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9. 격돌(10)
#259
【물러서지 마!】
종말을 앞둔 아드렌의 상공에서 두 세력이 격돌했다. 드래곤과 빛 거인 간의 전투는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든 난전으로 진화하고 있었다.
드래곤들의 이빨이 다물리고, 발톱이 휘둘러질 때마다 거인들의 육신이 찢겨 나가고 있었다.
【최대한 많이 없애야 한다! 숨결을 쏟아 부어라!】
“고오오옥!”
각종 마법이나 드래곤의 상징인 브레스도 아낌없이 퍼부어지고 있었다. 쩍 벌어진 아가리 안쪽에서 쏟아져 나오는 원소의 폭풍은 최강의 종족에 걸맞은 파괴력을 자랑했다.
그럼에도 빛 거인의 군세는 멈추지 않고 달려들고 있었다. 한 개체의 강함은 드래곤 측이 압도적이었지만, 거인들의 머릿수는 결코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콰아아아! 마하카디아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화염의 파도가 거인들을 휩쓸었다. 불길에 덮쳐진 거인들이 눈이 녹듯 사라져 버렸다.
“그오오옥! 고옥!”
【버러지들, 재 한 줌도 남기지 않고 태워 주마!】
마하카디아가 외쳤다. 달처럼 하얀 비늘을 타고난 그녀는 이번 전투를 개시한 선봉대 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구름처럼 바글거리는 거인들의 무리를 헤집으며 자신의 소임을 다하고 있었다.
가공할 속도 덕분에 마하카디아는 적진 한복판을 제 집처럼 돌아다닐 수 있었다. 푹! 이마에 난 뿔로 다섯 명의 거인을 단번에 꿰뚫어 버린 그녀가 작게 읊조렸다.
【나란소니아. 이번에는 내가 이겼어.】
그녀는 수습 조로 빠진 라이벌을 떠올리며 조소를 머금었다. 아드렌에서 두 번째로 빠른 드래곤인 마하카디아는 언제나 가장 빠른 용인 나란소니아를 질투하고 있었다.
헌데 오늘 새벽, 가장 빠른 용이 되고 싶다는 그녀의 소원이 갑자기 이루어졌다. 나란소니아의 잘려나간 왼쪽 날개를 떠올린 그녀가 이를 악물었다.
‘멍청한 년. 하필이면 날개를 당할 게 뭐야.’
나란소니아는 이제 날지 못하게 되었다. 그것도 자신이 모시던 용왕에게 당해서.
한동안 가장 빠른 드래곤의 자리는 마하카디아의 차지일 터였지만, 이상하게도 그 사실이 썩 기쁘지 않았다. 갑자기 영문 모를 울분이 치밀어 올랐다. 그녀가 엿 같은 기분을 해소하기 위해 불을 뿜으려던 차였다.
【커억···!】
불현듯 아찔한 통증이 마하카디아를 덮쳤다.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비늘 사이를 파고드는 것이 느껴졌다. 황급히 고개를 돌리자, 자신의 등에 매달려 있는 거인이 눈에 들어왔다.
“고오.”
이목구비 없는 얼굴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전해지지 않았다. 거인은 빛으로 이루어진 단검을 그녀의 등허리에 박아 넣은 채 기계적으로 비틀어 대고 있었다.
칼날이 움직일 때마다 피가 튀었다.으득. 부러질 듯이 이를 악문 그녀가 노성을 터트렸다.
【크으으···감히!】
콰직! 마하카디아는 곧바로 기다란 목을 뻗어 거인의 머리를 통째로 물어뜯어 버렸다. 빛으로 이루어진 신체가 연기처럼 흩어졌으나 상처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허어, 허어억···!】
마하카디아가 휘청거렸다. 울걱이며 솟구치는 피의 양이 심상치 않았다. 주변에 있던 거인들이 상어떼처럼 몰려들었다. 속도가 늦춰진데다 적진 한복판에 있던 그녀는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못한 채 포위당하고 말았다.
【······!】
수십 명의 거인이 그녀의 몸에 들러붙었다. 곰팡이로 뒤덮인 빵 꼴이 된 마하카디아가 결국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흐려져 가는 의식 속에서 그녀는 생각했다. 세 번째로 빠른 건 누굴까?
거인들은 추락하는 와중에도 칼질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지면과 접촉하는 순간까지 분수 같은 피를 전신에서 쏟아냈다. 쿵. 부드러운 충돌음이 울려 퍼졌다. 시체에 들러붙어 있던 거인들이 다시 날아올랐다.
