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 수습(2)
#262
아셀은 눈을 감은 채 별을 보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종잡을 수 없었다. 아드렌의 추락을 막기 위해 마법진을 발동시켰다는 사실만이 어렴풋이 기억났다. 몸은 가만히 있었지만 정신은 그렇지 않았다.
그의 영혼은 별과 먼지, 그림자의 폭풍 속에 내던져진 채 요동치고 있었다. 성운의 기묘한 색채가 피부를 핥고, 소용돌이치는 별무리가 알아듣지 못할 언어를 귓가에다 속삭이고 있었다.
‘끄아아···아악···!’
아셀은 온몸을 비틀며 비명을 질러댔다. 허나 그의 목소리는 입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하고 머릿속에서만 울려 퍼졌다. 뇌를 걸레로 쥐어짜내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의식이 본 적 없는 세계 깊숙이 침몰하던 와중이었다.
『두아루가 소멸했다.』
『신체를 구성하던 영혼체가 전부 사라졌다.』
어떤 이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참기 힘들 정도로 큰 목소리는 고막이 아닌 영혼으로 곧바로 전해져 오고 있었다. 귀를 막고 싶어도 막을 수 없었기에 아셀은 그들의 대화에 강제로 집중하게 되었다.
『그럴 리가. 바로 추격하겠다.』
『신호가 닿지 않는다. 저쪽에서 문을 열기 전까지는 불가능해.』
영혼체? 신호? 이해하기 힘든 단어의 연속에 혼란스러워하던 와중이었다. 찰나 마구잡이로 요동치던 시야가 고정됐다.
아셀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별 가득한 어둠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새하얀 대지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여, 여긴?’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끝없이 펼쳐진 풍경 속에서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지면은 온통 소름 끼치는 흰색을 띠는 흙과 돌, 같은 색의 풀로 뒤덮여 있었다.
바람은 불었지만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으스스한 한풍이 불어올 때마다 풀잎이 일제히 흔들렸다. 지상과 마찬가지로 백색 구름이 흐르는 하늘은 석회를 넓게 펴 바른 것 같았다.
이따끔 벼락으로 추정되는 섬광이 일어날 때마다, 구름의 표면 위로 아드렌에서 본 것과 같은 마법진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문득 하늘을 둘러보던 아셀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저건···!’
두아루를 닮은 거인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최소 네 장, 많게는 여덟 장의 날개가 그들의 널찍한 등 위에서 퍼덕이고 있었다. 거인들은 백색 하늘을 표류하듯 돌아다니거나, 마법진이 나타날 때마다 그 안쪽으로 사라지거나 나오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보통은 한 명씩 출입했지만, 동시에 여러 명이 들어가고 나오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저건 어딘가로 이어진 문인 걸까? 두아루가 그랬던 것처럼 또 다른 세상을 파괴하러 가는 걸까?
굳어버린 아셀이 그 기묘한 광경을 감상하던 와중이었다. 제자리에서 날갯짓하던 거인 하나가 입을 열었다.
『누군가 우리를 엿보고 있다.』
『지금 뭐라고 했나, 아하유테?』
『기다려라.』
천천히 고개를 돌린 거인이 아셀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이 커졌다. 틀림없이 외부로의 신호 송출을 차단했는데 어떻게 기척을 감지한 건지 알 수 없었다.
물론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두리번거리던 거인이 천천히 아셀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목구비 뚜렷한 얼굴이 가까워질 때마다 아셀의 숨이 점점 가빠졌다.
『여기 어디쯤인데.』
거인이 뻗은 손아귀가 얼굴을 덮으려던 찰나였다. 콰지직! 갑자기 시야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거인이 빠르게 낚아채는 손동작을 해 보았지만, 아셀의 의식은 이미 그들의 영역 밖으로 튕겨 나간 뒤였다.
‘아아아아악!’
아셀이 소리 없이 절규했다. 거인들의 영역에서 벗어난 몸은 빠른 속도로 날아가고 있었다.
지금까지 지나온 풍경이 역재생되고 있었다. 헤아릴 수 없는 별무리 사이를 가로지르던 찰나,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려 퍼졌다.
