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 척결(2)
#270
“네가 한 번 나서줘야 할 것 같다.”
그림자 대공이 말했다. 창백한 얼굴에 드리운 그늘이 인상 깊었다. 어지간하면 본인이 알아서 하는 아저씨인데 상당한 난항을 겪고 있는 듯했다. 누워 있던 로난이 상체를 일으켰다.
“뭐야, 교주라도 나왔어요?”
“아니. 대주교가 두 명 나타났다. 우리로서는 방어막조차 돌파할 수가 없더군. 아군의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야.”
그림자 대공이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산맥의 심부에서 갑작스럽게 두 명의 대주교가 나타나는 바람에 연합군은 점령했던 거점을 세 개나 빼앗겼다고 했다.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최근 들어 잠잠하더니 결국 나오셨군. 그런데 마신 게 아니라 발라서 때렸는데도 안 먹혀요?”
“그래. 원액을 바른 검으로 내리쳐 봐도 생채기 하나 나지 않더군.”
그림자 대공이 혀를 찼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자존심이 굉장히 상한 것이 눈에 보였다. 하긴 오르세와 마찬가지로 평생 패배라는 것을 모르고 살아온 작자였으니. 로난이 말했다.
“가 봐야겠네. 그나저나 원액이라 하니까 기분이 좀 이상하네요. 내가 주스도 아니고.”
“우리한테는 비슷하잖나. 어쨌든 더 심각한 것은 놈들이 시간을 벌고 있다는 거다. 분명히 산맥 곳곳에 비밀 통로가 있을 텐데, 이대로라면 상당수를 놓쳐 버릴지도 몰라.”
대공은 네뷸라 클라지에의 도주 가능성에 대해 걱정하고 있었다. 충분히 그럴 만도 했다. 이파리와 줄기는 태워도 뿌리가 살아 있는 꼴이니. 로난이 몸을 일으켰다.
“조금 더 빨리 부르지.”
퓩! 그가 팔에 꽂혀 있던 대롱을 뽑아냈다. 디디칸은 함부로 뽑으면 큰일난다고 했지만 워낙에 상처가 빨리 낫는 체질이라 별 상관이 없었다. 잠깐 흐르던 핏줄기가 이내 멎었다.
“고맙다.”
“어서 가죠. 안 그래도 찌뿌둥했는데 잘 됐네.”
로난은 그림자 대공을 따라 천막을 나섰다. 차가운 북풍이 훅 밀려왔다. 연합군의 막사와 전란에 휩싸인 펠그란드 산맥이 눈앞에 펼쳐졌다.
동부의 판시아 요새와 동시 공략 중인 펠그란드 산맥은 교단에서도 손꼽히는 대형 지부였다. 바위와 침엽수로 뒤덮인 험준한 산맥은 전체가 네뷸라 클라지에의 요새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지독한 새끼들.”
로난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여기서만 보름이 넘는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다. 밤의 어둠 속에는 온갖 함성과 비명, 쇠 부딪히는 소리가 뒤섞여 있었다.
“그래도 아주 북쪽은 아니라 다행이군.”
그리 말한 로난이 외투를 걸쳤다. 북부라 그런지 초여름임에도 기온이 낮았다. 말을 하거나 숨을 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나와 바스라졌다.
아직도 헤이란과 망령의 바다를 떠올리면 불알이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망령의 바다라. 문득 구원자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재인지한 로난이 입술을 비틀었다.
‘이제 반 년 정도 남았나.’
세상을 완벽히 구하고 출생의 비밀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구원자를 살려야 했다. 그리고 구원자를 살리기 위해서는 교주 아벨의 피가 필요했다.
엘시아와는 비정기적으로 편지를 주고받고 있었지만, 딱히 증상이 호전되거나 하는 기연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기세라면 머지않아 교주에게 도달할 것 같다는 점이었다. 흡혈귀와 협동한 대장장이들은 로난의 피를 그대로 무기에 바르는 것 외에도 운용하는 방법을 알아냈고, 실제로 큰 성과를 내고 있었다. 그림자 대공이 말했다.
“그럼 먼저 출발하겠다.”
“엉. 죽지 말고 기다려요.”
로난이 손을 흔들었다. 그림자 대공의 몸이 어둠으로 휩싸이더니 사라졌다. 그럼 가 보실까. 고개를 돌리자 얌전히 앉아서 자신을 내려보고 있는 시타가 눈에 들어왔다.
“뺘.”
“거 올려보기 힘드네. 누가 이렇게 커지래?”
로난이 픽 웃었다. 덩치는 무지막지하게 커졌지만 똘망한 눈동자는 여전히 귀여운 맛이 있었다.
로난의 눈빛을 살핀 시타가 알아서 머리를 숙였다. 기다란 목에 올라탄 로난이 푹신푹신한 털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가자. 친구.”
“뺘잇!”
시타가 네 장의 날개를 펼치며 날아올랐다. 거대한 덩치에도 불구하고 시타의 이륙은 유령처럼 고요했다. 막사에 있던 병사들이 일제히 환호했다.
