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의 천재칼잡이-226화 (226/333)

226. 늦여름은 가을로(2)

#226

“아드렌에 가는 법 좀 알려줘. 될 수 있으면 살아서 도착하는 방법으로.”

“뭐라?”

이타르간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그가 의구심 다분한 투로 물었다.

“갑자기 아드렌에는 왜 가려는 거지?”

“뭐,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로난의 설명이 이어졌다. 어차피 나바르도제의 아들이었으니 말해도 될 것 같았다.

용의 도시로 가야 할 이유는 너무나도 많았다. 우선 망령의 바다에서 바르카가 했던 말이 마음에 걸렸다. 교주가 회의에서 아드렌과의 접선 이야기를 꺼냈다는 것이 벌써 몇 달 전이었으니, 이미 모종의 음모가 진행되고 있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심지어 지난 이틀간 정리한 바르카의 자료에서는 이미 신도 일부가 아드렌으로 들어갔다는 정보를 도출해낼 수 있었다. 거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모른다. 다만 교주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인 만큼 본인이 직접 가서 아직까지 잔류하고 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었다.

교주 아벨의 피를 어떻게든 받아 내는 것이 지금 로난에게 주어진 가장 급한 과제였다. 자신의 아버지인 카인에게는 이제 일 년 남짓한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이쯤 되면 세상이 가라고 떠미는 거지.’

또한 교주를 만나지 못하더라도 딱히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었다. 네뷸라 클라지에의 초기 멤버인 알리브리헤가 거기 있었으니까.

엘시아와는 달리 교단에 잔류 중이라고 했으니, 그는 교주의 행방이나 대머리 강림 계획에 관해 자세하게 알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이타르간드가 말했다.

“확실히 보통 일이 아니군. 그쯤 되면 아예 군대가 나서야 하는 것 아닌가.”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런데 아드렌에서 받아줄 지가 문제지.”

“하긴 그것도 그렇군.”

실제로 로난은 교단의 음모가 밝혀지자마자 제국군을 아드렌에 파견하여 달라고 요청했다. 비밀 요원을 맡고 있는 그는 네뷸라 클라지에와 관련된 일이면 이유를 불문하고 병사를 움직일 권한이 있었다.

‘무조건 거절당하겠지. 전령이 죽지나 않으면 다행이야.’

하지만 로난은 아드렌 측에서 그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종족과 그 세력이 모여 만들어진 도시는 제국의 눈치 따위는 보지 않았다. 나바르도제가 하늘 위의 적을 막기 위해 아드렌을 떠난 뒤로는 더더욱.

그녀는 지금의 용왕을 두고 지극히 ‘드래곤 다운’ 드래곤이라고 했었는데, 그건 한마디로 성격이 개좆 같다는 뜻이었다. 이타르간드가 말했다.

“사실 가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다. 관문까지의 이동 수단은 공간 마법을 제외하고는 모두 허용되니까.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입국 심사다.”

“당연한 소리지만 그냥은 못 들어가지?”

“그래. 드래곤과 그 종복만이 출입을 허가받는다. 수상한 기색이 조금이라도 보이면 바로 그 자리에서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지. 아마 관문에서 죽은 사람만 모아도 나라 하나를 세울 수 있을 거다.”

“시발.”

로난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너무 강경해서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용왕과 헤츨링들이 살아가는 곳이라 그런지 보안이 굉장히 철저했다.

‘젠장, 어떻게 하지?’

입국 심사대를 통과할 방법이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그가 한참을 고민하던 와중이었다. 벼락 같은 발상이 로난의 머릿속을 스치며 지나갔다.

“잠깐만. 내가 그냥 네 종복이 되면 되잖아. 심사할 때만 임시적으로.”

“뭣이?”

“말 그대로 나한테 이르 네 각인을 새기는 거지. 이걸 왜 고민했는지 모르겠네.”

“보아하니 종복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나 보군. 각인이라는 것은 단순한 그림이 아니다. 그건 주종 관계를 계약하는 일종의 마법적 구속······네놈, 설마.”

