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의 천재칼잡이-236화 (236/333)

236. 용왕(1)

#236

【우리의 왕께서 그쪽을 뵙고자 하십니다.】

“뭐라고요? 왕?”

로난이 눈썹을 치켜떴다.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드래곤 아가씨가 말을 이었다.

“네. 오르세와의 교전이 벌어질 무렵부터 이곳을 주시하고 계셨습니다. 물론 지금도 그렇고요. 어지간한 소란이 아니었으니까요.”

위압적이던 목소리가 한결 누그러졌다. 오르세처럼 때와 장소에 따라 말투를 바꾸는 모양이었다. 문득 아드렌의 정치 문제에 관한 충고가 머릿속을 스쳤다.

이거 영 상황이 안 좋은데. 칼을 한 바퀴 돌려 잡은 로난이 빈정거리듯 물었다.

“용건이 뭐길래 그런 높으신 분이 나를 찾아요?”

“오르세와의 교전에서 벌인 활약이 감명 깊으셨다는군요. 아무래도 공을 치하하실 생각이신 것 같습니다.”

그녀는 로난이 오르세와 치고 받는 내내 용왕과 교신을 주고받았다고 했다. 막바지가 되어서야 끼어든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귀공의 칼솜씨에 감탄한 것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폴리모프 한 상태였다고는 하나 인간이 마룡과 대등하게 검을 겨루다니. 이치를 벗어났다 해도 과언이 아니더군요.”

“뭐, 별 거 아니었어요.”

여인이 진심 어린 칭찬을 보냈다. 로난은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적였다. 여기까지는 아무래도 좋았으나 뭔가 더 있을 것 같았다. 그가 미심쩍은 투로 질문했다.

“그게 전부?”

“제가 듣기로는 그렇습니다.”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부러 나바르도제 이야기를 안 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못 알아챈 건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적어도 이 여자는 알아차렸을 텐데. 잠시 고민하던 로난이 입을 열었다.

“내가 거절하면 어떻게 되죠?”

“굉장히 무례한 처사로 아드렌의 역사에 기록되겠지요. 하지만 그런 비상식적인 행동을 하시지는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무슨 근거로?”

“동료 분들이 먼저 탑에 가 계시니까요.”

동료라는 말을 들은 로난의 얼굴이 확 굳었다. 여인은 여전히 건조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백청색 눈동자는 바람 없는 날의 호수처럼 잔잔했다.

“뭐라고?”

“말 그대로입니다. 한 분은 도서관에, 한 분은 하늘탑 근처에 계시더군요. 로난 님의 동료라는 것을 확인하고 모셨습니다.”

두 사람을 찾았다는 위치는 로난이 배정해 주었던 구역과 일치했다. 아무래도 공갈은 아닌 것 같았다.

문득 로난은 이 여자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칼자루를 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 두 사람에게 무슨 짓을 했다면···.”

“응접실로 모신 것 외의 행동은 일체 하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많지 않으니 빠르게 답을 해 주시면 좋겠군요. 지금 저와 함께 하늘탑으로 이동하시겠습니까?”

의문형이었지만 질문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사실상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무언가를 생각하던 로난이 입속말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에이, 시발.’

아무리 고민해 봐도 정면 돌파밖에 답이 없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은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겠지. 한숨을 내쉰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뭐, 가 보자고요.”

****

여인의 이름은 나란소니아였다. 자신을 왕을 지키는 다섯 드래곤 중 한 명이라 소개한 그녀는 로난을 아드렌 중앙에 자리한 고탑으로 안내했다.

“인사 정도는 해도 되겠지.”

“서둘러만 주십시오.”

본격적으로 그녀를 따라가기 전, 로난은 현장에 있던 사람들과 간단한 인사를 나누었다. 그새 파견된 종복들이 오르세로 인해 파괴된 거리를 복구하고 있었다.

