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의 천재칼잡이-277화 (277/333)

277. 이릴(3)

#277

“이런. 또 저지른 건가.”

문을 열어본 아벨이 혀를 찼다. 복도에서부터 피비린내가 코를 찌르나 싶더니 역시나였다. 이릴이 지내도록 마련한 방은 악몽에나 나올 것 같은 지옥으로 변해 있었다.

“화려하기도 하지.”

호위와 수발을 담당하는 인원들은 모조리 갈기갈기 찢겨서 피와 내장으로 방을 장식하고 있었다. 애써 가장 좋은 가구와 옷가지를 마련했는데, 모두 피가 묻어 못 쓰게 되었다.

이릴은 방 한가운데서 무릎을 꿇은 채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머리카락과 피부가 워낙에 하얘서 그런지 묻은 피가 더욱 잘 보였다. 가녀린 손에는 과일 깎는 과도 한 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그녀를 제외한 생존자는 한 명밖에 없었다. 르탄시에와 함께 이릴을 보살피도록 명령받은 주교 올리비아였다. 그녀는 방의 구석에 틀어박힌 채 잘려나간 자신의 양 손목을 보며 흐느끼고 있었다. 아벨이 말했다.

“애썼군. 올리비아.”

“끄윽···끄으으윽, 교주님···!”

올리비아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상처는 비단 잘려나간 손목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몸 곳곳에 새겨진 자상은 전부 뼈까지 닿을 만큼 깊었다.

의식을 잃은 이릴은 몇 초 만에 방에 있던 모두를 처치하고 자신을 불구로 만들었다. 벌어진 그녀의 입술 사이로 원망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 저건 괴물입니다. 통제가 안 되는···도대체 어디에 쓰시려는 겁니까···?”

“남의 조카를 보고 괴물이라니. 너무하군.”

“죽여야 합니다. 부, 분명 내버려 둔다면 교단의 적이 될 겁니다. 예?”

아벨은 대답하지 않았다. 분명 그는 이릴을 교단의 성녀로 만들 거라 말했었지만, 병신이 된 올리비아에게 그런 걸 떠올릴 여유는 없었다. 아벨이 말했다.

“그렇다기에는 의식을 잃지만 않으면 그냥 평범한 여자애잖나. 솔직히 이번 경우도 자네의 실책일 테고. 무리해서 뭔가를 시키려다가 의식을 잃었고, 이 사달이 났겠지. 안 그런가?”

“저, 저는 딱히 아무것도···.”

“그럼 내 조카의 목에 난 손자국은 뭔가. 응?”

아벨이 싸늘하게 읊조렸다. 올리비아의 얼굴이 굳었다. 그의 말마따나 이릴의 목에는 조른 듯한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요, 용서해 주십시오. 하도 발버둥을 치는 바람···”

뒤늦게 잘못을 시인한 올리비아가 뭐라 변명하려던 차였다. 그녀의 목 위로 붉은 선이 그어짐과 동시에 머리가 떨어졌다. 푸확! 절단면에서 솟구친 피가 아벨의 얼굴을 적셨다.

“후···조금만 더 하면 되는데 왜 다들 말을 안 듣는 건지.”

아벨이 한숨을 내쉬었다. 칼에 묻은 피를 털어낸 그가 납도했다. 착실하게 진행되어 가는 최종장의 이야기와는 별개로 일은 고되지는 것 같았다.

“케엑, 켁!”

“으음, 일어났니?”

그때 뒤쪽에서 맹렬한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아벨이 고개를 돌렸다. 잠에서 깨어난 이릴이 목을 부여잡은 채 콜록거리고 있었다.

“콜록, 콜록···이, 이건!”

“네 작품이지. 역시 피는 속일 수 없더구나.”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이릴이 헛숨을 들이켰다. 그녀는 이 학살을 저지른 것이 자신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아벨은 그녀를 나무라기는 커녕 다정하게 웃어 보였다.

“바로 주치의를 불러 주마. 몸이 차가워지면 안 되니 먼저 씻고 새 옷으로 갈아입거라. 새로운 방은 곧 마련해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다, 당신들과 하고 싶은 이야기는 없어요···돌려보내 주세요.”

이릴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슬슬 한계였다. 아무것도 필요 없으니 그냥 동생과 함께 있고 싶었다. 눈물을 뚝뚝 흘리던 그녀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로난···.”

“당연히 돌려보내 줄 거란다. 일이 끝나면 말이지. 너무 그러지 말고 내 말을 들어 보거라 이릴. 어차피 세상은 곧 종막을 맞이한단다.”

