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의 천재칼잡이-243화 (243/333)

243. 알리브리헤(4)

#243

【오랜만은 아니군. 애송이.】

오르세가 으르렁거렸다. 흉악한 기세는 여전히 잘 벼린 칼날처럼 곤두서 있었다. 로난은 시선을 그에게 고정한 채 알리브리헤에게 물었다.

“···이 자식이 왜 여기 있어요?”

“구석진 곳에 쓰러져 있는 걸 데려와서 치료해 줬지. 면식이 있는 사이거든.”

“면식?”

로난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그러고 보니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 뒤 알리브리헤의 행방이 묘연해졌었는데, 오르세를 찾으러 갔던 모양이었다.

더불어 구원자의 기억 속에서 들었던 대화도 스멀스멀 떠올랐다. 알리브리헤는 나바르도제를 만나기 위해 떠나는 구원자에게 오르세의 이야기를 해 주었었다.

분명 그 땅에는 인간들이 자리를 잡으려고 할 테니 레어를 다른 곳에 틀라고 경고했었지. 알리브리헤가 말하는 면식이란 아마 그 때의 일을 칭하는 듯했다. 오르세가 말했다.

【위선 부리지 마라. 제국이 세워지기도 전의 일을 언제까지 들먹일 생각이냐.】

“검은 동포끼리 너무 날을 세우는군. 네놈은 감사하다는 말도 할 줄 모르느냐?”

【하, 동포라. 같잖은 노인 흉내부터 그만두면 생각해 보도록 하지.】

노인 흉내라는 말을 들은 로난이 알리브리헤를 돌아보았다. 역시 이 작자는 고의적으로 늙은이의 모습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었다. 로난을 힐끔 돌아본 알리브리헤가 헛기침했다.

“흐흠, 오해하지 말게. 별 이유 없으니까. 그냥 다 죽어가는 늙은이 흉내를 내야 교단에서 일을 덜 시키거든.”

“난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요.”

로난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두 사람을 쳐다보던 오르세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 저 애송이를 내 앞에 데려다 놓은 거냐. 허기질 테니 요기라도 하라는 건가?】

“보아하니 둘이 이해관계가 일치할 것 같아서 데려왔지. 이 늙은이는 잠시 빠질 테니 대화 나누시게나.”

“이해관계? 잠깐, 어디 가요?”

로난이 물었으나 알리브리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뭐라 말할 새도 없이 등을 돌려 방을 나가 버렸다. 적막 속에서 서로 마주 보던 두 사람이 동시에 눈살을 찌푸렸다.

【네놈과 할 말은 없다. 그 빌어먹을 검과 나바르도제의 위치를 내놓고 꺼져라.】

“내 엉덩이나 핥으시지.”

【방종에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내가 부상을 입었다고 해서 네깟 놈 하나를 못 치워버릴 것 같으냐?】

불현듯 오르세의 어깨 위로 검은 기운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의 옆에서 아롱이던 등불이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그가 으르렁거렸다.

【마지막 기회다. 나바르도제의 위치를 말해라.】

“하···시발.”

로난이 한숨을 내쉬었다. 무섭다기보다는 답답했다. 차라리 돌멩이를 하나 가져다 놓고 이야기해도 이것보다는 말이 잘 통할 것 같았다.

알리브리헤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었다. 이해 관계가 어쩌고 한 걸 보면 분명 그 영감쟁이도 이 자식의 목적을 알고 있을 텐데.

갈수록 마음이 조급해질 뿐이었다. 의식이 끝나기까지 이틀이 남았고, 슐리펜의 생사도 불분명한 이 상황에서 뭘 하고 있는 건지. 한창 속을 썩이던 차였다.

‘잠깐, 설마.’

불현듯 한줄기의 바람 같은 발상이 로난의 머릿속을 스치며 지나갔다. 알리브리헤의 말이 뭔지 알 것도 같았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그가 의도적인 한숨을 내쉬었다.

“후···그렇게 알고 싶다면야. 그 누님은 지금 드리무어라는 곳에 있어.”

【말하기 싫다면 어쩔 수 없지. 네놈은 여기서······뭐라?】

오르세의 눈이 커졌다. 이렇게 갑작스러운 답변이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피부를 찌르던 살기가 잠시 가라앉았다.

【···드리무어라니, 거기가 어디냐.】

“하늘 저 멀리 떠있는 요새지. 거기는···.”

로난은 드리무어와 관한 정보를 간략하게 설명했다. 다른 요소는 철저히 배제하고 신비로운 위치와 주변 풍경, 거기에 나바르도제가 있다는 사실만을 강조했다.

