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 척결(3)
#271
“누나가 보냈네?”
로난이 봉투를 개봉했다. 이윽고 편지를 읽던 그가 히죽 웃었다. 얼굴에서 노기가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아데샨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기분이 좀 풀렸나 보네.”
“누나가 쓴 편지인데 찌푸린 채 읽을 수는 없죠. 전해 줘서 고마워요.”
로난의 눈빛에서는 애정이 뚝뚝 묻어나고 있었다. 자신과 둘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보여준 적이 없는 표정이었다. 그 모습을 보던 아데샨이 자기도 모르게 미소지었다.
“이릴 님을 정말로 좋아하는구나.”
“그럼요. 왜, 아데샨도 알다시피 저는 부모가 없잖아요?”
한순간 아데샨의 말문이 막혔다. 이런 말에는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막상 로난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있었지만서도. 아데샨이 침묵하자 그가 입을 열었다.
“생각해 보면 참 지랄 맞은 팔자죠. 엄마는 어릴 때 돌아가셔서 얼굴 한 번 제대로 본 적이 없고, 아버지라는 작자는 세계의 비밀을 간직한 채 북녘 끝자락에 잠들어 있으니. 그래서 모성애라든가, 부모의 사랑이라든가 하는 걸 잘 몰라요.”
“으응···.”
“하지만 한 번도 거기에 대해 불만이나 결핍을 느낀 적은 없었어요. 저한테는 누나가 있었으니까. 애새끼 때 못되먹게 굴긴 했어도, 그건 딱히 사랑을 못 받고 자라서가 아니라 제 타고난 성미가 더러워서였죠.”
로난이 낄낄거렸다. 아데샨도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별의 가호가 사라진 것을 확인한 후발대가 산길로 진입하고 있었다.
“누나는 언제나 저를 사랑과 정성으로 길렀어요. 포대기에 업혀서 님버튼을 돌 때부터 그걸 느꼈죠. 저 같은 놈팡이한테는 과분한 사람이었어요.”
“그, 그렇게 말할 것까지야.”
“아뇨. 정말로요.”
로난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이릴과 함께한 유년기의 일화를 몇 개 말해 주었다.
“한번은 제가 동화에 나오는 마룡 오르세를 보고 싶다며 떼를 쓴 적이 있어요. 대충 꿈에서 만날 수 있다며 퉁쳐도 될 말이었지만 누나는 그러지 않았죠. 어떻게 했을 것 같아요?”
“음···글쎄? 그림을 그려 주셨나?”
“비슷하기는 했는데 조금 달라요. 누나는 한 달 내내 잠까지 줄여 가면서 정말 그럴싸한 오르세의 분장을 만들었어요. 그리고 본인이 입고서 싸돌아다니고 온 저를 놀래켜 줬죠.”
당시의 기억을 떠올린 로난이 픽 웃었다. 어른의 기준으로 생각해 봐도 굉장한 정성이 들어간 분장이었다. 네 장의 날개를 진짜 까마귀의 깃털로 만들었었으니. 아데샨이 입을 가리며 감탄했다.
“우와.”
“그리고 저는 놀라는 척도 안 하고 방으로 들어갔죠. 그때는 이미 오르세에 대한 흥미가 식어 있었거든요. 이후로도 제가 그 분장에 관심을 준 적은 없었어요.”
“···우와.”
아데샨이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아까와는 조금 다른 느낌으로. 그녀의 표정을 본 로난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정말 개새끼였군.’
돌이킬수록 유년기의 자신이 답도 없는 호로자식이라는 것을 인지하게 되었다. 똥기저귀부터 갈아 주던 누이를 도대체 왜 귀찮아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예쁜 짓 한번 한 적 없었지만, 이릴은 언제나 무한한 사랑을 무상으로 베풀어 주었다. 일언반구도 없이 집을 뛰쳐나오기 직전까지.
돌아와서 정말 다행이지. 입속말로 중얼거린 로난이 말을 이었다.
“말이 조금 샜네. 그냥 아끼는 티를 좀 내고 싶었나 봐요.”
