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6. 이릴(2)
#276
“들어갈게요?”
로난이 말했다. 어쩐지 느낌이 썩 좋지 않았다. 끝내 엘시아의 대답을 듣지 못한 그가 계단 아래로 발걸음을 옮겼다.
첫 번째 칸을 밟는 순간 출입문이 저절로 닫히기 시작했다. 바람 빠지는 소리를 듣고 놀란 시타가 머리를 뒤로 뺐다.
“뺘잇?!”
“잘 지키고 있어. 너무 추우면 남쪽으로 내려가서 기다려도 돼.”
뒤를 슬쩍 돌아본 로난이 손을 흔들었다. 출입구의 크기에 비해 덩치가 너무 커서 도저히 같이 들어갈 수가 없었다.
“뺘바!”
“그래. 다녀오마.”
시타는 뭘 그리 걱정하냐는 듯 방실방실 웃었다. 추위에 떨던 처음과는 달리 그새 적응한 모양이었다. 마음을 한결 놓은 로난이 걸음을 내디뎠다.
저번에도 느낀 거지만 계단이 정말 깊었다. 용암이 흐르는 곳까지 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계단이 끝난 자리부터 펼쳐진 복도의 천장에서는 이상하게 생긴 등불들이 줄지어 늘어선 채 빛을 뿌리고 있었다.
‘다시 봐도 참 신기한 곳이야.’
태양의 편린을 가져다 붙여 놓은 것 같은 광원은 발광 다이오드인지 뭔지 하는 물질로 만들었다고 했었다. 인류가 가장 찬란한 문명을 꽃피우던 시기에 만들어졌던 유적이라고 했던가. 과연 그럴 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감상에 젖어 있을 시간은 없었기에 로난은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저번에 왔을 때 구조를 대강 파악한 덕에 헤매지 않을 수 있었다. 마침내 구원자의 방 앞에 도달한 그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시발. 여기 암호는 모르는데.”
구원자가 투병 중인 방의 철문은 굳건하게 닫혀 있었다. 유적의 입구에서 본 것보다 조금 더 복잡하게 생긴 철판이 문짝 옆에 붙어 있었다.
‘좆됐군.’
한 번이라도 봤다면 기억했을 터였다. 허나 엘시아의 어깨에 가려진 탓에 번호 몇 개를 보지 못했다. 삑삑거리는 소리가 제법 많이 들려왔던 걸로 보아 족히 서른 자리는 되는 것 같던데.
“이 여자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야?”
낭패였다. 로난이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그냥 문을 베어 버릴까 하는 고민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거의 끝나 가는 일 년의 유예가 그를 조급하게 만들고 있었다. 여기까지 오면서도 엘시아의 기척은 여전히 느껴지지 않았고, 아벨의 피는 그의 안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로난은 저번에 왔을 당시 엘시아가 자신의 피로 구원자의 치료를 시도하는 것을 보았었다. 지나치게 근거 없는 자신감이었지만 뭔가 똑같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방법은 비슷할 텐데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그가 칼자루를 톡톡 두드리며 고민하던 차였다.
-콰아아아앙-!!
“니미, 깜짝이야.”
별안간 천장 쪽에서 굵직한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복도가 미세하게 흔들리며 천장에 붙어 있던 먼지들이 떨어져 내렸다.
“뭐야?”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상당히 큰 폭발이었다. 충격이 여기까지 전해져 온 것만으로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었다.
깊숙한 위치도 위치였지만, 애초에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씨앗인지 뭔지를 지키기 위해 설치되었던 구조물이 아닌가.
‘화산은 아닌데.’
심상치 않았다. 일단 자연적인 폭발은 아닌 것 같았다. 마나로 강화된 로난의 허벅지가 터질 듯이 부풀었다. 쾅! 폭심지의 위치를 가늠한 그가 복도 쪽으로 뛰쳐나갔다.
쾅! 쾅! 한 번 지면을 박찰 때마다 주변 풍경이 빠르게 변했다. 복도는 길고 넓었으나 마나로 각력을 강화한 덕에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여기군.’
로난이 멈춰 섰다. 천장 저편에서 마나가 맥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폭발에서 느껴진 파장과 동일한 마나에는 네뷸라 클라지에 특유의 반짝거림이 함유되어 있었다. 엘시아의 것은 아니었다. 다수 인원이 뒤엉켜 싸우는 듯한 소음 또한 옅게 들려오고 있었다.
“또 무슨 개짓거리를 하고 있는 거냐.”
로난이 으르렁거렸다. 자세한 영문은 모르겠지만 그 잡놈들이 행패를 부리고 있는 듯했다. 바르카도 그렇고, 대륙의 끝자락까지 와서 이러고 싶을까.
