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의 천재칼잡이-283화 (283/333)

283. 진군(1)

#283

“형. 괜찮아?”

어린 날의 아벨이 물었다. 뺨을 스치는 밤바람이 차가웠다. 갑자기 자신을 두고 뛰쳐나간 카인은 마을 어귀에 멍하니 주저앉아 있었다.

“······”

카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창백한 뺨에는 눈물 자국이 선명했다. 그는 막 자신의 능력이 사람을 되살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직후였다.

변화한 몸은 추위를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부서진 마음속에서는 살을 에는 북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조심스레 다가온 아벨이 카인의 입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형 입에 뭐가 묻었어.”

“어···?”

카인은 저도 모르게 입가를 소매로 닦았다. 푸르스름한 얼룩이 덕지덕지 묻어 나왔다. 배가 터지기 직전까지 들이켰던 거인의 피였다.

고개를 돌리자 비로소 아벨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작은 소년은 몸에 맞지도 않는 자신의 외투를 걸친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불현듯 카인은 깨달았다. 이제 내게 남은 것은 이 아이뿐이라는 것을.

“···그래. 괜찮아.”

“이제 우리 어떻게 해? 쾅 소리 나더니 엄마랑 아빠 없어졌어.”

“걱정하지 마. 내가 있잖아”

입가를 완전히 닦아낸 카인이 몸을 일으켰다. 이 꼬마가 자신을 아벨이라 믿는 것처럼 그 또한 믿어 보기로 했다. 이 아이는 내 쌍둥이 동생이라고. 아벨의 손을 잡은 카인이 싱긋 미소 지었다.

“형이랑 같이 가자. 아벨.”

.

.

.

“으음.”

아벨이 눈을 떴다. 아무래도 깜빡 잠든 모양이었다. 익숙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쓸데없이 크고 화려한 의자, 온통 하얗게 물들여 놓은 가구들. 총본산의 꼭대기에 자리한 교주의 성전이었다.

“···빌어먹을.”

그리 중얼거린 아벨이 검지를 들어 눈가를 닦았다. 꿈을 꾼 것은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그것도 수만 년 전의 일이 떠오르다니.

쯧. 손가락에 묻은 액체를 본 아벨이 혀를 찼다. 찰나 깊숙한 곳에 묻어 두었던 상념이 하나둘씩 올라오고 있었지만, 그는 손을 바짓단에 문질러 닦는 것으로 정신을 다잡았다.

“형님은 틀렸소.”

아벨이 읊조렸다. 이제 정말 끝이 머지않았다. 누구의 생각이 맞는지는 곧 판명이 날 터였다.

머리카락을 쓸어넘긴 그가 걸음을 옮기려던 차였다.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교주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래.”

익숙한 목소리였다. 아벨이 손짓함과 동시에 문이 열렸다. 화려한 로브를 걸친 여인이 걸어 들어왔다. 이릴의 보호 및 감시를 담당하는 대주교 르탄시에였다.

“상황을 보고 드리려고 왔습니다. 이릴 양의 해주는 순탄하게 진행 중입니다.”

“고생했군. 건강에 이상이 생기거나 한 건 아니겠지?”

“전혀 문제없습니다. 곤히 잠들어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대로 교주님의 피가 해주 작용을 제대로 해 주더군요. 생각보다 훨씬 시간이 덜 걸릴 것 같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아벨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상하던 바였다. 그는 이릴의 능력을 개화하기 위해서 그녀의 몸에 걸린 저주를 해제하고 있었다.

카인이 심어 놓은 족쇄들이 끊어지는 순간, 이릴은 소망이 이루어지는 권능을 온전히 갖게 될 터였다.

'모든 것의 근원다운 효과군'

아벨이 입꼬리를 올렸다. 어떤 해주법도 통하지 않던 이릴의 저주를 풀어내는 열쇠는 역시 자신의 혈액이었다. 과거의 경험에서 착안한 발상이었다.

아벨은 과거 카인의 피를 뽑아 자신에게 수혈했다. 카인이 소망을 이용하여 다인하르를 구하고, 깊은 잠에 빠졌을 시기였다. 거인들의 권능을 다룰 수 있게 된 것도 그때부터였다.

이제 와서는 별 상관없었지만, 마지막까지 카인의 비밀을 알아내지 못한 것은 아쉬웠다. 틀림없이 별의 거인들과 모종의 관계가 있었을 텐데. 보고를 들은 아벨이 르탄시에의 어깨를 두드렸다.

