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 용과 함께(2)
#245
하늘탑의 1층은 여타 건축물이 그러하듯 로비의 기능을 담당했다. 광장처럼 드넓은 공간은 온갖 호화스러운 조각상과 그림, 과장 약간 보태서 작은 고래만 한 샹들리에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 화려함은 황궁의 무도회장을 소박한 마을 쉼터 정도로 보이도록 전락시키는 수준이었다. 허나 화장실에서 정체불명의 폭발음이 들려온 지 수십 분이 지난 지금, 세상에서 가장 격식 높은 고탑의 반석은 부랑자들도 얼씬거리지 않을 지옥으로 변모해 있었다.
어디를 보나 시체가 있었다.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자욱한 피비린내가 팽배해 있었다. 보석을 깎아 만든 조각상들은 광산에서 막 캐낸 원석과 다름없는 형태로 박살이 나 있었다.
부를 과시하기 위해 전시되었던 귀금속들은 눅진한 피 웅덩이 속에서 부스러기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샹들리에가 추락한 탓에 언제나 불이 켜져 있던 공간에는 새벽녘인 바깥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어둠이 드리워 있었다.
푹! 칼날이 비늘을 꿰뚫는 소리가 전투의 종막을 알렸다.
【커억...!】
드래곤 프라드비체의 눈이 커졌다. 세로로 길게 좁혀진 동공이 등 뒤를 향했다. 자신의 뒷목을 깊숙이 파고든 장검과 그것을 쥐고 있는 인간 청년이 보였다.
급소를 꿰뚫렸다는 것을 어렵잖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피가 거듭하여 목구멍에 차오르는 탓에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양손으로 자루를 움켜쥐고 있던 청년이 검을 더 깊숙이 밀어 넣었다.
“이제 그만 뒈져라. 드래곤.”
【네, 놈···이.】
“나란소니아인지 뭔지 하는 년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약하군.”
로난의 감상평을 들은 프라드비체가 이를 악물었다. 한 입 거리도 안 되는 인간에게 이런 모욕을 당하게 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당장 씹어 삼켜야 마땅했으나 날개와 사지가 얼음 속에 갇혀 있어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부서지지도, 녹지도 않는 것이 보통 얼음이 아니었다. 저승의 그늘에서 퍼올린 것 같은 한기가 그의 몸을 잠식하고 있었다.
마법사를 먼저 처치했어야 했다는 후회가 뒤늦게 들었지만 이미 때는 늦어 버렸다. 그는 번들거리는 눈알을 굴려 구석에서 벌벌 떨고 있는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너, 빌어먹을 마법사···!】
“히이익!”
아셀은 자신의 존재를 말소시킬 기세로 몸을 움츠렸다. 소심한 행보와는 별개로 얼음의 한기는 더욱 강해지고 있었다.
프라드비체의 목과 입에서 흘러나오는 선혈은 떨어지는 도중에 얼어붙어 버렸다. 챙··· 구슬픈 소리와 함께 바닥에 닿은 핏방울이 산산이 부서졌다.
【저, 주한다.】
다시 로난을 돌아본 프라드비체가 게워내듯 말했다. 그의 눈에서 빛이 꺼졌다. 칼날을 한 번 비틀어도 반응은 돌아오지 않았다. 완전한 죽음을 확인한 로난이 심드렁하게 뱉었다.
“네 저주까지 세 들일 공간은 없어서.”
로난이 팔을 잡아당기자 라만차의 새하얀 검신이 뽑혀 나왔다. 얼음의 한기로 주변 기온이 내려가 있던 탓에 상처 위로 수증기가 모락모락 올라왔다.
아지랑이 같은 예기가 칼날 위로 일렁이고 있었다. 피를 마시고 날카로움을 더하는 특성은 성검과 결합했음에도 여전히 건재했다. 역시 용의 피가 맛있다는 린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엇차.”
로난은 프라드비체의 몸 위에서 뛰어내렸다. 고개를 돌린 그의 시선이 구석에서 바들거리고 있는 아셀에게 향했다.
“죽이는데 아셀. 이제 그냥 얼음 마법사로 전향해도 되겠어.”
“내, 내가 용을 가두다니···.”
“네 마법에 대한 긍지를 가져 인마. 누누히 말하지만 네게 부족한 건 자신감밖에 없어.”
우물거리던 아셀이 고개를 끄덕였다. 드래곤 사냥에 지대한 공을 세운 사람치고는 퍽 소극적인 태도였다.
막 화장실에서 나온 직후 프라드비체와 부하들이 들이닥쳤을 때는 다 죽는 줄만 알았는데, 막상 싸워 보니 생각보다 별 탈 없이 끝났다.
바쥬라를 두고 오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광경을 봤다면 자칭 스승인 겨울의 마녀가 온종일 전음으로 떠들어댔을 테니까. 로난이 말했다.
“어이, 여긴 끝났어.”
“이쪽도 끝났다. 몸풀기도 안 되는군.”
