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 격돌(3)
#250
【이 오만방자한 놈이-】
【썩 떨어지지 못할까!】
용왕이 외쳤다. 품 깊숙이 파고든 오르세는 아직도 왼쪽 목을 문 채 늘어지고 있었다. 드래곤보다는 사나운 맹견을 연상케 하는 동작에서 품위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워낙에 비늘이 단단하여 속살까지 이빨이 닿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영 번거로웠다. 브레스를 뿜으면 간단히 떨쳐낼 수 있었으나, 날개와 팔다리가 뒤엉켜 있어서 여건이 마땅치 않았다.
【쓰러져라!】
그때 오르세가 왼팔을 쳐들었다. 시커먼 손아귀가 불에 달군 것처럼 붉게 물들었다. 콰직! 짧은 호를 그리며 날아든 손이 용왕의 가슴을 내리찍었다.
【커헉!】
방어하려 했지만 한발 늦고 말았다. 정확히 비늘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간 손톱이 내상을 입혔다. 다시금 용왕의 세 입에서 핏물이 터져 나왔다.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거체가 기울기 시작했다. 뒷걸음질치던 그는 정상의 가장자리까지 물러서게 되었다. 곧이어 오르세의 등에 올라타 있던 아셀이 주문을 영창했다.
“디, 딥 프로즌!”
그의 손끝에서 푸르스름한 마나의 응집체가 쏘아졌다. 파직! 한기를 담은 덩어리는 정확히 오르세의 손톱이 파고든 자리에 적중했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용왕이 노성을 터트렸다.
【거기 미물아. 짐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
“히, 히이이익!”
아셀이 기겁하며 오르세의 등가시를 움켜쥐었다. 그 순간 용왕의 몸 곳곳에서 거대한 얼음 가시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얼음이 빠르게 자라나는 광경은 도로변의 포석을 비집고 싹을 틔우는 잡초를 연상케 했다.
【크윽···?!】
용왕의 얼굴들이 굳어졌다. 몸이 빠르게 무거워지고 있었다. 목의 상처를 통해 스며든 냉기가 전신으로 번져나가고 있었다.
여섯 개의 눈동자가 아셀에게 고정되었다. 믿을 수 없었다. 설마 저 조그만 인간이 발현한 마법이 자신에게 통했단 말인가. 용왕이 혼란에 빠져 있던 와중이었다.
【떨어져라!】
기회를 포착한 오르세가 날개를 펼치며 그를 밀쳤다. 쾅! 위태롭게 가장자리를 밟고 있던 용왕이 뒤로 밀려났다. 찰나 균형을 잃어버린 그의 발이 탑의 가장자리를 벗어났다.
【이런···!】
【잘했다. 간다!】
용왕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호탕하게 웃어젖힌 오르세가 기운을 끌어모았다. 한순간 검게 물든 그의 몸이 인간으로 변모했다.
푹! 검은 남자가 된 오르세가 가슴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손잡이를 잃은 아셀이 비명을 내질렀다.
“흐야아아악! 끄아아악!”
아셀은 오르세의 옆구리에 발을 붙인 채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그는 로난이나 슐리펜처럼 자신을 다정하게 챙겨 주지는 않았다. 본모습일 때 얼음으로 접합시켜 놓은 신발이 아셀의 유일한 생명줄이었다.
촤악! 그때 오르세가 가슴에 집어넣었던 손을 뽑았다. 붉게 물든 오른손에는 나선형의 장창이 쥐어져 있었다.
본래 나바르도제를 꺾기 위해 만든 비장의 무기였다. 도움닫기를 한 오르세가 탑의 정상을 박차며 도약했다. 창날로 용왕의 가슴을 겨눈 그가 급강하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꿰뚫어서, 나바르도제의 행방을 토해내게 해 주마!】
오르세가 외쳤다. 나선형의 장창은 그 특유의 검은 기운과 주변의 마나를 빨아들이며 점멸하고 있었다.
본능적인 불길함을 감지한 용왕이 눈살을 찌푸렸다. 뭘로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기에 맞으면 안 될것 같았다.
【···건방지기는.】
보다 못한 세 번째 머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몸의 통제권을 가져간 그가 드래곤 하트에 고여 있던 열기를 온몸으로 퍼트렸다. 콰장창! 움직임을 구속하고 있던 얼음이 모조리 박살 나며 무너져 내렸다.
“저, 저걸 풀다니!’
아셀이 경악했다. 용왕의 뜨거운 피는 몸속을 타고 흐르던 냉기마저 한순간에 녹여 버렸다. 파아아앙-! 동시에 접혀 있던 한 쌍의 날개가 폭발하듯 펼쳐졌다.
【크윽!】
금빛 비늘로 뒤덮인 날개는 한 눈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했다. 콰아앙! 풍압에 튕겨 나간 오르세가 하늘탑의 외벽에 처박혔다.
얼음을 떨쳐낸 용왕이 날갯짓했다. 보통 덩치가 큰 새는 바람과 지형의 힘을 빌어 날아오르지만, 아드렌의 군주는 그런 잡스러운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광풍과 함께 솟구친 그의 몸은 단 한 번 퍼덕이는 것으로 하늘탑의 상공에 다다랐다.