“오오, 직접 가는 건가!”
“그래, 한 방 먹여주고 와!”
그들에게 있어서 로난은 이미 영웅 이상 가는 존재였다. 계급과 지위를 막론하고 로난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로난은 가볍게 손을 들어 주는 것으로 성원에 회답했다. 화아악-! 한 번의 날갯짓만으로 산맥 언저리에 도달한 시타가 쩌렁쩌렁하게 포효했다.
“뺘하아아아-!”
동시에 산맥 전역에 뿌려진 피가 시타에게 모여들기 시작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핏방울이 하늘로 치솟는 모습은 꼭 비가 거꾸로 내리는 것 같았다.
폭발적인 성장의 비결이었다. 전쟁은 많은 피를 불렀고, 그것은 모조리 시타의 것이었다. 시타의 검고 푹신한 깃털은 모든 피를 게걸스레 흡수하고도 젖지 않고 윤기를 유지했다. 흡수를 마친 시타가 만족스레 웃었다.
“뺘하하!”
“적당히 먹어 인마. 여기서 더 커지면 어쩌려고.”
로난이 시타의 목을 가볍게 꼬집었다. 물론 진심은 아니었다. 이미 집안에서 키우기는 늦었는데, 더 커지면 뭐 어때.
로난과 시타는 오 분도 걸리지 않아서 목적지에 도착했다. 드높은 상공에서는 수평선상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산맥의 중심부가 훤하게 보였다.
그림자 대공은 부하들과 함께 공중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시커먼 전투복을 입은 흡혈귀 수십 명이 대공을 중심으로 포진해 있었다. 그가 로난을 맞이했다.
“왔나.”
“예. 제법 튼튼해 보이기는 하네요.”
발아래를 내려본 로난이 휘파람을 불었다. 과연 괜히 자신을 부른 것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본 것과는 격이 다른 별의 가호가 산맥의 중심을 뒤덮고 있었다.
반구형의 장막은 보랏빛과 적색 사이의 어중간한 색채로 일렁거리고 있었다. 육안으로 봐도 두꺼워 보이는 것이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파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로난이 물었다.
“돌입할 병력은 더 있어요?”
“1, 4, 12번 지휘관과 휘하 부대가 포위를 담당하고 있다. 아마 방어막이 파괴되는 대로 진입이 가능할 거야. 용케도 놈들의 감지망에 안 걸리고 병력을 배치했더군.”
“아하. 아데샨이 갔구만.”
로난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제 4 야전 지휘관은 아데샨을 지칭했다.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모의전에서 놀라운 기량을 보여준 그녀는 소탕 작전이 시작된 지 머지않아 연합군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담당하는 병력은 적었으나 그녀가 이끄는 부대는 연합군 내에서 최고의 승률을 자랑했다. 여기서는 아직 벌어지지 않은 역사였지만, 대장군을 해먹던 재능이 어디 갈 리가 없었다. 어쩐지 기분이 좋아진 로난이 대공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럼 바로 가죠. 따라와요.”
“잠깐, 그렇게 막무가내로···!”
“한 마리는 어떻게든 치워 볼 테니까 다른 하나만 잡아 줘요.”
탓! 불현듯 로난이 시타의 등 위에서 뛰어내렸다. 기다렸다는 듯이 날개를 접은 시타의 몸이 아래를 향해 숙여졌다.
“기다려라!”
잠시 벙쪄 있던 흡혈귀들 또한 그의 뒤를 따라 강하하기 시작했다. 로난은 칼자루에 손을 얹은 채 빠르게 가까워지는 산맥을 내려보았다.
귓가에서 울부짖는 바람 소리가 거칠었다. 혼탁한 역장 저 안쪽에 유별나게 화려한 로브를 입은 사내와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좆같은 새끼들.”
갑자기 열불이 치솟았다. 저것들만 아니었으면 지금쯤 필레온에서 요정의 밤 축제를 즐기고 있을 터였다. 친구들과 바보같이 낄낄거리거나, 축제 복장으로 갈아입은 아데샨과 별을 보거나 하면서.
로난이 이를 악물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일상의 행복을 빼앗겼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장막 앞에 다다른 그가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스각! 라만차가 경쾌한 호를 그림과 동시에 별의 가호가 산산이 부서졌다.
“무슨···!”
그림자 대공의 눈이 커졌다. 이변을 감지한 대주교 알리시아가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평생을 단련한 별의 가호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검은 그림자들이 머리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잠깐, 카일라시스!”
그녀가 뭐라 외치려던 차였다. 촤아아아악! 붉은 꼬리를 그리며 강하한 로난의 검격이 옆에 있던 대주교 카일라시스의 정수리부터 고간까지를 일격에 갈라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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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원본에는 견줄 수가 없군. 자네 말대로 진작에 부를 걸 그랬어.”
그림자 대공이 탄성했다. 콧대 높던 흡혈귀들도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나흘 내내 정체되어 있던 구간이 고작 두 시간만에 뚫렸다. 로난이 심드렁하게 내뱉었다.