별안간 아벨이 이릴의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귀중한 보물을 건드리듯 조심스러운 동작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모두가 공포와 절망 속에 죽음을 맞이하겠지만, 네가 있다면 다르단다. 너는 그들에게 평안한 죽음을 선사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야. 그간 동생과 주변 사람들만 아우르던 너의 상냥함으로 세상을 보듬어줄 생각은 없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모르겠어요.”

이릴이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사람이 하는 말은 언제나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벨이 말을 이었다.

“너라면 가능하다. 네 힘이라면 말이다. 자, 너를 성녀로 완성시켜 줄 물건이 완성되었단다.”

“···네?”

이릴이 갸웃거렸다. 딱! 별안간 아벨이 손가락을 튕김과 동시에 닫혀 있던 방문이 열렸다. 대주교 르탄시에가 다소곳이 걸어 들어왔다.

“저건···?”

이릴의 눈이 커졌다. 르탄시에의 손에는 고급스러운 방석이 들려 있었다. 그 위에서는 작은 티아라 하나가 찬란한 광채를 흩뿌리고 있었다.

알알이 박혀 있는 보석은 밤하늘의 별빛처럼 서늘한 백색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아름답기는 했지만, 썩 좋은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

“그럼 구원자의 위치를 들킨 건 아니네요. 그냥 재수가 없던 거구나.”

“맞아요. 불행 중 다행이죠. 아무래도 주교씩이나 되던 인재가 죽었으니 교단 차원에서 조사를 나온 것 같아요.”

엘시아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두 사람은 잠시 대기하는 동안 밀렸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지금의 주제는 갑자기 대주교 파사가르데가 이곳 망령의 바다까지 행차한 이유였다.

‘마지막까지 구질구질하군. 빌어먹을 고양이 같으니.’

로난이 질린다는 듯이 혀를 찼다. 대주교가 이끄는 추격대는 바르카의 급사에 대한 수사를 위해 파견된 것이었다. 만약 엘시아가 빠르게 요격에 나서지 않았거나 패배했다면 구원자는 틀림없이 살해당했을 터였다.

“···슬슬 끝나 가는 것 같네요.”

문득 설원을 바라보던 엘시아가 중얼거렸다. 대주교의 습격 때문에 벌어진 난장판은 빠르게 일단락되어가고 있었다.

아직 살아 있는 네뷸라 클라지에의 신도들은 엘시아에 의해 하나 둘씩 소탕되고 있었다. 처참한 비명이 산발적으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흐아아악! 살려줘!”

“에, 엘시아 님, 부디 자비를···커어억!”

워낙에 정령의 수가 많아서 로난이 나설 필요도 없었다. 얼음을 육체 삼아 현신한 정령들이 목숨을 구걸하거나 달아나는 신도들을 가차없이 찢어 발기고 있었다.

‘이 여자도 보통은 아니군.’

그런 참극을 지켜보는 엘시아의 얼굴에는 일말의 변화도 없었다. 유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손속에 자비가 없는 것이 과연 네뷸라 클라지에의 전 대간부 다웠다. 시타는 허공을 선회하며 곳곳에 뿌려진 피를 흡수하고 있었다.

“뺘하하!”

배가 불러 기분이 좋아진 시타가 웃음을 터트렸다. 핏방울이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걸 보니 아무래도 시간이 제법 걸릴 것 같았다. 시타를 쳐다보던 엘시아가 입을 열었다.

“꿈새라니. 귀한 아이를 동반자로 데리고 다니는군요.”

“네 뭐. 어쩌다 보니.”

로난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고 보니 꿈새라는 단어를 듣는 것도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생김새와 능력이 굉장히 특이한데, 어버이가 어떻게 되죠?”

“나도 잘 몰라요. 낳은 건 마르페즈라는 쬐깐한 털복숭이인데, 걔는 저런 괴물은 아니었거든요.”

로난이 어깨를 으쓱였다. 시타와 만난 지도 벌써 삼 년이라는 시간이 되어 가지만 여전히 출생의 비밀은 베일에 싸여 있었다.

주변의 영향을 받아 태어나는 지고의 환상종. 바렌은 최근까지도 꿈새와 관련된 연구를 하고 있었으나 끝내 그 비밀을 밝혀내지 못하고 있었다.

‘궁금하긴 하군.’

로난이 입맛을 다셨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한번 파헤쳐볼 만한 주제였다. 그때 복구공사를 하던 얼음 골렘 하나가 두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구오오오!”

“아. 다 됐나 보군요.”

검기에 으깨진 바닥은 상흔 하나 없이 복구되어 있었다. 그녀가 원소의 정령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정령사라 가능한 일이었다. 엘시아가 임시로 만들어진 출입구를 가리키며 말했다.

“어서 들어가죠. 시간이 얼마 없어요.”

