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 격돌(2)
#249
【···아드렌.】
레드 드래곤 브니하르도가 입을 열었다. 신들린 것처럼 두서없는 중얼거림이었다.
그녀의 몸은 외우주의 괴물들이 쏟아낸 체액과 내장으로 더럽혀져 있었다. 날개 끄트머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각양각색의 액체는 더위 먹은 소의 침처럼 끈적거렸다.
그럼에도 붉은 비늘은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오물에 뒤덮였음에도 광채를 잃지 않은 것이 꼭 진창에 떨구어진 루비 같았다.
그녀가 나바르도제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증거였다. 옆에 있던 엘프, 이라니엘 레마티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아드렌이라니, 향수병이라도 걸린 겁니까?”
【가고 싶다고는 안 했어. 그냥···뭔가 불길해서 말이지.】
브니하르도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평소에는 전혀 관심이 없던 고향이 왜 갑자기 떠올랐는지 알 수 없었다. 유년기에 잠깐 지냈던 적이 전부인 곳인데.
“정 신경 쓰인다면 시간을 한번 내서 다녀오시지요. 여기는 저희가 막고 있을 테니.”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는군. 이딴 꼴을 보고 어떻게 가?”
브니하르도가 코웃음 쳤다. 그녀의 시선이 전방을 훑었다. 거대하고 반투명한 장막이 깊은 우주와 그들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외우주의 위협으로부터 그들을 지켜주는, 별의 갑옷이었다.
별의 갑옷 안쪽에는 온갖 괴물의 시체가 그득하게 쌓여 있었다. 하나같이 끔찍하게 생겨 먹은 주검은 말 그대로 산더미처럼 많아서, 이동이나 시야 확보에 지장이 생길 정도였다.
【이 짓거리를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군. 아무리 화룡의 부탁이라지만.】
“그래도 기나긴 생을 소모하는 데 제격이지 않습니까. 저는 아직 괜찮군요.”
“로로타루타. 거기 담배 좀 다오.”
주로 드래곤과 엘프로 구성된 불멸자들이 짧은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그들이 있는 장소는 하늘과 하늘의 경계에 세워진 요새 드리무어였다. 외우주의 적을 막아내는 유일한 보루인 이곳에서는, 오늘도 눈 코 뜰새 없이 바쁜 하루가 이어지고 있었다.
별의 갑옷은 나날이 얇아지고 있었다. 균열과 괴물의 수가 점점 늘어서 이제는 최소 두 자릿수의 인원이 경계를 서야 했다. 지금처럼 나바르도제가 잠을 자고 있을 때는 더욱 많은 인원이 투입되었다.
‘그 애송이는 잘 지내려나 모르겠군.’
문득 로난과의 일을 떠올린 브니하르도가 픽 웃었다. 전선에 투입됐으면 서너 사람 몫은 너끈히 할 인간이었는데, 지금은 뭘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시선을 슬쩍 내리자 푸른 구슬처럼 아롱이고 있는 별이 눈에 들어왔다. 모든 불멸자와 필멸자의 고향. 저게 뭐가 그렇게 좋다고 우글우글 몰려오는 건지.
그녀가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 있던 차였다.
“또 온다!”
【이런.】
누군가 외쳤다. 혀를 찬 그녀가 전방을 바라보았다. 우주의 어둠 저 멀리서 검은 해일이 몰려오고 있었다. 쉴새없이 꾸무럭거리는 파도의 정체는 가늠할 수 없이 많은 괴물의 집합체였다.
“수가 상당한데···나바르도제 님을 꺠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됐어. 한 달만에 주무시는 건데, 어머니도 좀 쉬셔야지.】
곳곳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근래 본 것 중 가장 많은 수였다. 어찌어찌 처리할 수는 있겠다만 개고생을 면치 못할 터였다. 이번에는 불을 몇 번이나 뿜어야 할까. 그녀가 괴물들을 보며 견적을 짜던 차였다.
‘···저게 뭐지?’
불현듯 브니하르도의 눈매가 가늘게 좁혀졌다. 반짝거리는 무언가가 검은 해일을 향해 빠르게 접근하고 있었다.
하얗고 긴 꼬리를 그리는 것이 꼭 혜성을 연상케 했다. 단순한 천체 현상 중 하나인가 싶어 무시하던 그녀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뭐?”
십만 걸음은 떨어져 있을 법한 위치임에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괴물의 무리가 뿔뿔이 흩어지고 있었다. 늑대를 피하는 양떼처럼 다급하면서도 일사불란한 움직임이었다.
‘어머니의 불을 맞고도 달아나지 않는 놈들인데?’
보면서도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 의아해하는 것은 그녀만이 아닌 것 같았다.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내로라하는 불멸자들 또한 혜성의 기이함에 사로잡혀 있었다. 콧수염 난 사내 한 명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궁금하군. 내가 가서 보고 오지.”
“잠깐, 뭔지 모르는데 조심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나는 타클라마칸이다. 귀쟁이.”
