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의 천재칼잡이-278화 (278/333)

277. 구원자(4)

#278

“···안녕하쇼.”

로난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구원자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여기까지는 잘한 것 같은데 문제는 더는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더럽게 어색하네.’

엘시아에게 슬쩍 눈치를 주었지만, 그녀는 구원자의 부활에 기뻐하며 열심히 훌쩍거리느라 로난의 얼굴을 볼 겨를이 없었다.

“흑···흐윽···드디어···.”

‘빌어먹을.’

로난이 입술을 비틀었다. 인사를 마친 구원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젠장, 오래간만에 본 아들한테 하고 싶은 말도 없나. 머리를 긁적거리던 로난이 운을 띄웠다.

“어···몸은 좀 어떻수?”

“한결 낫구나. 훨씬 좋아졌다.”

“아닌 것 같은데.”

로난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 아까보다 호전된 것 같기는 했지만, 살아 있는 것이 신기한 치명상임에는 변함이 없었다. 아이의 머리통만 한 구멍 너머로는 여전히 뒤편의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음, 급한 고비는 넘겼다고 표현하는 게 맞겠구나. 자가 치유가 가능한 수준까지는 나았으니 이제는 시간만 있으면 된단다.”

“그럼 다행이고요.”

“설마 정말로 아벨의 피를 구해 올 줄이야···네 용기와 무력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구나.”

구원자가 말했다. 그의 말마따나 상처는 천천히 아물고 있었다. 헛걸음을 한 건 아닌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다만 양심에 찔리는 부분이 하나 있었다. 로난이 멋쩍게 대답했다.

“그, 나는 그냥 떨어진 걸 주워오기만 했어요. 누가 그 괴물에게 상처를 입힌 지는 몰라요.”

“그런가. 네가 아니라면 필히 이릴 그 아이가 한 거겠지.”

“뭐라? 누나가요?”

로난의 눈이 커졌다. 이게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우리 누나로 말할 것 같으면 닭 모가지 비트는 것도 무서워서 나한테 부탁하는 사람이었다.

고기 요리를 해 주겠다며 자신만만하게 굴다가도, 피를 볼 일이 생기면 울먹거리며 찾아오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그런 사람이 네뷸라 클라지에의 교주와 검을 겨루고 상처까지 입혔다고? 차라리 마르야를 염력으로 끌어당겨서 키스를 때려 박는 아셀이 더 상상하기 쉬웠다. 구원자가 말을 이었다.

“네 누이···그러니까 이릴은 너보다 훨씬 더 진하게 피를 물려받았단다. 물론 일신의 무력은 네가 우월하지만, 그 아이도 자신의 몸을 지킬 수준은 되는 거지.”

상식을 설명하듯 담담한 목소리였다. 로난은 여전히 벙찐 채 칼부림을 하는 이릴의 모습을 떠올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설마요.”

“사실이란다. 그 아이의 다른 능력 덕에 무재가 깨어날 기회가 없었을 뿐. 영원히 깨어나지 않기를 바랬건만···.”

“···그렇다고 치죠. 맞아, 물어볼 게 있어요.”

별안간 로난이 손가락을 튕겼다. 갑자기 충격적인 소식을 듣는 바람에 본론을 꺼내는 것이 늦어지고 말았다.

물어보고 싶은 것도, 밀린 이야기도 잔뜩 있었지만 지금은 이릴을 구하는 것만 신경 쓸 때였다. 그가 사정을 설명하려는 차였다.

“굳이 전부 설명할 필요 없단다. 이미 다 보고 있었으니. 이릴이 내 어리석은 동생에게 납치당한 거겠지? 너는 거기에 대한 조언을 구하러 온 거고.”

“뭐야,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로난이 눈썹을 치켜떴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의 대화도 이릴에게 벌어진 일을 모른다면 성립할 수가 없는 대화였다. 하도 흐름이 자연스러워서 눈치채지 못했다.

“별 거 아니란다. 눈은 감았지만 귀는 열려 있었거든. 너와 엘시아가 이 안에서 나눈 대화는 모두 기억하고 있단다.”

“허.”

로난이 헛웃음을 쳤다. 설마 유리관 안에서도 의식이 있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물론 부연설명을 안 해도 된다는 것은 좋은 소식이었다. 구원자가 침음을 흘렸다.

“으음···어쨌거나 아벨이 그 아이를 데려갔다면 별로 상황이 좋지는 않구나. 목적도 목적이지만 분명히 총본산으로 데려갔을 테니 아벨과 대주교들을 한 번에 상대하게 될 테고···.”

