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 용왕(4)
#239
‘···전쟁이라고?’
용왕의 말을 들은 로난이 미간을 좁혔다. 목소리에 비장미가 감도는 걸로 봐서 단순히 분위기에 취해 지껄인 말은 아닌 것 같았다.
문득 어느 주교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새로운 머리가 자라나면 더는 나바르도제 따위는 상대되지 않을 거라 했었지. 로난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소문과 다른 태도와 더는 그녀를 경계하지 않는다는 수상한 발언. 네뷸라 클라지에와의 접촉. 머지않아 주어진 정보를 가공해낸 그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니미. 저 미친 도마뱀이.”
“로, 로난? 갑자기 왜 그래?”
아셀이 당황 섞인 목소리로 질문했다. 로난은 답변하는 대신 주먹을 움켜쥐었다. 저 쌍대가리는 나바르도제와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대머리들의 힘을 받아 먹으면서.
‘경계하지 않는다는 건 이거 때문이었나.’
미물이 어쩌고 하더니 결국은 자신의 강함을 위해 손을 잡은 모양이었다. 지금 로난이 보고 있는 것은 전생에는 벌어지지 않은 사건이었다.
아드렌과의 접선 자체가 최근 교단의 상황이 좋지 않은 탓에 아벨이 내린 특수 조치라고 했으니까. 생각해 보니까 이거 시발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이구나.
‘위험한데.’
진심으로 나바르도제가 위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용왕 자체는 그녀보다 격이 떨어져도 요상망측한 별의 힘을 받는다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그건 이치를 벗어난 외계의 힘이었으니.
더군다나 용왕은 호칭 그대로 드래곤의 왕이자 아드렌의 군주였다. 그가 교단에 협력한다는 소리는 그 아래의 부하나 종복도 대머리 신봉자들에게 붙을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였다.
이건 굉장히 재미없는 상황이었다. 뭐부터 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설마하니 가장 위부터 포섭당해 있을 줄이야.
스멀스멀 올라오는 두통에 로난이 신음하던 와중이었다. 스아아···별안간 용왕이 밟고 있던 마법진의 빛이 사그라졌다. 용왕과 대화를 나누던 주교가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군요. 나머지는 내일 이어서 진행하겠습니다.”
아마 오늘의 의식이 마무리된 것 같았다. 하늘을 응시하던 용왕이 날개를 접고 고개를 숙였다. 백색 비늘로 뒤덮인 세 번째 머리는 벌써 절반 정도가 자라 있었다.
【아직 더 할 수 있는데-】
【아쉽구나.】
두 머리가 입맛을 다셨다. 광신도들이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밤공기를 메우던 반짝거림이 서서히 옅어져 가고 있었다.
신도들은 의식에 사용된 도구들을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했다. 다음으로 할 일을 고민하던 로난이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뻗어나온 그의 검지가 신도들을 가리켰다.
“아셀. 일단 기다렸다가 저 버러지들을 따라가자.”
“뭐, 뭐라고?”
“아, 손가락이 안 보이는구나. 저 광신도 새끼들 말한 거야.”
“그, 그건 맥락상 알아들었기는 한데···.”
아셀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슐리펜은 잠자코 신도들의 면면을 번갈아서 쳐다보고 있었다. 로난이 말을 이었다.
“저 새끼들도 잠은 잘 거 아냐. 아마도 이 탑에 침소가 있을 확률이 크겠지. 거기를 뒤져 보면 뭐라도 나오지 않겠어?”
단서가 발견되지 않으면 고문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최소한 알리브리헤나 교주 중 한쪽의 정보는 얻을 수 있겠지.
문제는 인원이 상당히 많은데다 쟁쟁한 실력자들이라 암살이나 각개 격파를 해야 할 것 같았다. 딱히 대책이 없었기에 아셀과 슐리펜은 로난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심호흡한 아셀이 일행을 이동시키려는 차였다. 갑자기 주교 한 명이 세 사람을 향해 손을 뻗었다. 벌어진 그의 입술 사이로 영창을 외우는 소리가 새나왔다.
