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 고백, 위령비, 귀로
#224
검은 남자는 적막과 의문을 남겨 놓은 채 오로라 스칼을 떠났다. 뒤늦게 말문이 트인 사람들이 그에 대해 떠들어 대고 있었다.
“우웁! 우웨에엑!”
“이상한 친구군. 저렇게 강했으면서 왜 그때는 아무 짓도 하지 않은 거지?”
“사, 산 채로 머리를 터트리다니···.”
비명횡사한 여인과 염소 수염 사내는 아직도 눈을 희번득하게 뜨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끔찍하여 사람들은 머리가 아파올 정도의 피비린내 속에서도 좀처럼 시체에 손을 대지 못하고 있었다. 보다 못한 로난 일행이 시신을 수습하고 나서야 본격적인 뒤처리가 시작되었다.
“좋아. 셋 하면 던지는 거야. 하나, 둘···셋!”
“흡!”
디디칸의 구호와 함께 세 사람이 동시에 손을 놓았다. 쇠사슬로 묶인 자루 하나가 밤바다로 던져졌다.
풍덩! 작은 물보라를 일으킨 자루는 몇 초 지나지 않아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데샨이 우려 섞인 목소리로 질문했다.
“떠오르지는 않겠죠?”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마력 추적을 교란시키는 광석까지 듬뿍 넣었으니까.”
디디칸이 주억거렸다. 그들은 논의 끝에 두 끄나풀의 시체를 밤바다에 버리기로 했다.
둘을 살해한 것은 검은 남자였지만, 드라하비에는 누가 부하를 죽였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을 작자였다. 아무리 시체를 잘 수습하고 경위를 설명해도 책임은 모두가 지게 될 터, 모른 척 일관하는 것이 여러모로 가장 나았다. 디디칸이 말했다.
“고생했어. 안 도와줘도 되는데, 정말 고맙다.”
“···.”
로난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은 줄곧 검은 남자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강함도 강함이었지만 정체를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었다.
‘진짜 뭐 하는 새끼지?’
하는 짓거리를 봐서는 드래곤일 확률이 매우 높아 보였다. 헌데 첫 조우 당시 자신만이 그 강렬한 기척을 눈치챈 현상을 이해할 수 없었다.
실제로 아데샨과 디디칸은 아직 그의 종족을 인간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반짝거리는 마나는 느껴지지 않은 걸로 봐서 교단 측의 인물은 아니었다. 기다리던 디디칸이 재차 질문했다.
“로난?”
“···그래. 너도 고생했다.”
뒤늦게 디디칸을 돌아본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조금 더 깊이 고민해 봐야 할 문제 같았다. 흥미가 생겼다는 말도 영 마음에 걸렸고.
“으음···드라하비에라.”
디디칸은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밤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일단 최선의 선택을 했지만 드라하비에의 보복이 두려운 듯했다. 로난이 그의 등을 툭툭 두들기며 말했다.
“표정 풀어. 내가 나바르도제 님에게 말해 볼 테니까.”
“···너 설마 불의 어머니와 연줄이 있는 거냐?”
“그건 비밀.”
로난은 확답하는 대신 히죽 웃어 보였다. 정 안 될 것 같으면 황제에게 고자질하거나 여명의 권한을 사용해도 어찌어찌 해결될 터였다. 어차피 범죄자 새끼인데 뭘.
바다 위에서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맹렬한 기세로 타오르던 극광도 서서히 잦아들고 있었다. 바람을 쐬다가 돌아간 중앙 홀은 말끔하게 뒤처리가 되어 있었다.
카탄이 그들을 호출한 것은 슬슬 날이 밝아올 즈음이었다. 작업장의 분주한 풍경은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와 변함이 없었다.
푸른 불은 여전히 세차게 일렁이고 있었고, 장인들은 여전히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홀에서 벌어졌던 일을 들은 카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야, 녹색 독니가 찾아와서 행패를 부리다니. 그런 일이 있었어?”
“···소리가 상당히 컸을 텐데?”
“나는 원래 집중하면 아무것도 못 듣거든. 한번 봐야겠네. 일단 칼은 다 벼려 놨어.”
어마어마한 집중력이었다. 카탄은 손질을 끝마친 라만차를 내밀었다. 검을 받아든 로난이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스르릉-! 여전히 유려한 검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생각보다 극적인 변화가 있지는 않네요.”
칼을 유심히 살피던 로난이 입을 열었다. 얇은 칼날을 따라 극광의 색채가 묻어나고 있었으나, 기분 탓이라 칭해도 좋을 정도로 희미했다. 카탄이 검지를 좌우로 까닥거리며 혀를 찼다.
