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 바닷길, 용의 도시로(2)
#229
양단된 갤리온이 천천히 벌어지며 침몰하고 있었다. 나비가 날개를 펼치는 것처럼 우아한 움직임이었다. 처절한 비명이 바다 위에 울려 퍼졌다.
“배, 배가!”
“아아악! 살려줘!”
운 좋게 검격을 피한 이들이 배에서 뛰어내렸다. 잘린 단면을 통해 탈출하는 사람들은 꼭 지진이 나기 전에 대피하는 쥐떼를 연상케 했다. 가라앉는 범선을 지켜보던 슐리펜이 심드렁하게 내뱉었다.
“생각보다는 물렁하군.”
“이 새끼···.”
로난이 픽 웃었다. 위력으로 보나 사거리로 보나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향상되어 있었다. 바람으로 화했던 칼날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천재는 천재라 이건가.’
누나랑 노닥거리느라 조금은 해이해진 줄 았거늘 완벽한 오해였다. 누가 뭐래도 이 자식은 대륙제일검이자 제국의 샛별이었다.
지금 시점에서 진지하게 붙어 봐도 아마 승부를 장담할 수 없을 터. 그때 범선 쪽을 바라보던 슐리펜이 입을 열었다.
“계속 오는 건가. 하나를 베면 멈출 줄 알았거늘.”
“엉?”
로난이 시선을 옮겼다. 남아 있는 두 채의 범선이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조난자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구조를 요청하고 있었지만 멈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동료들을 구하는 것보다는 우리를 손봐 주는 것이 더 급한 듯했다. 별안간 두 갤리온의 앞쪽에서 섬광이 번쩍였다. 휘리릭-! 조금 전에 들었던 휘파람 소리가 연쇄적으로 번져왔다.
“아하. 끝까지 해 보시겠다?”
로난이 휘파람을 불었다. 이번에는 제대로 보였다. 정확히 스물세 개의 포탄이 바람을 가르며 날아오고 있었다.
조금 전에는 기습이라 당했지만 이러면 딱히 못 막을 것도 없었다. 그가 칼자루를 잡아당김과 동시에 붉은 초승달이 횡으로 그어졌다. 부채꼴로 쏘아진 검기가 포탄들을 요격했다. 콰과과광! 화염과 연기로 이루어진 장벽이 두 갤리온과 로난 사이에 나타났다. 당황 섞인 외침이 여기까지 들려왔다.
“비, 빌어먹을, 저게 뭐야?!”
장벽은 이내 바닷바람 속에 흩어졌다. 한층 가까워진 갤리온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재장전할 시간 따위를 줄 생각은 없었다. 즉시 자세를 잡은 슐리펜이 뿌리듯이 검을 휘둘렀다. 다시금 불어닥친 바람의 칼날이 두 갤리온에 직격했다. 쾅! 사선으로 토막난 선박들의 위쪽 면이 미끄러지듯 바다로 가라앉았다.
“생각보다 싱겁네.”
로난이 칼을 내렸다. 조금은 기대했는데 이건 뭐 몸 풀기 수준도 되지 않았다. 그때 침몰하는 갤리온 위로 시커먼 덩어리 몇 개가 폭죽처럼 솟구쳤다.
“음?”
인기척을 느낀 로난이 눈을 가늘게 떴다. 크기로 보아 포탄은 아닌 것 같았는데 햇살이 눈 부셔서 정체를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수직에 가까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온 덩어리들이 마침내 식별이 가능할 거리까지 가까워졌다. 두 청년이 미간을 좁혔다.
“···사람?”
“그런 것 같군.”
중무장한 거한들이 별똥별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듣도 보도 못한 형식의 공수부대였다.
하나같이 무게가 상당해 보이는 것이 부딫혔다가는 무사하지 못할 것 같았다. 일행과 눈이 마주친 거한들이 노성을 터트렸다.
“이 개자식들! 모조리 죽여 주마!!”
“드라하비에 님의 이름으로!”
