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1. 구원자(7)
#281
“···아벨?”
카인이 저도 모르게 내뱉었다. 눈앞에 있는 소년은 자신과 쌍둥이라 해도 믿을 만큼 닮아 있었다. 코를 훌쩍이던 소년이 그의 옷깃을 붙잡으며 물었다.
“형. 나 추워.”
“이게 도대체 무슨···아니지. 자, 잠깐만 기다려···!”
카인은 허둥지둥 자신의 외투를 벗어 소년에게 입혀 주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 추위에 내던져진 아이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 외투를 걸친 소년이 남는 소매를 파닥거리며 말했다.
“옷이 엄청 커···훌쩍. 그리고 아직 추워.”
“그, 그래. 조금만 참아. 금방 따뜻하게 해 줄 테니까.”
이상하게 외투를 벗었음에도 추위가 느껴지지 않았다. 카인은 소년의 손을 잡고 바람막이 역할을 해줄 벽과 지붕이 남아 있는 폐허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폐자재와 고래 기름을 이용하여 모닥불을 만들었다. 카인과 모닥불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은 소년이 헤헤 웃었다.
“히히, 따뜻하다. 고마워 형.”
“별 것도 아닌데 뭐···그런데 하나만 물어보자.”
“응?”
“···넌 누구야?”
카인이 질문했다. 어영부영 넘어가기에는 너무 큰 문제였다. 손을 모아 입김을 불던 소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왜 그런 걸 물어봐?”
“그냥 대답해 줘. 너는···내 이름이 뭔지는 알아?”
“진짜 오늘 이상해 형. 카인이잖아.”
“······!”
카인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그는 아직 소년에게 이름을 말해 준 적이 없었다. 갈수록 뭐가 뭔지 알 수 없게 되어가고 있었다.
“그, 그럼 네 이름은 뭔데?”
“아벨. 형. 정말로 괜찮아?”
“어떻게···그럼 엄마는? 아빠 이름은?!”
카인이 흥분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겁에 질린 소년이 어깨를 움츠렸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이어지는 카인의 질문에 대답했고, 어느 하나 틀리게 말하지 않았다. 천천히 물러선 카인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건···이건 말도 안 돼.”
“무, 무서워 형···나 아무것도 잘못 안 했어.”
“아니야. 이건 뭔가 잘못됐어···!”
머리가 어지러웠다. 격통은 사라졌으나 새로운 감각이 몸을 휘감고 있었다. 피가 아닌 다른 무언가 혈관을 흐르는 기분이었다. 몇 번이고 마른 세수를 하던 카인이 폐허를 박차고 뛰쳐나갔다.
“아니야!”
“형! 어디 가?!”
소년이 외쳤으나 카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여전히 찬란한 별빛이 머리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떨어진 구덩이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 웅덩이에 빠진 뒤부터야.’
카인의 사고는 평소보다 수백 배는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벌어진 불가사의한 일이 모두 거인의 피에 빠진 뒤부터 벌어졌다는 결론을 도출해 냈다. 익사하기 직전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 까지도.
구덩이는 여전히 마을 중심에서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었다. 카인이 그 앞에 멈춰섰다. 온 힘을 다해 한참을 뛰었음에도 숨이 차지 않았다.
‘다시 한 번 거기로 가고 싶어.’
그렇게 되뇌인 카인이 눈을 감았다. 마을로 돌아왔을 때와 같은 절차였다. 머지않아 바람소리가 잦아들었다. 삼 초 뒤에 눈을 뜬 그가 헛숨을 들이켰다.
“···세상에.”
카인은 자신이 빠졌던 웅덩이에 들어와 있었다. 거인은 여전히 얼음벽에 처박혀 있었다. 푸른 피는 아직도 온천수처럼 김을 내뿜으며 부글거리고 있었다.
‘원하는 게 이루어졌어.’
뭔가 알 것도 같았다. 카인은 다시금 마을로 돌아가는 것을 소망했다. 이번에는 눈을 감지 않은 채였다. 그러자 주변 풍경이 부서지듯 뒤틀리며 폐허가 된 마을이 눈앞에 펼쳐졌다.
다시 웅덩이를 상상하자, 그는 원래 서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낚싯대가 있으면 좋겠다 소망하니 이번에는 머리로 그린 것과 동일한 낚싯대가 허공에서 나타났다. 결론을 내린 카인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이 능력이라면. 엄마랑 아빠도···!”