“얌마! 아셀!”
“햐아악!”
아셀이 눈을 떴다. 폐로 밀려든 새벽공기가 차가웠다. 눈에 피가 고여 있는 탓에 세상이 온통 붉게 보였다.
눈을 질끈 감아서 피를 짜낸 뒤에야 제대로 주변을 살필 수 있었다. 머리 위의 하늘에는 익숙한 천체가 수놓아져 있었다. 어리둥절한 채 주변을 둘러보던 아셀의 시선이 자신의 어깨를 붙잡고 있는 사람에게 향했다.
“···로난?”
“정신이 드냐 이 새끼야? 엉?”
로난이 말했다. 굉장히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았다. 오르세, 나란소니아를 비롯한 사람들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아셀은 대답하는 대신 천천히 손을 뻗어 로난의 귀를 만지작거렸다.
물렁하지만 조금은 단단한 연골의 촉감이 여기가 현실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자신이 하던 일을 떠올려낸 아셀이 입을 뗐다.
“아드렌은···?”
“말해 뭐하냐. 네가 해냈어 인마.”
로난은 검지를 뻗어 아드렌의 상공을 가리켰다. 한 눈에 담지 못할 만큼 드넓은 마법진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그 안쪽에서는 나바르도제도 구속할 수 있을 것 같은 거대한 쇠사슬이 네 갈래로 뻗어나와 있었다. 염력과 반짝거리는 마나가 뒤섞여 만들어진 쇠사슬은 오직 로난과 아셀의 눈에만 보였다.
쇠사슬 끝에 달린 갈고리는 아드렌의 지반에 단단히 박힌 채 추락하는 것을 방지하고 있었다. 더는 밤하늘이 멀어지지 않았다. 세상이 짓누르는 듯한 감각도 사라져 있었다. 아셀이 옅게 탄성했다.
“아···.”
조금만 더 무리했다가는 정신이 파괴될 뻔했는데, 아슬아슬하게 성공한 모양이었다. 가만히 그 광경을 지켜보던 아셀이 배시시 미소 지었다.
“···에헤헤.”
언제나처럼 티 없는 웃음이었다. 로난은 아셀에게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구태여 묻지 않았다. 그의 가녀린 어깨 위로는 네뷸라 클라지에 특유의 반짝거리는 마나가 아지랑이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나란소니아의 설명을 들은 그는 아셀이 대머리들의 힘을 끌어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용왕조차 감당하지 못하고 며칠씩 나누어 전달받은 그 웅대한 힘을 한번에 땡겨 온 것이었다. 아드렌의 추락을 막겠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그런 사람에게 로난이 해 줄 수 있는 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미친놈. 넌 진짜로 맛이 간 놈이야.”
“우윽, 어지러워···.”
로난이 아셀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다. 아셀은 손짓 따라 머리를 흔들며 힘없는 웃음을 흘렸다. 벙쪄 있던 주변인들이 본격적으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믿을 수가 없군. 저 인간이 혼자서 한 일이라고?】
【폐하가 했던 의식을···.】
【무수히 많은 천재를 보았지만,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구나.】
최소 수백 년씩을 살아온 드래곤들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런 건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하늘 위에서 추락하는 섬을 개인이 멈춰 세우다니. 지고의 대마법사로 알려진 로르혼조차 이런 일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이제 저것들만 처리하면 되겠군.”
다시 하늘로 시선을 올린 로난이 혀를 찼다. 정신이 나가 버린 빛의 거인들이 메뚜기 떼처럼 날뛰고 있었다. 그래도 다 같이 하면 어떻게든 될 터였다.
【순수하게 감탄했다. 마법사.】
“오르세 님···.”
그때 오르세가 인파를 가르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전투의 여파로 피로해 보이기는 했지만 오만하고 위풍당당한 기세는 여전했다. 아셀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에는 말 그대로의 경의가 묻어나고 있었다.
【제국을 불사르더라도 너만은 살려 주지. 나를 방해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부, 불사르다니···그건···카윽!”
아셀이 뭐라 대답하려던 차였다. 그의 몸이 들썩이며 입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화들짝 놀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아셀. 얌마.”