【이놈들!】
그 위로 어느 그린 드래곤이 토해낸 산성액이 쏟아져 내렸다. 촤아아아-! 부식성 강우에 직격당한 거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소멸했다.
마하카디아의 주검이 돌이킬 수 없이 훼손되었으나 지금은 누구도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미 곳곳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으니까. 한 드래곤의 죽음은 하나의 역사가 저무는 것을 의미했지만, 지금은 그 공공연한 비극에 안타까워할 시간조차 없었다.
그때 진형을 갖추며 날아온 거인들이 그린 드래곤의 배와 모가지에 창을 찔러 넣었다. 마지막 기력을 다해 산성액을 토해낸 드래곤이 피를 토하며 소리쳤다.
【멈추지 마라···! 커헉, 놈들을 죽이는 것에만 집중···】
촤아악! 추가적으로 날아온 거인들이 그의 머리를 잘라냈다. 또 하나의 역사가 저물었으나 이번에도 역시 애도는 없었다. 누군가 발동한 전격 마법이 그 자리에 있던 거인들을 모조리 터트려 버렸을 뿐.
비명과 포효가 하늘을 메웠다. 싸움에서 기력을 다한 드래곤들이 추락하고 있었다. 빛 거인의 군세가 소멸하고 있었다. 그 참상을 지켜보던 두아루가 작게 중얼거렸다.
『···참으로 어리석구나.』
저토록 발버둥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도시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고, 그들의 자긍심이자 정신적 지주인 하늘탑마저 처참하게 무너져 버렸다.
의미 없이 죽은 드래곤과 종복의 수는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이쯤 되면 저항 따위는 부질없다는 사실이 뼛속까지 각인되었을 만도 하거늘.
『구원을.』
쓸데없는 감상이 길었다. 시선을 부유석으로 돌린 두아루가 다시 창을 움켜쥐었다. 그는 전투가 벌어지는 와중에도 계속 목표물을 향해 창을 투척하고 있었다.
이제 정말 머지않았다. 아드렌은 이미 상당한 속도로 떨어지고 있었다. 점점 멀어지는 땅이 그것을 방증하고 있었다.
부유석을 감싸고 있던 방어 마법은 파괴된 지 오래였다. 아드렌 전역에서 올라온 희끄무레한 기운이 그의 몸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자신에게 죽은 이들의 영혼이었다.
그는 용의 도시를 추락시킨 뒤 멸망시킬 행선지를 생각하며 팔을 쳐들었다. 아마도 이것이 마지막 일격이 될 터였다. 창이 그의 손을 떠나려는 순간이었다.
【크아아아아아-!!!】
어디선가 천 개의 벼락이 내리치는 듯한 포효가 울려 퍼졌다.
****
별하늘이 멀어지고 있었다. 쭉정이 같은 구름이 도시의 경계 너머로 솟구치고 있었다. 서서히 가라앉던 아드렌은 이제 본격적으로 추락이라 부를 만한 속도로 떨어지고 있었다.
“커억! 컥!”
나란소니아가 기침했다. 그녀의 어깨가 들썩거릴 때마다 등에 새겨진 상처에서 피가 번져 나오고 있었다. 날개가 뜯겨나간 자리. 나란소니아의 옆에서 이동하던 아셀이 걱정스레 물었다.
“괘, 괜찮아요?”
“후우...그래. 문제없다.”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낸 나란소니아가 끄덕거렸다. 얼굴빛이 창백한 것이 어디로 보나 문제가 있었지만 아셀은 차마 지적하지 못했다. 상황이 워낙에 급박했기 때문에.
“추락을 막을 수 없다면 최대한 많은 수의 인원을 구해야 한다. 서두르자.”
“그, 그건 그렇지만···.”
아셀이 더듬거렸다. 나란소니아의 뒤로는 수습조에 배치된 드래곤들이 분주히 따라오고 있었다. 그들의 파리한 안색은 나란소니아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모두가 마나를 무리해서 소모한 탓이었다.
“내가···내가 힘만 더 있었어도.”
아셀이 눈을 질끈 감은 채 중얼거렸다. 수습조는 아드렌의 추락을 막는 것에 실패했다.
최대한 접근해서 부유석에 마나를 주입하고, 방어 마법도 걸어 봤지만 두아루가 던지는 창 한 방에 모든 것이 헛수고로 돌아가고 말았다.
예상했던 결과였지만 막상 현실이 되니 암담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좌절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그들은 다급히 전략을 바꿔서 시가지였던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어차피 도시는 지키지 못하게 되었으니 인명 구조라도 최대한 해 보자는 취지였다. 지금까지 죽인 빛 거인의 숫자만 천이 넘어갔다. 나란소니아가 부하 드래곤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몇 명이나 구할 수 있겠나.”