이라니엘이 제지하자 사내가 툭 내뱉었다. 잠시 멈칫거린 이라니엘이 어깨를 으쓱이며 물러났다. 그는 용기 있는 엘프였지만, 한때 나라만 두 개를 멸망시킨 어스 드래곤을 막기에는 배짱이 조금 모자랐다.
어스 드래곤 타클라마칸이 별의 갑옷 바깥으로 나섰다. 이제는 곳곳에 균열이 뚫려 있어서 딱히 통로를 찾아 이동할 필요가 없었다. 그가 막 본모습으로 폴리모프하려던 와중이었다. 갑자기 시야 한구석이 확 밝아졌다.
“어?”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혜성에서 발산되는 빛이 강해지고 있었다. 섬뜩한 백색은 다른 천체의 빛을 모조리 집어삼키며 새카만 우주에 낮이라는 개념을 형성하고 있었다.
불길함을 느낀 브니하르도가 뭐라 말하려던 차였다. 파아아앙-!! 혜성을 중심으로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원형으로 확장되는 섬광은 호수에 일어나는 파문을 연상케 했다. 빛의 파도에 휩쓸린 괴물들이 갈가리 찢겨 나갔다.
【뭣···!】
단말마의 비명을 토해낼 틈새조차 없었다. 브니하르도가 헛숨을 들이켰다. 확장되던 충격파는 기어코 갑옷 앞까지 밀려왔다. 콰아아앙! 물결치듯 쏘아진 무형의 힘이 별의 갑옷을 강타했다.
【크으윽!】
“빌어먹을,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세상이 흔들렸다. 곳곳에서 당혹성이 터져 나왔다. 압도당한 사람들은 방벽 너머로 나간 동료의 이름을 부르지 못했다. 이윽고 빛이 사그라짐과 동시에, 달이 회전하는 소리마저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고요가 내려앉았다.
처음으로 입을 연 것은 브니하르도였다.
【···타클라마칸.】
하나둘씩 눈을 뜬 사람들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별의 갑옷 바깥으로 나선 타클라마칸은 본모습으로 변한 채 죽어 있었다. 빛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창 한 자루가 그의 가슴 깊숙이 박혀 있었다.
“거인···?”
이라니엘이 읊조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하얀 거인 하나가 그의 거대한 시체를 딛고 서 있었다. 등에 돋아난 두 쌍의 날개는 조각처럼 아름다웠다. 혜성이 뿜던 것과 동일한 백색광이 그의 몸에서 배어 나오고 있었다.
“뭐, 뭐야?!”
“방벽을 지켜라!”
머지않아 혼란이 들불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외우주의 괴물을 다 갈아 놓기는 했지만 결코 아군은 아닌 것 같았다.
불멸자들은 빠르게 전투 태세를 취했다. 정체불명의 거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침묵하던 이라니엘이 입을 열었다.
“···브니하르도.”
【그래.】
브니하르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서로가 할 말을 알 수 있었다. 주춤거리던 불멸자들이 하나둘씩 거인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어머니를 불러라. 당장.】
그녀가 말했다. 거인의 몸이 천천히 공중으로 떠올랐다. 펼쳐진 그의 손바닥 안쪽으로 빛의 입자가 모여들며, 기다란 창 한 자루가 생성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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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둘 것 같으냐!】
오르세가 포효했다.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아드렌이 진동했다. 네 장의 날개를 완전히 펼친 그의 모습은 꼭 하늘에 피어난 꽃 같았다.
“타, 탑 위로 나왔다!”
“어떻게 저기까지!”
탑 주변을 경계하던 드래곤들의 시선이 쏠렸다. 설마 내부에서부터 치고 올라올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들은 서둘러 하늘탑 쪽으로 방향을 돌렸지만, 오르세는 방해 따위를 받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죽여주마!】
허공에서 몸을 비튼 오르세가 수직으로 강하하기 시작했다. 사냥하는 맹금류를 연상케 하는 동작이었다.
로난을 비롯한 세 사람이 이를 악문 채 자세를 낮췄다. 콰아아아! 강렬한 바람이 얼굴 가죽을 뜯어갈 기세로 몰아치고 있었다. 그의 한쪽 입꼬리가 히죽 올라갔다.
“죽이는데···!”
“히야아아아악!”
좆나게 재미없는 상황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아셀의 처절한 비명은 바람에 삼켜지며 소멸해 버렸다.
탑 정상과의 간격은 매우 빠르게 좁혀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용왕이 노기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바닥을 기어라-】
【주제를 모르는, 놈!】
동시에 용왕의 세 머리가 동시에 입을 벌렸다. 쩍 벌어진 아가리 안쪽에 다시금 세 개의 태양이 머금어졌다.
【사라져라.】
세 번째 머리가 선고하듯 내뱉었다. 동시에 태양의 형체가 허물어지며 세 줄기의 광선이 오르세를 향해 쏘아졌다.
다만 이번에는 기습이 아닌지라 회피기동을 시도할 여력이 남아 있었다. 오르세가 방향을 전환할 때마다 세 개의 빛줄기가 그와 일행의 몸을 스치듯이 지나갔다.
