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0. 총공세(4) >
#290
“여긴 언제 와도 정이 안 가는군.”
아벨이 혼잣말했다. 그는 온통 새하얗게 물든 대지 위를 거닐고 있었다. 거인들이 살아가는 세계였다. 빈민가의 겨울을 연상케 하는 공허하고 차가운 바람이 뺨을 스치고 있었다.
모래알 하나마저 백색을 띠는 세상에서 색채라는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네뷸라 클라지에의 총본산도 그럭저럭 비슷하게 꾸며 놨지만 역시 원본에 비할 바가 되지 못했다.
고개를 들자 하얀 하늘이 보였다. 빈틈없이 별을 뒤덮은 구름 속에서는 거대한 마법진이 사라졌다 나타나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사냥을 떠나거나 돌아오는 거인들이 이용하는 통로였다.
바쁘기도 하지. 그리 읊조린 아벨이 다시 발을 내딛는 차였다. 머리 위에서 낮고 굵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필멸의 생을 타고난 자여.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온 건가.』
『그 참람한 걸음을 멈출지어다.』
“아아···그러죠.”
아벨은 한쪽 무릎을 꿇어앉은 채 고개를 들었다. 두 명의 거인이 바로 위에서 자신을 내려보고 있었다. 날개가 각각 네 쌍씩 달린 걸로 보아 그렇게 지위가 높은 개체들은 아니었다.
화아아악! 날갯짓에서 말미암은 바람이 주기적으로 사방을 휩쓸고 있었다. 인간 따위는 찌그러트리고도 남을 광풍이었지만 아벨은 어떤 영향도 받고 있지 않았다. 반투명한 그의 몸은 육체가 아닌 정신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벨을 응시하던 거인 하나가 입을 열었다.
『그대는···기억에 있는 얼굴이군.』
“그야 어제도 왔으니까요.”
아벨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주기적으로 얼굴을 비춰서 그런지 이제 막무가내로 공격을 퍼붓지는 않았다. 목청을 한 번 가다듬은 그가 최대한 예를 갖춰서 말했다.
“그 분을 뵈러 왔습니다.”
『뭣이···.』
거인들이 움찔거렸다. 안 그래도 굳어 있는 면면들이 한층 더 딱딱해졌다.
그들은 한참이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아벨도 딱히 재촉하지는 않았다. 아벨은 거인들이 자기네들이 ‘그분’이라 부르는 존재와 소통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감각 공유라. 참 편리하단 말이지.’
아벨은 잠자코 머리를 조아린 채 기다렸다. 생각보다 길어진 침묵 속에서 평소 같으면 인지하지 못했을 음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살려줘.
-나는 잘못한 게 없어!
-제발 꺼내주세요···제발···.
속삭임처럼 작은 소리였다. 언어는 모두 달랐지만 의미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의 절규가 거인들의 몸속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아벨은 그것이 거인에게 살해당한 영혼들이 내는 목소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위대한 종족과 하나가 되어 영원한 삶을 구가하게 되었지만 그다지 행복하지는 않아 보였다.
아벨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이제 곧 지상에 남아 있는 사람들도 비슷한 운명을 맞이할 터였다. 물론 처지는 저들과 많이 다르겠지만. 그때 침묵하던 거인 한 명이 입을 뗐다.
『돌아가라. 그분께서는 너를 보고 싶어 하지 않으신다.』
“···오늘도입니까?”
아벨의 미간이 좁혀졌다. 예상대로 기는 했지만 그래도 퇴짜를 맞는 것은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그가 말을 이었다.
“그러지 말고 한 번만 더 말씀드려 주시지요. 별 하나를 통째로 바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데 그 정도 부탁은 들어주셔도 괜찮지 않습니까?”
『두 번을 말하지 않겠다. 돌아가라.』
불현듯 두 거인이 동시에 손을 뻗었다. 새하얀 손아귀 안쪽으로 빛의 입자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하여튼 이 대머리들은 대화라는 게 통하지 않았다. 눈치를 살피던 아벨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한 번 얼굴이라도 비춰 달라는 것이 뭐가 그리 어려운 부탁인지 모르겠군요. 장담하건대 제 모성을 우습게 여기고 오셨다가는 화를 입을 수도 있습니다.”
『오만하구나. 필멸자들은 우리를 이길 수 없다.』
“그러면 얼마 전에 저희 별에서 타계하신 네 분은 뭡니까?”
『뭣이···.』
말문이 틀어막힌 거인들이 입을 다물었다. 아벨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빛은 더는 비굴하게 부탁하는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이제는 담판을 지어야 할 때였다.
“왜, 겁이라도 나신답니까?”