“기껏해야 세 자릿수일 겁니다. 추락하는 속도가 생각보다 빨라요.”
“···젠장.”
나란소니아가 입술을 짓씹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아무리 노력해 봐도 시민 대부분은 용의 도시와 함께 수장될 터였다.
아드렌에 있는 모두를 나르기에 수습조의 인원은 너무나도 부족했다. 잠시 침묵하던 나란소니아가 입을 열었다.
“할 수 있는 만큼 한다. 정박한 비공정을 모조리 꺼내고, 생존자들을 데려오도록. 세 명씩 인원을 나눠서 움직여라.”
“넵!”
폴리모프를 해제한 드래곤들의 몸이 부풀었다. 땅을 박차며 날아오른 그들은 나란소니아의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흩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이동을 재개했다. 발걸음을 재촉하던 나란소니아가 입을 열었다.
“우습지 않나.”
“네, 네에?”
“드래곤이라는 종족이 말이다. 평소에는 그토록 잘난 척을 한 주제에 충성을 맹세한 종복들조차 구하지 못하고 있지 않느냐.”
나란소니아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머뭇거리던 아셀이 두아루가 있던 방향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건···어느 종족이라 같을 거라 생각해요. 저런 존재 앞에서는···.”
하늘 위에서는 여전히 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형용할 수 없는 괴성이 섬 전체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빛 거인과 드래곤들이 뒤엉키며 지옥을 자아내고 있었다.
두아루는 손 쓸 도리가 없는 천재지변에 가까운 존재였다. 아셀의 말을 들은 나란소니아가 천천히 주억거렸다.
“그래. 네 말대로다. 감당할 수 없는 미증유의 재난 앞에서는, 우리도 필멸자와 다름없어지는 거지. 뼛속에 새겨져 있는 오만함을 긁어냈다면 조금 더 상황이 나아졌을까? 이제는···그것도 잘 모르겠군.”
“나란소니아 님···.”
“잡설이 길었군. 걱정하지 마라, 너와 친구들은 내 긍지를 걸고 돌려보내 줄 테니까.”
나란소니아가 힘겹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대화가 끝났다.
그들이 어색한 적막 속에서 걸음을 옮기던 와중이었다. 캉. 별안간 발아래로 금속성이 들려왔다. 지면의 감촉이 달라진 것을 눈치챈 아셀이 시선을 내렸다.
“이건···?”
아셀이 눈썹을 치켜떴다. 풀과 흙은 사라지고 금속으로 이루어진 바닥이 깔려 있었다. 그것이 거대한 원판이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굉장히 이질적인 느낌을 주는 원판이었다. 필레온 대광장의 절반 정도 되는 면적의 판에는 생채기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나란소니아가 말했다.
“하늘탑의 정상에 있던 반석이군. 여기까지 날아온 건가.”
“반석이요? 아···!”
아셀이 작게 탄성했다. 뭔가 했더니 용왕이 올라가서 의식을 치르던 원판이었다. 설마 이 커다란 것이 떨어져 나왔을 줄이야.
시커먼 표면 위로는 굉장히 복잡하고 기하학적인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용왕의 의식을 위한 술식인 듯했다. 천천히 마법진을 훑어보던 아셀의 눈이 커졌다.
“잠깐···.”
어떤 발상이 그의 뇌리를 스치며 지나갔다. 굉장히 위험하고 무모했지만 시도해볼 가치는 충분히 있었다. 갑자기 앞으로 달려나간 아셀이 마법진을 손으로 더듬어 가며 살피기 시작했다.
“···뭘 하는 거지?”
“잠시만요. 이건···분명히···.”
나란소니아가 되물었으나 아셀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늘이 내린 집중력은 주변에서 들려오는 모든 소음을 자체적으로 차단하고 있었다. 좁아진 그의 시야에서는 거대한 마법진만이, 그 복잡한 문양과 수식의 구조만이 남아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가능해···흐름을 모아서···촉매 삼는다면···.”
“마법사, 지금 도대체 뭐 하자는···”
나란소니아가 그를 재촉하려던 차였다. 갑자기 몸을 일으킨 아셀이 그녀의 소매를 붙잡았다.
“도와주세요.”
“뭐라?”
부탁하는 그는 말을 더듬지 않았다. 나란소니아의 미간이 좁혀졌다. 빠르게 혼잣말을 웅얼거리던 아셀이 입을 열었다.
“···어쩌면 막을 수 있을지도 몰라요. 추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