“쯧쯧, 막상 실전에 들어가면 다를 거야. 믿음이 부족하군.”
“그러면 좋겠네요.”
“이게 내 무기가 맞나 싶을 정도로 놀랄 걸? 여기, 아가씨 것도 받아.”
“앗, 감사합니다.”
아데샨이 채찍과 석궁을 받아들었다. 역시 라만차와 마찬가지로 겉보기만으로는 큰 변화가 없었다. 주섬거리던 카탄이 웬 화살 뭉치 하나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자, 이것도.”
“이건···?”
“그냥 기분 내키는 대로 만들어 봤어. 나는 예쁜 아가씨를 좋아하거든. 많지는 않으니까 적재적소에 사용하는 게 좋을 거야.”
카탄은 그것이 아데샨을 위해 특수 제작한 쇠뇌라고 했다. 극광을 먹인 화살촉의 표면은 오묘한 빛깔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쇠뇌를 받아든 아데샨이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아껴서 쓸게요.”
“어쩜 예의도 이렇게 바를까. 남자친구가 괴롭히면 말해. 이 언니가 혼내줄 테니까.”
“······네.”
머뭇거리던 아데샨이 고개를 끄덕였다. 로난은 끝내 그녀가 긍정한 의미를 눈치채지 못했다. 카탄은 나머지 장비는 완성되는 대로 보내준다는 말을 남기고는 그들을 배웅했다.
“그럼 잘 가라 영웅들. 북부에 들르게 되면 또 와.”
“신세 졌어요.”
로난과 아데샨은 다시 활주로로 나섰다. 지나치는 동안 마주친 사람들이 모두 감사 인사를 표했다.
대부분이 선물을 하나씩 내 놓는 바람에 안 그래도 빵빵한 그들의 배낭이 더 부피가 커졌다. 활주로까지 두 사람을 안내한 디디칸이 악수를 요청했다.
“여러 가지 일이 있었지만 즐거웠다. 어째 너와 있으면 매번 시끌벅적한 것 같군.”
“그러게. 다음에도 기깔나는 발명품 좀 만들어 봐.”
“하하, 안 그래도 만들고 있는 게 있지. 형수님도 건강하시고.”
“혀, 형수라뇨. 그런···!”
아데샨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디디칸은 도망치듯 대장간으로 돌아갔다.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는 뭐 그런 핑계였다.
“갔네요.”
“···응.”
디디칸이 떠나간 활주로는 적막에 빠졌다. 두 사람과 뽀송뽀송해진 그리폰, 파도 철썩이는 소리만이 남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로난과 아데샨은 나란히 그리폰에 기댄 채 하늘을 바라보았다. 누구도 출발을 재촉하지 않았다. 서서히 밝아오는 하늘에는 잔상 같은 별빛이 수놓아져 있었다.
‘아.’
아데샨은 디디칸의 이른 퇴장이 둘만의 시간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괜히 손발을 꼬던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 아까 고마워. 촛대를 막아줘서.”
“해야 하는 일이었는데요 뭐. 예쁜 얼굴을 다치면 안 되잖아요.”
“아, 아하하···.”
예쁘다는 말을 들은 아데샨이 뺨을 긁적였다. 이런 말은 아무리 들어도 적응이 안 될 것 같았다. 짧은 대화가 오간 자리에 다시 적막이 찾아왔다.
음, 역시 지금 말해야겠지? 로난이 쭉 생각하던 두 사람의 관계에 관해 이야기하려던 차였다.
“로난.”
“네?”
“좋아해. 많이.”
로난의 눈이 커졌다. 아무래도 타이밍을 재고 있던 것은 그 뿐만이 아닌 것 같았다. 고개를 돌리니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아데샨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저도요.”
로난이 답했다. 동시에 양손으로 아데샨의 얼굴을 붙잡은 그가 입을 맞췄다. 두 입술이 맞닿으며 뭉그러지는 감촉이 나쁘지 않았다. 머지않아 입이 떨어졌다.
“저도 많이 좋아해요.”
“한 번만 더 말해줘.”
“좋아한다니까요.”
좁아진 시야 속에서는 서로의 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의 얼굴이 다시 가까워지던 차였다. 웬 소녀의 목소리가 그들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으음···자고 일어나자마자 이런 걸 보다니. 감격스럽네.]
“꺄악!”
“염병, 뭐야?”
시야가 다시 넓어졌다. 황급히 얼굴을 뒤로 물린 두 사람이 죄인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활주로는 텅 비어 있었다. 어쩐지 기시감이 느껴지던 목소리에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린?"