말을 잇던 이타르간드의 눈이 둥그렇게 떠졌다. 뒤늦게 로난의 말뜻을 알아차린 것이다. 낄낄거리던 로난이 자신의 칼자루를 툭툭 두들겨 보였다.

“그래. ‘마법적’ 구속이잖아. 나는 마법을 자를 수 있고. 심사대만 넘고 각인은 없애 버리면 되는 거 아냐?”

“웃기는군. 그런 게 가능할 거라 생각하는 건가.”

“나는 될 거 같은데. 잠깐만 기다려 봐.”

별안간 로난이 훈련장 밖으로 나갔다. 다시 돌아온 그의 손에는 큼직한 까마귀 한 마리가 들려 있었다. 나무 위에서 졸다가 납치당한 까마귀가 세차게 홰를 치며 울어댔다.

“까악! 까아악!”

“자, 얘한테 각인을 새겨 봐.”

로난이 까마귀를 내밀었다. 이타르간드의 미간이 격하게 좁혀졌다.

“···수치스럽군.”

“어서.”

한숨을 내쉰 이타르간드가 까마귀의 날개 위에 손을 얹었다. 한순간 그의 손바닥 아래가 붉게 반짝였다. 날뛰던 까마귀가 얌전해졌다.

“깍?”

“다 됐다···.”

이타르간드가 손을 뗐다. 기하학적인 형상의 각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꼭 인두로 지진 자국 같았지만 뜨겁지는 않았다. 어리둥절하던 까마귀가 날개를 펼치며 포효했다.

“까아아악!”

“우왁!”

화들짝 놀란 로난이 까마귀를 양팔로 끌어안았다. 하마터면 놓칠 뻔 했다. 이타르간드의 힘을 나눠 받아서 그런지 힘이 타조만큼이나 좋아져 있었다.

“이 새대가리가. 얌전히 있지 못해!”

“깍! 까아악!”

까마귀는 새똥을 갈겨 대며 버둥거렸다. 참다못한 로난이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스각! 예리한 검격이 각인이 새겨진 표면 위를 가볍게 스치며 지나갔다.

“···끼익?”

몸에서 힘이 풀린 까마귀가 저항을 멈췄다. 이타르간드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까마귀와의 결속이 사라진 것이 느껴졌다.

“맙소사.”

신기에 가까운 칼솜씨는 까마귀에게 티끝만한 상처도 남기지 않았다. 각인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자리에는 검은 깃털만이 남아 번들거리고 있었다. 이타르간드가 넋이 나간 듯 중얼거렸다.

“이런···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다니.”

“어···그러게.”

얼척이 없는 것은 로난도 마찬가지였다. 뭔가 될 것 같기는 했지만 이렇게 쉽게 풀릴 줄은 예상치 못했다. 뒷머리를 긁적이던 그가 툭 내뱉었다.

“이게 되네.”

****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매미의 마지막 공연도 끝난 교정에는 빨갛게 익은 잠자리들이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더위가 한풀 꺾인 하늘은 더욱 진한 청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바야흐로 풍요의 계절인 가을이 다가오고 있다.

로난은 곧장 아드렌으로 떠나지는 않았다. 장소가 장소인 데다 교주가 얽힌 이상 준비를 철저하게 해서 가야 했다. 아직 오로라 스칼에 의뢰했던 장비도 오지 않았고.

‘서두르다 좆되는 것보다는 이게 나아.’

그는 할 수 있는 조치를 모두 해 놓기로 했다. 제국군에게 네뷸라 클라지에와 관련된 정보를 제공하고, 이릴이 사는 집의 보안을 강화했다. 작은 지부들이 소탕되었다는 소식은 심심찮게 들려왔다.

물론 개인적인 단련도 빼먹지 않았다. 특급 모험 동아리 부원 간의 대련은 하루도 빼먹지 않고 진행되었다. 허리를 숙이며 마르야의 횡베기를 피한 로난이 칼등으로 그녀의 손목을 때렸다.

