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 늦여름은 가을로(1)
#225
늦여름의 필레온 아카데미는 녹음으로 푸르렀다. 아마도 올해 마지막 공연이 될 매미의 노래가 지천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근무 중인 교직원과 일찍 돌아온 학생 몇몇이 교문을 들락거리고 있었다. 창문 너머로 그 풍경을 바라보던 이릴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슬슬 개학이구나.”
이릴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꽃병의 꽃을 갈아 끼우고 있었다. 샛노란 수선화는 언제 봐도 질리지 않았다.
문득 3년 전의 일을 떠올린 그녀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언제나 까칠하던 동생에게 처음으로 선물을 받았었다.
‘그때도 수선화였지.’
로난이 쑥스러워하며 내민 수선화는 이릴이 지금까지 본 어떤 꽃보다 아름다웠다. 돌이켜 보면 동생이 필레온 아카데미에 가기로 결심한 것도 바로 그 날이었다. 너무 대견해서 펑펑 울었었는데.
“···얼른 왔으면 좋겠다.”
“안 그래도 어제 연락이 왔소. 오늘 내일 중으로 도착할 거라 하더군.”
“앗, 정말요?”
그때 뒤쪽에서 낮고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린 이릴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청소를 시작한 지 두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슐리펜은 아직 걸레질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슐리펜 씨, 너무 그렇게 열심히 안 해도 돼요. 제가 한다니까요!”
“그럴 수는 없소.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그랑시아 가의 가훈. 게다가 먼지를 많이 마시면 폐병이 날 수도 있으니 최대한 꼼꼼하게 해야 하오.”
“아이 참.”
이릴의 만류에도 슐리펜은 완고했다. 차기 검성이 두건을 두르고 걸레질을 하는 광경도 이제는 일상이 되어 버렸다.
‘많이 크셨네.’
처음 봤을때는 마냥 어려 보이던 슐리펜도 이제는 어엿한 청년 티가 났다. 키도 부쩍 커졌고, 소매를 걷으며 드러난 팔에는 핏줄이 불거져 있었다. 가만히 그를 쳐다보던 이릴이 손뼉을 쳤다.
“맞아요. 슐리펜 씨, 우리 로난하고 동갑이셨죠? 아카데미를 졸업하시는 게 내년이었나요?”
“그렇소. 왜 그러시오?”
“에헤헤, 그냥 궁금해서요. 금방 점심 준비할테니까 같이 먹어요!”
이릴은 그 말을 남긴 채 아래층으로 향했다. 발랄하게 걸음을 옮기던 그녀는 갑자기 주방 앞에서 방향을 틀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이릴의 상냥하고 산뜻한 이미지에 걸맞게 꾸며진 방은 로난을 비롯해서 여지껏 한 명의 손님도 들인 적이 없었다. 천천히 침대 앞으로 다가간 그녀가 바닥에 엎드렸다. 그리고 침대 아래에 팔을 밀어 넣었다.
“우으으으···!”
쉽지 않았다. 한계까지 손을 뻗자 무언가 잡혀 나왔다. 딱 그녀의 손바닥에 쥐어질 만한 크기의 작은 상자였다.
“휴, 다른 곳에 둘 걸 그랬나.”
겉면의 먼지를 털어낸 이릴이 상자를 열었다. 나침반과 비슷하게 생긴 기계장치 하나가 덩그러니 들어 있었다. 기록하고자 하는 상대의 피를 묻히면 그가 있는 방향을 가리키는 마도구인 혈계침이었다.
붉은 바늘은 어느 한 곳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가만히 혈계침을 바라보던 이릴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얼마 안 남았네.”
그녀가 다시 상자를 닫았다. 그리고 다시 손이 닿지 않을 정도로 깊숙한 곳까지 밀어 넣었다.
의지를 다잡듯이 자신의 얼굴을 두드린 이릴이 몸을 일으켰다. 불현듯 현관 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나, 나 왔어. 선배도 같이.”
“앗, 로난!”
이릴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방문을 열고 뛰쳐나간 그녀가 문간에 서 있던 로난을 와락 끌어안았다. 거진 두 달만의 재회였다. 뒤에 있던 아데샨이 얼굴을 가리며 인사했다.
“아, 안녕하세요. 이릴 씨.”
“아데샨도 오랜만이네! 얼굴은 왜 가려?”
“그, 그게, 막 돌아온 터라 조금 지저분해서요. 제대로 씻지도 못했고···.”
그녀의 말이 맞았다. 긴 여정에 지친 두 사람은 솔직히 청결하다고는 부를 수 없는 꾀죄죄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릴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에이, 그게 무슨 상관이야! 다들 엄청 보고 싶었어!”
“나도.”
로난이 짧막하게 대답했다. 시선을 올린 그녀가 헤실헤실 웃었다.
동생. 세상에서 하나뿐인 내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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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지. 역시 누나 요리가 최고라니까.”
“에헤헤, 다행이다. 많이 먹어.”
“후, 그럼 한 그릇만 더.”