행하면서도 믿을 수 없었다. 소망한 것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자신을 아벨이라 주장하는 소년은 분명 동생을 보고 싶다는 소망이 구체화되서 나온 존재일 터였다.
더는 주저할 필요가 없었다. 심호흡한 카인은 복구된 마을과 자신을 따스하게 반기는 부모님을 머릿속에 그렸다. 그가 감았던 눈을 뜨는 순간이었다.
“역시···!”
그는 완벽하게 멀쩡한 마을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감정이 북받쳐 오른 카인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큼직한 구덩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정겨운 거리와 건물들이 그 자리에 들어서 있었다.
“엄마! 아빠!”
자신이 동생이라 주장하는 이상한 애는 머릿속에서 지워진 지 오래였다. 카인은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집으로 달려갔다. 아버지가 다 큰 사내놈이 질질 짠다며 놀리겠지만,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오늘부터는 절대로 거짓말하지 않을 거야. 사랑한다거나 좋아한다거나 하는, 낯간지러운 말도 떠오를 때마다 바로바로 할거야. 쾅! 현관 앞에 도착한 카인이 문을 열어젖혔다. 그의 눈이 커졌다.
“···어?”
건물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빠의 작살도, 엄마가 앉던 흔들의자도, 벽난로에서 타오르는 장작마저도 그대로인데, 막상 부모님들은 보이지 않았다.
“이, 이럴 리가 없는데···?”
주변이 너무 고요한 것을 눈치챈 카인이 집 밖으로 나섰다. 행인은 물론 마을에 생동감을 더해 주던 썰매 개나 순록들도 보이지 않았다.
집을 한 채씩 확인해 봐도 사람이 들어 있는 집은 없었다. 문득 불길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 카인의 뇌리를 스치며 지나갔다.
‘설마 죽은 사람은 못 살리는 건가?’
호흡이 거칠어지며 식은땀이 흘렀다. 그럴 리가 없었다. 그런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됐다. 낚시 다녀온다며 대충 지껄인 말이 가족과의 마지막 대화가 되어서는 안 됐다.
‘그래. 피가 부족한 거야.’
가쁜 숨을 몰아쉬던 카인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는 곧바로 소망을 이용하여 웅덩이 앞으로 돌아갔다. 무릎을 꿇어앉은 그가 작게 읊조렸다.
“기다려요. 내가 살려 줄 테니까.”
카인은 양손으로 거인의 피를 퍼 올렸다. 손바닥 안쪽에서 찰랑거리는 액체는 지상에서는 나지 않는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한 모금을 들이키자 식도가 타오르는 듯한 작열통이 덮쳐왔다.
“우웁···!”
무의식중에 멋모르고 마실 때와는 달랐다. 하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손으로 피를 떠 마시던 그는 아예 입을 처박고 벌컥벌컥 들이키기 시작했다.
거인의 피가 목구멍을 넘어갈 때마다 그의 감각은 점점 더 예민해지고 있었다. 더는 마시지 못할 때까지 들이킨 카인이 눈을 감고 빌었다.
제발 돌려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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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안 됐나 보네요.”
로난이 말했다. 한창 이야기하던 구원자가 갑자기 입을 다문 탓이었다. 노을을 닮은 그의 눈동자 뒤편에서는 모든 것이 시작되고 끝나던 그날의 풍경이 재현되고 있었다.
몇 번을 기도해도 비어 있는 집. 뭐라 형용할 수 없는 푸르른 피의 맛. 결국 아무도 구하지 못한 채, 건물만 멀쩡해진 마을 어귀에 앉아 절규하는 소년. 구원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아무리 시도해도 안 되더구나.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은.”
“빌어먹을. 그럼 그 아벨이라는 놈은 뭐에요? 죽었는데 살아서 나타났잖아요.”
“그건 나도 모른다. 헤아릴 수 없이 오랜 세월을 살아왔지만, 이 능력으로 살아난 것은 아벨 뿐이었어.”
구원자가 입술을 비틀었다. 그는 결국 아벨을 친동생으로 받아들였다.
사실은 그가 자신을 동생이라 칭하는 수상한 소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모든 것을 잃어버린 카인에게 그런 것을 따지고 가릴 여유는 없었다.
“그 이후로 나는 아벨과 함께 온 세상을 돌아다녔단다. 그날 절벽 위에서 등을 찔리기 전까지. 이제와서 생각해 보면, 참으로 오랜 시간을 같이 했구나.”