“수고했다. 나는 잠시 어디를 좀 다녀와야겠어. 이 정도까지 해 줬으면 알아서 잘 할 수 있겠지?”

“네.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좋아.”

아벨이 방을 나섰다. 텅 빈 성전에는 르탄시에만이 남아 덩그러니 서 있었다. 발소리가 들리지 않게 된 것을 확인한 그녀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

아무리 상황이 상황이라지만 이건 너무 바빴다. 옛날에 평신도로 입교했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또 어디로 가시는 건지···.”

그녀가 혼잣말했다. 아벨이 최근에 자리를 길게 비운 적이 있어서 이번에도 그럴까 염려되었다.

딱히 그의 신변이나 패배하는 것이 걱정되는 것은 아니었다. 아벨이 직접 대응 조치를 취한 이상 그런 일은 절대로 벌어지지 않을 테니까. 더군다나 그들에게는 이릴이라는 인질까지 확보하고 있었다.

다만 별의 도래만을 기다리고 있는 신도들과는 달리 혼자 붕 떠있는 듯한 태도는 마음에 걸렸다. 최종장을 앞둔 사람 같지가 않다 해야 할까. 다른 걸 보고 있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물론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명령을 따르는 것 뿐이었기에, 르탄시에는 조용히 정신을 집중하고 전음을 보낼 준비를 했다. 머지않아 그녀의 목소리가 모든 신도들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대주교 르탄시에가 고한다.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해라.]

****

“잡아라! 절대로 놓치지 마!”

“여기서 꺾지 못하면 전부 물거품이 된다!”

오후의 하늘 아래 병사들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길고 처절했던 전투도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족히 만 명은 되는 연합군이 병장기를 꼬나쥔 채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하늘을 뒤덮은 마법진은 기어코 거인 하나를 토해 낸 뒤 사라졌다. 짧은 자기소개를 마친 거인은 용의 도시에서 두아루가 그랬듯이 무차별적인 파괴 행위를 일삼기 시작했다.

-바사기아가 형을 집행한다.

그런대로 평화롭던 중부 연합군의 군영은 순식간에 폐허가 되었다. 빛의 창이 쇄도하며 일어나는 폭발은 지면에 거대한 구덩이를 만들었다. 굉음이 한 번 울려 퍼질 때마다 수십에서 수백 명의 병사가 목숨을 잃었다.

“이 빌어먹을 괴물 놈들!”

“이 찌꺼기들은 전부 우리가 처리해야 한다!”

깃털을 촉매로 소환된 사역마들도 사상자 수를 늘리는데 한몫하고 있었다. 두려움이 없는 인공 마수들은 서로의 몸을 짓밟아 가며 연합군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고오오옥!”

“끄아아악!”

두아루의 사역마와는 달리 그들은 들개를 닮은 짐승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빛으로 이루어진 몸뚱이와 병장기가 부딪히며 작렬하는 파열음이 전장을 빈틈없이 메우고 있었다.

하지만 용의 도시처럼 상황이 절망적이냐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다. 헤아릴 수 없이 많던 사역마들의 수는 눈에 띄게 줄어 있었다. 거인 바사기아 또한 전장 한복판에 포위된 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흐읍!”

몸을 낮추며 거인의 창을 피한 나비로제가 검을 휘둘렸다. 스각! 검광이 번쩍이나 싶더니 빛으로 이루어진 창대가 반으로 부러졌다. 거인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

로난의 피를 먹인 그녀의 대태도는 끓어오르는 듯한 적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잠시나마 거인을 무력화시킨 나비로제가 몸을 뒤로 뺐다. 그리고 큰 소리로 외쳤다.

“쏴붙여라!”

그와 동시에 전후좌우 모든 방향에서 화살과 투사체 마법이 쏟아졌다. 거인은 황급히 방어 자세를 취하려 했지만 보이지 않는 힘이 그것을 제지했다.

콰직! 느닷없이 어깨를 짓누르는 압력에 몸이 굳어졌다. 적진을 훑어 보던 거인이 무미건조하게 내뱉었다.

『그대인가.』

“히, 히이익!”

거인과 눈이 마주친 아셀이 헛숨을 들이켰다.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데 한 번에 눈치챌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염력 마법으로 거인을 찍어 누른 것은 그의 행적이었다.

『놀랍구나. 이것이 일개 필멸자의 힘이라니.』

거인이 작게 감탄했다. 힘을 줘도 허리를 펴기가 힘들었다.