공터가 된 뒷골목 곳곳에는 교전 중에 죽은 병사들의 시체가 널려 있었다. 하나같이 토막이 나거나 갈기갈기 찢겨서 원형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그나마 온전한 것은 블루 드래곤 라라타시안의 주검이었다. 양 손이 날아가고 가슴팍에는 사슴도 지나다닐 만한 구멍이 뚫렸음에도 그런 취급을 받는 것이 우스웠다.

라라타시안은 여전히 박살난 골목 위에 그 거대한 몸을 뉘이고 있었다. 문득 어느 노인의 모습이 로난의 시야에 들어왔다. 다시 인간으로 폴리모프한 심사관 바나르티에였다.

“심사관.”

그는 뒷짐을 진 채 동료의 주검을 바라보고 있었다. 로난이 옆으로 다가갔다. 바나르티에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입을 열었다.

“서둘러 응급 조치를 해봤지만 무리였습니다. 오르세 놈이 아무래도 존재해서는 안 될 무기를 만든 것 같군요.”

로난은 대답하는 대신 블루 드래곤의 시체를 쳐다보았다. 그의 팔에 난 절단면과 가슴의 구멍이 검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로난이 나란소니아를 힐긋거리며 말했다.

“그러게요. 누가 방해하지만 않아도 잡았을 텐데.”

“아뇨. 오히려 무리해서 추격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나란소니아 님의 말마따나 궁지에 몰린 짐승은 더욱 난폭해지는 법이니까요.”

그는 오르세가 폴리모프를 해제하고 항전했다면 피해가 수십 배는 커졌을 것이라 설명했다.  몸을 돌린 바나르티에가 로난을 마주보았다.

“감사드립니다. 나바르도제 님의 대리자라 해도 설마 인간에게 목숨을 구원받을 줄이야.”

“됐어요. 뭘 그런 거 가지고.”

로난이 손사래를 쳤다. 별안간 그의 머릿속에 바나르티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죄송합니다. 설마 폐하께서 눈치채실 줄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난데없는 전음에 로난이 눈썹을 으쓱였다. 말투에 미안함이 뚝뚝 묻어나는 것이 로난이 정체를 발각당한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는 듯했다.

‘정중하기도 하지.’

나바르도제나 이르가 그러하듯, 드래곤이 다 씹새끼는 아닌 듯했다. 로난은 괜찮다는 의미로 한쪽 눈을 감아 보였다. 그가 자신을 팔아넘긴 것이 아니라는 것은 어렵잖게 알 수 있었다.

[혹시나 무슨 일이 생겨 아드렌을 탈출해야 한다면 하수도를 이용해서 섬의 북쪽 배수구로 이동하십시오. 거기에 배를 가져다 두겠습니다.]

“당신···.”

[아드렌의 하수도는 전부 이어져 있지요. 아마 하늘탑 아래에서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로난의 눈이 커졌다. 이건 정말로 가치 있는 정보였다. 가만히 대기하던 나란소니아가 그를 불렀다.

“로난 님.”

“아 그래, 지금 가요.”

그녀가 눈짓으로 재촉하는 탓에 로난은 금세 자리를 떠야 했다. 뒤쪽에서 바나르티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음에 뵙지요. 신세는 꼭 갚겠습니다. 불의 대리인이시여.”

“신세는 무슨. 다음에 봐요.”

로난은 폐허가 된 거리를 등지고 걸어갔다. 자욱한 피비린내가 선선한 밤바람 속에 뒤섞이고 있었다. 많이도 죽었군.

그러고 보니 주인장 노인이 보이지 않았다. 술집이 박살난 충격에 쓰러지기라도 한 걸까.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행방을 모르길래 그냥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아쉽군.’

그가 운영하던 술집의 잔해는 여전히 블루 드래곤의 머리에 깔려 있었다. 로난이 입맛을 다셨다. 정말로 괜찮은 브랜디였는데.

.

.

.

