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의 천재칼잡이-288화 (288/333)

< 288. 총공세(2) >

#288

“어서 가자꾸나. 그래야 내 딸을 구하는 김에 겸사겸사 세상도 구하지 않겠느냐.”

그 말을 남긴 구원자가 다인하르 안쪽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발걸음이 인상적이었다. 벙쪄 있던 로난이 그의 뒤를 따랐다.

“아, 거 같이 좀 갑시다.”

“시간을 지체할 생각은 없으니 서두르거라. 이보게, 함교로 가는 길이 어디였지?”

“하, 함교? 그게 뭐냐?”

갑작스러운 질문에 꿈꾸는 천둥이 당황했다. 구원자는 차근차근 ‘함교’라는 장소에 관해 설명했다.

“아주 넓고 평탄한 공간이지. 온통 새하얗고, 기계장치가 있고···아, 그래. 이렇게 커다란 수정이 있다네.”

구원자가 양 팔을 벌리며 원을 그렸다. 순간 어느 장소가 로난과 천둥의 뇌리를 스치며 지나갔다. 기억이 왜곡된 것이 아니라면 분명 이전에 가본 적이 있었다. 추리에 성공한 천둥이 손가락을 튕겼다.

“아하, 유적의 심장 말하는 거냐? 거기라면 알고 있다!”

과거 로난이 네뷸라 클라지에의 교주인 테라닐과 결전을 벌였던 곳이었다. 충격파와 지면을 찢고 튀어 오르는 스파크, 학살당한 원주민의 피비린내가 아직도 선명했다. 구원자가 주억거렸다.

“심장이라···그래. 틀린 말은 아니지. 거기로 안내해 줄 수 있나?”

“하, 하지만 거기 신성한 장소다. 우리 부족 아니면 들어갈 수 없는데···.”

꿈꾸는 천둥이 말꼬리를 끌었다. 그리고 안절부절못하며 로난의 눈치를 살폈다. 구원자가 믿을 만한 사람인지 물어보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성지니 뭐니 하는 곳이었지. 가는 길도 지랄 맞았고. 고민하던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믿어도 되는 사람이야. 내가 장담해.”

“그렇다면 좋다. 내가 데려다 주겠다!”

로난의 보증이 떨어지기 무섭게 천둥의 얼굴이 밝아졌다. 성지로 향하는 이유를 일절 묻지 않는 부분에서 로난에 대한 신뢰를 엿볼 수 있었다. 천둥이 척척 앞장서서 걸어 나갔다.

로난과 구원자는 천둥을 따라 다인하르 안쪽으로 이동했다. 사방이 바위산과 모래, 금속성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라 조금이라도 기분전환을 하기 위해서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 봐야 했다.

밤공기는 여전히 차가웠다. 인공광이 일절 없는 사막이라 그런지 밤하늘은 유별나게 아름다웠다. 로난이 오색찬란하게 타오르는 성운을 보며 걷던 와중이었다.

“이 시간에 어디를 가는 거냐. 천둥.”

“엉?”

갑자기 앞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 사람이 동시에 시선을 옮겼다. 웬 우락부락하고 거대한 원주민 사내 한 명이 서 있었다. 천둥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우앗, 형님?!”

“너는···.”

놀란 것은 로난도 마찬가지였다. 천둥과 마찬가지로 다인하르에서 함께 인연을 맺었던 원주민인 성난 돌풍이었다. 로난과 눈이 마주친 그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로난. 오랜만이다.”

“그러게.”

성난 돌풍의 머리에는 화려한 모자가 씌어져 있었다. 예상했던 것처럼 새로운 족장으로 등극한 모양이었다. 성큼성큼 다가온 그가 로난과 손을 맞잡았다.

“삼 년 내내 소식이 없어서 조금 걱정했다.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다.”

“너만큼이야 하겠냐.”

돌풍의 몸을 본 로난이 혀를 내둘렀다. 인간이 아니라 흑요석을 깎아 만든 조각상 같았다. 그는 로난과 구원자가 다인하르에 진입하는 순간 기척을 눈치챘다고 했다. 인사를 마친 돌풍이 입을 열었다.

