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의 천재칼잡이-242화 (242/333)

242. 알리브리헤(3)

#242

“그래서 자네들은 정체가 뭐지? 내 처음이자 마지막 휴가를 망치러 온 건가?”

로난의 눈이 커졌다. 정말로 알리브리헤였다. 헌데 구원자의 기억을 여행했을 당시와는 다른 사람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인상이 달라져 있었다. 분명히 호탕한 성격의 덩치였는데.

무언가 사정이 있는 것 같았으나 로난은 구태여 묻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건 따로 있었으니까.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휴가라뇨?”

“내 질문에 먼저 답해 주면 고맙겠군.”

“그거야 말해줄 수 있는데···교주한테 막 이르고 그럴 거 아니죠?”

“내가 의심스럽다면 말하지 않아도 좋네. 대신 우리의 대화는 여기서 끝나겠지. 내가 교단에 품은 생각이 결코 긍정적이지는 않다는 것만 일러두겠네.”

과연 만만치 않은 늙은이였다. 부드러우면서도 강경한 태도에서 노련함을 엿볼 수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로난이 머리를 끄덕였다.

“음, 그러죠.”

협박이 먹힐 것 같은 유형은 아니었다. 또한 나쁜 마음을 먹었다면 우리를 구해주지도 않았을 터였고. 그는 자신과 쿨쿨 잠들어 있는 아셀을 번갈아 가리켰다.

“저는 로난이고, 저기 자고 있는 애는 아셀이에요. 그러니까···”

로난은 자신들의 신상과 아드렌에 온 목적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만약에 일이 잘못되더라도 빌미 삼아 추적당할 수 있는 정보는 철저히 배제하고서. 알리브리헤는 모닥불에 장작을 하나씩 던져 넣으며 그의 말을 경청했다.

넓고 비어 있는 공간이라 목소리가 울렸다. 일렁이는 모닥불의 빛이 하수도에 긴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어느 정도 설명을 들은 알리브리헤가 천천히 주억거렸다.

“···그렇게 된 거였나. 교단을 막기 위해 여기 아드렌까지 오다니, 대단하군.”

“생각보다는 오기 쉽던데요. 참, 아까는 고마웠어요.”

“으음?”

갑자기 로난이 고개를 숙였다. 알리브리헤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뭐가 고맙다는 겐가?”

“나랑 쟤를 구해줬잖아요. 솔직히 말해서 어떻게 하수도까지 올 지 막막했거든요.”

로난은 나름 정중하게 감사를 표했다. 짚을 건 짚고 넘어가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이 영감님을 아직 완전히 신용할 수는 없었지만, 그 덕분에 위기를 모면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벙쪄 있던 알리브리헤가 입을 열었다.

“···자네는 교주의 자식이 아니군. 솔직히 조금은 의심하고 있었네만.”

“음? 갑자기 확신을?”

“그 괴물의 피를 이은 사람이 남에게 감사 같은 것을 할 리가 없으니까. 머리를 숙일 리는 더더욱 없고. 뤼코포스만 봐도 알 수 있지.”

그리 말하는 알리브리헤의 말투에는 혐오감이 눅진하게 묻어나 있었다. 본인이 말했던 것처럼 교단과의 사이가 그닥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럼 자네의 정체는...설마 이 늙은이가 생각하는 게 맞는 건가.”

“아마 그럴걸요.”

로난은 부정하지 않았다. 여기까지 온 이상 밝힐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생사 여부나 정확한 위치는 말하기 전까지 모를 테니 이 정도는 괜찮겠지.

“저는 구원자, 그러니까 카인의 아들이에요.”

“아아···맙소사.”

알리브리헤가 탄식했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천천히 쓸어내린 그가 말을 이었다.

“얼마 만에 그 이름을 듣는 건지 모르겠군. 설마 자식이 있었을 줄이야···아직 살아 있나?”

“글쎄요. 이제 영감님 차례에요.”

로난이 익살스레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하나를 줬으니 이제 하나를 받을 차례였다. 어이가 없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던 알리브리헤가 옅게 실소했다.

“···웃는 게 아버지를 닮았군.”

“그런가요?”

로난의 입꼬리가 조금 더 올라갔다. 알리브리헤가 뭐라 말하려던 차였다. 쿠구구구···! 별안간 지진이 난 것처럼 바닥과 벽면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뭐야?”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퀴퀴한 공기가 요동치는 것이 느껴졌다. 저 멀리 어디선가 외침처럼 들리는 음성이 산발적으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알리브리헤가 쯧쯧 혀를 찼다.

“아지다하카가 본격적으로 추격을 시작한 모양이군. 아마 바깥은 지금 난리가 났겠지.”

로난은 그것이 지상에서 들려오는 소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치이익- 알리브리헤가 모닥불을 향해 검지를 뻗자 담요를 덮은 것처럼 불길이 사그라졌다.

“일단 장소를 옮기지. 따라오게.”