나란소니아를 따라 걷던 로난은 머지않아 용왕이 기거하는 하늘탑 앞에 도착했다. 고개를 아무리 꺾어도 맨 위가 보이지 않았다.

“···더럽게 높네.”

로난이 옅게 감탄했다. 하늘과 도시를 잇는 거대한 원기둥은 아드렌이 세워질 당시부터 세워져 있었다. 길고 두꺼운 그림자는 도시의 경계를 넘어 주변을 흐르는 구름 위까지 드리워 있었다.

탑의 입구 또한 가관이었다. 말도 안 나오게 큰 대문은 본모습의 드래곤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것 같았다. 문 앞에 멈춰선 로난이 한숨을 내쉬었다.

“염병, 이걸 또 언제 올라가냐···.”

“그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우선 동료 분들과 인사부터 나누시지요.”

“엉?”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동시에 나란소니아가 문을 열었다. 자세히 보니 대문 위에 인간이 통과할 수 있는 작은 문이 따로 나 있었다.

그들이 문간을 넘는 순간이었다. 황궁의 로비도 오두막으로 보이게 할 만큼 화려하고 호사스러운 공간이 눈앞에 펼쳐졌다. 나란소니아가 말했다.

“도착했습니다. 응접실입니다.”

“···내가 이래서 마법이 싫어.”

로난이 헛웃음을 쳤다. 유령이 다리털을 잡아뽑는 것 같았다. 공간 마법의 일종인 건가? 천천히 응접실을 둘러보던 로난의 시야에 두 청년의 모습이 들어왔다.

“너희들.”

아셀은 웬 책을 잔뜩 쌓아놓은 채 읽고 있었고, 슐리펜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명상을 하고 있었다. 로난과 마주친 두 사람이 몸을 일으켰다.

“로, 로난! 무사했구나!”

“···역시 거짓말이었나.”

멀쩡한 행색을 보아하니 어디 해코지를 당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반응이 영 이상했다. 무사하다니, 저런 말이 왜 나오지?

로난이 그들을 마주보고 섰다. 짝짝. 뒤에 있던 나란소니아가 손뼉을 두 번 쳤다.

“그럼 10분 뒤에 알현실로 이동하겠습니다. 저 문을 열고 바로 나오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녀는 검지를 뻗어 응접실 한구석에 있는 문을 가리켰다. 그리고 들어왔던 문으로 다시 나갔다. 주변에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확인한 로난이 입을 열었다.

“이 멍청이들아, 이게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무사하다니?

“그, 그게···갑자기 드래곤들이 몰려와서는 빨리 오지 않으면 네가 위험하다고 했어. 그래서···.”

“마찬가지다.”

아셀과 슐리펜의 대답을 들은 로난이 이마를 짚었다. 이거 아무래도 한 방 먹은 것 같았다.

용왕의 부하들은 로난이 위험하다는 핑계로 그들을 데려왔고 했다. 로난의 표정을 읽은 아셀이 헛숨을 들이켰다.

“호, 혹시 우리 속은 거야? 역시 따라와서는 안 됐던 거지?”

“됐어. 이미 이렇게 된 걸 어떡하냐.”

로난이 고개를 내저었다. 잘 생각해 보면 오르세랑 싸우는 게 위험하기는 했으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차피 거절했으면 힘으로 끌고 왔겠지. 영악한 파충류들 같으니라고.

“그래서, 쓸만한 건수는 좀 있었어?”

“미, 미안해···도서관에는 별 게 없었어.”

아셀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는 백방으로 도서관을 뒤져 봤지만 네뷸라 클라지에와 관한 정보는 구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래도 성과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대, 대신이라 하기에는 뭐하지만, 조사에 도움이 될 만한 마법을 몇 개 배웠어.”

“그건 잘 됐네. 고생했어.”