“이야기는 대충 들었다. 다인하르의 심장으로 가려는 거지?”

“엉. 맞아.”

“그렇다면 내가 안내해 주겠다. 천둥은 아직 미숙해서 혼자 가는 거 무리다.”

성난 돌풍은 동생과 마찬가지로 로난이 성지로 향하는 이유를 물어보지 않았다. 그의 뼈에는 과거 로난과 슐리펜에게 입은 은혜가 사무치리만치 각인되어 있었다. 옆에 있던 꿈꾸는 천둥이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형님! 그게 무슨 소리냐? 나도 제대로 할 수 있다!”

“그래서 저번에 가다가 팔다리 부러졌나? 나 아니었으면 너 불구 됐다.”

“윽, 그건···.”

“그러지 말고 두 사람 다 같이 가지.”

원주민 형제가 옥신각신하던 와중이었다. 갑자기 끼어든 구원자가 두 사람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가 로난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이 놈이 기절하면 나 대신 옮기거나 깨워줄 사람이 필요하거든. 원체 덩치가 커서 말이지. 그리고 성난 돌풍 자네는 족장이지?”

“기절? 옮겨? 이, 일단은 그렇다. 내가 족장이다.”

“그럼 자네는 더욱 같이 가야 해. 자세한 건 가서 이야기해줄 테니 일단 출발하지.”

그리 말한 구원자가 성난 돌풍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그보다 머리 하나가 더 있는 돌풍이었지만, 속수무책으로 구원자에게 끌려가 길을 안내하게 되었다.

“허.”

로난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뻔뻔스러운 것도 저 수준이면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문득 로난과 구원자를 번갈아서 쳐다보던 천둥이 손뼉을 쳤다.

“아, 자세히 보니 저 사람 로난하고 닮았다. 머리 색만 빼고는 판박이다!”

“그야 내 아버지니까.”

“아버지? 로난도 아버지가 있었나?! 그럼 엄마도 있나?”

꿈꾸는 천둥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물었다. 내가 여자라고 해도 저거보다는 덜 놀랄 것 같았다. 로난이 눈을 부라리며 물었다.

“얌마. 그게 무슨 뜻이야. 내 관상이 고아처럼 생겨먹었다 이거냐?”

“화, 화내지 마라. 로난 너무 강해서 솔직히 나는 너 괴물인 줄 알았다. 우리랑 같은 인간이라 기쁘다.”

“농담이야. 그런데 둘 다 없긴 하네.”

꿈꾸는 천둥이 당황하며 말했다. 물론 농담이었기에 로난은 적당히 낄낄거리는 것으로 그를 안심시켰다. 다만 우리랑 같은 인간이라는 말이 마음에 조금 걸렸다.

‘나는 인간이 맞는 걸까.’

거인의 피를 마시던 순간을 떠올린 로난이 입술을 비틀었다. 어쩌면 구원자나 아벨처럼 영원에 가까운 삶을 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성찰적인 고민에 빠진 그가 침음을 흘렸다.

“으음···그건 좀 싫은데.”

“여, 역시 화난 거다.”

천둥이 어깨를 움츠렸다. 어쨌든 네 사람은 다인하르의 심장부로 향했다. 인사를 나누고 싶은 원주민들이 더 있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나중으로 미뤄 두기로 했다.

“조심해라. 빨간 물에 빠지면 뼈도 못 찾는다.”

“그러니까 저건 용암이라 부르는 거라고. 이 돌대가리야.”

네 사람은 절벽을 기어오르고, 용암의 강줄기를 징검다리로 건너고, 마침내 심장부와 이어진 길고 긴 복도에 도달했다. 짝! 까마득한 복도를 쳐다보던 구원자가 손뼉을 쳤다.

“그래. 이제 기억이 나는구나. 여기만 지나면 함교가 나왔었어.”

“거 빨리도 떠올리시네.”

