를 따랐다.
워낙에 넓어 생각보다 오랜 시간을 걸어야 했다. 극광을 머금은 밤바다가 아름다웠다. 여전히 화려한 빛의 군무 아래로 파도 철썩이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빙하의 한쪽 끝에 다다르고 나서야 돌로 만들어진 내리막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여기부터는 대장장이나 일꾼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종종 만날 수 있었는데, 드워프 위주인 그란 카파도키아와는 달리 대부분이 인간이었다. 로난과 그간 밀린 이야기를 나누던 디디칸이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뭐야, 우리를 구해준 게 너였어?! 그럼 제이거를 죽인 것도?”
“제이거는 나 말고 다른 자식이 죽였어. 한심한 놈이었지만, 마지막은 멋지게 갔지.”
“미, 믿을 수가 없군. 그러고 보니 웬 인간 두 명이 우리를 구해 줬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그게 너희였을 줄이야···.”
디디칸이 말을 더듬었다. 제이거의 부하들에게 납치당한 장인은 전체의 3할 정도였다.
남아 있는 오로라 스칼의 사람들은 문을 단단히 걸어잠근 채 한두 달 가량 농성전을 펼쳤는데, 그 와중에도 대장간은 가동되었다고 했다. 어차피 이 빙하의 요새를 뚫고 들어오지 못할 것을 알았기 때문에. 디디칸이 다소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너희들은 영웅이야. 이거 어떻게 감사를 표해야 할 지 모르겠군.”
“감사는 무슨, 장비만 잘 만들어 줘.”
“아무렴. 그건 내가 잘 말해 둘 테니 걱정하지 마. 앗, 여기 이거 좀 맡아줘.”
문득 디디칸은 갈림길에서 마주친 어느 청년에게 그리폰의 고삐를 넘겨 주었다. 청년은 능숙한 동작으로 고삐를 받아들었다. 그가 그리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리폰은 걱정하지 마. 우리 마굿간은 숙소만큼이나 보온이 잘 되니까.”
“그래놓고 나중에 보니까 냉동 닭이 되어 있는건 아니겠지.”
“하하하, 체질에 따라서는 반팔로 잠들어도 땀이 날 지경이라고. 자, 이제 다 왔다.”
한참을 걷던 디디칸이 마침내 멈춰섰다. 빙하 속에 박혀있다시피한 석문은 수인들이 머리를 숙이지 않고 들어갈 수 있을 만큼 높고 넓었다.
석문을 열자 제법 긴 통로가 나타났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망치 두들기는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통로를 벗어남과 동시에 오로라 스칼의 진정한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럼 세계 유일의 이동식 대장간, 오로라 스칼에 온 걸 환영한다.”
디디칸이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말했다. 뒤따르던 두 사람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줄곧 조용히 있던 아데샨이 감탄을 흘렸다.
“우와아아···.”
“대단하군.”
로난 역시 인정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황궁의 대연회장에 버금가는 넓은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물론 그만큼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의 투박한 멋이 있었다.
바닥, 벽면, 천장, 기둥···내부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요소는 푸르스름한 얼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빙하를 깎아 만든 전함이나 다름없었다. 사람들이 분주히 돌아다니며 큰 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봐, 집광수(集光水)좀 가져다 줘!”
“이번 극광이 끝나기 전에 빛을 먹여야 해. 서둘러!”
“검은 남자가 의뢰한 무기는 어떻게 됐어?”
바깥에 비하면 훨씬 따뜻했으나 절대적으로 추운 것은 여전했기에 그들은 여전히 두께 있는 털옷을 입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바쁜 것이 어째 그란 카파도키아와 인상이 비슷했다. 차이점이 있다면 밤인데도 낮처럼 활기가 넘친다는 것과, 일반적인 대장간에서는 듣지 못할 단어들이 종종 나온다는 걸까.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집광수가 뭐냐?”
“극광의 힘을 원활하게 흡수시키기 위해 금속과 장비에 바르는 액체야. 왜, 아까 내가 쏟은 거 있잖아. 빛을 먹인다는 것은 장비를 외부로 옮기고 집광수를 바르는 행위를 통틀어서 말하는 거고.”
“아하···그렇군.”
로난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친절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무슨 소리인지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을 안내하던 디디칸이 별안간 손을 말아 외쳤다.
“이봐, 카탄 님은 어디 있어?”
“카탄?”
수인이라 그런지 확실히 목청이 좋았다. 삼삼오오 모여서 대화를 나누던 인부 중 한 명이 고개를 돌려 대답했다.
“제3작업실. 뒤에 두 사람은 손님인가?”
“그래. 하지만 단순한 손님이 아니라 우리 오로라 스칼을 구한 영웅들이라고. 제이거에게 납치된 동료들이 풀려난 것도 이 두 명 덕이야.”
“뭣이라?”
인부들이 일제히 몸을 돌렸다. 하나같이 궁금한 게 많아 보였지만, 디디칸은 그들을 무시한 채 걸음을 옮겼다.
“이크, 의뢰는 마치고 대화를 나누는 게 좋을 거야. 전부 수다쟁이거든.”
“그게 나을 것 같군.”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광장을 가로지른 그들은 몇 개의 계단과 복도를 지난 끝에 어느 방에 도착했다. 벽면에는 제3작업실이라 적힌 큼직한 팻말이 붙어 있었다.
빙하를 널찍하게 깎아 만든 공간은 어지간한 대장간 세 개를 붙여 놓은 것 만큼 넓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얼음으로 만들어진 화로와 그 안에서 일렁이는 푸른 불꽃이었다.