【크흐흐···잡룡들의 군주가, 노욕을 부리는구나.】
고개를 든 오르세가 즐겁다는 듯이 클클거렸다. 간신히 쥐포가 되는 것을 면한 아셀이 울먹거리고 있었다. 다시금 짙은 그림자가 그의 몸을 타고 올라왔다. 순식간에 본모습으로 돌아간 오르세가 포효를 내지르며 비상했다.
【크아아아!!】
공중전이 시작되었다. 두 거룡은 하늘탑을 넘어 저 구름 위까지 상승했다. 먼저 고도에서 우위를 점한 아지다하카가 브레스를 뿜었다. 콰아아아! 광선 세 줄기가 오르세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그가 탑을 중심으로 선회하며 회피기동을 시도하자, 광선도 그의 잔상을 뒤따랐다.
“크에에에엑!”
“폐, 폐하!”
무시무시한 공격임이 틀림없었지만, 문제가 하나 있다면 브레스의 사거리가 너무 길다는 점이었다. 왕을 돕기 위해 오다가 휘말린 드래곤들이 추락하고 있었다. 별의 힘을 받아 강해진 용왕의 브레스는 동족의 비늘조차 흔적도 없이 지워 버리고 있었다.
【폐하!】
별안간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아셀이 눈썹을 치켜떴다. 어디서 많이 본 드래곤 한 마리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나, 나란소니아?”
온몸이 은색 비늘로 뒤덮인 드래곤은 달빛을 깎아 만든 세공품처럼 아름다웠다. 틀림없이 자신과 친구들을 들이받았던 그 용이었다.
로난에게 패배하고 마음이 꺾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건가? 그녀는 오르세 이상 가는 곡예비행을 펼치며 광선을 회피했다. 순식간에 당도한 나란소니아가 오르세와 용왕 사이를 가로막았다.
【비켜라, 강철의 창부야. 감히 나를 막아설 생각이라면···!】
난데없는 개입에 오르세가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당장에라도 나란소니아를 찢어 죽일 기세였다. 붉은 눈동자가 잉걸불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오르세를 무시하고 용왕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녀가 날개를 활짝 펼치자 강철 가시 수십 개가 용왕을 향해 쏘아졌다.
【불충을 용서하십시오!】
카가강! 허나 가시들은 단 하나도 용왕의 비늘을 뚫지 못한 채 튕겨나갔다. 난데없는 하극상을 당한 용왕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나란소니아,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지?】
화가 나기보다는 당황스러웠다. 수많은 신하 중에서도 나란소니아는 의미가 각별한 충신이었다.
그런 그녀가 저 마룡의 편에 서서 자신을 공격하다니. 스멀거리며 올라온 분노가 눈앞을 흐리던 차였다. 나란소니아가 말을 이었다.
【폐하, 부디 눈을 뜨십시오! 사악한 이들의 비술이 폐하의 몸을 좀먹고 있습니다!】
【···뭐라?】
용왕이 멈칫거렸다. 뒤늦게 그를 쳐다본 아셀이 헛숨을 들이켰다. 본래 황금빛으로 번쩍이던 그의 상반신이 희멀건한 백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꼭 새로 돋아난 목이 뿌리를 내리는 것 같았다. 몸의 지배권을 뺏으려는 것처럼. 세 번째 머리가 으르렁거렸다.
【헛소리다. 배신할 생각이라면, 함께 죽여 주마.】
【잠깐-】
【기다려···】
나머지 두 머리가 뭐라 말하려던 차였다. 제멋대로 입을 벌린 세 번째 머리가 광선을 토해냈다. 콰아아아아! 하늘이 밝게 물들었다. 닿은 것을 말소시키는 백색광이 나란소니아를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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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긴 저기대로 바쁘네.”
위쪽을 슬쩍 올려다본 로난이 고개를 내저었다. 두터운 구름층이 뇌광을 머금은 것처럼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한순간 벼락이 내리친 것처럼 밝아졌던 사위가 다시 어둠에 뒤덮였다.
오르세와 떨어진 지 십 분 정도가 지났다. 저 하늘 위에서는 거룡들의 표효가 산발적으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뭘 어떻게 싸우고 있는지는 몰라도, 전투의 여파만으로 하늘탑이 흔들릴 정도면 말을 다 한 것 같았다. 가끔씩 구름을 찢고 떨어지는 용왕의 브레스가 자신의 머리 위로만 떨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음.”
슐리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몸은 새롭게 덧씌워진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주춤거리며 물러난 신도 한 명이 납득이 안 간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이, 이런 빌어먹을···도대체 어떻게 가호를···!”
그는 자상을 입은 옆구리를 손바닥으로 틀어막고 있었다. 붉은 내장이 손가락 틈새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피비린내가 자욱했다. 하늘탑의 정상은 네뷸라 클라지에의 시체로 뒤덮여 있었다. 열여섯 구의 시체 중에서 두 구는 주교였고, 세 구는 뤼코포스였다.