“윈드 스피어.”
“뭣···!”
로난의 눈이 커졌다. 순식간에 주교의 손 앞에 작은 마법진들이 그려지며 바람으로 이루어진 창 수십 개가 세 사람을 향해 쏘아졌다. 아셀이 헛숨을 들이켰다.
“힉···!”
“제기랄.”
로난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피하기에는 양이 너무 많았다. 들키는 한이 있더라도 자르거나 쳐내야 했다. 그가 막 칼자루를 잡아당기려는 순간이었다.
쉭! 슐리펜이 한 발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미리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빠르고 노련한 움직임이었다. 검로를 따라 불어닥친 강풍이 창들의 궤도를 미세하게 뒤틀었다.
“너···!”
“뭔가 이럴 것 같았다. 계속 이쪽을 힐끔거리더군.”
슐리펜이 말했다. 후우웅! 원래는 적중했어야 할 바람의 창들은 종이 한 장의 간격을 두고 세 사람의 몸 근처를 스쳐 지나갔다. 막거나 잘라내는 행위와는 달리 위화감이 들지 않았다. 사람들의 눈에는 바람의 창 수십 개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가로지른 걸로만 보였다.
“···기분 탓이었나.”
마법을 시전했던 주교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를 이상한 시선으로 보는 것은 용왕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언짢은 듯 말했다.
【지금-】
【뭐 하는 짓이지?】
“결례를 용서하십시오. 다름이 아니라 저 부근에 인기척이 느껴진 것 같아서···.”
주교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잘못을 인정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의 시선은 조금 전에 창을 쏘았던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틀림없이 뭔가를 느꼈었는데.
【하하, 그럴 리가 없지 않느냐. 어느 누가 감히 내 명을 어기고-】
【탑 근처를 서성거린다는 거냐.】
용왕이 웃었다. 확신에 찬 목소리는 오만하게마저 느껴질 지경이었다. 당장이라도 자살할 것처럼 울먹거리던 아셀이 입을 열었다.
“로, 로난. 일단 피해야 할 것 같아.”
“···그래.”
로난이 혀를 찼다. 정말 아슬아슬한 상황이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투명화도 풀리지 않았고, 기척도 감추고 있었는데 순전한 감으로 들킬 뻔한 것이었다.
‘염병. 누가 주교 아니랄까 봐.’
같은 일의 재발을 막기 위해서라도 일단 장소를 이동해야 할 것 같았다. 어디가 좋을지 고민하던 로난이 두 층 아래에 난 창문을 가리켰다.
“우선 들어가자. 저기서 기다렸다가 미행하면 될 것 같으니까.”
“으, 응. 알았어.”
옥상에서 아랫층과 이어진 계단은 하나밖에 나 있지 않았다. 아셀은 천천히 일행을 이동시켰다. 천만 다행히도 주교의 시선은 따라오지 않았다.
그들은 창문을 통해서 탑으로 재진입했다. 내부에는 아무도 없었다.
“···흐아아!”
털썩. 모두를 착지시킨 아셀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왜소한 몸이 바들바들 떨려 오고 있었다. 그가 눈가를 닦으며 중얼거렸다.
“주, 죽는 줄 알았어···.”
“고생했다. 너가 최고야.”
로난이 엄지를 치켜들었다. 사실상 이 자식이 다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바람의 창에 뺨을 스치면서도 염력을 유지하다니, 내가 아는 아셀이 맞나 싶었다. 그의 등을 두드리던 로난이 슐리펜을 돌아보았다.
“너는 두 번째 최고 해라. 덕분에 안 들켰네.”
“최고는 으뜸가는 하나만을 칭하는 단어다.”
슐리펜이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평소 같았으면 천박한 비유를 들어 가며 핀잔을 줬겠지만 오늘만은 그러지 않았다. 그가 대처하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들켰을 테니까. 아마 용왕과 광신도들에게 뚝딱뚝딱 두들겨 맞고 추락사했겠지.
“좋아. 그럼 조금만 쉬다가 이동···”
“찾았다. 이 쥐새끼들.”