오르세는 설명을 이어나가는 로난의 눈을 뚫어질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터럭 같은 거짓말이라도 했다가는 당장 머리를 뽑아 버릴 기세였다.

물론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정보를 통제했을 뿐 거짓말은 하지 않았으니까. 오르세의 얼굴에 점진적으로 기대감이 차오르는 것이 보였다. 설명을 다 들은 그가 입을 열었다.

【···거짓말은 아닌 것 같군. 그래서 거긴 어떻게 가는 거지?】

“나도 몰라.”

【뭐라?】

오르세의 미간이 확 구겨졌다. 여기서부터가 중요했다. 머릿속으로 말을 한 번 정리한 로난이 고개를 내저었다.

“나도 딱 한 번 다녀온 거라 정말 몰라. 공간 마법을 반복하면서 갔거든. 하지만 딱 한 명, 알고 있는 사람이 여기 아드렌에 있어.”

【그게 누구냐.】

“용왕 아지다하카. 나바르도제의 편지를 받아 놓고도 무시하는 배짱 좋은 새끼지.”

로난이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그는 용왕이 하늘탑의 정상에서 벌이는 의식과 그 이유를 요약해서 말해 주었다.

세 번째 머리라든가, 전쟁을 벌이려 한다는 것이라든가. 설명을 들은 오르세가 이를 악물었다.

【감히 나를 제치고 나바르도제를 칠 생각인가. 가소로운 놈이···!】

“너, 그 가소로운 놈한테 졌잖아.”

【죽고 싶다면 계속 혓바닥을 놀려 봐라. 저번에는 방심해서 당했을 뿐, 정면 승부라면 절대로 지지 않으니까.】

다물린 입 안쪽으로 바득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의 반응을 본 로난이 내심 안도했다.

‘다행이다. 드래곤은 드래곤이구나.’

이쯤 되면 거의 넘어온 것 같았다. 역시 나바르도제를 향한 이 자식의 집착은 단순한 전략적 이유 때문만이 아니었다. 발론을 치기 전에 치워 버리려는 목적과는 별개로, 역대 최강의 드래곤을 자신의 손으로 꺾고자 하는 호승심이 내포되어 있었다.

“이제 어쩔 거야?”

【지금 당장 하늘탑으로 간다. 정보를 뱉었으니 목숨은 남겨 주지. 어서 그 저주받은 검이나 내놓고 꺼져라.】

“성급하기는. 그보다 더 좋은 생각이 있는데 들어 보지그래.”

【좋은 생각이라고?】

오르세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이제 결정타를 날릴 때였다. 로난이 자신감 있게 주억거렸다.

“그래. 우리랑 같이 탑을 올라가는 거야. 나도 거기에 용건이 있거든.”

【웃기지도 않는 소리군. 내가 인간 따위랑 왜 그래야 하지?】

“이 씹새끼. 니가 그딴 식으로 나올 줄 알았지, 고집은 적당히 부리고···”

오르세가 코웃음 쳤다. 예상한 반응이라 딱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로난이 뭐라 말을 이으려던 차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웬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수도로 숨어들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철저하게 조사하도록.】

“알겠습니다. 판트하이온 님.”

두 사람의 얼굴이 동시에 굳어졌다. 틀림없는 사람들의 목소리였다. 거리는 대략 70m 안팎, 발소리로 미루어 보아 인원은 열 명쯤 되는 것 같았다.

“썅, 벌써 여기까지 온 건가.”

로난이 혀를 찼다.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하수도를 뒤지기 시작할 줄이야. 알리브리헤는 어디서 뭘 하는 건지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별안간 오르세가 입구를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벌레들이 꼬였군. 치워야겠다.】

“드래곤도 하나 있는 것 같은데. 다친 놈한테는 버겁지 않겠냐?”

【하, 버겁다고?】

오르세가 가소롭다는 듯이 실소했다. 푹! 그는 대답하는 대신 자신의 가슴에 손을 집어넣었다. 뭐 주머니 이런 곳에 넣었다는 게 아니라 진짜로 살가죽 안쪽에 손을 넣었다는 의미였다.

“뭐···!”

기괴한 광경에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피가 튀거나 살이 찢어지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오르세의 피부는 물이라도 된 것처럼 그의 팔을 부드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촤아악! 머지않아 오르세의 팔이 빠져 나왔다. 로난의 눈이 커졌다. 다시 드러난 그의 손에는 오로라 스칼에서부터 봐왔던 시커먼 창이 쥐어져 있었다.

“너···.”