생각났다. 분명 성검 린의 목소리였다. 파르잔에 다녀온 이후로 처음 듣는 것이었다.
힘을 되찾은 건가? 로난은 자는 사람을 깨우듯이 라만차를 흔들었다.
"얌마, 일어난 거야?"
-퓌욕.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가만히 있던 그리폰이 홰를 쳤다. 표정이 뚱한 것이 볼 장 다 봤으면 이제 가자고 재촉하는 것 같았다.
'빌어먹을,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린에 대해서 모르는 아데샨은 그런 로난을 당황 섞인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색한 침묵이 둘 사이에 내려앉았다. 뒤통수를 긁적이던 로난이 입을 열었다.
“일단 갈까요.”
“그, 그래.”
아쉬웠지만 분위기가 깨진 이상 어쩔 수 없었다. 두 사람이 탑승하기 무섭게 날아오른 그리폰이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밝아지는 세상 속, 점점 작아지던 오로라 스칼은 마침내 작고 하얀 점이 되어 시야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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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관님, 저희 왔어요.”
“음.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군.”
나무로 된 문이 열렸다. 두 사람을 발견한 나비로제가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여관의 벽난로 앞 자리에 앉아 덥힌 꿀술을 마시고 있었다.
“날씨가 좋아서 얼마 안 걸렸어요. 그리폰은 바깥에 세워 놨고요. 으, 배고파.”
“여기 물이랑 순록 스튜 두 그릇 주세요.”
아데샨이 물과 음식을 주문했다. 그들은 날이 완전히 밝아올 무렵에 변경백령 바르샤바에 도착했다. 오로라 스칼에서 휴식을 푹 취한 그리폰은 한 번도 멈추지 않고 목적지까지 날았다.
“엥?”
나비로제에게 다가간 로난이 눈썹을 치켜떴다. 웬 복실복실한 북극여우 한 마리가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여관에 들어왔을 때는 각도 탓에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의 눈이 커졌다.
“세크리트 교수님?”
“고생 많았다. 이 녀석들아.”
룬달리안에서 헤어진 뒤로 첫 재회였다. 테이블 위로 올라온 그가 로난의 손을 맞잡고 흔들었다. 로난이 물었다.
“언제 온 거에요?”
“오늘 아침이란다. 정말 말도 안돼는 일을 해줬더구나.”
그는 거의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원래는 냉소적이라 해도 좋은 사람인데 어지간히도 감동을 받은 듯했다.
“투칸 고원의 저주는 거의 다 사라졌어. 그간 쌓인 증오를 해독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만, 그래도 웃음소리가 조금씩 들려오고 있단다.”
세크리트는 로난의 부재 중에 벌어진 일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많은 변화가 있었다.
바르카의 저주는 사라졌고, 곳곳에서 발생하던 수인 간의 대립도 잦아들었다. 오랜 시간 동안 잊혀졌던 평화라는 개념이 다시금 수면 위로 드러나고 있었다.
마르야의 카라벨 상단은 어젯밤에 막 제도로 방향을 틀었다. 자이파는 동생이 싸지른 똥을 수습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바르카가 암약하던 시간이 워낙에 길었어야지. 그래도 자이파 님의 영향력 덕에 민심은 빠르게 돌아오고 있단다.”
“그거 다행이군. 제이거는요?”
“사흘 전에 장례식이 있었지. 그렇게 많은 수인이 모인 것은 송곳니의 밤 이후 처음 봤어.”
제이거의 장례는 성대한 규모로 치러졌다. 자이파는 그가 바르카의 꼭두각시였다는 사실을 굳이 밝히지 않았다. 인생의 말미에 보여준 용기에 대한 보상이었다.
신 수인 연합은 곧바로 해체되지 않았다. 임시적으로 우두머리 자리에 오른 자이파는 그들로 하여금 엉망이 된 북부를 복구하게 하고 있었다.
종국에는 그들을 네뷸라 클라지에와 대적하기 위한 병력으로 만드는 것이 자이파의 목적이었다. 잔을 단번에 비운 나비로제가 입을 열었다.
“허튼 생각을 안 하면 좋겠군. 그때는 정말 죽일 수밖에 없으니까.”
“아마 괜찮을 거에요.”
로난이 확신에 찬 투로 말했다. 그는 자신에게 감사하던 자이파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일처리를 마치고 돌아온 자이파는 누구보다 든든한 우군이 되어 줄 터였다. 세크리트가 말했다.
“나는 북부에 조금만 더 남아 있을 생각이다. 혹시나 아직 풀리지 않은 저주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래도 가을에는 돌아가마.”