아셀은 투명화를 비롯한 마법 몇 가지를 책으로 익혔다고 말해 주었다. 보통 저딴 식으로 마법 습득이 가능한가 싶었지만, 원래 천재를 이해하려 들면 안 된다는 것을 로난은 알고 있었다.

어쨌든 투명화라면 높은 확률로 도움이 될 터였다. 아셀의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한 그가 슐리펜을 돌아보았다.

“너는 별 일 없었고?”

“하나 있었다. 보름 전부터 하얀 로브를 입은 인간들이 탑 주변을 서성거리는 것을 보았다는군.”

“역시 그랬···뭐?”

로난과 아셀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목소리가 하도 담담해서 별 소득이 없었다 말하는 줄 알았다.

“확실해? 누구한테 들었어?”

“하늘탑 인근에서 가게를 운영하던 상인이다. 웬 주정뱅이들이 행패를 부리고 있길래 쫓아내 줬더니 감사하면서 말해 주더군.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

로난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가늠조차 할 수 없던 사건의 꼬리를 발견한 느낌이었다.

그가 뭐라 한 마디를 하려는 차였다. 끼이익···갑자기 응접실 한구석에 자리한 문이 저절로 열렸다. 아셀이 기겁하며 뒷걸음질쳤다.

“히엑! 뭐, 뭐야?!”

“거 성격 한번 급하군.”

로난이 미간을 좁혔다. 시계를 올려다 보니 정확히 10분이 경과해 있었다. 앞머리를 쓸어넘긴 그가 두 사람에게 말했다.

“일단 가자. 침착하게만 굴자고.”

“으, 응. 제발 별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내 말 잘 들어. 만약 일이 잘못될 것 같으면···”

여기까지 온 이상 도망칠 수는 없었다. 아셀과 슐리펜에게 비상시의 대책을 속삭여준 로난이 앞장서서 걸음을 옮겼다.

활짝 열린 문 너머에서는 황금빛 광채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전해져 오는 기운이 뭔가 심상치가 않았다.

그들이 문 안쪽으로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금속이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발밑에서 울려 퍼졌다. 세 사람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시발. 이게 다 뭐야.”

“우, 우아아아···.”

“굉장하군.”

누구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생전 본 적 없는 금은보화가 끝이 보이지 않는 공간을 뒤덮고 있었다. 한 닢에도 목숨을 거는 큼직한 금화는 여기에서는 바닥을 까는 데 쓰이는 조약돌과 다를 바가 없었다.

제국의 은행을 모두 털어도 이 정도의 양이 나올지 궁금했다. 그들이 황금으로 이루어진 사막 위를 전진하던 와중이었다. 쿠르릉···! 불현듯 지축이 흔들리는 듯한 진동과 함께 어느 남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드디어-】

【왔는가.】

맥동하는 화산처럼 웅혼한 목소리였다. 촤아아아! 그들의 앞에 있던 황금의 언덕이 무너져 내렸다. 붕괴된 봉우리 위로 거대한 용의 머리 두 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히, 히이이익···읍!”

둘 다 금빛 비늘로 뒤덮인 골드 드래곤이었다. 끝을 모르고 치솟던 목은 머리가 천장에 닿고 나서야 곡선으로 굽어졌다.

용과 눈이 마주친 아셀이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언제나 평정을 유지하던 슐리펜도 어깨를 움츠렸다.

그들 중 하나가 용왕이라는 것을 눈치채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로난은 여기가 알현실이라는 것도 잊은 채 욕지거리를 중얼거렸다.

“이런 니미···.”

나바르도제 이후로 이렇게 거대한 생물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보물 속에 파묻힌 몸뚱어리의 크기는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목과 머리까지의 길이만 해도 어지간한 드래곤의 전신 길이와 맞먹는 수준이었다.

로난이 둘 중 어느 쪽이 용왕인지 고민하던 와중이었다. 네 개의 눈을 굴리던 머리들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반갑다. 짐은 아드렌을 다스리는 드래곤의 군주-】

【아지다하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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