【시건방진 소리를 하는군.】

창날은 여전히 흉악무도한 나선형으로 꼬여 있었다. 쾅! 불현듯 오르세가 땅을 박차며 달려나갔다. 한순간 신형이 흐릿하게 보일 정도로 빠른 몸놀림이었다. 정확히 로난이 눈을 한 번 깜빡거린 시점이었다.

“자, 잠깐···이 놈은!”

【오르세, 이런 곳에 있었나!】

“끄아아악! 살려 줘!”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미친 새끼. 욕지거리를 내뱉은 로난이 황급히 달려갔다. 현장에 도착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멈춰선 그가 헛웃음을 지었다.

“···허.”

이미 상황은 종료되어 있었다. 흐르는 수면이 붉었다. 물비린내와 뒤섞인 혈향이 자욱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갈기갈기 찢어진 시체들이 하수도를 따라 떠내려가고 있었다.

【네···놈···.】

드래곤으로 보이는 사내는 벽에 기대앉은 채 죽어가고 있었다. 시커먼 창이 그의 가슴 한복판을 꿰뚫고 있었다. 오르세는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채 그 참상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다시 한번 지껄여 봐라. 버겁다고? 이걸 보고도 네놈들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나?】

그가 로난을 돌아보며 말했다. 오만하고, 잔혹하고, 강력한 것이 마룡이라 부르기에 모자람이 없는 모습이었다.

어느새 붕대가 풀리며 드러난 복부는 흉터만 남긴 채 아물어 있었다. 그때 죽어가던 사내가 오르세를 향해 팔을 들어 올렸다.

【···죽어라.】

【음?】

오르세의 눈이 커졌다. 그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으나 사내의 손 앞에는 이미 마법진이 맺혀 있었다.

정체 모를 마법이 발현되려는 순간이었다. 로난이 반사적으로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파아아···! 노을색 빛무리가 번쩍이나 싶더니 죽어가던 사내의 몸이 그의 눈앞까지 끌려왔다.

【무슨···커억!】

사내의 눈이 커졌다. 푹! 로난은 말없이 찌르기를 쏘았다. 심장을 관통당한 사내가 단말마의 비명을 내뱉었다. 이윽고 축 늘어진 그의 몸뚱이가 하수도 아래로 떨어졌다.

풍덩. 물소리와 함께 가라앉은 사내는 두 번 다시 떠오르지 않았다. 어색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오르세를 돌아본 로난이 픽 웃었다.

“그런 것 같은데.”

【네놈···!】

오르세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피를 뒤집어 쓰고 있어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아마 얼굴도 시뻘개졌을 터였다. 암, 이건 쪽팔려 해야 하는 상황이 맞지. 그때 로난에게 업혀 있던 아셀의 입에서 새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흐야아아악! 자, 잡아 먹힌다!”

“시발!”

로난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하마터면 덩달아서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가 손을 풂과 동시에 떨어진 아셀이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윽!”

“얌마, 간 떨어질 뻔했잖아.”

“히익···히이이···로, 로난?”

아셀은 그제야 로난을 돌아보았다. 겁에 잔뜩 질려 있기는 했지만, 안색은 이전보다 훨씬 나아져 있었다.

반응을 보아하니 호수에서 알리브리헤에게 삼켜질 당시에 기억이 머물러 있던 모양이었다. 토끼처럼 두리번거리던 아셀이 울먹거렸다.

“여, 여기가 어디야? 분명 우리는 드래곤에게···히에엑! 시, 시체다!”

【시끄럽군. 그건 뭐지.】

“부끄러운 내 친구.”

로난의 대답을 들은 오르세가 눈살을 찌푸렸다. 심각하던 분위기가 단숨에 풀어져 버렸다.

【그러고 보니 북부에서도 본 적이 있는 것 같군.】

“히엑! 드, 드래곤?!”

오르세와 마주친 아셀이 다시 한번 기겁했다. 문득 옆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세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리자 거기에는 알리브리헤가 서 있었다.

“뭐야. 소란스러워서 급하게 왔는데, 벌써 끝낸 모양이군.”

알리브리헤의 손에는 식량이 그득히 담긴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아무래도 저걸 가지러 갔었던 모양이었다. 현장을 둘러본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휴식할 시간도 제대로 안 줘서야 원···대화는 잘 끝났나?”

“어느 정도는요.”

로난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셀은 황급히 그의 뒤로 숨었고, 오르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마 수치심과 싸우느라 정신이 없을 터였다. 알리브리헤가 말했다.

“따라오게. 아예 놈들의 턱밑에 자리를 잡도록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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