목소리가 쩌렁쩌렁한걸로 보아 상당히 열이 받은 모양이었다. 하긴 뭘 해보기도 전에 배들이 모조리 격침당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문득 어느 대머리 사내의 머리에 새겨진 문신이 눈에 들어왔다. 독룡을 형상화한 각인은 분명 오로라 스칼에서 본 적이 있었다.
젠장, 괴물로 변할 줄 아는 놈들이군. 옅은 한숨을 내쉰 로난이 입을 열었다.
“준비해. 제법 튼튼한 놈들이니까.”
족히 스무 명은 되어 보였다. 못 죽일 건 없었지만, 저 상태 그대로 배에 충돌하는 걸 허용했다간 이 야들야들한 슬루프가 버티지 못하고 파괴될 터였다.
귀찮지만 할 수 없었다. 아직 마스트만 어떻게 복구하면 이타르간드가 고혈압으로 쓰러지는 것은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전부 토막을 내서 무게를 분산시키면 그래도 버틸 만하겠지.
“전부 쳐내는 것이 관건이군.”
“큰 덩어리만 없으면 괜찮을 거야. 배는 조금 더러워지겠지만, 별수 없지.”
“알아들었다.”
말뜻을 알아들은 슐리펜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람으로 변한 검신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칼바람이 응축된 회오리가 당장 찢을 것을 내놓으라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확실히 눈치가 빠른 놈이었다. 로난이 칼자루를 움켜쥐자 노을의 주홍색이 검신을 타고 올라왔다. 그가 막 행동에 나서려는 차였다. 속절없이 낙하하던 거한들의 몸이 허공에 정지했다.
“엥?”
로난과 슐리펜이 멈칫거렸다. 꼭 날아오던 파리떼가 거미줄에 걸린 것 같았다. 곳곳에서 당혹성이 터져 나왔다.
“모, 몸이 안 움직여···!”
“비겁한 놈들아, 무슨 수를 쓴 거냐!”
반응을 보아하니 저쪽 의도는 아닌 것 같았다. 문득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운 것을 확인한 로난이 고개를 돌렸다.
“마스트?”
부러졌던 마스트가 원상복구된 채 우뚝 솟아 있었다. 요사스러운 한기를 내뿜는 얼음이 포탄에 맞아 끊어졌던 부분을 접합시키고 있었다.
“이건···!”
로난의 눈이 커졌다. 조악하기는 했지만 돛대로서의 기능은 되찾은 상태였다. 겁에 질린 소년의 목소리가 그 아래에서 들려왔다.
“히이익! 소, 소리 지르지 마세요!”
거한들의 고함을 들은 아셀이 어깨를 움츠렸다. 그의 왼손은 하늘을 향해 뻗어져 있었다. 슐리펜이 벙찐 채 눈을 깜빡거렸다. 로난이 기가 막힌다는 듯이 헛웃음을 쳤다.
“역시 내가 사람 하나는 잘 뽑았다니까.”
“로, 로난! 일단 잡았어!”
아셀이 외쳤다. 유약한 행색과는 달리 무시무시한 물리력이었다. 게다가 이제는 별로 힘들어하는 것 같지도 않은 것이, 어찌 보면 우리 중에 가장 강한 것은 저 자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난이 대견하다는 투로 그를 칭찬했다.
“잘했다. 아셀, 그대로 잡고 있어.”
“응? 이대로···?”
아셀이 뭐라 말을 이으려던 차였다. 빠르게 시선을 교환한 로난과 슐리펜이 동시에 검을 휘둘렀다.
붉고 푸른 검기들이 허공에 머물러 있는 거한들을 향해 쏘아졌다. 일말의 주저도 없이 쇄도한 검기가 그들의 몸뚱어리를 가르며 지나갔다. 촤아악! 폭발하듯 쏟아져 나온 피와 내장, 신체 일부가 청년들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쿵! 발치에 떨어진 머리통과 눈이 마주친 아셀이 비명을 터트렸다.
“히에에엑! 히아아악! 흐야아아악!”