“그러게 말했잖아요. 일찍 부르라고.”
그는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채 발치에 널브러진 시체를 툭툭 걷어차고 있었다. 개전과 동시에 반 토막이 난 카일라시스라는 놈이었다. 연합군을 천 명도 넘게 잡아먹은 악명 높은 대주교는 아무리 날고 긴다 해도 기습에는 얄짤 없다는 교보재로 전락해 버렸다.
연합군은 별의 가호가 부서지는 즉시 돌입했다. 대주교 알리시아는 필사적으로 항전했지만 로난과 그림자 대공의 맹공을 견디지 못하고 산맥 깊숙한 곳으로 후퇴해 버렸다. 길고 길었던 펠그란드 공방전도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봐. 제법이던데.”
“발자크.”
그때 뒤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린 로난이 눈썹을 으쓱였다. 그림자 대공의 동생인 발자크가 클클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분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군. 너는 지금의 나보다 강하다. 이전의 그 애송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어.”
“그거 영광이군.”
“아예 피 뽑는 건 그만두고 전선에만 나서는 건 어떠냐. 그 편이 일이 더 수월해질 것 같은데.”
“이 새끼들이 대륙 전역에 흩어져 있는 게 아니면 진작에 그렇게 했지.”
로난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발자크의 말마따나 로난은 어떤 방패도 뚫는 창과 같은 존재였다. 당연히 그가 전선에서 싸운다면 좋은 성과가 나올 터였지만, 그런 전략을 취하기에는 교주가 기거하는 총본산의 위치가 불명확했다.
‘뿌리를 뽑아야 해.’
아직 잔존하는 지부가 많은 것도 해당 전략을 사용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했다. 로난의 피를 이용한 희석액을 받지 못한 연합군은 별의 가호를 뚫을 수 없었다. 무언가를 고민하던 발자크가 손가락을 튕겼다.
“아, 그러고 보니 누이가 있다 하지 않았나? 아예 채혈은 그녀에게 맡기는 건 어때?”
“뭐?”
한순간 로난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근처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아데샨이 헛숨을 들이켰다.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됐어. 몸이 작아서 피도 얼마 안 나올 텐데.”
“그러지 말고 시도나 해 보는 게 어떠냐. 네 혈육이라면 같은 효과를 지녔을 터. 가용할 수 있는 피의 양이 많아질수록 형세는 유리해진다.”
“누나 이야기는 그쯤 해. 싸우기 전부터 나바르도제 님한테 말해 둔 거니까.”
심호흡한 로난이 입을 열었다. 이마에 핏줄이 불거지긴 했지만 이 정도면 아직 평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완고한 거절에 발자크가 입맛을 다셨다.
“그런가. 아쉽군.”
“나 혼자로 충분해. 다 쉬었으면 슬슬 쫓아가자.”
“그러지. 그런데 정말로 아쉬워. 네 누이의 피 맛은 어떨지 궁금하기도 했는데 말이지, 크하하하!”
별안간 발자크가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로난의 머릿속에서 무언가 끊어졌다. 농담으로 한 소리라는 것을 이성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이미 손은 칼자루를 쥐고 있었다.
“야.”
“으응? 왜 그러지?”
찰나 로난이 멈춰섰다. 발자크가 돌아봄과 동시에 그의 검이 뽑혀 나왔다. 인지를 벗어난 속도로 날아든 라만차가 발자크의 혓바닥을 자르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누군가 옆에서 로난을 와락 끌어안았다.
“로, 로난!”
“···아데샨?”
로난의 팔이 멈췄다. 아데샨이 어색하게 웃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발자크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분명 칼집에 꽂혀 있던 검이 자신의 얼굴 앞에서 희번득하게 빛나고 있었다.
“네놈, 이게 무슨···”
그로서는 왜 검을 겨누어졌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발자크가 노기 어린 목소리로 따지려던 차였다. 침묵하던 그림자 대공이 입을 열었다.
“닥쳐라. 발자크.”
“형님?”
“제 4 야전 지휘관이 너를 살린 거니까. 로난, 아우의 무례를 대신해서 사과하지.”
별안간 로난의 앞으로 걸어온 대공이 고개를 숙였다. 앞머리를 한 번 쓸어넘긴 로난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지 마요. 대공씩이나 되는 사람이.”
“사과를 받아 주겠나?”
“당연하죠. 나도 너무 흥분했어요.”
“고맙군.”
그림자 대공이 미소지었다. 그는 억울해 죽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발자크를 데리고 구석으로 향했다. 다시금 심호흡한 로난이 아데샨을 돌아보았다.
“···고마워요. 이놈의 성격도 좀 죽여야 하는데.”
“아냐, 그럴 수도 있지. 편지가 와서 전달해주려고 왔어.”
“편지요?”
“응. 제도에서···한번 볼래?”
싱긋 웃어 보인 아데샨이 품에서 편지봉투 하나를 꺼내 들었다. 편지를 받아든 로난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누나가 보낸 편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