“응. 충분히 느껴져.”
“그리 말해주니 고맙네요. 어쨌든 그게 전부에요. 누나만큼은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요.”
로난이 말을 맺었다. 실제로 이릴의 행복은 그가 세상을 구하기로 결심한 가장 큰 원동력 중 하나였다. 사랑스러운 누이에게 비극 따위는 어울리지 않았다.
“아, 내일 몇 시간만 제도에 다녀와도 될까요?”
“응? 그야 당연히 괜찮기는 한데, 왜?”
“저도 몰랐는데 내일이 제 생일이었나 봐요. 누나가 오랜만에 둘이서 보내자네요.”
로난이 이릴에게 받은 편지를 보여 주었다. 양피지 위에는 벌레처럼 꼬불거리는 글씨가 또박또박하게 적혀 있었다.
내일이 생일이니 집으로 돌아오라는 전문의 하단에는 선물도 이미 준비했다는 추신이 달려 있었다. 생일 같은 건 잊고 산지 오래라 완전히 까먹고 있었다. 아데샨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건 가야지. 어차피 펠그란드를 점령하면 휴식기를 가질 거기도 하고. 내가 잘 말해 둘게.”
“금방 다녀올게요. 선배는 별일 없죠?”
“응? 으음···그게···.”
아데샨이 머뭇거렸다. 그녀는 최근 들어 환청 비슷한 증상을 겪고 있었다. 로난과 함께 북부에 갔을 때부터 머릿속에서 들려오던, 정체 모를 여인의 목소리가 날이 갈수록 커져 가고 있다.
말하고 싶었지만 괜히 이야기했다가 시간을 많이 잡아먹을 것 같아서 고민이 되었다. 전황이 완전히 기울었다 해도 일단은 전투 중이었으니까. 그녀가 뭐라 말하려던 차였다.
“이봐. 아무래도 후퇴해야 할 것 같다.”
“발자크 님?”
갑자기 뒤에서 다가온 발자크가 말을 걸었다. 창백한 얼굴 곳곳에는 원래는 없던 멍자국이 나 있었다. 그림자 대공에게 교육이랍시고 끌려 가더니 신명나게 두들겨 맞은 것 같았다. 로난이 물었다.
“무슨 일이야?”
“방금 동부에서 전보가 왔다. 자이파가 이끄는 2군단이 판시아 요새를 점령했다고 하더군. 매들이 마무리 작업을 끝내고 여기로 오는 중이라고 한다.”
“아하, 드디어 판시아를 먹었나. 그런 거라면 튀어 줘야지.”
로난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와 시선을 교환한 아데샨이 다급히 자신의 부대가 있는 방향으로 달려갔다. 머지않아 그녀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제4 야전지휘관이 알린다. 전군은 펠그란드 산맥 바깥까지 즉시 후퇴하라. 반복한다. 이 전음을 듣는 지휘관들은 부대를 통솔하여 즉시 펠그란드 산맥을 벗어나라.]
그림자의 마나를 담은 전음이 군영 전체로 번져 나갔다. 절정에 치닫던 연합군의 공세가 일순 멎었다.
그들은 완전히 태세를 바꿔서 후퇴하기 시작했다. 막 산맥 깊숙한 곳으로 진입하려던 연합군의 선봉대도 머지않아 걸음을 돌렸다.
“노, 놈들이 물러갑니다!”
“어떻게 된 거지?”
최후의 전투를 준비하던 신도들이 당혹성을 내뱉었다. 영문 모를 회군이었다. 이제 거점 두 개만 점령하면 펠그란드 전역이 연합군의 손에 떨어지는 건데, 저렇게 순순히 돌아가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이게 무슨···.”
대주교 알리시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로난과 그림자 대공에게 패퇴한 뒤 거점에서 몸을 추스르고 있었다. 다가온 부하가 질문했다.
“뒤쫓을까요?”
“···아니. 우리가 불리하다. 물자와 인력을 옮기는 데만 신경쓰도록.”