오르세가 몸을 돌렸다. 나선형의 창날 위로 핏물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의 주변에는 구멍 뚫린 반룡과 사역마의 시체가 서른 구도 넘게 널브러져 있었다. 형질이 다른 혈액이 뒤섞이고 응고되는 것을 반복하며 붉은 카페트를 만들고 있었다.
기둥에 가까운 장창 위로는 오르세 특유의 검은 기운이 연기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오르세는 모든 적에게 한 번씩만 창을 휘두르거나 찔렀고, 두 번을 버티는 상대는 아무도 없었다.
‘저건 도대체 뭘로 만든 거야?’
로난은 질린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재료를 뭘 썼는지는 몰라도 무시무시한 내구도와 파괴력이었다. 아마도 저 자식이 프라드비체를 맡았다면 더 일처리가 빨라졌겠지. 그런 생각을 하던 와중이었다.
“괴, 괴, 괴물들···.”
턱수염이 난 보초가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그는 전투가 시작되기 전과 같이 화장실 입구 앞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는 이 지옥의 유일한 생존자였다. 폭발음을 듣고 몰려온 동료들은 눈 깜짝할 새 몰살당했다. 로난과 오르세의 창칼이 허공에 선을 그릴 때마다 육신은 얇은 종이처럼 찢겨나갔다.
강한 건 눈치채고 있었지만 설마 드래곤인 프라드비체마저 살해할 줄이야. 저벅저벅 다가간 로난이 그의 앞에서 멈춰 섰다.
“좋아. 그럼 이야기를 마저 해볼까.”
“뭐, 뭐든지 말하겠습니다. 그러니 목숨만은···!”
그는 눈알을 필사적으로 굴렸지만 역전의 가능성은 보이지 않았다. 로비 전역에 뒤덮인 반투명한 장막이 그의 희망을 삼키고 있었다.
눈앞의 아셀이 전투가 시작될 무렵에 설치해 둔 방음 마법이었다. 싸움을 빙자한 학살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지원군이 오지 않은 이유였다. 로난이 말했다.
“먼저 첫 번째. 내 친구는 어디 있어?”
“아, 암청색 머리의 검사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아마 3층에 계실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층 전체가 라다반카자 님의 레어거든요. 거기서 심문이 진행되고 있을 겁니다.”
“3층이라···그래도 얼마 안 높네.”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마냥 좋아할 수는 없었다. 틀림없이 이런 놈들이 층마다 깔려 있을 테니까.
“네가 생각할 때 바깥으로 올라가는 건 어떨 것 같아.”
“벼, 별로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습니다. 혹시 정상에 가실 때 외부로 이동하셨지 않습니까?”
“그런데.”
“저희 측에서도 그걸 인지하고 있어서 오히려 외부에 더 많은 병력이 배치되었습니다. 아마 들키는 순간 요격당할 겁니다.”
그 말을 들은 로난이 창문 바깥을 내다보았다. 과연 드래곤 수십 마리가 허공을 선회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반룡으로 변한 병사들이 횃불을 들고 탑 근처를 돌아다니거나 제자리에 선 채 경계 근무를 서고 있었다.
“니미.”
로난이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욕지거리가 절로 나오는 풍경이었다. 저 정도면 차라리 안쪽에서 올라가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어쩔 수 없나. 참, 뭐 하나만 더 물어보자.”
“네?”
“이 사달이 났는데 용왕은 어디 가 있는 거냐?”
로난이 재차 질문했다. 처음부터 궁금했는데 바깥을 보니 더욱 의심이 짙어졌다. 이 정도의 비상사태인데 가장 강력한 본인이 나서지 않는 것이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앉아서 손가락만 까닥이는 유형은 아닌 것 같던데.’
더군다나 병력의 배치도 이상했다. 오르세나 자신 같은 침입자를 잡을 생각이 있는 거라면 보다 병력을 분산시키는 것이 옳았다.
헌데 대부분의 드래곤이나 종복은 하늘탑 주변에만 자리해 있었다. 마치 탑에 있는 무언가를 지키려는 것처럼. 딸꾹질하던 보초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 그건 저도 잘···아마도 알현실에 계시지 않을까요?”
“개수작 부리지 마. 친구들이랑 같이 저기에 눕고 싶어?”
로난이 검지를 뻗어 시체들을 가리켰다. 한 싸움 한다고 콧방귀를 뀌던 동료들은 샹들리에 아래 짓뭉개져 형체도 알아보기 힘든 육편으로 변해 있었다.
“저, 정말 모릅니다. 폐하의 개인적인 동선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 있는지라···.”
보초의 얼굴이 백지처럼 질려갔다. 그를 응시하던 로난이 바닥에 침을 뱉었다.
반응을 보아하니 정말로 모르는 듯했다. 아무래도 조금 더 높은 놈들을 잡아서 족쳐야 할 것 같았다. 그 자존심 높은 드래곤들이 순순히 불 지는 모르겠지만.
“에이, 젠장.”