그는 뒷짐을 진 채 하수도 깊숙한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로난은 아셀을 깨우지 않고 업은 채 알리브리헤를 뒤따랐다. 마법사 대부분은 자면서 마나를 회복하니, 최대한 많이 쉬게 해 주고 싶었다.

“우움···으으음···.”

“푹 자라. 지금이 아니면 못 쉴 것 같으니까.”

발소리가 이어졌다. 아드렌의 하수도는 지금껏 로난이 경험해 본 어떤 하수 시설보다 크고 넓었다. 특히나 어지간한 하천에 비견될 만한 수도의 넓이가 인상 깊었다.

‘더럽게 크네.’

확실히 드래곤들이 통이 컸다. 로난이 한창 그 규모와 만듦새에 감탄하던 와중이었다. 앞서 걷던 알리브리헤가 입을 열었다.

“···휴가라는 건 말 그대로 휴가일세. 나는 지금 네뷸라 클라지에가 창시된 이후 처음으로 교단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왔지. 교주를 제외하고는 내가 여기 있는지조차 모른다네.”

처음에 로난이 한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다. 물소리가 워낙에 커서 귀를 기울여야 했다. 알리브리헤는 약속한 대로 자신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자네와 내가 처음 만난 술집은 내가 취미로 운영하는 곳이었다네. 늘그막의 소소한 재미였지.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는 애송이 하나 때문에 더는 못 쓰게 되어 버렸지만.”

“그건 유감이에요. 뭔가 했더니 취미였구나. 난 또 왜 대장간이 아니라 그런 곳에 있었나 했죠.”

“뭐야, 내가 대장장이였다는 걸 자네가 어떻게 알고 있지?”

“그냥, 교단이랑 싸우다 보니 알게 됐어요. 유명하던데요.”

로난이 너스레를 떨었다. 그는 자신이 구원자의 기억을 일부 공유한다는 사실을 굳이 말하지 않았다. 패를 전부 보여주는 것은 아직 섣부른 판단이었다.

“그리고 제 여자친구가 영감님이 만든 채찍을 쓰고 있거든요. 유리아인가 뭔가 하는 여자가 쓰던 거.”

“아아···뭘 말하는지 알겠네. 까다로운 무기인데, 적응한 게 대단하군.”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갔다. 마음만 같아서는 서둘러서 본론만 뽑아 내고 싶었지만 괜히 일을 그르칠 바에는 자연스럽게 유도하는 방식이 나았다. 별안간 알리브리헤가 질문을 건넸다.

“맞아, 아지다하카 그 친구와 정확히 무슨 일이 있던 건가? 나는 정말로 아무것도 몰라서 말일세.”

“그거 완전히 미친 새끼에요. 나바르도제를 이길 수 있으면 자기 부모까지 팔아넘길 새끼라니까요.”

당시 상황을 떠올리니 갑자기 열불이 치솟았다. 손잡을 대상이 따로 있지. 로난은 노기 충만한 목소리로 하늘탑에서 벌어졌던 일을 설명했다.

나바르도제를 향한 질투와 교단과의 결착, 별에서 힘을 받아오는 수상한 의식까지. 슐리펜의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설명은 끝났다. 알리브리헤가 수염을 쓰다듬었다.

“동료가 그렇게 되다니 유감스럽군. 그래도 생포라는 말이 나온 이상 죽지는 않았을 걸세. 뱉은 말을 잘 지키는 것이 드래곤이라는 족속의 얼마 없는 장점이니까.”

“그렇게 믿어야죠.”

로난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 멍청한 자식은 어떤 일이 있어도 구해야 했다. 알리브리헤가 침음을 흘렸다.

“흐으으음···그나저나 아지다하카도 참 어리석은 선택을 했군. 아벨이 아드렌과 접촉했다는 소문을 듣기는 했는데, 설마 사실일 줄이야.”

“힘을 얻으면 용왕이 나바르도제를 이길 수 있을까요?”

“글쎄. 하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하지. 의식이 끝나면 아드렌은 멸망할 걸세.”

알리브리헤가 담담하게 말했다. 너무 담담해서 의미를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터벅. 로난이 제자리에 멈춰 섰다.

“···뭐라고요?”

“하늘탑의 정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건 단순히 힘을 더해주는 의식이 아닐세. 용왕과 아드렌이라는 거대한 힘을 미끼로 저 머나먼 하늘에 있는 존재를 불러들이는 거지. 뭐, 강해지기야 하겠다만은.”

“하늘에 있는 존재라니. 설마 그 거인들···아.”

“방금 뭐라고 했나?”

알리브리헤가 걸음을 멈췄다. 그와 눈이 마주친 로난이 헛숨을 들이켰다. 너무 흥분한 나머지 시기상조인 발언을 해 버리고 말았다.

‘젠장, 불찰이다.’

로난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심히 재미없는 상황이었다.

만약 알리브리헤가 조금이라도 교단에 충성심이 남아 있다면 자신을 제거하려 들 터였다. 로난의 손이 천천히 칼자루에 가까워졌다.