낄낄거리던 로난이 뭐라 말하려던 차였다. 별안간 뒤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냉수를 끼얹은 것 같은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그들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스무 걸음 정도 떨어진 계단 앞에 하얀 로브를 입은 중년인이 서 있었다. 일행을 향해 바람의 창을 쏘았던 주교였다.
“거기에 있는 걸 알고 있다. 순순히 모습을 드러내라.”
그의 앞에는 이미 마법진 수십 개가 펼쳐져 있었다. 조금 전에 쏜 것과 같은 바람의 창과 검들이 곰치처럼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투명화 마법이 작동하고는 있었지만 들킨 것은 확실한 것 같았다. 문득 스산함을 느낀 로난이 고개를 들자 천장에 들러붙은 채 빛나는 마법진이 보였다. 역시나 바람의 병장기들이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시발.’
로난이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의심이 많아 보이는 관상이긴 했는데 기어코 뒤따라온 모양이었다. 기괴한 색으로 일렁이는 별의 가호가 그의 몸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풀어라.”
“로, 로난···!”
“어서.”
한숨을 내쉰 그가 아셀의 다리를 툭툭 찼다. 투명화 마법이 해제되며 세 사람의 모습이 드러났다. 주교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올라갔다.
“감이 좋군. 세 명이 모두 나타나지 않는다면 당장 쏴 버리려고 했는데 말이지.”
로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머리와 눈알을 빠르게 굴리며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주변에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걸로 보아 혼자 내려온 것 같았다.
“아까 내가 느낀 것도 분명 기우가 아니었을 터. 용왕의 종복으로 보이지는 않는데 여기서 뭘 하는 거지?”
주교가 말을 이었다. 수상한 짓이라도 하면 당장 무기들을 격발할 기세였다.
판단을 마친 로난이 코어를 전환했다. 마나의 결이 달라지며 반짝거리는 마나가 어깨 위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가 입을 열었다.
“저희는 아군입니다 주교님. 알리브리헤 님의 명령을 받아 부득이하게 미행하게 되었습니다.”
로난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했다. 알리브리헤라는 이름을 들은 주교가 눈썹을 치켜떴다.
“뭐라? 알리브리헤 님이?”
“그렇습니다. 용왕 아지다하카와의 접선 중에 별 일은 없는지 몰래 확인하라 하셨습니다. 아무래도 같은 드래곤이라 그 천성을 알고 있으니 걱정이 되신 거겠지요.”
주교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단순한 첩자라기에는 교단의 정보를 너무 많이 알고 있었다. 자신의 주교라는 신분과 용왕과의 접선. 알리브리헤가 드래곤이라는 점까지.
게다가 잘 보니 검은 머리 청년에게서는 네뷸라 클라지에 특유의 기척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사실이냐.”
“네. 절대로 들키지 말라고 하셨는데, 면목이 없습니다.”
“쉽사리 믿기가 힘들군. 휴가 중에는 교주님을 제외한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겠다고 본인 입으로 공언하시는 걸 들었는데.”
“저는 있는 그대로 말했을 뿐입니다. 아마도 지금 여기 아드렌에 계시니 노파심이 생기신 것 아닐까요.”
로난이 말했다. 아셀과 슐리펜은 미동도 없는 그의 얼굴을 보며 감탄마저 느끼고 있었다. 사람이 이렇게 거짓말을 잘 할 수도 있단 말인가.
“으음, 하긴···.”
주교가 침음을 흘렸다. 마법진들의 빛이 한결 잦아들었다.
로난이 소리 없는 쾌재를 불렀다. 장소를 부정하지 않는 걸로 봐서 알리브리헤가 여기 아드렌에 있다는 것은 확실한 듯했다. 휴가 중이라는 것은 모르고 있었지만.
“그래도 아직 믿을 수 없다. 저 뒤의 둘에게서는 별의 힘이 느껴지지도 않고 말이지. 소속 지부와 이름을 말해라.”
고민하던 주교가 다시 입을 열었다. 빠르게 일행과 시선을 교환한 로난이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었다.