다행히도 지상과 가까운 곳이라 뭐라도 해 볼수 있을 것 같았다. 로난이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이미 진홍색으로 물든 라만차의 검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조금 전에는 은신처로서의 기능을 상실할까 걱정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까짓꺼 고쳐 주면 그만이었다.
****
“투항해라, 배신자!”
대주교 파사가르데가 외쳤다. 마나가 난폭하게 소용돌이치며 그의 손아귀로 모여들고 있었다. 그는 얼어붙은 바다 한복판에서 대규모 전투에 임하는 중이었다.
설원 위로는 그의 마법이 작렬한 흔적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었다. 깊고 넓게 파인 구덩이는 꼭 별이 떨어진 자리 같았다. 함께 망령의 바다까지 온 신도들이 파사가르데의 옆에서 방어 주문을 영창하고 있었다.
“물러가라, 짐승 놈들!”
“커허엉!”
공격에만 집중하는 대주교를 대신하는 것이었다. 반투명한 야수 백여 마리가 방어막을 포위한 채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하위, 중위급 정령들이 손발톱을 휘두를 때마다 방어막 위로 조금씩 금이 가고 있었다.
“대주교님을 믿고 버텨라!”
“물러서지 마!”
하지만 신도들의 얼굴에서는 걱정이라는 것을 찾아볼 수 없었다. 대주교의 실력을 믿기 때문이었다.
파사가르데는 그 믿음에 보답하려는 것처럼 왼손으로 땅을 짚었다. 콰아아앙! 방어막 주변으로 폭발이 일어나며 정령들이 단번에 소멸했다. 그가 재차 외쳤다.
“당장 항복하지 않겠다면 한 방 더 먹여주마. 지금이라도 머리를 조아려라!”
노기 서린 외침이 설원 위에 울려 퍼졌다. 엘시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마법이 만들어낸 구덩이의 바로 옆에서 회백색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서 있었다.
“···곤란하네.”
엘시아가 중얼거렸다. 갈수록 상황이 나빠지고 있었다. 하지만 물러설 수는 없었기에 그녀는 나지막이 주문을 영창했다.
엘시아의 뒤편에 붉은 마법진이 그려지더니, 붉은색이 도는 육지 거북 한 마리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체고가 3m에 이르는 거대한 덩치가 인상적이었다. 그녀가 말했다.
“부탁해요. 바야르도.”
“흐아아암···.”
고위 화염 정령인 바야르도였다. 엘시아의 앞을 가로막은 채 눈을 끔뻑이던 바야르도가 입을 벌렸다. 콰아아아앙!! 거대한 목구멍 깊숙이서 일렁이던 불길이 파사가르데를 향해 쏟아졌다.
“부질없는 짓을!”
파사가르데가 외쳤다. 체내의 마력을 증폭시킨 그가 엘시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녀 주변의 공간이 한 점으로 좁혀지나 싶더니 대폭발이 일어났다.
콰아아아앙-!! 무자비한 굉음이 얼어붙은 바다를 흔들었다. 북풍이 연기를 날려 버린 자리에 엘시아의 모습이 드러났다. 한계치 이상의 피해를 입은 바야르도가 역소환되며 소멸하고 있었다.
“콜록, 콜록···!”
“하하하! 꼴이 우습구나. 교단을 등지고 나간 배신자가 우리의 힘으로 연명하다니!”
파사가르데가 광소를 터트렸다. 기괴한 색채로 일렁거리는 역장이 엘시아의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예전에 구원자에게 직접 받은 별의 가호였다.
‘정말 위험하네.’
그녀가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설마 고위 정령까지 한 번에 갈 줄은 몰랐다. 아무리 상대가 과거에 여명 마탑의 탑주 노릇까지 했던 마법사라고 해도, 이 정도로 밀릴 일은 아니었다.
거의 보름 동안 밤을 새워서 연구에 매진한 탓에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하이란을 부르기에는 마나가 부족했고, 어중간하게 약화된 정령들은 힘을 제대로 쓰지 못했다.
개전 당시의 기습 또한 치명적이었다. 첫 번째 폭발에 휘말린 그녀의 옷가지는 넝마가 되어 펄럭거리고 있었다.
항복. 항복이라. 그 단어를 되뇌던 엘시아가 처음으로 파사가르데를 돌아보았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거절하겠습니다.”
“하!”
다시 주문을 영창하는 엘시아를 본 파사가르데가 코웃음 쳤다. 그래도 옛 상관인지라 우대해 주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협상은 글러먹은 모양이었다.