“특수한 광석을 연료 삼으면 피어나는 불꽃이야. 일반적인 불보다 훨씬 뜨겁지.”
디디칸은 질문이 없었음에도 설명했다. 열기가 상당함에도 얼음이 녹지 않는 것이 신기했다. 대여섯 명의 장인들이 화로 주변에서 저마다의 작업을 하고 있었다.
망치질을 하는 사람도 있었고, 화로에서 갓 꺼낸 검신을 얼음 속에 박아넣는 것으로 담금질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디디칸은 그들 중 팔짱을 낀 채 화로를 바라보고 있는 여인에게 다가갔다.
“스승님.”
디디칸이 불렀으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통이 넓은 바지에 상의는 가슴만 가리는 과감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딱히 관능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는데, 남자처럼 짧게 친 머리카락과 자신 못지않게 두꺼운 팔뚝 탓이었다. 근육으로 뒤덮인 등판에는 웬 드래곤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굉장하군.’
전장에 무기 없이 던져 놔도 열 명 정도는 그냥 잡을 것 같았다. 척 봐도 주먹이 맵게 생긴 것이 도론에게는 함부로 굴던 디디칸이 왜 깍듯이 존대를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무안해진 디디칸이 헛기침했다.
“흠흠, 스승님. 손님을 데려왔습니다.”
“디디칸이냐. 손님이라고?”
“네. 오로라 스칼에서 가장 실력 있는 대장장이를 찾아 왔다고 하더군요. 제이거의 병사들을 치워 준 은인들이기도 합니다.”
“뭐라?”
여인은 그제야 몸을 돌렸다. 마르야도 한번 접고 갈 복근이 모습을 드러냈다. 야성적인 몸에 비해 이목구비 자체는 제법 미인이었다. 디디칸이 여인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로난, 이쪽은 내 스승인 카탄 님이다. 오로라 스칼에서 제일가는 대장장이지.”
“부정하지는 않겠다. 그나저나 이런 애송이들이 우리를 구했다고?”
“네. 그러니까···”
카탄이라 불린 여인은 자신이 제일가는 대장장이라는 점을 시원하게 인정했다. 디디칸은 로난에게 들은 사건의 진상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로난과 아데샨을 번갈아서 쳐다보던 그녀가 작게 탄성했다.
“허, 확실히 맞는 것 같군. 아직 나이가 어려 보이는데 이 정도의 기운이라니···겉모습만 보고 애송이라 부른 걸 용서해 다오.”
“괜찮아요. 사과도 빨랐고 그런 취급은 익숙해서.”
“고맙군. 디디칸에게 들었다시피 내 이름은 카탄이다. 먼저 동료들을 구해준 점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한다.”
감사를 표한 카탄이 악수를 청했다. 별 생각 없이 손을 맞잡은 로난이 흠칫거렸다. 사람의 손이 아니라 나무껍질을 만지는 것 같았다. 지독하리만치 박힌 굳은살과 흉터 탓이었다.
‘자신감의 이유가 있었군.’
로난이 헛웃음을 쳤다. 이 한 번의 악수만으로 카탄의 수준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실력이 없을 수가 없는 대장장이였다. 그녀가 말했다.
“그래, 이제 무슨 용건으로 찾아왔는지 말해 봐. 이 시기에 찾아온 걸 보면 보통 사정은 아닌 것 같은데.”
“딱히 그런 건 아닌데···일단 이거부터.”
별안간 안주머니를 뒤적이던 로난이 고급스러운 편지봉투 하나를 그녀에게 건넸다. 검의 제전의 원로들이 친필로 작성한 추천장이었다. 추천장을 읽던 카탄이 휘파람을 불었다.
“호오, 간만에 보는 추천장이구나. 헤이란의 늙은이들이 이런 극찬을 하는 건 처음 보는군.”
“뭐라고 써 있길래 그래요?”
“가관이야. 보면 틀림없이 우쭐해질 테니 자존감이 조금 떨어진다 싶은 날에 읽어 보려무나.”
카탄이 킥킥거렸다. 어지간히도 감사를 담아 눌러 쓴 모양이었다. 추천장을 돌려준 그녀가 말을 이었다.
“이거 정말 열심히 해야겠군. 슬슬 검은 남자가 올 시간이니 그가 떠나는 대로 시작하지.”
“검은 남자?”
“그래. 언제나 이 무렵에 찾아오는 손님이 있거든. 아까 보니 그 사람이 의뢰한 무기가 드디어 완성된 것 같던데, 그걸 넘겨주는 것만 보고 시작하지.”
영문 모를 소리에 로난이 눈썹을 으쓱였다. 그가 뭐라 말하려는 차였다. 형용할 수 없이 불길하고 강렬한 기운이 등 뒤에서 번득였다.
“시발, 뭐야?”
온몸의 털이 동시에 곤두섰다. 일상 생활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위압감이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괜찮나?”
“로난? 왜 그래?”
아데샨과 카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장인들도 멀쩡히 하던 일을 이어가고 있었다. 숨을 가다듬은 로난이 입을 열었다.
“···둘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으응···? 뭐가?”
아무래도 그를 제외한 나머지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듯했다. 카탄은 그렇다 쳐도 예민한 아데샨이 느끼지 못하는 것은 뭔가 이상했다. 그때, 낯선 목소리가 로난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이봐, 내가 의뢰한 건 아직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