“으윽!”

“확실히 늘었네. 아직 조금 느리지만.”

“이익, 이번에도 우리가 질 줄 알고! 다 같이 몰아쳐!”

그녀의 외침과 함께 사방에서 부원들이 달려들었다. 아셀의 얼음과 에르제베트의 화염, 오필리아의 혈마법이 연계되어 쏟아졌다. 적재적소의 위치로 달려간 브라움이 방패를 쳐들었다.

“오.”

로난이 입을 말며 감탄했다. 물 흐르는 듯한 연계를 보아하니 다들 여름방학을 매우 알차게 보낸 것 같았다.

거진 두 달 만에 보는 친구들은 모두 부쩍 성장해 있었다. 마르야는 이제 상인이 아니라 검사로서도 귀족가 사이에서 명성을 떨치는 경지가 되었고, 아셀과 에르제베트는 학생 신분 최초로 모든 마탑에서 러브콜을 받았다.

졸업반인 브라움은 이미 진로가 정해졌는데, 그 가기 어렵다는 제국 기사단에서 첫 걸음을 내딛는다고 했다. 오필리아는 고대 혈마법 하나를 해석하는데 성공했고, 슐리펜이야 뭐 말할 것도 없었다. 날아오던 맹공을 지켜보던 로난이 히죽 웃었다.

“니들을 만나서 기쁘다.”

진심이었다. 눈앞의 동료들은 그로 하여금 세상을 구할 의욕을 고취해 주는 어엿한 원동력 중 하나였다. 로난이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그러니까 더 빡세게 해 봐.”

오로라 스칼에서 벼린 검은 이전보다 훨씬 가벼워져 있었다. 로난은 온 힘을 다해서 그들의 노력에 답해 주었다. 촤아악! 흩뿌리듯 그어진 검격이 사방에서 닥쳐오던 마법을 찢어발겼다.  머지않아 박살이 난 부원들이 바닥에 뒹굴었다.

“아아악! 분해! 왜 칼이 맞지 않는 거야!”

“매, 매일 이게 무슨 짓이야···히이잉···.”

징징거리는 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슐리펜을 제외한 부원들의 승률은 한없이 0%에 수렴했다. 그들이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것은 로난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몇 번을 해도 결과는 바뀌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의미가 없는 행동은 아니었다. 탈진한 부원들을 번갈아서 쳐다보던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결정했다.”

“결정하다니, 뭘?”

“다음 동아리 활동에 같이 갈 사람을 정했다고. 아셀, 따라와.”

“나, 나 말하는 거야?! 잠깐만···!”

아셀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로난은 대답하는 대신 그를 어깨에 들쳐 멨다. 간만에 마나를 완전히 소진해 버린 아셀은 저항 비슷한 것도 하지 못했다.

“사, 살려줘어엇!”

“아, 아셀···제기랄.”

구슬픈 비명만이 울려 펴졌다. 뭐라 말하려던 브라움이 그대로 기절했다. 탈진한 부원들은 그를 가엾게 여기면서도 자신이 간택받지 않은 점에 대해 안도감을 느꼈다.

****

“그, 그게 무슨 소리야? 아드렌이라니?”

“말 그대로야. 너는 잘 모르겠지만 누구를 데려갈지 좆나게 오랫동안 고민했다고.”

로난이 자신의 계획을 이야기한 것은 아셀을 방에 데려다 놓고 세 시간 정도가 지난 뒤였다. 소진된 마나와 심신을 회복시킬 시간을 줌으로써 그가 졸도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숨을 가쁘게 들이 내쉬던 아셀이 말을 이었다.

“아드렌이라면 요, 용들의 도시잖아. 그런 무시무시한 곳을 왜 가려는 거야?”

“뭐,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 천재 마법사님이 뭐 이런 걸로 쫄고 그래.”

“처, 천재라니···나는 그런 게···.”

