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 대회의(1)
#267
“더럽게 많네.”
정오 무렵의 하늘이 맑았다. 대광장을 둘러보던 로난이 미간을 좁혔다. 그와 부원들이 도착했을 때, 필레온의 대광장은 이미 전교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갑작스럽게 소집에 불려 나온 학생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하우으음···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힉···! 수, 숨막혀···마르야···.”
늘어지게 하품한 마르야가 아셀을 끌어안으며 중얼거렸다. 술이 덜 깬 부원들의 의식은 아직도 꿈에 반쯤 걸쳐진 상태였다.
그들은 간신히 세수만 하고 로난에게 불려 나왔다. 앞머리를 쓸어넘긴 슐리펜이 침음을 흘렸다.
“···과음 같은 추태를 부리다니. 수치스럽군.”
“흐응, 그랑시아의 소공작께서도 속세에 많이 물들었네요. 기품을 잃다니, 저희 아칼루시아에서는 꿈도 못 꿀 일이에요.”
“에리. 머리는 왜 양쪽으로 묶은 거니?”
“헉···!”
그들이 한창 떠들어 대던 와중이었다. 우우웅! 별안간 단상 앞의 공간이 뒤집히더니 웬 수염 긴 노인 한 명이 걸어 나왔다. 필레온 아카데미의 교장인 크라바 크라티르였다.
거진 한 달 만에 다시 보는 그는 수염이 더 길어져 있었다. 전날에 잠을 설쳤는지 눈가에 짙은 그늘이 드리운 것이 보였다. 크라티르가 입을 열었다.
“다들 반갑습니다 여러분. 갑작스러운 소집이었는데 이렇게 모여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으니 정숙해 주시겠어요?”
딱! 크라티르가 손가락을 튕기자 그를 중심으로 마나의 파문이 퍼져 나갔다. 학생들의 이목이 쏠림과 동시에 대광장이 조용해졌다. 잠시 뜸을 들이던 크라티르가 말을 이었다.
“오늘부터 필레온 아카데미는 무기한 휴교에 들어갑니다. 아카데미 측의 지원 및 보호를 원하는 학생들은 남아 있을 수 있지만, 될 수 있으면 자택으로 돌아가 근신하시기 바랍니다.”
“뭐?”
로난의 눈이 커졌다. 옆에 있던 아데샨이나 부원들도 엇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겨울의 마녀 때문에 제도가 일 년 동안 겨울에 휩싸여 있을 때도 정상 운영하던 필레온이 갑자기 휴교라니, 심히 당황스러운 소식이었다.
무슨 농담인가 싶었지만 크라티르의 표정은 여느 때보다 진지했다. 잠잠했던 학생들이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졸업반 학생 한 명이 손을 들며 질문했다.
“왜 그런지 이유를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미안하지만 이번만큼은 답을 드리기 어렵군요. 다만 여러분을 위해서, 본 교장과 교직원들이 심도 깊은 논의를 거친 끝에 나온 결론이니 양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각 기숙사의 관리인들이 안내해 드릴 테니 염두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후로도 몇 명이 더 질문을 던졌으나 사정 상 자세한 정보를 알려줄 수 없다는 답변만이 돌아왔다. 크라티르는 학비나 듣지 못한 수업은 반드시 필레온 측에서 책임지겠다는 말을 남긴 채 등을 돌렸다.
“자, 귀가 수속을 시작하겠습니다. 학생 여러분은 안내인의 지시에 따라 움직여 주세요!”
크라티르가 퇴장하자마자 대광장 곳곳에서 안내인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혼란스러워하는 학생들을 이끌고 저마다가 맡은 구역으로 향했다. 상황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아셀이 더듬거렸다.
“뭐, 뭐지? 휴교라고?”
“이거 심상치 않은데···.”
마르야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다른 부원들의 얼굴에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들이 인파에 치이며 이리저리 표류하던 와중이었다. 별안간 로난의 머릿속에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로난 군. 미안하지만 지금 즉시 교장실로 와 주겠어요?]