알리시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영문은 모르겠지만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가호를 무조건 베어 버리는 로난의 존재는 마른 하늘에 내리치는 벼락이나 다름 없었다. 다른 대주교도 없는 지금, 어설프게 교전을 벌였다가는 더 큰 피를 볼 수도 있었다.
“교주님은 도대체 뭘 하시는 건지···.”
패배를 곱씹던 그녀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조직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음에도 교주는 벌써 한 달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처음에는 무언가 계획이 있어서 자리를 비운 거라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 믿음조차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모든 것은 별의 뜻대로.”
하지만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 교주였다. 지금까지 잘 해왔던 만큼, 틀림없이 교단을 정답으로 이끌 터였다.
짝짝. 손바닥으로 얼굴을 쳐서 믿음을 다진 알리시아가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부하들에게 지시를 하달하려는 차였다. 동측 망루에서 경계를 서던 신도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부, 북쪽에서 뭔가 옵니다!”
“뭔가라니?”
“아아···맙소사, 하늘, 하늘을 보십시오!”
점점 주변이 소란스러워지고 있었다. 동쪽을 돌아본 알리시아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얼어붙어 버렸다. 지평선 위의 상공에서, 거대한 드래곤 일곱 마리가 편대를 이루어서 날아오고 있었다.
“무슨.”
연합군의 화력을 담당하는 매 부대였다. 전력이 약해지고 별의 가호도 사라진 지금, 네뷸라 클라지에 측에서 그들을 막을 수 있는 수단은 존재하지 않았다. 선봉을 담당한 이타르간드가 입을 쩍 벌리며 포효했다.
【크아아아아아-!!!】
나바르도제의 막내 아들은 덩치는 작아도 일곱 중에 가장 뜨거운 불을 내뿜었다.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산맥이 진동했다. 알리시아의 얼굴에 절망이 깃들었다.
일곱 드래곤의 비늘은 모두 루비를 연상케 하는 적색으로 번쩍거리고 있었다. 나바르도제의 피를 이어받은 신의 피조물들은 모든 용 중에서 제일 강력하다 알려져 있었다.
“이래서 갑자기 회군한 건가···!”
느닷없던 후퇴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일곱 드래곤은 산맥에 진입하는 순간부터 불을 토해냈다. 콰아아아아! 쇳물처럼 쏟아진 적황색 불길이 아직 연합군의 발이 닿지 않은 거점을 불사르기 시작했다.
“도, 도망쳐라! 성채 내부로 들어가!”
“늦었어···!”
“알리시아 님! 벼, 별의 가호를···!”
곳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신도들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알리시아는 별의 가호를 발동하지 못했다. 한 번 파괴된 가호가 다시 재생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했다.
드래곤들은 순식간에 그들의 머리 위까지 도달했다. 지상을 훑어보던 이타르간드가 노기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희망을 버려라! 벌레 같은 놈들아!】
동시에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화염의 급류가 알리시아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신도들은 급한 대로 방어 마법을 시전했지만 수 초를 버티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늘을 올려보던 알리시아가 헛웃음을 쳤다.
“이건 너무하잖아.”
콰아아아! 천 개의 숲이 동시에 타오르는 듯한 소리와 함께 화염이 성채를 뒤덮었다. 눈 깜짝할 새 유기물을 분해해버린 불은 건물 내부까지 침투하여 피난을 가던 병력이나 물자도 남김없이 불살라 버렸다.
용의 불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비명조차 남지 않았다. 북쪽에서 불어온 찬바람이 산맥을 휩쓸자 불티 섞인 잿더미가 확 일어났다. 북측의 기둥을 담당하던 펠그란드 산맥은 그렇게 연합군의 손에 떨어졌다.
****
상쾌한 정오였다. 제도 위로 펼쳐진 하늘에는 양떼 같은 구름이 흘러가고 있었다. 반쯤 열린 창문 사이로 초여름의 바람이 새어들고 있었다.
“드디어 오늘이구나.”
기온은 높았지만 습기가 없어서 덥지 않았다. 창밖을 바라보던 이릴이 웃음지었다. 사랑하는 동생의 생일을 축하하기에 더없이 알맞은 날이었다.