로난이 헛웃음을 쳤다. 어쨌든 동일한 장소가 맞다니 다행이었다. 여기는 함정 같은 위험한 요소가 없어서 편안하게 걸을 수 있었다. 쭈그려 앉은 로난이 구원자에게 눈짓했다.

“알겠으니까 얼른 업히쇼. 서둘러야지.”

물론 여유를 즐길 틈 따위 없었다. 구원자는 자연스럽게 아들의 등에 몸을 맡겼다. 동시에 로난의 형체가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쾅! 땅을 박차는 소리가 울려 퍼짐과 동시에 원주민 형제의 당혹 어린 외침이 울려 퍼졌다.

“로, 로난! 같이 간다!”

“기다려!”

간격은 빠르게 벌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로난은 계속 달렸다. 문제는 통로 자체가 하도 길어서 속도를 높였음에도 끝이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어둠과 침묵이 대화를 부추기고 있었음에도 부자간에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간격 넓은 발소리만 규칙적으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문득 의문 하나가 로난의 머릿속을 스쳤다. 구원자에게 하려던, 원래는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물어보려던 질문이었다. 천둥이 조금 전에 했던 질문 때문에 다시금 떠올랐다.

‘내가 왜 이러지.’

로난이 눈썹을 으쓱였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물어보지 않으면 평생 기회가 찾아오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침묵하던 로난이 입을 열었다.

“이봐요.”

“왜 그러느냐.”

“그···엄마는 어떤 사람이었어요?”

“오. 그걸 이제야 물어보는구나. 역시 궁금했던 모양이지?”

구원자가 반색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하는 걸 봐서 언제 물어보는지 나름대로 기대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괜스레 낯이 뜨거워진 로난이 신경질을 냈다.

“젠장, 댁 같으면 안 궁금하겠어요? 나를 낳아 준 사람인데.”

“궁금하겠지. 당연히 궁금할 거야. 어떤 사람인지 묻는다면···으음. 그야말로 태양과 같은 여자였어. 네 어머니는 말이다.”

구원자가 말했다. 조금 속이 메스껍기는 했지만 로난은 묵묵히 그의 말을 경청했다.

“카샤는 쭉 님버튼에서 살던 처녀였단다. 우주처럼 검은 머리카락이 정말 아름다웠지. 이릴이 머리카락까지는 가져가지 못해서 안타까웠는데, 네가 물려받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단다.”

그리 말한 구원자가 로난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밤하늘을 닮은 색채는 틀림없는 아내의 것이었다.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함부로 만지지 말아 줄래요?”

“닳는 것도 아니고 뭘 그러느냐. 어쨌든 카샤는 참 좋은 여자였어.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그렇기에 더 사랑스러웠지. 그녀는 진심으로 남에게 잘해줄 수 있는 사람이었단다.”

구원자의 말투는 몰라보게 밝아져 있었다. 그동안 어떻게 이 주제를 참았는지 의문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는 숨도 고르지 않고 아내의 장점을 줄줄 읊었다.

“감자 스튜를 잘 만들었고, 여자치고는 힘도 셌고, 실수는 잦을지언정 매사에 포기하는 법이 없었지. 하지만 내가 카샤에게 반한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단다. 뭔지 아느냐?”

“얼굴이죠?”

“잘 아는구나.”

로난은 일체의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그는 과거 심상세계를 여행하며 본 엄마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엄마는 그대로 머리와 눈동자 색만 바꿔 놓았다고 해도 될 정도로 누나와 닮아 있었다. 구원자가 엄숙하게 끄덕거렸다.

“그래. 카샤는 누구보다 아름다웠다. 헤아릴 수 없는 시간 동안 많은 여자들을 봐왔지만 누구도 상대가 되지 않았어. 어떤 일이 있어도 핏줄을 남기지 않겠다는 맹세는 그녀의 눈웃음 한 번에 똥이나 다름없는 넋두리로 변해 버렸단다.”

“···솔직해서 좋네요.”

구원자는 원래 여인을 사귀거나 아이를 가지지 않을 생각이었다고 말했다. 자신이 가진 이 무시무시한 능력이 유전이라도 된다면 끔찍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으니까.