“크라티르?”
로난이 눈썹을 으쓱였다. 틀림없는 크라티르의 목소리였다. 거의 동시에 그의 양옆에 서 있던 아셀과 아데샨이 놀란 듯 움찔거렸다. 미어캣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아셀이 로난을 돌아보며 물었다.
“로, 로난···너도 혹시?”
“엉. 들었다.”
“나도 들었어.”
아데샨도 주억거렸다. 그때 가만히 있던 슐리펜이 교장실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로난이 물었다.
“너도냐?”
슐리펜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한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 걸로 봐서 아직 숙취가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크라티르의 부름을 들은 것은 모두 네 명이었다.
“뭔가 일을 꾸미는 것은 확실해 보이는군.”
그들을 번갈아 쳐다보던 로난이 턱을 만지작거렸다. 전부 네뷸라 클라지에를 상대로 혁혁한 공을 세운 사람들이었다.
아직 아드렌에서 쌓인 피로가 남아 있었지만 그래도 별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뭔가 큰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가 아셀과 아데샨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좋아. 가 보자.”
****
네 사람은 교장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예상과는 달리 대광장을 벗어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필레온의 학생들은 이제 유명인사가 된 그들을 알아서 피하며 길을 만들어 주었다.
“어서들 오게나. 생각보다 빨리 와 줬군.”
“젠장, 깜짝이야.”
막 교장실의 문고리를 잡으려던 로난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갑자기 바람이라도 분 것처럼 문이 벌컥 열렸다.
크라티르는 뒷짐을 진 채 방 안을 배회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뭐 마려운 노견 같아서 썩 안쓰러웠다. 로난이 질문했다.
“무슨 일이에요? 갑자기 휴학은 또 왜 한 거고?”
“미리 부르기를 잘 했군. 그 모습으로 갔다가는 큰일 날 뻔했어.”
“예?”
뜬금없는 답변이 돌아왔다. 네 사람을 위아래로 훑어본 크라티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영문 모를 말을 들은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갑자기 무슨 소리에요? 그래도 머리까지 감았는데 너무하시네.”
“그 정도로는 부족하네.”
딱! 크라티르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들의 교복이 구김살 없이 펴짐과 동시에 곳곳에 묻어 있던 얼룩도 남김없이 사라졌다. 알딸딸한 술 냄새도 더는 나지 않았다.
“오.”
“이제 됐네. 자세한 건 전부 가서 설명해줄 테니까 이리들 모이게나.”
크라티르가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네 사람은 그렇게 했다. 그들이 마법의 범위 내로 들어온 것을 확인한 크라티르가 다시 한 번 손가락을 튕겼다.
딱! 경쾌한 소리와 함께 공간이 뒤집혔다. 시야가 한 순간 어두워지나 싶더니, 생소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어지간한 건물의 로비라 해도 믿어질 정도로 넓은 공간은 재질을 알 수 없는 시커먼 광석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아셀이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여, 여기는?”
“필레온에 자리한 비밀 회의장이라네.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결코 들어올 수 없지.”
크라티르가 대답했다. 과연 사방을 둘러봐도 문이나 창문을 찾아볼 수 없었다. 워낙에 부지가 넓기는 했지만 설마 이런 시설까지 갖춰져 있는지는 몰랐다.
공간 한복판에는 뒤집어서 배로 써도 될 만큼 기다란 탁자가 놓여 있었다. 탁자 앞에는 백 개의 의자가 놓여 있었는데, 정확히 여섯 자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헌데 그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낯이 익었다. 익숙한 면면을 본 로난이 눈썹을 치켜떴다.
“거기는 내 자리다 고양이. 그 털 난 엉덩이를 치워라.”
“까다롭게 굴지 말고 그냥 대충 앉지. 그런 시시콜콜한 것을 따지려 드니까 네가 나를 못 이기는 거다.”