엘시아는 종종걸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로난은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일부러 남겨 둔 작은 통로는 엘시아와 로난이 유적에 진입하는 순간 닫혀 버렸다. 가파른 계단을 따라 내려가던 엘시아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유적에는 어떻게 들어오신 거죠? 저쪽 출입구도 부수신 건가요?”

“설마요. 그냥 암호 누르고 들어왔죠.”

“···24자리 숫자를요?”

“네. 자랑은 아닌데, 저번에 그쪽이 누르는 걸 슬쩍 봤거든요.”

로난이 면목 없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엘시아는 그대로 벙쪄 버렸다. 지금 중요한 건 암호를 봤다는 게 아니지 않나.

“···그렇군요. 어쨌건 더 늦기 전에 와서 다행이에요. 최근 들어 구원자님의 상태가 더 나빠지고 있었거든요.”

“뭐라고요?”

“이대로라면 한 달을 버티기에도 어려운 상황이었어요. 당신이 와서 얼마나 다행인지···.”

엘시아의 목소리에는 슬픔과 안도가 어우러져 묻어나고 있었다. 그녀는 지난 한 달 동안 구원자의 상태가 더욱 악화되었다고 설명했다.

원래는 이길 상대인 파사가르데에게 밀린 이유도 구원자의 치료를 위해 밤낮 없이 동분서주한 탓이었다. 로난이 질문했다.

“갑자기 왜 그렇게 된 거죠?”

“아마도 아벨이 강해진 거겠죠. 아무리 그렇다지만 천 년도 전에 입은 상처에 영향을 미칠 정도라니···이대로라면 위험해요.”

“구원자는 구할 수 있을까요.”

“이게 정말로 아벨의 피라면요.”

엘시아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복잡한 감정 변화를 겪는 와중에도 그녀의 눈빛은 확신에 차 있었다. 두 사람은 머지않아 구원자의 방에 도착했다. 푸쉬이이익···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철문이 좌우로 개방되었다.

“···젠장.”

구원자를 본 로난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는 여전히 유리관 속에 갇혀 있었다. 엘시아의 말마따나 가슴에 난 상처가 눈에 띄게 악화되어 있었다. 자상을 중심으로 확장하고 있는 얼룩은 이제 상반신 전체를 뒤덮기에 이르렀다.

솔직히 죽은 줄 알았다. 다행히도 코와 입에서 나오는 물거품이 그가 호흡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하얀 가운을 걸친 엘시아가 각종 기계장치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그럼, 시작할게요.”

그녀는 일 초도 시간을 낭비할 생각도 없어 보였다. 구원자 때문인지, 누이가 붙잡혀 갔다는 로난의 사정을 참작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결의에 찬 표정을 본 로난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믿어요.”

심호흡한 엘시아가 곧바로 치료에 돌입했다. 로난이 예상했던 것처럼 지난번과 과정이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아벨의 피와 그녀가 개발한 약물이 구원자의 몸과 이어진 대롱으로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제발···.”

엘시아가 입술을 짓씹었다. 다시 한 번 구원자를 쳐다본 로난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렇게 오래 잤으면 슬슬 일어나 아저씨. 당신 딸이 잡혀 갔다고.

마지막 한 방울이 구원자의 몸으로 흘러들어가는 순간이었다. 줄곧 닫혀 있던 그의 눈꺼풀이 달싹이더니 노을빛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엘시아가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구, 구원자 님···제 목소리가 들리시나요?”

가녀린 어깨가 불안정하게 들썩거리고 있었다. 엘시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당장에라도 물을 쏟아낼 것처럼 젖어 있었다.

대답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로난은 이를 악무는 것으로 감정을 억눌렀다. 여기까지는 저번과 같았다. 엘시아가 다시금 뭐라 말하려던 차였다. 영원히 다물려 있을 것 같던 구원자의 입술이 서서히 벌어졌다.

“무슨 말을···해야 할지 모르겠군.”

“아아···!”

엘시아의 눈이 커졌다. 정체되어 있던 눈물이 와락 쏟아져 내렸다. 황급히 달려간 로난이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지려는 그녀를 붙잡았다.

“젠장, 괜찮아요?”

“저, 저는···저는···!”

엘시아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이렇게 다채로운 표정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인 줄은 미처 몰랐다. 로난의 시선은 그녀를 부축하는 와중에도 구원자에게 머물러 있었다. 불현듯 로난과 눈을 맞춘 구원자가 말을 이었다.

“오랜만이구나···내 아들아.”

그 말을 듣는 순간 로난의 몸이 굳었다. 머릿속이 벼락이 떨어진 것처럼 새하얗게 변했다. 이럴 때는 무슨 말을 해야 하더라? 고민하던 로난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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