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의 천재칼잡이-272화 (272/333)

272. 강탈(1)

#272

“내 이름은 아벨. 네뷸라 클라지에의 교주란다.”

“···네뷸라 클라지에?”

“그래. 들어본 적 있니?”

아벨이 질문했다. 이릴은 대답하지 않고 천천히 뒷걸음질쳤다. 발뒤꿈치가 땅에 닿을 때마다 고인 피가 찰박거렸다.

“그나저나 놀랍구나. 설마 그 재미없는 인간이 여자를 만나고 아이까지 가질 줄이야. 게다가 보아하니 엄청난 미인을 만났던 것 같군.”

아벨은 감탄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시선은 이릴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헤아릴 수 없이 긴 세월을 살아왔음에도 단연 독보적인 아름다움이었다.

툭. 이릴의 등이 벽에 닿았다. 더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가까스로 평정을 되찾은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아, 알아요. 네뷸라 클라지에.”

“음?”

“나쁜 사람들이잖아요. 제국과 세상을 멸망시키려 한다는···..”

이릴이 말꼬리를 끌었다. 아무리 평온 속에서 살아왔다지만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로난과 슐리펜이 언제나 그들의 위험성을 경고해 왔으니까.

사랑하는 동생이 집에 잘 들어오지 못하는 것도 그 악당들 때문이었다. 아벨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나쁜 사람들이라···뭐, 틀린 말은 아니다만.”

아벨은 더는 이릴을 따라가지 않고 제자리에 서 있었다. 제도의 심장부에서 이런 학살을 저지르고도 태연한 것이 그의 실력을 짐작케 했다. 식탁 위의 음식을 집어 먹던 아벨이 말을 이었다.

“정확히는 멸망이 아니라 진화를 위한 발돋움이란다. 새가 날아오르기 위해 알을 깨는 것과 비슷한 원리지. 멍청한 네 아비는 마지막까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아빠와는 무슨 관계죠?”

문득 이릴의 시선이 그의 얼굴에 닿았다. 몇 번을 봐도 너무 닮아 있었다. 아버지와 모종의 관계가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아벨이 자신의 은백색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이 마당에 숨길 필요는 없겠지. 나는 카인의 쌍둥이 동생이란다.”

“쌍둥이?”

“그래. 그러니까···인간의 가족 관계로 따지자면, 나는 네 삼촌이 되겠구나.”

“삼촌이라니, 그럴 수가···.”

이릴의 얼굴이 굳어졌다. 설마 친족이 남아있을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다.

“목적이 뭐죠? 도대체 왜 이런 짓을 하시는 거에요?”

여전히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그래도 이제는 눈을 보며 말할 수 있었다. 질문 중간중간 빠르게 주변을 살폈지만 상황을 타개할 만한 도구는 보이지 않았다. 잠시 뜸을 들이던 아벨이 입을 열었다.

“그야 너를 데려가기 위해서지. 이야기가 길어지니 자세한 건 가서 이야기하자꾸나.”

“저를···데려간다고요?”

“그래. 지금이라도 너를 찾아서 정말로 다행이라 생각한단다. 로난이라는 애송이도 유별나긴 하지만 형님의 능력 중 가장 위험한 것은 아무래도 네가 물려받은 것 같거든.”

“···능력?”

영문 모를 소리였다. 아벨의 표정이 갑자기 진지해졌다. 그는 몸을 가리던 로브를 들추며 허리춤에 찬 검을 드러내 보였다.

“네 힘은 위험하단다 이릴. 내가 지금에야 너희 남매의 정체를 인지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진작에 알았더라면 십 년도 전에 싹을 잘라 버렸을 텐데.”

“그런···.”

위협적인 어조에 이릴이 어깨를 움츠렸다. 아벨은 이야기하는 내내 칼자루를 당장에라도 뽑아들 것처럼 만지작거렸다. 유려한 검집은 눈으로 만든 상아처럼 티 없는 백색을 띠었다. 몸을 돌린 아벨이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그럼 가자. 오래는 걸리지 않을 거다.”

“가, 가까이 오지 마세요···!”

이릴은 빠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아벨은 멈추지 않았다. 성큼성큼 걸어온 그가 손을 뻗는 찰나였다. 가쁜 숨을 몰아쉬던 이릴이 쥐어짜 내듯이 외쳤다.

“아악! 저리 가!!”

“······!”

절박하면서도 명료한 목소리였다. 그녀를 중심으로 형체 없는 파장이 터져 나왔다. 불현듯 다가오던 아벨의 동작이 멈췄다. 그가 이릴의 외침을 나지막이 되뇌었다.