“정확해요. 뭐 방법이 없을까요? 날개 달린 대머리들을 막을 방법도 알려주면 더 좋고.”

“···일단 여기서 나가야겠다. 엘시아, 나를 꺼내 다오.”

“네에?!”

갑작스러운 구원자의 요청에 엘시아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새하얀 뺨에는 아직도 눈물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녀가 빠르게 도리질했다.

“하, 하지만 아직 상처가 다 낫지 않았어요. 무리하셨다가는···.”

“어서. 시간이 없다.”

구원자가 단호하게 말했다. 유하던 얼굴에는 어느새 비장미가 감돌고 있었다. 하나뿐인 딸이 납치당해서 그런가. 어쩔 줄 몰라하던 엘시아가 결국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겠어요.”

그녀는 방 한구석으로 걸어가 복잡해 보이는 기계장치를 조작했다. 푸쉬이이익···유리관 내부의 액체가 가라앉으며 출입구가 열렸다.

“아아, 얼마만에 두 다리로 땅을 딛는가···.”

사지를 이리저리 움직이던 구원자가 발을 내디뎠다. 그가 유리관 밖으로 나오는 순간이었다. 탁! 앙상한 다리가 꼬이며 그의 몸이 훅 기울었다.

“이런.”

“구, 구원자 님!”

엘시아가 비명을 질렀다. 로난이 황급히 손을 뻗었다. 다행히도 몸이 바닥과 부딪히기 전에 붙잡을 수 있었다. 그가 걱정 섞인 투로 질문했다.

“젠장, 괜찮은 거 맞아요?”

“그래. 아무래도 오랜만에 움직여서 근육이 놀란 모양이다. 고맙구나.”

구원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막 태어난 사슴처럼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허둥지둥 달려온 엘시아가 그의 나신에 두터운 로브를 걸쳐 주었다.

“이, 이거 입으세요. 감기라도 걸리시면 안 돼요.”

“그래. 고맙군.”

로난의 미간이 좁혀졌다. 당장에라도 유리관에 돌려 놓고 마저 절여야 하는 게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본인이 괜찮다고 하니 어쩔 수 없었지만서도. 로난과 마주보고 선 구원자가 입을 열었다.

“···그럼 답변을 해야겠지. 지금의 너로서는 불가능하단다.”

“예?”

“아벨은 강하다. 네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너는 물론이요 나바르도제 님이 나서도 이기지 못할 게다.”

베일 듯이 단호한 말투였다. 이럴 거면 시발 왜 나오겠다고 한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가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넘기며 말했다.

“빌어먹을, 그 정도는 나도 알아요. 그러니까 놈을 조져 버릴 방법을 물어보려고 댁한테 온 거 아니에요.”

로난의 이마에 핏줄이 불거졌다. 답을 찾기 위해 온 건데 당연한 소리나 하고 있으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둘의 대화를 듣던 엘시아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로, 로난 님. 말을 조금···.”

“미안하지만 한 번만 봐 줘요 엘시아. 누나 일이 급하니까 가만히 있던 거지, 솔직히 제 입장에서 이 사람은 존경스러운 아버지보다는 어머니와 우리 남매를 버리고 간 놈팡이에 가깝다고요.

“그건···.”

“심지어 그냥 간 것도 아냐. 보통 인간은 한 개도 감당 못할 저주까지 듬뿍 걸어 놓고 튀었지.”

로난이 으르렁거렸다. 그간 쌓였던 울분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실제로 로난은 구원자의 몸 상태가 조금만 더 좋았어도 얼굴이나 배 쪽에 주먹을 한 방 먹여 주려고 했다. 아주 매콤한 걸로.

끼어들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엘시아가 입을 꾹 다물었다. 옆에 있던 구원자가 쓴웃음을 지었다.

“딱히 틀린 말도 아니구나. 확실히 나는 훌륭한 아버지와는 거리가 멀었지.”

“양심은 있으셔서 다행이군. 그나저나 한참 전부터 끙끙 앓았으면서 용케도 어머니를 만났네요. 그때는 안 아팠어요?”

로난이 물었다. 생각해 보니 이상했다. 5년 전에 자기 발로 유리관에 들어갈 정도로 아팠다면서 어머니를 꼬시고 아이까지 가지는 게 가능한가? 구원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팠다. 하지만 때때로 사랑은 죽음의 고통조차 잊게 만드는 법이지.”

“우웩.”

“너도 언젠가는 깨달을 거란다. 기나긴 생을 낭비하며 깨달은 진리 중 하나는, 그보다 강력한 힘은 이 우주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야.”