로난이 감자 스튜를 자신의 그릇에 퍼담았다. 이걸로 벌써 네 그릇째였다.
별로 특별한 재료가 들어가지 않는데도 이렇게 중독성이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가 맞은편에 앉은 슐리펜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 저 족제비 같은 놈이 이상한 짓은 안 했지?”
“웅? 이상한 짓이라니?”
“뭐 그런 거 있잖아. 갑자기 씻어야겠으니 욕실을 써도 되냐 묻는다든가···상의를 탈의한 채 운동을 도와 달라 한다든가···.”
“커흡.”
슐리펜이 사레가 들린 것처럼 켈룩거렸다. 다행히도 입에 음식을 넣고 있지 않아서 침을 좀 튀기는 것으로 끝이 났다.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은 그가 혀를 찼다.
“천박하군. 터무니없는 억측이다.”
“그럼 다행이고. 음습한 꼼수 말고 정석적인 절차를 밟으란 말이지.”
로난과 아데샨은 제도로 돌아오는 즉시 집으로 향했다. 마침 시간대가 점심이라 함께 밥을 먹을 수 있었다.
긴 탁자에는 네 사람이 서로 마주 보며 앉아 있었다. 상체를 쭉 뻗은 이릴이 아데샨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아데샨도 많이 먹어. 하나도 안 지저분하니까 신경 쓰지 말고!”
“가,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아데샨이 고개를 끄덕였다. 로난과 친남매 사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릴의 앞에 서면 어쩔 수 없이 주눅들었다.
제국이 아니라 온 대륙을 뒤져봐도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은 찾지 못할 터였다. 아데샨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이릴이 말을 이었다.
“지저분한 게 아니라 오히려 더 예뻐졌는데? 에헤헤, 남자친구라도 생긴 거야?”
“그, 그게요···그러니까···.”
아데샨이 말을 더듬었다. 이걸 사실대로 말해도 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너같은 멀대 호박이 감히 내 동생을 건드렸냐며 화를 내면 어쩌지? 갑자기 우시는 거 아닐까? 자식처럼 애지중지 키운 동생이잖아···!
물론 이릴의 성격 상 그럴 것 같지는 않았지만 두려운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녀가 한창 혼란스러워하던 와중이었다. 가만히 스튜를 퍼먹던 로난이 입을 열었다.
“그럴 수도 있지. 나랑 사귀고 있으니까.”
“어?”
“로, 로난···!”
담담한 말투에서는 일말의 주저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데샨이 다급히 외쳤으나 이미 물은 엎질러진 뒤였다.
한순간 식탁에 정적이 찾아왔다. 툭. 가만히 듣고만 있던 슐리펜의 손에서 숟가락이 떨어졌다. 갑자기 몸을 더 뻗은 이릴이 그녀의 얼굴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뭐어어어! 진짜로?!”
“네, 네에···그렇게 됐어요.”
아데샨은 딱따구리처럼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까이서 보니까 더 예뻤다. 로난과 그녀를 번갈아서 쳐다보던 이릴이 탄성을 터트렸다.
“꺅! 세상에 진짜 잘 됐다. 너무너무 잘 어울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언제부터 사귀기로 한 거야? 누가 먼저 고백했어? 손은 잡았지? 서, 설마 벌써 입을 맞췄다던가···!”
질문 공세가 노도처럼 쏟아졌다. 아데샨이 히끅거리며 질문에 답할 때마다 이릴의 다리가 헤엄치듯 파닥거렸다.
‘즐겁네.’
두 사람을 바라보던 로난이 픽 웃었다. 이런 분위기가 정말로 그리웠다. 눈과 극광, 꼬순내 나는 털보들과 뒤엉키며 보냈던 지난 두 달도 나름 즐거웠지만, 지금처럼 목가적인 정취는 느낄 수 없었다.
슬슬 솥단지가 비어 갈 무렵이었다. 불현듯 로난이 입을 열었다.
“누나. 나 뭐 물어보고 싶은게 있는데.”
“응? 뭔데?”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다고 했었지?”
“···에?”
이릴의 얼굴이 아주 잠깐 굳었다가 풀어졌다. 입을 오물거리던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너무 어릴 때 집을 나가셔서. 왜 그래?”
“그냥. 갑자기 궁금해서.”
로난이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혹시라도 구원자나 아벨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 기대했는데, 역시 허무맹랑한 생각인 것 같았다. 애초에 그녀에게도 저주가 깃드는 것을 심상 세계 속에서 직접 보았거늘.
“만약에 누나랑 닮은 사람이 와서 아버지나 친척이라 우겨도 절대로 문 열어주면 안 돼. 알겠지?”
“으응? 그럴게.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릴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눈을 깜빡였다. 로난은 딸아이를 훈계하는 듯한 말투로 문단속을 재차 강조했다. 네뷸라 클라지에가 수세에 몰리고 있는 지금이 가장 위험한 시기였다.
‘상처 입은 호랑이가 무서운 법이지.’