“저리···가.”

“···응?”

이릴의 눈이 커졌다. 아벨은 팔을 뻗던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파르르 떨려오는 눈가만 제외하면 밀랍 인형이라 해도 믿어질 지경이었다.

“도, 도망쳐야 해···.”

영문 모를 상황이었지만 절호의 기회였다. 슬금슬금 움직이던 이릴이 그의 굳어버린 팔 아래로 몸을 숙여 빠져나갔다.

“누구 없어요?! 도와주세요!”

이릴이 소리쳤다. 허나 적막한 거리에서 답변은 돌아오지 않았다. 시체들을 피해 가며 달려간 그녀가 막 현관문 고리를 쥐려는 차였다. 갑자기 흐려져 있던 아벨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이런 망할 계집애가!”

“꺄악!”

아벨이 손을 뻗어 이릴의 머리카락을 잡아챘다. 그리고 그대로 잡아당겨 따귀를 후려쳤다. 철썩! 거칠게 튕겨 나간 그녀가 피 웅덩이에 처박혔다.

“아윽!”

고개가 젖혀질 정도로 강하게 맞아서 그런지 머리가 멍했다. 이릴이 얼굴을 부여잡은 채 고개를 들었다. 한 발 늦은 통증이 얼얼하게 전해져 오고 있었다.

터진 입술에서 새빨간 피 한 방울이 흐르고 있었다. 등 뒤에서 물컹한 감촉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린 그녀는 자신이 머리 없는 주검들 사이에 앉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 미안해요···!”

이릴이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아벨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자신의 손바닥과 그녀의 얼굴을 번갈아서 쳐다보고 있었다. 앞머리를 한 번 쓸어넘긴 그가 입을 열었다.

“후우···미안하구나. 나도 모르게 그만.”

말투에서 정말로 당황했던 것이 느껴졌다. 이릴은 말없이 그를 노려보았다. 누군가에게 손찌검을 당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토록 주의했음에도 다시 걸려들 뻔했군. 역시 네 힘은 너무 위험해.”

“힘이라니···저, 저는 그런 거 몰라요.”

이릴은 다시 주방 쪽으로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로난이 선물해준 하얀 원피스가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그렇겠지. 만약에 네가 그 힘을 제어할 수 있었다면 나는 영원히 너희 남매를 찾지 못했을 테니까. 살면서 이상하다 생각한 적 없니? 그런 미모를 타고났는데 왜 지금까지 아무도 너를 건드리지 않았을까? 왜 평화로운 나날이 당연하다는 듯이 이어졌을까?”

“그, 그건···사람들이 착해서···.”

“웃기지 마라. 인간이라는 종족의 본질은 그렇게 선하지 않아. 너희 남매가 평온을 영위한 비결은 네가 그 벌레들과 살아가는 삶을 아름답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벨이 말했다. 격양된 말투에서는 원인 모를 광기가 느껴졌다. 가까스로 감정을 추스른 그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잡설이 길었군. 이제 가자.”

“시, 싫어···!”

이릴은 반사적으로 도마에 놓인 식칼을 집어들었다. 칼자루를 쥔 두 손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아벨이 코웃음을 쳤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마라. 그렇게 떨리는 손으로 뭘 하려고 그러지?”

아벨은 그녀를 무시한 채 손을 뻗었다. 이릴이 눈을 질끈 감고 식칼을 휘둘렀다.

"오, 오지 마!”

공격이라 부르기에도 민망한 동작이었다. 평생 농사만 짓던 아가씨니 당연한 일이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아벨이 그녀의 뒤로 슬쩍 돌아갔다. 탁! 손날을 세운 그가 이릴의 뒷목을 가볍게 내리쳤다.

“헉···!”

이릴의 몸이 앞으로 무너졌다. 아벨이 고꾸라지려는 그녀를 받쳐 안았다. 의식을 잃었음에도 고사리 같은 손은 아직 식칼의 자루를 놓지 않고 있었다.

“내 원. 그래도 우리의 혈족이라는 건가.”

그 모습을 본 아벨이 헛웃음을 쳤다. 비록 희석되었어도 피는 속일 수 없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괜히 들고 다니다가 찔리기라도 하면 안 될 일이었다. 그가 이릴의 손에서 식칼을 빼앗으려는 순간이었다.

쉬릭! 한순간 이릴의 손에 쥐어진 식칼이 급가속하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음?”

아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순간 자신의 뺨 위로 붉은 선이 그어졌다. 촥! 상처가 벌어지며 피가 튀어 올랐다.

“무슨···!”