그들은 언제나처럼 방어에 전념하지 않고 달려들었다가 피를 보고 말았다. 무적의 방어를 자랑하던 별의 가호는 로난의 칼부림 앞에서 종잇장처럼 찢어져 버렸다.
방어막이 사라진 자리로 파고든 슐리펜의 폭풍검은 그들의 몸을 난도질해 놓았다. 칼을 한 바퀴 돌려 잡은 로난이 훈계하듯 말했다.
“그런 잡기술에 의존할 생각을 하니까 이 사달이 나지. 마지막으로 훈련한 날이 기억나기는 해?”
“빌어먹을, 무슨 수작을 부린 거냐는 말이다!”
그때 과다출혈로 휘청거리던 사내가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발놀림은 엉망이었고, 검을 쥔 손도 벌벌 떨리고 있었다.
“병신.”
저런 게 지부장 급이라니 한심할 따름이었다. 문득 바이디안 산맥에서 만났던 엘프 브리기아가 머릿속을 스쳤다. 돌이켜 보면 그 귀쟁이는 정말로 쓸만했는데.
한숨을 내쉰 로난이 앞으로 치고 나갔다. 잠시 겹쳤던 두 사람의 신형이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퍼석-! 일곱 토막으로 분해된 사내의 시체가 바닥에 무너져 내렸다.
“허어억···.”
“다음.”
곳곳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로난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눈이 마주친 신도들이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새하얗게 질린 그들의 면면에서 으름장을 놓던 이전의 기세는 찾아볼 수 없었다.
“덤벼, 겁쟁이들아. 불알이 쪼그라들어서 싸울 생각도 못 하겠냐?”
신도들은 모멸감에 이를 악물면서도 앞으로 나서지는 못하고 있었다. 이 정도로 승기를 잡았으면 슬슬 시작해도 될 것 같았다. 검 끝으로 그들을 겨눈 로난이 입을 열었다.
“좋아. 그럼 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주지. 첫 번째 별이 내려오지 못하게 할 방법을 말해.”
“네, 네가 어떻게 그걸···!”
첫 번째 별이라는 말을 들은 신도들의 눈이 튀어나올듯이 커졌다. 물론 로난에게는 대답할 이유가 없었기에 그는 검을 쳐든 채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이미 의식은 끝난 것 같았지만, 아직 막을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지그런 막연한 희망에라도 걸어 봐야 하는 시기였다.
저벅. 슐리펜과 그가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네뷸라 클라지에의 신도들이 한 걸음을 물러났다. 결국 가장자리까지 물러난 그들의 얼굴에 절망이 깃들던 차였다. 로난의 뒤쪽에서 웬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지?”
생소하면서도 섬뜩한 목소리였다. 한순간 소름이 전신을 타고 올라왔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로난의 얼굴이 석상처럼 굳어졌다.
자신보다 머리 하나가 더 있는 노인이 눈앞에서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가슴께까지 흘러내리는 수염은 이마에 한 바퀴 돌려 감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뭔, 씨발···”
로난의 눈이 커졌다. 언제 여기까지 접근했는지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그의 어깨 위로는 반짝이는 마나가 봉화처럼 솟구치고 있었다. 카인과 아벨을 제외하면 가장 강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규모였다.
“흐음, 좋은 검이군.”
로난이 뭐라 말하려던 차였다. 갑자기 노인이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그의 왼손에는 어디서 많이 본 검 한 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그랑시아의 문양이 새겨진 장검은 틀림없이 슐리펜의 것이었다.
“어떻게···!”
슐리펜의 미간이 좁혀졌다. 방금까지 손에 쥐어져 있던 검이 보이지 않았다. 불현듯 섬뜩한 감각이 로난의 뒷덜미를 스치며 지나갔다.
“빌어먹을!”
본능적으로 위기를 감지한 로난이 황급히 몸을 뒤로 물렸다. 촤아아악! 동시에 그의 어깻죽지 위로 붉은 피가 튀어 올랐다. 셔츠 아래로 드러난 피부에 예리한 자상이 새겨져 있었다.
“감이 좋구나.”
노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걸 피했냐고 물어보는 듯했다. 로난이 이를 악물었다. 조금만 더 늦게 몸을 뺐다면 팔이 잘릴 뻔했다.
“이런, 로난.”
슐리펜이 다급하게 손을 뻗었다. 노인의 손에 쥐어져 있던 검이 바람의 형태로 화하며 사라졌다. 다시금 슐리펜의 손에 쥐어진 칼자루의 모습에, 그가 헛웃음 쳤다.
“허. 신기한 능력이군.”
“니미, 요술쟁이라도 되냐?”
바닥에 침을 뱉은 로난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한순간에 불과했지만 동작을 놓쳤다. 슐리펜은 빠르게 칼을 쳐들며 전투 태세를 취했다. 두 사람을 번갈아서 쳐다보던 노인이 입을 열었다.
“네뷸라 클라지에의 대주교 알론 몬드레이라네. 자네들의 방종도 여기서 끝내도록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