보안에 공을 정말 많이 들이고 있었지만 혹시 모를 일이었다. 만약에 집이나 누나의 존재를 알아낸 교단이 납치극을 벌인다면 그만큼 곤란한 일도 없었다.
“조심하자고 한 말이야. 참, 북부에서 선물을 사 왔는데.”
“앗, 선물?!”
심각한 이야기를 마친 로난이 선물로 화제를 돌렸다. 결국 자신이 신경을 더 써야 했다. 머지않아 식사를 마친 로난과 아데샨이 집을 나섰다.
“잘 먹었어. 선배 기숙사에 짐만 날라 주고 올게.”
“응, 천천히 와! 아데샨도 또 와!”
이릴이 생글생글 웃으며 그들을 배웅했다. 현관문이 열리는 순간 시야의 구석진 곳에서 인영 몇 개가 빠르게 흩어졌다. 로난이 전방에 시선을 둔 채 입을 열었다.
“몇 명이에요?”
“스물하고도 세 명. 조금 떨어진 곳에 일곱 명 더 있어.”
아데샨이 대답했다. 언제 봐도 경이로운 탐지 능력이었다. 로난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낄낄거렸다.
“좋아. 약속은 확실하게 지켜 주시는군.”
일전에 공을 세운 답례로 황제에게 부탁했던 가택 호위병이었다. 기껏해야 대여섯쯤 보내줄 줄 알았는데 서른 명이라니. 거기다가 몸놀림을 보아하니 실력도 제법 있는 듯했다.
“이제 개학까지 얼마나 남았죠?”
“이틀. 이번 방학은 정말 북부에서만 있었네.”
“그러게요. 으음···어쩌지.”
무언가를 고민하던 로난이 침음을 흘렸다. 긴 여정이 막 끝났지만 쉬고 있을 틈이 없었다. 아데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아니 그냥, 누구랑 갈지 고민돼서요. 선배는 학생회장에 졸업반이니까 아카데미에 집중해야 할 거 아니에요.”
“으응?”
다음 목적지는 사실상 정해져 있었다. 다만 워낙에 빡센 곳이라 가는 시기나 함께 갈 동료에 대한 고민이 극심했다.
로난의 고민은 아데샨을 기숙사에 바래다 줄 때까지 이어졌다.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 뺨에 입을 맞추고, 집으로 돌아와서 그간 못 이룬 잠을 퍼질러 자기 직전까지도 그 생각 뿐이었다.
일어난 뒤에는 북부에서 수집한 자료를 정리하는 데 시간을 투자했다. 자료를 통째로 보내면 훨씬 일이 간편하겠지만, 황실에 교단의 끄나풀이 있을 수도 있으니 그냥 직접 정리하고 직통으로 보고하는 편이 마음이 편했다. 로난이 시타의 입에 일곱 번째 보고서를 물려 주며 말했다.
“이번에는 이거. 부탁하마.”
“뺘!”
시타가 창밖으로 날아올랐다. 이렇게 보고를 하면 평균 세 시간 이내로 답변이 왔다. 그러고 보니 황궁에도 한 번 들러야 하는데.
어쨌든 바쁘게 살다 보니 이틀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대광장에서 열린 개학식에서는 그리운 면면이 잔뜩 모여 있었다. 아셀과 어깨동무를 하고 있던 마르야가 그를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었다.
“로난! 언제 돌아왔어?”
“마, 마르야. 히익, 숨 막혀···!”
다행히 두 사람도 무탈하게 돌아온 모양이었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는데 이전보다 훨씬 더 친해 보였다. 오필리아, 브라움, 에르제베트 역시 조금은 성숙해진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슐리펜은 말할 것도 없고.
“이 자식은 도대체 어디 간 거야.”
하지만 로난이 찾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한참이나 교정을 돌아다니던 그는 동아리 훈련장에 들어가서야 금발의 소년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문을 열자 잿가루 섞인 열풍이 훅 몰려왔다. 훈련용 허수아비가 모조리 불길에 휩싸여 있는 걸로 봐서 개학 첫날부터 훈련에 매진하고 있던 듯했다. 로난이 그를 불렀다.
“어이, 이르.”
“누가 감히 나를 그딴 식으로···로난?”
이타르간드가 고개를 돌렸다. 나바르도제의 혈족에 걸맞는 곱상한 얼굴이 땀에 젖어 번들거리고 있었다. 로난과 눈이 마주친 그가 호승심 어린 미소를 머금었다.
“간만이군. 너도 훈련을 하러 온 건가? 괜찮다면 나와 대련이나···”
“대련 좋지. 원한다면 바지에 똥을 지릴 정도로 패 줄 수도 있어. 그런데 그 전에 뭐 하나만 물어보자.”
“뭐지?”
이타르간드가 눈썹을 으쓱였다. 옷에 묻은 잿가루를 털어낸 로난이 입을 열었다.
“용의 도시 아드렌에 가는 법을 알려줘. 가급적이면 살아서 도착할 수 있는 방법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