“오냐, 그렇다면 흔적도 없이 날려주마!”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저런 더러운 배신자는 먼지가 되어 사라져야 마땅했다. 그가 다시 한 번 특제 폭발 마법의 주문을 영창하려던 차였다. 촤악! 갑자기 발치에서 적색광이 번쩍거렸다.
“윽, 뭐야?”
무언가 빠르게 눈앞을 스치며 지나간 것 같았다. 그가 저도 모르게 감았던 눈을 뜨는 순간이었다. 잘려나간 왼팔이 눈에 들어왔다.
“···어?”
파사가르데의 눈이 커졌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왼손을 중심으로 모여들던 마나가 힘없이 흩어지고 있었다.
“이게 무슨···.”’
“대, 대주교님!”
신도들이 당혹성을 터트렸다. 절단면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설원을 적시고 있었다. 엘시아가 한 짓인가? 분명히 방어 마법을 사용했는데?
타는 듯한 통증이 몰려오고 있었다. 현실을 자각한 그가 비명을 내지르려던 차였다. 퍼억-! 다시 한 번 발치에서 적색광이 번쩍거리더니 뭔가 예리한 것이 목울대를 가르며 지나갔다. 파사가르데의 몸과 머리가 분리되었다.
“······!”
유언은 없었다. 그제야 땅속에서 무언가 솟아난 것을 눈치챈 몇몇 신도가 고개를 들었다. 붉은 초승달 두 개가 저 먼 하늘을 가르며 날아가고 있었다.
“저, 저건?!”
그들은 머지않아 초승달의 정체가 검기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공황에 빠진 신도들이 머리 잘린 대주교와 정체 모를 적의 습격 중 어떤 것에 더 신경을 기울여야 하는지 고민하던 와중이었다. 쾅! 쾅!! 먼젓번의 것과 동일한 검기 일곱 개가 지면을 가르며 솟구쳐 올랐다.
“끄아아악···!”
“허억!”
모두 아홉 개의 붉은 초승달이 밤하늘을 향해 쏘아졌다. 잘려나간 몸뚱어리들이 허공에서 춤을 췄다. 하나의 폭이 5m에 달하는 거대한 검기는 자신이 나아가는 진로에 있는 모든 것을 베어 버렸다.
“···으응?”
엘시아의 눈매가 가늘게 좁혀졌다. 그녀는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주문을 영창했더라도 한발 늦었을 타이밍이었는데.
우르릉···! 얼음으로 이루어진 바닥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붕괴하는 지면 위로 웬 그림자 하나가 솟구쳐 올랐다. 발아래의 참상을 본 청년이 미간을 좁혔다.
“으. 더러워.”
양념장을 엎어 놓은 것 같은 풍경이었다. 위에 뭐가 있을 것을 예상해서 검기를 쏜 것은 맞는데, 생각보다 양이 많고 더 잘게 썰려 있었다. 청년의 얼굴을 본 엘시아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로난 님?”
“뭐야, 엘시아?”
로난이 눈썹을 치켜떴다. 그토록 찾아 헤매도 보이지 않던 여인이 저기 있었다. 탓! 그는 비명을 질러 대는 신도들을 무시한 채 엘시아의 앞에 착지했다.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어떻게 된 거에요?”
“···제가 묻고 싶은 말입니다만.”
엘시아는 여전히 벙찐 채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헷갈리고 있는 사람 같았다. 로난은 손을 뻗어 꾀죄죄해진 엘시아의 머리카락을 털어 주었다.
“뺘아아아-!!”
불현듯 머리 위에서 익숙한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개를 든 로난이 헛웃음을 쳤다. 시타가 네 장의 날개를 퍼덕거리며 날아오고 있었다.
“빨리도 온다.”
로난이 픽 웃었다. 잡놈들은 시타에게 맡겨 버리면 될 터였다. 그러고 보니 딱히 강한 놈도 없어 보이는데 그 폭발은 누가 일으킨 건지가 의문이었다.
‘엘시아가 한 건 아닌 것 같은데.’
여러모로 궁금한 것이 많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로난이 지금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낸 그가 엘시아에게 말했다.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얼른 처리해 버리죠. 제가 좀 많이 급해서요.”
“···무슨 일인지 설명이 필요할 것 같군요.”
“길게 말할 필요도 없어요. 자, 받아요.”
안주머니를 뒤적거리던 로난이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작은 병에는 보호 마법이 덕지덕지 발려 있었다. 투명한 유리 안쪽으로는 살짝 보랏빛이 감도는 액체가 찰랑거리고 있었다.
“설마.”
찰나 엘시아의 얼굴이 굳어졌다. 액체의 정체를 눈치채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파사가르데와의 전투에서도 흐트러지지 않던 호흡이 가빠지고 있었다. 그녀의 입이 나지막이 벌어졌다.
“······정말 구했군요. 당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