목소리가 진중했다. 구원자는 투병하던 와중에 우연히 어머니를 만나서 님버튼에 잠시 정착했다고 말했다. 이런 가족적인 대화를 나누는 날이 오다니,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무엇보다···네 어머니는 너무 아름다웠단다. 남은 여생을 전부 날려 버려도 좋을 만큼.”

“그건 좀 납득이 가는 이유네요.”

로난이 픽 웃었다. 하긴 이릴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 이 영감쟁이가 왜 무리를 했는지 어렵잖게 알아차릴 수 있을 터였다. 잠시 어색한 적막이 감돌았다. 기억을 반추하던 구원자가 입을 뗐다.

“그럼, 이제 가자꾸나.”

“가다니. 어디를요?”

“아벨을 물리치고 내 딸을 구해야 할 것 아니냐.”

“뭐야, 아까는 절대로 못 이긴다 하지 않았어요?”

로난의 눈이 커졌다. 방금 들은 것과는 내용이 달랐다. 구원자가 고개를 내저었다.

“정확히는 지금의 너로서는 이기지 못한다고 했었지. 승산을 높일 방법이라면 존재한다.”

“그게 뭔데요?”

“그건 가면서 이야기해 주마. 나를 좀 업어 다오.”

“···예?”

“어서. 제법 오래 걸어야 하는데 지금의 상태로는 거기까지 못 갈 것 같아서 그런단다.”

구원자는 이길 가능성이라도 만들기 위해서는 망령의 바다 어딘가에 있는 특정한 장소로 가야 한다고 설명했다. 하도 뻔뻔해서 헛웃음이 나왔다. 어이가 없었지만, 일단 믿져야 본전이니 로난은 허리를 낮추고 제자리에 쭈그려 앉았다.

“뭐가 뭔지···.”

“엇차···신세 좀 지마.”

구원자는 일말의 주저도 없이 로난에게 업혔다. 어째 대화를 나눌수록 사람이 예상했던 것과 달라지고 있는 것 같았다.

오랫동안 유리관 안에 갇혀 있기만 해서 그런지 구원자는 굉장히 가벼웠다. 등판을 두드리던 그가 감탄하듯 말했다.

“등이 넓구나.”

“···헹.”

로난이 실소했다. 지금의 기분을 뭐라 설명할 수가 없었다. 아주 좋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나쁘지도 않았다. 자세를 다잡은 구원자가 엘시아에게 말했다.

“엘시아. 자리를 지켜다오.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뜻을 따르겠습니다.”

엘시아가 허리를 숙였다. 그녀는 감격과 우려가 반반씩 섞인 눈빛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말을 다루듯이 로난의 방향을 잡아 준 구원자가 입을 열었다.

“그럼, 출발하자.”

****

예상외로 비밀 장소로 향하는 길은 유적과 이어져 있었다. 방을 떠난 로난은 구원자의 지시에 따라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은 유적에서 가장 외진 곳에 있는, 식량 창고처럼 보이는 작은 방에서  사다리를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어디까지 이어진 거에요?”

“깊이···아주 깊은 곳까지. 힘들지?”

“별로요. 그냥 얼마나 걸리나 궁금해서 물어본 거에요.”

로난이 툭 내뱉었다. 실제로 전혀 힘들거나 하지는 않았다. 사다리를 타고 삼십 분 정도를 내려가니, 이번에는 길고 가파른 비탈길이 나왔다.

“···더럽게 춥네.”

입김조차 얼어붙을 것 같았다. 어째 깊이 들어갈수록 더 추워지는 것 같았다. 망령의 바다에 이런 곳이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앞서 말했던 것과 달리 구원자는 가는 와중에도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표정이 영 안 좋은 게 긴장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비탈길을 따라 한참을 내려가던 로난이 질문을 건넸다.

“그래서, 그 방법이라는 게 뭔데요? 어떻게 해야 지금의 제가 아벨을 이길 수 있죠?”

“······바쥬라의 마력과 태초의 불씨의 열기가 네 심장에서 느껴지는구나. 이런 방법으로 해주를 하다니, 참으로 신선하군.”

“네? 갑자기 그게 뭔···.”

“로난. 나는 네가 저주를 풀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 것을 알고 있단다. 그럼에도 네 몸속에는 아직 절반가량의 저주가 남아 있지.”

로난이 헛숨을 들이켰다. 설마 여기서 저주 이야기가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구원자는 당황한 그를 뒤로하고 말을 이었다.

“나는 그걸, 없애 주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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