‘베어야 하나?’

숨막히는 정적이 둘 사이를 맴돌았다. 로난은 당장에라도 칼을 뽑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몇 초가 지났을까,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 돌아왔다.

“허허···벌써 거기까지 파헤친 건가. 교단도 밑천이 다 드러났군.”

“···뭐?”

갑자기 알리브리헤가 웃기 시작했다. 사악한 의도 같은 것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정말로 웃겨서 웃는 웃음이었다.

이거 느낌이 몹시 좋지 않았다. 참다 못한 로난이 그를 채근했다.

“젠장, 웃지만 말고 설명해 줘요. 정확히 뭐가 어떻게 된 거에요?”

“별 것도 없다네. 그래도 내가 아는 것 까지는 이야기해 주지.”

알리브리헤는 의외로 흔쾌하게 굴었다. 정말로 교단에 품은 감정이 좋지 않은 듯했다.

로난이 침을 삼키며 다음 말을 기다리던 와중이었다. 별안간 등을 돌린 그가 다시 하수구 안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뭐야, 이야기해 준다면서요?”

“그럴 걸세. 하지만 먼저 자네가 만나야 할 사람이 있네.”

“만나야 할 사람?”

로난이 물었으나 알리브리헤는 대답하지 않았다.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는 뒷모습이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다. 로난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도대체 뭐야···?”

갑자기 말하다 말고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허나 다른 선택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로난은 결국 그를 따라서 걸음을 옮겼다.

비슷비슷한 풍경이 이어졌다. 여기는 찬란한 도시의 그림자와 같은 공간이었다. 발소리에 놀란 시궁쥐들이 분주하게 뛰어다니고, 인간의 시체도 이따금 보였다.

대부분은 백골만 남은 상태였는데, 아마도 주인에게 버림받은 종복들인 것 같았다. 아드렌에서 추방당하기는 싫으니 여기로 도망쳐 오기라도 한 걸까. 문득 시선을 올린 로난이 천장을 바라보았다.

‘난리도 아니군.’

배수구를 통해 자신과 아셀을 찾는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아까보다 소리가 커진 걸로 보아 병력이 더 투입된 것 같았다. 정확한 건 직접 봐야 알겠지만, 까놓고 말해서 막막한 상황이었다.

이런 와중에 누구를 소개해 준다는 건지. 그때 한 시간째 직진만 하던 알리브리헤가 어느 모퉁이를 돌았다. 그가 고개를 돌리지 않고 말했다.

“도착했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이 많았어.”

“뭘요. 그래서 누구를 만나게 해 주려···”

로난이 투덜거리며 모퉁이를 도는 순간이었다. 그의 다리가 바닥에 뿌리를 내린 것처럼 굳어 버렸다.

피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삿짐이 들어오지 않은 방처럼 비어 있는 공간 한복판에 웬 남자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너는···!”

작은 등불 하나가 그의 옆에서 아롱이고 있었다. 수양버들처럼 늘어진 남자의 머리카락이 옆구리까지 내려와 있었다. 눈을 감고 있었지만 얼굴을 알아보기에는 문제가 없었다. 마룡 오르세였다.

‘저 새끼가 왜 여기 있어?’

잘 단련된 오르세의 복부에는 붕대가 두텁게 감겨 있었다. 공간 한구석에 시뻘겋게 물든 붕대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걸로 봐서 보통 피를 많이 흘린 것이 아닌 듯했다.

약초로 보이는 풀떼기들이 주변을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다. 신종 함정인가? 아셀을 지탱하지 않는 손이 천천히 칼자루로 향하던 차였다. 알리브리헤가 그를 향해 의수를 흔들었다.

“이봐, 몸은 좀 어떤가.”

친구에게 인사를 건네듯 정감 넘치는 말투였다. 오르세가 눈을 떴다. 알리브리헤를 돌아본 그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잘도 그런 말을 지껄이는군. 당신이 신고만 하지 않았어도 이 사단은 나지 않았다.】

“웃기지도 않는구나. 도망치라고 신고를 한 건데 멋대로 날뛴 네놈 잘못이지. 장담컨데 내버려 뒀으면 너는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었을 게다.”

【닥쳐라, 늙은이. 회복은 충분히 되었으니 이제 가겠다.】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로난이 혼란에 빠졌다. 티격태격하기는 했지만 사이가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우라질,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알리브리헤가 한숨을 내쉬었다.

“후···배은망덕한 놈 같으니라고. 떠나는 건 네놈이 알아서 할 일이지만, 먼저 이 친구랑 대화부터 한 번 나눠 보는 게 어떠냐.”

【대화라고?】

오르세가 갸웃거렸다. 알리브리헤는 말없이 옆으로 비켜섰다. 뒤에 서 있던 로난과 그의 눈이 마주쳤다. 끔찍하리만치 어색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로난이 먼저 입을 열었다.

“살아 있었냐?”

【오랜만은 아니군. 애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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