뒤늦게 찾아온 쓰라림이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아벨이 뭐라 말하려던 찰나 다시 공격이 날아왔다. 그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이었다. 쉬이익! 예리한 식칼이 그의 콧잔등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지나갔다.

찰나 이릴을 잡고 있던 팔에서 힘이 풀렸다. 몸을 웅크린 이릴이 그의 속박을 빠져나갔다.

“이런.”

아벨이 뒤늦게 눈치챘으나 이미 이릴은 그의 속박을 벗어난 뒤였다. 세 걸음 밖으로 벗어난 그녀가 다시 식칼을 고쳐 잡았다. 아까와는 달리 한 손으로 쥐고 있었지만, 되려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매섭구나. 실력을 감추고 있었나?”

아벨이 물었다. 피를 본 것은 몇백 년 만에 처음이었다.

허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릴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길고 풍성한 머리카락은 버들잎처럼 늘어진 채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거 참.”

아벨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노을처럼 아름다운 눈동자는 어느 곳도 보고 있지 않았다. 틀림없이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무의식 중의 잠재력 발현···같은 건가.’

뭐가 어떻게 된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해야 하는 일에는 변함이 없었다. 칼자루에 손을 얹은 아벨이 중얼거렸다.

“가급적이면 피를 보지 않고 데려가려 했는데 말이지.”

혀를 쯧쯧 차던 아벨이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그를 중심으로 일어난 반짝거리는 마나가 돌풍처럼 휘몰아쳤다. 탓! 아벨과 흐느적거리던 이릴의 형체가 동시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

“누나. 나 왔어.”

똑똑. 로난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상단이 많이 들어온 날이라 그런지 제도의 거리는 평소보다 북적거렸다.

“저, 저게 뭐야? 드래곤?”

“우와. 멋지다.”

행인들의 시선은 모두 시타에게 쏠려 있었다. 파란 하늘 아래 앉아 있는 시타의 모습은 도시 한복판에 자라난 거목을 연상케 했다.

푹신푹신한 털과 그래도 귀여움이 남아 있는 얼굴이 그들이 괴물이 나타났다며 비명을 지르면서 도망치는 것을 방지하고 있었다. 이릴을 볼 생각으로 신이 난 시타가 눈웃음치며 울었다.

“뺘!”

“늦어서 미안해. 갑자기 마무리 지을 일이 생겨서. 그래도 최대한 빨리 왔어.”

현관문 안쪽은 잠잠했다. 괜스레 미안해진 로난이 사과했다. 그는 펠그란드 산맥의 일을 마무리 짓느라 약속 시각인 정오에서 이십 분 정도를 늦고 말았다.

그래서 로난의 손에는 이릴이 좋아하는 수선화가 한 다발 들려 있었다. 사죄의 의미이자, 간만에 꽃을 보고 기뻐하는 누이의 얼굴을 보고 싶어서 직접 따 온 것이었다. 못 들었나 싶어서 로난이 문을 다시 두드렸지만, 이번에도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잠깐 나갔나? 일단 들어갈게.”

로난이 문을 열었다. 현관문은 평소처럼 열려 있었다. 언제나 다름없이 깔끔한 실내가 눈에 들어왔다.

“누나?”

쿵. 다시 현관문을 닫자 외부의 소음이 확 줄어들었다. 집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맛있는 냄새가 나서 고개를 돌리니 음식이 잔뜩 차려진 식탁이 눈에 들어왔다.

이릴이 차려 놓은 생일상인 듯했다. 감자 스튜가 중앙에 놓여 있는 것을 보면 확실했다. 문득 주방을 둘러보던 로난이 미간을 좁혔다.

“뭔가 이상한데···?”

자꾸 영문 모를 위화감이 들었다. 누나만 없을 뿐, 틀림없는 우리 집이었지만 뭔가 이상했다. 불현듯 그의 시선이 주방 한구석에 놓여 있는 식칼에 닿았다.

“음?”

식칼에는 붉은 핏방울 몇 개가 맺혀 있었다. 그걸 보는 순간 로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섬뜩한 적색으로 아롱이는 혈흔은 가축의 것이 아니었다.

“설마.”

위화감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로난이 반사적으로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챙그랑! 그가 허공에 대고 검을 휘두름과 동시에 내부의 풍경이 유리가 깨지듯 산산이 무너져 내렸다.

“뺘아아?!”

굉장히 수준이 높은 환영 마법이었다. 창문 밖에서 실내를 바라보던 시타가 경악성을 터트렸다. 이윽고 나타난 집의 진짜 모습에, 로난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이게 뭐야 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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