【뭐야. 왜 그러는 거냐.】
로난이 휘청거리는 그의 몸을 받쳐 안았다. 무미건조하던 오르세의 얼굴에도 당혹이 깃들었다. 입 안에 고여 있던 피를 뱉어낸 아셀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흐으으···역시···조금 부족했나 봐.”
“부족하다고?”
“응···무리를 해서라도 궤도에 올려놨어야 하는데···이대로라면 다시 추락하고 말 거야···.”
“···추락?”
아셀의 말을 들은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 순간 정지해 있던 아드렌이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다.
우르릉···야수가 그르렁거리는듯한 진동에 사람들이 다시 혼란에 빠졌다. 고개를 들자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점멸하고 있는 쇠사슬과 마법진이 눈에 들어왔다.
“막아야···해.”
아셀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로난과 오르세를 뒤로 한 채 마법진의 중심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로난이 다급하게 그의 팔을 붙잡았다.
“당장 그만 안 둬? 죽고 싶은 거야?”
“괜찮아···일정 궤도에 올려놓으면 괜찮을 거야. 조금만 더 하면···”
“조금만 더는 지랄, 네 몸이 지금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로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무모한 짓거리도 정도가 있었다. 상식적으로 인간이 대머리들의 힘을 당겨 받고 멀쩡할 리가 없었다.
그 용왕조차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폭주해서 사고가 났거늘, 그의 발톱보다 작은 아셀이 버텨 봐야 얼마나 버티겠는가. 이건 재능과는 또 다른 문제였다. 오르세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무리하지 마라 마법사. 너는 이미 충분히 했다.】
“얼른 타. 네가 시간을 벌어준 덕분에 더 많이 구할 수 있을 테니까.”
로난은 절대로 친구가 자살하는 꼴을 볼 수 없었다. 차라리 이 도시를 추락시키면 추락시켰지. 가만히 그를 바라보던 아셀이 작게 읊조렸다.
“···용서해 줘.”
“뭐?”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순간이었다. 콰아아앙! 갑자기 보이지 않는 충격파가 아셀을 중심으로 터져 나왔다.
“크윽!”
【무슨···!】
어마어마한 힘이었다. 로난과 오르세는 물론,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드래곤까지 남김없이 저 멀찍이 튕겨 나갔다. 쾅! 로난은 어떤 건물의 외벽에 등을 부딪히고 나서야 멈춰 섰다.
“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로난은 튕기듯이 몸을 일으켰다. 아셀의 의도를 짐작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곧바로 검을 뽑아든 그가 오러로 아셀을 끌어당기려고 했지만, 그의 형체는 이미 얼음으로 이루어진 방어막에 가려진 뒤였다.
“당장 멈추지 못해!”
마나로 강화된 허벅지가 터질 듯이 부풀었다. 쾅! 쾅! 쾅! 단 세 번의 도약만으로 마법진에 도달한 로난이 검격을 흩뿌렸다. 결코 녹거나 깨지지 않는 얼음이 산산이 조각나며 무너져 내렸다.
“아셀!!”
로난이 외쳤다. 아셀은 이미 마법진의 중앙에 앉아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그에게 접근하던 로난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기괴한 색채로 일렁거리는 장막이 아셀의 주변을 반구형으로 뒤덮고 있었다.
“뭔 씨발···.”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미약하기는 했지만 틀림없는 별의 가호였다. 네뷸라 클라지에 내부에서도 아무나 쓰지 못하는 힘.
도대체 무슨 경험을 했길래 이걸 쓸 수 있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로난이 아니라면 돌파조차 할 수 없을 터였다. 반드시 이번 일을 해결하고자 하는 아셀의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돌아가자.”
하지만 본인이 목숨을 잃는다면 결국 모든 것이 부질없어지기에, 로난은 주저 없이 칼을 휘둘렀다. 서걱! 뒤늦은 파공음과 함께 별의 가호가 무너져 내렸다. 그가 아셀에게 손을 뻗는 차였다. 고개를 돌린 아셀의 시선이 로난과 마주쳤다.
“···로난. 내가 마무리를 짓게 해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