“이놈!”
가장 먼저 티격태격하는 두 검성이 눈에 들어왔다. 자이파는 나비로제를 무시하며 기지개를 켰다. 옆에 있던 사람들은 격분한 그녀가 대태도를 뽑아들려는 것을 말렸다.
“지, 진정하시오. 만사의 주인이여! 내 자리를 양보해 드리겠소!”
“엉?”
로난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의 눈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말리는 사람 중 두 명의 머리에는 왕관 비슷한 모자가 씌여져 있었다. 아데샨이 감탄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페일과 탄시엔의 군주들이야. 왜 이런 곳에···.”
“뭐야, 진짜 왕이에요?”
아데샨이 주억거렸다. 로난은 기가 막힌다는 듯이 헛웃음을 쳤다. 페일이면 남부 끝자락에 있는 왕국인데 왜 여기까지 온 거지?
그때, 로난과 눈이 마주친 자이파가 손을 흔들었다.
“간만이군 로난. 북부에서는 크게 신세를 졌다. 덕분에 아들의 장례를 제대로 치러 줄 수 있었어.”
“다행이네. 잘 지냈수?”
“그럭저럭이지. 광신도 놈들을 죽이는 것을 낙 삼아 살아가는 중이다.”
자이파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북부에서 로난과 헤어진 뒤 네뷸라 클라지에의 지부 수십 개를 부하들과 함께 척결했다고 말했다.
친동생의 배신과 아들을 두 번 장사지낸 일로 상실감에 빠져 있을 줄 알았는데, 완전히 기력을 되찾은 것 같아 다행이었다. 문득 상석을 쳐다본 크라티르가 안도하며 말했다.
“다행히도 아직 안 오셨군. 어서 앉지.”
“그러죠. 그런데 아직 내 질문에 하나도 답변 안 해준거 알죠?”
“미안하네. 워낙에 서두르느라 어찌할 방도가 없었어. 휴교를 한 이유를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머지않아 벌어질 전쟁에서 학생들이 피해를 입지 않게 하기 위해서일세.”
“전쟁이요? 아, 설마···.”
아드렌에서의 일을 떠올린 로난이 옅게 탄성했다. 아데샨을 제외한 두 사람도 어느 정도 눈치챈 듯했다. 크라티르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때가 온 걸세. 이제 정말 앉아야 하네.”
궁금증이 해소된 로난은 더는 질문하지 않았다. 로난과 아셀, 슐리펜과 아데샨의 자리는 상석의 바로 옆이라 해도 될 정도로 높은 곳이었다.
의자에 앉자 비로소 회의실의 벽면과 천장에 새겨진 마법진이 눈에 들어왔다. 빈틈없는 설계는 모두 보안을 위한 것이었다. 불현듯 건너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안녕···로난···.”
“엥? 오필리아?”
천장을 올려보던 로난이 황급히 시선을 내렸다. 익숙한 소녀가 건너편 좌석에 앉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은색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너도 온 거야?”
“응···원래 밤의 일족은 제국의 땅을 밟지 않지만 경우가 경우니까···.”
오필리아의 주변에는 피부 창백한 미남미녀들이 줄지어 앉아 있었다. 그들이 전부 흡혈귀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별안간 그녀의 왼쪽에 앉아 있던 사내가 로난을 보며 킬킬거렸다.
“혈색이 좋아졌군, 간식거리. 잘 먹고 지낸 모양인데.”
“발자크.”
로난의 눈이 커졌다. 이건 정말로 오랜만에 보는 상판대기였다. 왼쪽 눈을 잃은 흡혈귀는 과거 로난과 선혈의 정수를 건 내기에서 패배한 적이 있었다.
“니가 여기 왜 있냐?”
“일족의 뜻에 따르는 것뿐이다. 사랑스러운 오필리아의 말처럼 보통 일이 아니라서 말이지.”