“얌마, 흘리지 말고 똑바로 잡고 있어.”
“자, 잠깐만! 끄아아악! 내 등 뒤로 눈알이 들어갔어, 누, 눈알이!”
아셀은 버둥거리면서도 끝내 염력을 풀지는 않았다. 일방적인 학살이 이어졌다. 각인까지 받은 녹색 엄니의 전사들은 변신은커녕 단말마조차 제대로 내지르지 못한 채 죽어갔다.
“이런 비겁···컥!”
“살려···허억!”
“드라하···캬아악!”
뜨거운 핏물이 머리를 적셨다. 아찔한 쇠 비린내가 들불처럼 피어났다. 비처럼 쏟아지는 끈적한 선혈은 갑판을, 돛을, 선수를 적시며 이 슬루프를 ‘붉은 선풍’이라는 이름에 더욱 걸맞는 선박으로 만들어 주었다. 잘려 나간 신체의 일부가 갑판에 부딪히는 충돌음이 빗소리처럼 울려 퍼졌다.
로난의 예상대로였다. 토막을 쳐서 부피를 줄이니 확실히 선체에 가해지는 충격이 줄어들었다. 물론 아주 피해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타르간드도 이 정도의 생채기는 용서해 줄 터였다. 피로 물든 돛이야 빨면 되는 거고.
몸이라는 그릇을 탈출한 창자가 돛대에 리본처럼 매달린 채 흔들리고 있었다. 몇 초 지나지 않아 습격자들은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살해당했다. 홀로 공중에 묶여 있던 노인이 버둥거리며 외쳤다.
“자, 잠깐만! 제발, 제발 살려주게!”
“그럴까?”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칼날을 타고 일렁이던 적색 예기가 가라앉았다. 막 폭풍검을 발현하려던 슐리펜이 입을 열었다.
“정보를 캐내려는 건가.”
“그런 거지. 아셀, 부탁할게.”
“흐으윽, 으, 응···!”
로난은 아셀에게 말해 노인을 내리게 했다. 구역질하던 아셀이 그를 속박하고 있던 마법을 해제했다. 쿵! 바닥에 엎어진 노인이 고통 어린 신음을 흘렸다.
“으윽···으으으! 너, 너희들은 도대체···!”
“그건 몰라도 돼 늙은이. 사지 온전하게 노후를 보내고 싶다면 아는 대로 부는 게 좋을 걸. 왜 우리를 습격했는지, 드라하비에라는 새끼가 뭐 하는 용인지···뭐 그런 거 있잖아.”
“커억!”
로난이 그의 등을 짓밟으며 말했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할아버지였지만 목숨을 노린 상대에게 베풀 자비나 예의범절 따위는 없었다. 물방개처럼 버둥거리던 노인이 간신히 머리를 들었다.
“저, 전부 말하겠네···! 그러니 이 발을 좀 치워 주게. 숨을 쉴 수가 없어.”
“좋아.”
“고, 고맙네···정말로 고마워.”
로난이 발을 치웠다. 눈치를 보던 노인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목울대 앞에 새겨진 각인이 눈에 띄었다. 참 특이한 곳에 새기셨군.
기왕 시간이 지체된 거 정보를 수집해서 가면 좋을 것 같았다. 디디칸은 분명 보스인 드라하비에가 아드렌과 바깥세상을 오간다고 말했었다.
잘은 모르지만 각인을 받을 정도의 위치면 뭐라도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크겠지. 저울의 건너편에 올려진 것이 목숨인 만큼 개수작도 안 부릴 터였다. 목을 어루만지던 노인이 입을 열었다.
“약속대로 전부 말해 주지. 내, 내 말은···.”
“내 말은?”
“내 말은 그, 그러니까···죽어라!!”
불현듯 노인이 양 팔을 뻗으며 로난에게 달려들었다. 온몸의 근육이 팽창하며 괴물 같은 모습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덩치 차이가 워낙 많이 나서 체격으로 찍어 누르려는 것 같았다.