실제로 그의 열화판인 아벨이 씨를 뿌리거나 클론 기술에 심취하면서 생겨난 것이 네뷸라 클라지에의 특수 조직인 뤼코포스였다.

하지만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기에 카샤는 너무 아름다웠다. 그는 기나긴 삶에서 처음으로 맞이한 이성간의 사랑에 취해 버렸다.

그 몇 년간 아벨에게 찔린 상처가 덧나지 않은 것은 그야말로 사랑의 힘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몇 마디를 더 하던 구원자가 지긋이 눈을 감았다.

“아아, 그 황홀했던 밤은 아직도 손에 잡힐 듯이 선명하구나. 그로부터 정확히 열 달 뒤에 이릴이 태어났지. 별 머금은 강이 아름답다며 네 어머니는 내 손목을 잡아끌었어. 그리고···.”

“빌어먹을, 거기서 더 나가면 그냥 버리고 갈 거에요.”

로난이 구원자의 말허리를 잘랐다. 그런 정보까지는 알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누나는 물론 자신이 세상에 등장하던 순간의 일화까지 떠들어 낼 기세였다. 잠시 침묵하던 로난이 빙긋 웃었다.

“뭐, 어쨌든 고마워요.”

“음?”

“어쨌든 엄마는 엄청나게 좋은 사람이었다는 거네요. 제대로 얼굴을 본 기억도 없어서 좀 궁금했거든요.”

로난이 말했다. 실제로 그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전무했다. 매년 누나와 함께 님버튼 양지바른 곳에 자리한 무덤 위에 꽃을 올려 놓았을 뿐이었다.

과거 세크리트의 방에서 심상 세계를 여행하지 않았다면 평생 얼굴조차 몰랐을 터였다. 구원자가 그의 머리카락을 검지에 돌돌 감았다.

“···내 평생의 한 중 하나는 네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거란다. 너와 이릴에게 저주를 건 뒤 바로 망령의 바다로 떠났으니까. 그만큼 자신이 저주스러웠던 적이 없었어.”

“어쩔 수 없었잖아요. 당장 살아야 하는데.”

“그리 말해주니 고맙구나. 너희를 두고 온 것도 그렇단다. 이릴은 그나마 추억이라 부를 만한 시간을 보냈지만, 로난 네게 해 준 것은 아무것도 없었거든.”

목소리가 먹먹했다. 음의 높낮이에서부터 유감스러운 감정이 느껴졌다. 그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이릴에게 내 피가 묻은 혈계침을 준 거란다. 성인이 되는 해의 생일에 네게 건네주라고 부탁했지. 내가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컸지만···.”

“컸지만?”

“사실은 그냥 다 자란 내 아들을 보고 싶었다. 이기적인 사유지.”

구원자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로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괘씸하기는 해도 그럴 수 있다 생각했다.

문득 자신이 전생에 일찍 가출한 것이 참으로 많은 일을 꼬아버렸다는 것이 느껴졌다. 성인이 될 때까지만 버텼어도 남은 기간 동안 거인들을 조져 버릴 수단을 찾았을지도 모르는데. 물론 이제 와서는 부질없는 이야기였지만.

“피는 피로만 씻을 수 있다는 말이 있지. 그 말처럼 나는 사랑만이 씻을 수 있는 상처가 있다고 생각한다. 카샤와 너희 남매는 영원히 지워질 것 같지 않던, 아벨에게 배신당했다는 절망감을 잊게 해 주었어.”

“거 다행이네요.”

“진심으로 고맙다. 이제야 내가 이 말을 하는구나.”

구원자는 그것을 마지막으로 말을 맺었다. 더는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거 참.”

로난이 입매를 비틀었다. 일부러 침묵을 지키는 것은 것은 아니었으나 마땅한 답사가 생각나지 않았다.

정확히 세 번을 더 도약한 그가 모퉁이를 도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눈앞이 확 밝아지며 익숙한 공간이 눈앞에 펼쳐졌다.

“일단, 도착했어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