“허···그러고 보니 이제 괜찮은 거냐?”
당시의 일을 반추하던 로난이 오필리아와 발자크를 번갈아서 쳐다보았다. 그때와 비교하면 거리감이 상당히 좁혀져 있었다.
오필리아의 여동생을 살해한 발자크는 그녀를 열렬히 사모함에도 불구하고 다섯 발자국 이내로 접근할 수 없었다. 벌레 보듯 질색하던 오필리아의 얼굴이 아직도 선명한데, 화해한 건가? 그녀가 천천히 주억거렸다.
“응···얼마 전에 오해가 풀렸거든.”
“오해?”
“정확히는 증오해야 할 대상이 발자크가 아니라는 걸 알았어···여동생이 미쳐버린 건 그 광신도들의 짓이었지.”
오필리아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필멸자를 위축시키는 살기가 그녀의 어깨 위로 흘러나오려는 차였다. 불현듯 그녀의 오른쪽에 앉아 있던 사내가 제지하듯 손을 들었다.
“그쯤 해라. 오필리아.”
“···네.”
살기가 가라앉았다. 아랫입술을 한 번 깨물었다 뗀 오필리아가 눈을 감았다. 저 공주님에게 명령할 수 있다니, 아무래도 상당히 지위가 높은 사람 같았다. 로난을 돌아본 정체 모를 사내가 서글서글하게 미소 지었다.
“이스란 폰 바르샤바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구나.”
“바르샤바? 당신 설마···.”
사내의 성은 발자크와 동일했다. 악수하던 로난이 잠시 멈칫거렸다.
그의 검은 연미복 안쪽으로 끝 모를 힘이 맥박치고 있었다. 오필리아와 발자크의 마력을 곱해도 이 정도는 미치지 못할 것 같았다. 이 정도면 오르세랑도 싸우겠는데. 본능적으로 그의 정체를 눈치챈 로난이 입매를 뒤틀었다.
“···그림자 대공?”
“오, 나를 알고 있나?”
이스란이라는 사내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오필리아와 발자크의 입을 통해서 수도 없이 들었던, 밤의 세계를 지배한다는 뱀파이어의 군주, 그림자 대공이었다.
“잘 부탁하마. 용의 도시를 구한 영웅이여.”
“···나도.”
이스란은 발자크처럼 미친놈일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굉장히 정중한 사내였다. 비단 그들을 제외하더라도 회의실은 온갖 강자로 들어차 있었다.
바렌과 자로딘을 비롯한 필레온의 교수진, 검의 제전에서 원로를 담당하던 전대 검성, 아운 필라 같은 마탑주들까지. 사실상 대륙의 최고 전력들이 모인 자리였다.
“저, 정말로 다 모였어···.”
“경이롭군. 역시 주최자가 중요한 건가.”
그 압도적인 위세를 견디지 못한 아셀이 바들거리며 읊조렸다. 슐리펜 또한 감탄을 숨기지 않았다. 아직 아는 것이 없는 아데샨은 조용히 탁자 밑으로 로난과 손을 맞잡고 있었다.
벽면에 붙은 시계가 정오를 가리키는 순간이었다. 화르륵! 비어 있던 상석 위로 불길이 솟구치더니 관능적인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오···정말로···.”
나바르도제는 아드렌을 다스리던 시기에 입었을 법한 위엄 있는 제복을 입고 있었다. 다소 소란스럽던 회의장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그녀가 참석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다들 모인 것 같군. 혹시 내가 늦지는 않았겠지?】
“안 늦었어요.”
【고맙구나 로난. 이틀만이지만 반가운걸.】
나바르도제가 눈웃음쳤다. 불의 어머니와 허물없이 대화를 나누는 로난의 모습에, 회의실에 있던 거의 모든 이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머리카락을 한 번 쓸어넘긴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럼 바로 회의를 시작하지. 의제는 네뷸라 클라지에의 척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