한숨을 내쉰 로난이 검을 휘둘렀다. 스각! 얇은 참격이 보초의 목에 새겨져 있는 각인 위를 스치며 지나갔다.
주인을 형상화한 문양이 바스라지며 사라졌다.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낀 보초가 목덜미를 쥐어 싸맸다.
“허억! 무, 무슨 짓을···!”
“너는 이제 종복도 뭣도 아니라 이거지.”
로난이 툭 내뱉었다. 헛짓거리하지 말라는 의미가 내포된 나름대로의 입막음이었다. 지금 성내에서 돌아다니는 평범한 인간은 일단 공격당하고 볼 가능성이 컸으니 함부로 나대지는 못할 터였다.
“여기서 짜져 있다가 날이 밝으면 꺼져. 혹시라도 괜한 말을 지껄였다간···”
“로, 로난! 위험해!”
로난이 한창 으름장을 놓던 와중이었다. 불현듯 아셀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위협을 감지한 그가 고개를 들었다. 진홍색으로 들끓는 화염의 격류가 자신의 눈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뭔···!”
불길의 속도가 생각보다 빨랐다. 황급히 보초의 목덜미를 움켜쥔 로난이 몸을 물렸다. 그는 완전히 빠져나왔지만, 불행하게도 보초의 하반신은 화염에 삼켜지고 말았다. 모골이 송연해지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크아아아아악! 끄흐아아악!”
“젠장.”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머지않아 불길이 사그라졌다. 보초의 하반신이 있던 자리에는 검게 그을린 자국만이 남아 있었다.
버둥거리던 보초가 축 늘어졌다. 반쪽짜리 시체를 내던진 로난이 화염이 쏘아진 방향을 돌아보았다.
“저건 또 뭐야.”
“크하아아아악!”
집채만한 드레이크 열댓 마리가 거대한 계단을 타고 내려오고 있었다. 입에서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진군하는 공룡들은 살아 움직이는 공성 병기를 연상케 했다.
갑자기 북측에 나타난 넓은 계단은 분명 원래는 존재하지 않았던 구조물이었다. 아마 방금 마법이나 어떤 기이한 방법을 통해 만들어낸 것 같았다. 하긴 저런 장치가 없는 게 더 이상하지.
“놈들을 찾았다! 잡아라!”
누군가 외쳤다. 바로 위층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병력에는 오늘만 세 자릿수를 썰어넘긴 반룡 병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늘하늘한 비단옷을 입은 여인이 가장 큰 드레이크의 등 위에 올라타 있었다.
【오호호! 뭔가 이상해서 내려와 봤는데 역시나 와 있었군. 너희들의 방종도 여기서 끝이다!】
그녀가 손등으로 입을 가리며 웃어젖혔다. 콧소리 섞인 웃음이 시체 가득한 공간에 울려 퍼졌다. 누가 봐도 폴리모프한 드래곤이었다.
“히익! 어, 어떻게!”
아셀이 경악했다. 침묵 역장이 아직 건재한 걸로 봐서는 정말로 감으로 때려 맞혀서 내려온 듯했다. 창에 묻은 피를 털어낸 오르세가 중얼거렸다.
“귀찮군. 잡룡들이 뭐 이리 많은지.”
【약할수록 허세를 부린다더니 딱 그 꼴이구나. 주제도 모르는 마룡아. 너는 이 알란스···캬아아악!】
이름을 밝히려던 여인이 비명을 토해냈다. 콰직! 그녀의 왼팔을 날려 버린 오르세의 창은 뒤편에 있던 드레이크의 정수리까지 관통하고 나서야 반대편 벽면에 처박혔다.
순식간에 불구가 된 그녀가 저주 섞인 말을 뱉어냈다. 혼란에 빠진 적진이 흐트러졌다. 로난은 그 찰나의 빈틈을 놓치지 않고 달려들었다.
적진 깊숙이 파고든 그가 검을 휘둘렀다. 서걱! 여인이 타고 있던 드레이크의 머리가 공중으로 솟구쳤다.
【무, 무슨!】
“크허어엉···.”
머리 없는 거체가 기울었다. 하늘 높이 솟구친 머리통이 휙휙 돌았다. 원을 그리며 뿌려지는 선혈이 안 그래도 유혈이 낭자한 공간에 붉은색을 더했다.
“노, 놈들을 잡아라!”
뒤늦게 정신을 차린 병사들이 투지를 다졌다. 굴러떨어졌던 드래곤 여인이 노성을 터트리며 몸을 일으켰다. 얼굴에 비늘이 돋치기 시작하는 것이 원래 모습으로 돌아갈 생각인 것 같았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로난이 혀를 찼다. 편하기 올라가기는 이미 틀려먹은 것 같았다. 저것들을 치우면 삼 층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사실만이 그나마의 위안이었다.
“이 개새끼. 죽었기만 해 봐라.”
그리 읊조린 로난이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바닥을 뚫고 자라난 아셀의 얼음이 선두에서 달려오던 적을 꿰뚫었다. 쿵! 회전하던 드레이크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짐과 동시에 전투가 재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