저 마법사를 먼저 제거해야 한다고 판단한 그가 말없이 손바닥을 펼쳤다. 빛의 입자가 모여들며 새로운 창이 쥐어지려는 찰나였다. 콰과광!! 일제히 날아온 화살과 마법이 그에게 적중했다.

고오오오···폭발에 바람이 흩어지자 더 만신창이가 된 거인의 모습이 드러났다. 상처에서 흘러내린 푸른 피가 바닥에 툭툭 떨어지고 있었다. 비틀거리던 그가 입을 열었다.

『덧없는···이들이여···.』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단지 이번에 당해서만은 아니었다. 전투가 시작된 이래로 그의 몸에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피해가 꾸준히 쌓여 가고 있었다.

두 쌍의 날개는 너덜너덜하게 찢어져 있었다. 전신에 새겨진 상처는 종류만 열 가지가 넘었다. 흠집 하나 없던 몸뚱어리는 해진 감자 푸대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로난의 피로 무장한 연합군이 각고의 노력을 한 결과였다. 그들은 죽을 힘을 다해 별의 가호를 파훼하고, 거인에게 유의미한 피해를 주는 데 성공했다.

일전에 대주교들의 가호조차 뚫지 못했던 것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거인이 날개를 펼쳤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는 모르겠으나 상황이 영 좋지 않았다. 콰아앙! 날개가 펼쳐짐과 동시에 불어닥친 광풍이 전장을 휩쓸었다.

“크윽···!”

“노, 놈이 도망친다!”

전열에 서 있던 병사들이 어디에 들이받힌 것처럼 튕겨 나갔다. 몇 개 남지 않은 나무와 막사들이 날아가 버렸다.

"으앗!"

갑작스러운 힘의 팽창에 아셀의 염력이 해제되었다. 이대로라면 놓치고 말 터였다. 원래대로라면 절망해야 마땅한 상황이었지만, 연합군의 면면은 생각만큼 어둡지 않았다.

“제발···.”

“부탁한다. 요술쟁이들.”

되려 그들은 무언가 기대하는 것처럼 주먹을 움켜쥐고 있었다. 화아악! 거인이 날아오르는 순간이었다. 전 연합군의 머리 속에 아데샨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금입니다!]

동시에 강렬한 마나의 파장이 전장 위로 퍼져 나갔다. 콰직! 비상하던 거인이 아무것도 없는 하늘에 머리를 부딫혔다.

『으음···!』

찢어진 이마에서 푸른 피가 튀었다. 이건 충격이 꽤 컸다. 상황을 지켜보던 병사들이 쾌재를 불렀다.

“좋았어, 막았다!”

『이건···.』

거인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 반투명한 역장이 새장처럼 주위를 뒤덮고 있었다. 자신이 머리를 부딪힌 자리에 거미집 같은 균열이 나 있었다.

여명과 만월 마탑의 마법사들이 원거리에서 작동시킨 고위 방어 주문이었다. 로난의 피를 마신 마법사들은 제한된 시간 동안 거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마법을 발현할 수 있었다.

『부질없는 짓을.』

하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자 이내 충격이 가라앉았다. 정신을 차린 거인이 역장에 창을 던지려던 찰나였다. 쉭! 무언가 시커멓고 거대한 덩어리 하나가 그의 머리 위까지 솟구쳤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쳐든 거인이 입을 열었다.

『그대는···?』

거인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는 즉시 창의 방향을 돌렸지만, 자이파는 이미 언월도를 머리끝까지 쳐든 채 강하하고 있었다. 결전을 앞두고 새롭게 벼린 그의 언월도는 나비로제의 것과 같은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여기서 죽어라. 버러지.”

자이파가 으르렁거렸다. 거인이 뭐라 말하려던 찰나였다. 촤아아아악! 허공에서 거대한 호를 그린 언월도가 그의 얼굴 위로 떨어졌다.

고깃덩이를 썰어내는 감각이 자이파의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콰아아앙!! 거의 동시에 하늘에서 떨어진 자이파와 거인이 전장 한가운데 추락했다.

“···더럽게 단단하군.”

자이파가 시선을 내려 거인을 바라보았다. 얼굴 한가운데 언월도가 박힌 거인은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흙먼지가 주변을 뒤덮고 있어서 아직 병사들의 환호성은 터져 나오지 않고 있었다. 창대를 한 바퀴 돌려 잡은 자이파가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렸다.

“로난 이 녀석은 도대체 언제 오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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