휘적거리는 광선이 밤하늘을 밝게 물들이고 있었다. 별의 힘으로 강해진 아지다하카의 브레스 앞에서는 아셀의 얼음 갑옷도 솜사탕이나 마찬가지였다.
【쥐새끼가-】
【따로 없구나!】
하지만 아무리 강력해도 맞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오르세는 종이 한 장 차이로 광선을 모조리 피하고 있었다.
참다 못한 용왕이 전략을 바꿨다. 세 머리의 시선이 한 곳으로 집중되며 광선들이 하나로 더해졌다. 파아아아아!! 수 배로 강렬해진 빛무리가 시야를 뒤덮었다.
“···위험하군.”
슐리펜이 이를 악물었다. 처음에 맞을 뻔했던 것과 같은 기술이었다. 아셀의 비명이 한층 격해졌으나 오르세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더 속도를 높이며 광선을 향해 돌진했다.
“갸아아악! 죽는다!”
“이 미친놈아, 뭘 어쩌려고?!”
보다 못한 로난도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렇게 되면 활로를 개척할 시간도 없었다.
이 정신병자의 등에 탄 것을 한탄하려던 찰나였다. 파아악! 갑자기 검은 기운이 오르세의 몸을 뒤덮나 싶더니 주변 풍경이 달라졌다.
“뭐, 뭐야?!”
“이건···!”
로난의 눈이 커졌다. 브레스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용왕의 거대한 목과 몸통이 시야의 전면을 차지하고 있었다. 문득 위장이 가벼운 경련을 일으켰다. 공간 마법에 휘말린 부작용이었다.
“브, 블링크···!”
머지않아 상황을 파악한 아셀이 경악했다. 오르세는 그들과 통째로 짧은 공간 이동을 한 것이었다. 세상을 삼킬 기세로 쏟아지는 빛의 급류가 머리 위를 지나가고 있었다.
【더러운 술수를···!】
세 번째 머리가 다급하게 시선을 내렸다. 하지만 오르세는 이미 그의 턱밑까지 다다른 뒤였다.
아셀이 더듬거리며 주문을 외우자 두꺼운 방어막이 탑승자들을 감쌌다. 콰아아아앙! 마침내 당도한 오르세가 급강하한 속력 그대로 용왕과 충돌했다.
【커억!!】
용왕의 거체가 크게 휘청거렸다. 세 개의 머리가 동시에 입에서 피를 토했다. 두 드래곤의 덩치는 사람과 코끼리 정도로 차이가 났지만, 오르세의 괴력은 체급의 격차마저 무시하고 있었다.
“끄아아아아악!”
일행이 바라보는 세상이 뒤집혔다. 미리 이를 악물고 있던 덕에 혀를 씹지 않을 수 있었다. 다섯 겹의 방어막 중 세 개가 충돌과 동시에 박살나 버렸다. 로난이 외쳤다.
“슐리펜, 뛰어내려!”
슐리펜은 대답 없이 그렇게 했다. 로난도 곧장 그 뒤를 따랐다. 바닥과는 10m 정도의 간격이 있었지만 이 정도는 괜찮았다.
“아셀, 부탁한다!”
“우웁···으, 응!”
아셀이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두 사람과는 달리 오르세의 등 위에서 뛰어내리지 않았다. 되려 자신의 신발과 오르세의 목을 얼음으로 접합시키며 결합력을 더했다.
용왕과 격돌하기 전에 미리 세웠던 작전이었다. 오르세가 강한 것은 틀림없었지만 아무래도 용왕은 버거운 상대였다. 아셀이 보조를 맡는다면 그나마 승산이 생길 터였다.
【크아아아아!!】
【커흐, 감히 짐에게-】
【피를 보게 하다니!】
여섯 장의 날개와 네 개의 머리가 덩굴처럼 뒤엉키고 있었다. 오르세는 들이박은 자세 그대로 오른쪽에 자라난 목을 물어뜯고 있었다. 처음에 주춤거리던 용왕도 어느새 균형을 잡고 싸움에 임하고 있었다.
두 거룡의 싸움은 이미 칼잡이 나부랭이들이 관여할 영역이 아니었다. 타닥! 로난과 슐리펜은 거의 동시에 바닥에 착지했다. 하얀 옷을 입은 네뷸라 클라지에의 신도들이 그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이 불경한 놈들이 기어코···!”
“유언장은 써 두고 온 거겠지.”
그들은 하나같이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성을 내고 있었다. 의식을 마친다는 목적은 달성했지만, 일을 방해받았다는 사실 자체에서 분노를 느끼는 듯했다.
로난과 슐리펜이 자연스레 서로를 등지고 섰다. 로난이 말했다.
“이번에는 낙오하지 마라.”
“내가 할 소리다.”
슐리펜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이미 뽑혀 나온 검을 타고 바람이 휘감기고 있었다. 코웃음을 친 로난이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칼잡이는 칼잡이 나름대로 할 일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