“얼씨구.”
갑작스러운 행동에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보통 실력의 차이를 이렇게 보여 주면 마음이 꺾여서 굴복하지 않나?
여유롭게 공격을 피한 그가 검을 휘둘렀다. 노인의 왼팔과 왼쪽 허벅지 위에 붉은 선이 생겼다. 빗나간 것을 확인한 그가 다시 몸을 돌리는 찰나였다. 촤아아악! 노인의 좌측 팔다리가 공중으로 솟구쳤다.
“허, 허어어억!!”
“행복한 노후는 물 건너가셨군. 그러게 왜 쓸데없는 짓을 하고 그래.”
외발이가 된 노인이 피를 뿌리며 엎어졌다. 로난은 다시 그의 목 뒤를 강하게 짓밟았다. 이번에는 아까와는 달리 저항이 극심했다. 과다출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비틀어 대던 노인이 처절하게 외쳤다.
“비켜라! 나, 나는 네놈들을 죽이거나 생포해야 한단 말이다!”
“그건 힘들 것 같은데.”
“새, 생포라도 당해라! 너희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노인이 뭐라 말하려던 차였다. 별안간 그의 목에 새겨진 각인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한순간 주름 가득한 얼굴에 절망이 깃들었다. 그가 양손으로 자신의 목을 움켜쥐었다.
“버, 벌써···! 그어억···.”
갑자기 말을 멈춘 노인이 질식한 것처럼 컥컥거리는 소리를 냈다. 목울대의 각인이 녹색 빛무리를 흩뿌리고 있었다. 점멸하는 간격이 빨라지는 것이 별로 느낌이 좋지 않았다.
“말하기 싫으면 썩 꺼져!”
본능적으로 위협을 눈치챈 로난이 노인을 배 바깥으로 던졌다. 투포환처럼 날아가던 몸뚱어리가 바다에 빠지는 순간이었다 쿠와아아! 녹색과 보랏빛이 뒤섞인 연기가 그의 이목구비 안쪽에서 터져 나왔다.
“구어어억! 구에엑!”
오늘 들은 것 중 가장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코와 입은 물론, 눈알의 테두리 틈새로도 새나오는 기체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불길한 색채를 띠었다.
“흐아아악! 저, 저게 뭐야?!”
“이건.”
아셀과 슐리펜이 눈썹을 치켜떴다. 연기에 닿은 노인의 이빨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눈동자가 곶감처럼 쪼그라들며 눈구멍 안쪽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노인의 몸뚱이는 이윽고 시든 꽃처럼 변해 버렸다. 상황을 파악한 로난이 다급하게 외쳤다.
“젠장, 독이다. 다들 코랑 입 가려!”
“으읍!”
그는 슐리펜의 목덜미를 잡고 아셀이 있는 마스트 아래까지 달려갔다. 마땅한 해독제도 없는 판에 중독되기라도 하면 일이 골치아파졌다. 배가 피해를 입기 전에 어서 범위를 벗어나야 했다.
독기 섞인 구름은 바람에도 흩어지지 않고 하늘 높이 뻗어 나갔다. 문득 오싹한 위화감이 로난의 목덜미를 스쳤다.
‘잠깐···흩어지지 않아?’
단순한 자폭 공격이라기에는 뭔가 이상했다. 탁 트인 바다, 각인이 발동하기 전 노인의 태도, 하늘 높이 치솟는 구름은 눈에 잘 띄는 색채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꼭 누군가에게 보여줄 것처럼. 머지않아 그 의미를 파악한 로난이 입을 열었다.
“아셀. 여기를 벗어나.”
“히이익! 으, 으응?”
“젠장, 시간 없어. 염력이든 뭐든 사용해 봐.”
로난이 아셀의 어깨를 양어깨로 움켜잡았다. 기겁하던 아셀이 지시대로 행동했다. 보이지 않는 힘이 배의 후미를 밀어내던 차였다. 저 멀리 파샨티 군도의 밀림 위로 거대한 그림자 하나가 솟구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