“양심적으로 아니라고는 말하지 마. 네가 천재가 아니면 대부분의 마법사가 자살해야 하니까. 그리고 마르야한테 다 들었어 인마. 북부에서 그냥 죽여줬다면서.”

로난은 장하다는 듯이 아셀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실제로 얼마 전 마르야에게 들은 그의 활약상은 영웅적이라는 말로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그는 사실상 단신으로 카라벨 상단을 지켰다. 난폭한 원주민들과 제이거의 부하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습격해 왔지만, 아셀의 염력은 그들이 상단에 발톱 자국 하나 내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실제로 며칠간 대련을 해 보니 알 수 있었다. 아셀은 진지하게 아드렌에서도 도움이 될 터였다. 로난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생각해 봐, 세상에서 가장 마법을 잘 다루는 종족의 도시인데 너도 뭔가 영감을 받지 않겠냐? 마탑의 노친네들이 가르쳐 주는 것보다 훨씬 가치 있는 정보가 넘쳐날 거라고.”

“새, 새로운 주문?”

한순간 아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렇게 겁에 질려 있다가도 새 주문 이야기에 반응하는 걸 보면 역시 마법사라는 족속은 다 비슷비슷 한 것 같았다.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번에 잠깐 다녀오는 걸로 바짝 성장하는 거야. 분명 마르야도 좋아할걸?”

“그, 그 이야기가 갑자기 왜 나와?”

“북부에 다녀온 이후 고 계집애가 너한테 이성적인 호감이 생긴 것 같거든. 진짜야.”

게다가 아셀에 대한 마르야의 생각도 달라진 것 같았다. 로난은 아셀의 활약을 이야기하던 그녀의 오묘한 표정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 쪼다는 눈치채지 못하고 있지만.’

예전에는 그냥 동성 친구나 귀여운 봉제 인형을 다루는 듯한 태도였다면, 지금은 확실히 이성. 최소한 믿고 등을 맡길 만한 동료로 인식하는 것 같았다. 아셀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마, 마르야가···? 정말로?”

“나는 그런 걸로 거짓말 안 해. 정 안 내킨다면 거절해도 좋아. 그래도 솔직하게 한 마디만 덧붙이자면···.”

별안간 로난의 목소리가 무거워졌다. 평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에 아셀이 헛숨을 들이켰다. 뜸을 들이던 로난이 입을 열었다.

“네 힘이 필요해. 아셀.”

“로, 로난···?”

“지금까지 해왔던 여행하고는 느낌이 조금 달라. 싸하다고 해야 할까. 동료가 있어야 할 것 같다는 직감이 들어.”

로난이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괜히 오랫동안 고민을 한 것이 아니었다. 어쩌다 사건에 휘말리는 거면 몰라도, 예견된 위협 속으로 친구를 끌어들이는 것은 결코 쉽게 할 수 있는 짓이 아니었다.

“그런데 정말로 거절해도 돼. 그 여느 때보다 위험해질 소지가 다분한 여행이거든. 이건 어디까지나 강요가 아닌 내 부탁일 뿐이야.”

“나, 나는···.”

아셀이 뭐라 대답하려던 차였다. 똑똑. 느닷없는 노크 소리와 함께 메이드 루시가 들어왔다. 돌처럼 견고해 보이는 상자 하나가 그녀의 손에 들려 있었다.

“안녕하세요 로난 님. 읏차, 소포가 왔어요.”

“아, 거기 두고 가세요. 어디서 온 거에요?”

“오로라 스칼···이라는 곳이네요? 카탄이라는 분이 보내셨어요.”

“아하, 드디어 왔군. 늘 고마워요 루시.”

루시는 사근사근하게 미소를 지어 보이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그녀가 문을 닫고 나간 자리에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한창 심각하던 분위기가 애매하게 변했다. 턱을 긁적이던 로난이 소포를 가리키며 말했다.

“뭐, 일단 이거부터 뜯고 마저 이야기할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