“가을? 아 맞아. 원래는 지금 여름이죠.”
한 달이 넘게 북부에 있다 보니 계절 감각이 사라졌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던 네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제도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별안간 아데샨이 나비로제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저기 교관님, 잠깐 로난이랑 어디 좀 다녀와도 될까요?”
“상관없다. 마차 시간만 맞춰서 오도록.”
“감사합니다.”
아데샨이 생긋 웃었다. 뜬금없는 행동에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어디 가요?”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서. 진짜 잠깐이면 돼.”
“어엇.”
그녀는 로난의 손을 붙잡은 채 여관 밖으로 나섰다. 두 사람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세크리트가 흡족하게 미소 지었다.
“허허, 청춘이군. 굉장히 고된 일정이었을 텐데.”
“원래 척박한 환경일수록 사랑이 피어나는 법이지요. 저 모습을 보기 위해 제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교수님은 모르실 겁니다.”
나비로제가 픽 웃었다. 둘 사이에 흐르는 기류만 봐도 관계의 진척을 알 수 있었다. 이제 둘의 키도 비슷해져 있어서 더 마음에 들었다.
여관을 빠져나온 로난과 아데샨은 천천히 도시의 북측으로 걸음을 옮겼다. 빠질 것처럼 푸른 하늘이 아름다웠다.
확실히 요새 역할을 하는 도시라 그런지 건물 대다수가 견고한 석재로 이루어져 있었다. 불현듯 길가에 멈춰선 아데샨이 우체통 옆에 피어난 들꽃 몇 송이를 꺾었다.
“꽃은 왜요?”
“다들 좋아했거든. 아무 데나 피는 강인함이 마음에 든다면서···너도 몇 송이 받아.”
“으음?”
얼떨결에 꽃을 받아든 로난이 눈썹을 으쓱였다. 계속 걷던 그들은 어느 언덕의 정상에 멈춰 섰다.
제법 고도가 높아서 바르사의 전경과 성벽 너머의 미개척지가 한 눈에 들어왔다. 전사자들을 기리기 위한 위령비는 그곳에 우뚝 서 있었다. 위령비를 바라보던 아데샨이 입을 열었다.
“엄마. 저 왔어요. 오빠들도 잘 있었지?”
“이건···.”
하늘을 향해 솟아난 바위는 그녀의 눈동자처럼 옅은 회색을 띠었다. 높고 널찍한 표면에는 송곳니의 밤에 전사한 군인의 이름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멀리서 봐야 볼 수 있어. 엄마랑 오빠들 전부 맨 윗줄에 적혀 있거든.”
검지를 뻗은 아데샨이 위령비의 꼭대기 부근을 가리켰다. 로난이 입술을 비틀었다. 마땅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너무 그렇게 심각해하지 마. 그냥 인사하러 온 거니까.”
“···노력해 볼게요.”
“조금 부끄럽긴 한데 내가 여, 연애는 처음 해 보거든···엄마랑 오빠들이 생전에 애인이 생기면 꼭 데려오라고 해서···.”
아데샨이 고개를 푹 숙였다. 머리카락 사이로 삐져나온 귀가 달궈진 쇠처럼 빨개져 있었다. 로난이 천천히 주억거렸다.
“잘 됐네요. 저도 처음이니까.”
“뭐, 진짜?”
“네. 부끄럽게도.”
“거짓말. 날 안심시키려고 그러는 거지.”
“저도 거짓말이면 좋겠···알았어요. 그런 표정 짓지 마요. 어쨌든 처음이라는 게 중요한 거잖아요.”
로난이 도끼눈을 뜨고 있는 그녀를 달래 주었다. 앞으로 이 사람 앞에서는 혓바닥을 조심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그들은 미리 꺾어온 들꽃을 위령비 앞에 내려놓았다.
“이대로면 바람에 금방 날아가지 않겠어요?”
“괜찮아. 머물러만 있으면 싹을 틔울 수 없으니까.”
“그렇기는 하죠.”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맞았다. 언제까지고 정체되어 있다가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손을 맞잡은 두 사람은 한참이나 위령비 앞에 서 있었다.
그들은 정오 무렵 귀로에 올랐다. 시간이 지나고 위도가 낮아질수록 대지는 계절을 되찾았고, 사람들의 옷차림은 점점 가벼워졌다. 세 사람은 여름방학이 끝나기 이틀 전이 되어서야 필레온 아카데미에 도착했다.
“오랜만이구만.”
로난이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후텁지근한 풀냄새가 폐부로 스며들었다. 아직 녹음이 푸르른 교정에서는 매미의 노래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