“얼른 보고 싶네. 내 동생.”
이릴이 중얼거렸다. 최근 들어 로난이 바빠지는 탓에 얼굴을 통 보지 못했다. 아셀이나 슐리펜 같은 친구들도.
그녀의 앞에는 상다리가 부러질 것처럼 많은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식탁 중앙에 자리 잡은 감자 스튜를 비롯한 스무 가지의 요리는 모두 그녀가 직접 만든 음식이었다.
손이 많이 가기는 했지만 로난의 얼굴을 생각하면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게다가 오늘은 보통 생일이 아니었기에 평소보다 더 힘을 주는 것이 맞았다.
오늘 그녀가 준비한 선물은 평소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가 있었다. 앞치마에 손을 닦던 그녀가 별안간 손가락을 튕겼다.
“참, 가장 중요한 걸 빼먹을 뻔했네.”
문득 선물을 꺼내 놓지 않은 것을 깨달은 이릴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 앞에 멈춰선 그녀가 엎드리다시피 허리를 숙였다. 저 깊숙이 혈계침이 들어 있는 상자가 보였다.
“이이이이익···!”
침대 아래로 손을 뻗은 이릴이 이를 악물었다. 아무리 용을 써 봐도 상자는 아슬아슬하게 손가락 끝을 스칠 뿐, 잡히지가 않았다. 한참을 그 자세로 바동거리던 이릴이 결국 몸을 일으켰다.
“후우우···너무 깊숙이 넣었나?”
그녀가 이마에 묻은 땀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침대를 통째로 움직여야 할 것 같았다. 소매를 걷어붙인 그녀가 다시 행동에 나서려던 차였다.
똑똑.
갑자기 현관 쪽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네~ 지금 가요!”
이릴이 외쳤다. 경쾌하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익숙했다. 약간 늦어질 수도 있을 것 같다더니 오히려 빨리 왔네? 그녀가 해맑게 웃으며 현관문을 열었다.
“로난! 어서 와! 많이 배고프···응?”
이릴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문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상할 정도로 사람이 없는 거리만이 남아 적막 속에 엎드려 있었다.
“···뭐지?”
이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히 인기척을 느꼈는데, 아무래도 착각한 모양이었다. 쿵. 별 생각 없이 문을 닫은 그녀가 몸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내가 잘못 들었···꺄아아아아악!!”
이릴의 입에서 새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집 안이 온통 피바다로 변해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사내 수십 명이 머리 없는 시체가 된 채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이, 이게···도대체···.”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이릴이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사내들의 옷에는 모두 발론 제국의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로난의 요청으로 이릴을 호위하기 위해 파견된 황실 직속 정예 요원들이었다.
살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목의 절단면에서 솟아나는 피가 비현실적으로 붉었다. 가쁘게 숨을 몰아쉬던 그녀가 주저앉으려던 찰나였다. 식탁 쪽에서 웬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갑다.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구나.”
“헉···!”
황급히 고개를 돌린 이릴이 얼어붙었다. 분명 아무도 없던 식탁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하얀 머리카락의 사내는 능청스레 그녀가 만든 감자 스튜를 퍼먹고 있었다.
“요리 솜씨가 그만이구나. 여기까지는 피가 안 튀어서 다행이야.”
“아, 아빠···?”
이릴이 말꼬리를 끌었다. 사내의 외모는 그녀가 기억하던 아버지와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기에는 근본적인 느낌에서 차이가 났다. 노을을 닮은 사내의 눈동자에서 아버지와 같은 상냥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겨우겨우 호흡을 진정시킨 이릴이 질문했다.
“···아니야. 다, 당신은 누구죠?”
“역시 형님의 혈육이었군. 그렇다면 이것도 나름 역사적인 만남이겠지. 이미 알고 있을 수도 있지만 정식으로 소개하마."
별안간 스튜를 퍼먹던 사내가 몸을 일으켰다. 머리를 긁적거리며 이릴의 앞까지 다가온 그가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아벨. 네뷸라 클라지에의 현 교주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