“그건 곤란합니다. 죄다 방금 지어낸 거짓말이었으니까요.”
“뭐?”
주교가 눈살을 찌푸렸다. 동시에 로난이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그가 다시 마법을 발동하려 했지만 라만차의 검신은 이미 노을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파아아! 한순간 빛무리가 일렁이나 싶더니 주교의 신형이 로난의 눈앞까지 끌려왔다.
“무슨···!”
주교의 눈이 커졌다. 주홍색 꼬리를 끌며 날아온 참격이 별의 가호를 두부처럼 가르고 있었다. 스각! 그의 목울대 위로 붉은 선이 그어졌다. 저항할 새도 없이 분리된 머리가 공중으로 솟구쳤다.
“이, 인비저블 핸드!”
아셀이 손을 뻗으며 주문을 영창했다. 넘어지던 몸통과 하늘을 나는 머리통, 분수처럼 치솟던 선혈이 허공에 정지했다. 주변에 피가 묻지 않은 것을 확인한 로난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잘 했어.”
“아윽!”
로난이 아셀의 등을 퍽퍽 두드렸다. 아직은 완전범죄가 가능한 시점이었다. 어차피 탈출할 생각이기는 했지만, 괜히 흔적을 남겼다가는 더 빨리 추격당할 가능성이 있었다. 아셀이 질문했다.
“이, 이 시체는 어떻게 하지?”
“형체도 알아보지 못하게 뭉개서 창밖으로 던져야지. 그대로 붙잡고 있어봐.”
“어?”
아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로난은 그가 뭐라 할 새도 없이 칼을 휘둘렀다. 촤아악! 허공에 머물러 있던 시체가 수백 조각으로 분해됐다. 염력으로 붙들고 있었기에 떨어지지는 않았다. 순식간에 일을 마친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제 공처럼 뭉쳐서 밖으로 던져. 최대한 멀리.”
“히, 히이이익!”
저기서 물 한 잔만 떠달라는 것처럼 담담한 말투였다. 아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상상하는 것만으로 구역질이 났지만 지금은 딱히 방도가 없었다. 그가 세상에서 가장 역겨운 고기 경단을 만드는 작업에 착수하려던 순간이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던 달빛이 한순간 사라졌다.
“음?”
세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용왕의 머리 하나가 거꾸로 뒤집힌 채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은 적막이 내려앉았다.
【너희들이 왜-】
【여기에 있지?】
용왕이 말했다. 여인의 목소리는 저 위쪽에서 들려오는 걸로 보아 왼쪽 머리만 내린 듯했다.
【분명 나오지 말라 했거늘. 설마 모든 것을-】
【봐 버린 건가?】
로난이 입속말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계획이 산산조각나는 소리가 귓가를 맴도는 것 같았다. 잠시 뜸을 들이던 그가 입을 열었다.
“어, 그러니까요. 잠이 안 와서 돌아다니다 보니···”
【슬프구나. 사악한 마룡을 물리친 용사를, 그것도 짐이 직접 치하한 이들을-】
【이렇게, 보내야 하다니.】
로난의 말허리를 자른 용왕이 나지막이 탄식했다. 불현듯 그의 아가리가 위아래로 벌어졌다.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 빛의 입자가 모여들며 응축되고 있었다.
“···튀어.”
로난이 말했다. 그는 주저앉아 있는 아셀을 들쳐멤과 동시에 몸을 돌렸다. 뛰쳐나간 로난과 슐리펜이 계단의 아랫층으로 몸을 던지는 순간이었다. 콰아아아! 해일처럼 쏟아져 나온 빛의 급류가 복도를 휩쓸었다.
“끄하아아아악!!”
아셀이 영혼이 뽑혀 나올 것 같은 비명을 내질렀다. 황금빛 광선은 반대편 벽면을 부수며 서녘 하늘로 뻗어 나갔다. 용왕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고한다! 하늘탑과 아드렌에 기거하는 모든 동포와 종복은 짐의 명을 받들어라!】
【침입자를, 잡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