“지긋지긋하기는 하네요. 그러고 보니 아버지야 거인의 피를 마셔서 그렇다 쳐도, 아벨이라는 놈은 어떻게 그렇게 오래 산 거에요?”
“모른다. 아벨은 나처럼 늙거나 병들지 않았어. 언제부터인가는 갑자기 거인의 힘도 사용하더구나. 마치 내 몸에서 태어난 분신인 것처럼.”
구원자는 아벨의 정체는 자신도 모른다고 설명했다. 과거 기술력이 정점에 도달한 사람들이 ‘클론’이라 불리는 생물 복제 기술을 개발했지만, 이 정도까지 원본 대상을 재현하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로난이 눈썹을 으쓱였다.
“몰래 자기도 거인의 피를 마신 거 아닐까요?”
“아니. 아벨은 모른다. 너와 나를 제외한 누구도 몰라. 당시의 나는 어렸지만, 이 힘이 위험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단다.”
구원자가 말했다. 그는 아벨과 엘시아를 비롯한 모두가 이 장소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했다. 원체 깊숙한 곳에 숨기기도 했지만, 본인이 이 장소를 들키지 않기를 소망했기에 비밀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했다.
몇 번을 들어도 사기적인 능력이었다. 갑자기 의문이 든 로난이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그런 말도 안 되는 능력이 있는데 왜 그 고생을 하면서 사람들을 도운 거죠? 교단 같은 것도 만들 필요 없이 평화를 빌면 끝나는 것 아니에요?”
“이게 마냥 전능해 보여도 꼭 그렇지만은 않단다. 명확한 한계가 존재하고, 생물을 죽이거나 살릴 수 없고, 과하게 사용하면 몸이 아파지면서 오랜 잠에 빠지지. 최소 수십 년 단위의 잠에 말이다.”
구원자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한때 능력을 활용하여 멸망해야 할 나라를 존속시켰다가 백 년 가까이 잠들었던 일화를 이야기해 주었다. 일어나 보니 그 나라가 멸망해 있었다는 말도 덧붙여서.
“허.”
로난이 헛웃음을 쳤다. 확실히 강력한 만큼이나 부작용도 심각했다. 로난의 등에서 내린 구원자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게 바로 이릴이 내게서 물려받은 힘이란다.”
“예?”
“소망하는 바를 이루는 힘. 내가 피를 마시고 얻은 것 중에서 강력한 능력이지. 내가 하는 대부분을 따라 할 줄 아는 아벨조차도 이 힘만큼은 베끼지 못했다.”
구원자의 목소리가 진중해졌다. 로난의 눈이 커졌다. 문득 과거 해주할 당시에 본 심상세계의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구원자는 자신보다 이릴에게 훨씬 더 많은 양의 저주를 쑤셔 넣었었다.
“누나한테도 저주를 건 이유가 있었군요.”
“그래. 아벨에게 들키지 않게 하기 위해서도 있었지만, 그 소망하는 힘을 자기도 모르게 사용함으로서 수명을 갉아먹게 하지 않기 위해서지. 하지만 스무 개의 저주를 걸어서 억누르려 해도 조금씩은 주변에 영향을 미치더구나.”
구원자가 주억거렸다. 그는 로난과 이릴이 성장하는 동안 아무 변고도 겪지 않은 것은 그녀의 능력 덕분일 것이라 단언했다.
마음씨 고운 이릴은 사람들의 선함과 평안함, 동생의 행복을 빌었고 그것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로난이 본격적으로 네뷸라 클라지에와 부딪히며 운명에 휘말리기 전까지.
“그렇다면 그 개새끼가 누나를 납치해 간 것도···!”
“그래. 내 딸의 힘을 눈치챈 게지. 본인의 역겨운 목표를 이루는 데 쓰려 할 것이 분명해.”
구원자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한순간 뿜어져 나온 살기에 로난은 하마터면 칼자루를 움켜쥘 뻔했다. 경직된 미간에서 지금까지의 유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어리석은 동생은 언제나 진화이자 새로운 지평을 여는 것이라 말을 포장하지. 하지만 간단하게 진실을 설명하자면···”
구원자가 말꼬리를 끌었다. 지금껏 네뷸라 클라지에를 조져 오면서 수도 없이 들어왔던, ‘별의 강림’의 정체가 밝혀지려 하고 있었다. 마침내 그가 입을 뗐다.
“이 별에 사는 모두를 죽여서 거인들에게 흡수시키려는 거란다. 육체 안에 들어 있는, 영혼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