아벨이 조소했다. 그의 한쪽 입꼬리가 히죽 올라가는 순간이었다. 콰직! 어디선가 날아온 빛의 창이 아벨의 등을 꿰뚫었다.
“컥···.”
아벨이 헛숨을 들이켰다. 어찌나 빨랐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간신히 궤적을 따라 고개를 들자 머리 위의 하늘이 소용돌이치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저건.’
별 전체를 휘감을 것처럼 거대한 소용돌이였다. 창이 떨어진 중심에는 검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아벨은 본능적으로 저 너머에서 무언가 자신을 내려보고 있음을 눈치챘다.
팟! 그가 뭐라 한마디를 하려던 순간 시야가 암전되었다. 다시 눈을 뜬 아벨이 튕기듯이 상체를 일으켰다.
“허억···!”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는 어느 밀실에 홀로 주저앉아 있었다. 총본산에 자리한 비밀의 방이었다. 정신체가 소멸하며 의식이 원래의 육신으로 돌아온 모양이었다.
“성질 한 번 더럽군.”
아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아직도 가슴을 꿰뚫리던 감각이 선명했다. 그의 발밑에는 거인들의 세계와 교신하기 위한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미끼를 물었다.’
가슴팍을 긁적거리던 아벨이 미소지었다. 멍청한 대머리들은 결국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지만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마지막에 빛의 창을 던진 것은 틀림없는 ‘그 분’이었다.
이걸로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남은 것은 몇 남지 않은 부하들과 이릴에게 달려 있었다.
문득 과거의 기억이 눈앞을 스치며 지나갔다. 돌이켜 보면 카인을 따라다니면서 참으로 많은 적수를 베면서 살아왔다. 야만스러운 유목 부족부터 다인하르 제국의 기계 군단까지. 허리춤의 칼집을 바로잡은 그가 방을 나섰다.
“어디, 얼마나 나아졌는지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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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만 항복하시지!”
마르야가 외쳤다. 앞으로 치고 나온 그녀가 횡으로 대검을 휘둘렀다. 그녀의 몸보다 길고 두꺼운 날붙이는 로난의 피와 같은 적색을 머금고 있었다.
“이 건방진 계집이!”
“우리가 그렇게 우스워 보이느냐!”
성벽 위에서 결사항전을 펼치던 신도들이 격분하며 달려들었다. 마르야의 기세가 좋기는 했지만 그래 봤자 자신들의 갑옷과 방패를 뚫을 수는 없었다.
캉! 그들이 방패를 쳐들며 방어 자세를 취하는 순간이었다. 멈추지 않고 파고든 대검이 신도들의 허리를 그대로 썰면서 지나갔다. 명치 아래의 감각을 상실한 사내가 당혹성을 흘렸다.
“어?”
“우습게 보여!”
마르야가 재차 소리쳤다. 상반신만 남은 신도들이 바닥에 엎어졌다. 콰아아앙! 멈추지 않고 날아간 참격이 그대로 옆에 있던 망루와 충돌했다. 일격에 밑둥이 썰린 망루가 성벽 아래로 무너져 내렸다.
“괴, 괴물이다!”
“뭐 저런 힘이···.”
곳곳에서 경악이 터져 나왔다. 그녀가 입고 있는 판금 갑옷은 격렬한 난전 속에서도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다. 극광의 색채로 아른거리는 갑옷은 얼마 전에 로난이 오로라 스칼에서 가져다 준 물건이었다.
중갑과 대검으로 무장한 마르야는 당당히 선두에서 적군을 썰어 버리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아군을 지키면서 전투하고 있는 브라움이 눈에 들어왔다. 쾅! 지부장 푸란의 철퇴를 막아낸 그가 칼등으로 대방패를 두들기며 외쳤다.
“겨우 그것밖에 안 되느냐! 더 세게 해 봐라!”
“감히 뚫린 입이라고···!”
격노한 푸란이 오러까지 사용해 가며 철퇴를 휘둘렀다. 아까보다 훨씬 더 강력해진 일격이 날아들었지만 브라움은 그조차도 멋지게 막아냈다. 푹! 결국 푸란의 사각에 자리하던 병사가 그의 허리를 창으로 꿰뚫었다.
“커헉!”
입에서 피를 토한 푸란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동시에 대여섯 개의 창이 그의 몸 위로 쏟아졌다. 외성의 적이 소탕된 것을 확인한 브라움이 마르야를 돌아보며 외쳤다.
“여기는 끝났다!”
“여기도야!”
마르야가 회답했다. 원체 큰 두 사람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기어코 마지막 요새마저 돌파한 그들은 연합군과 함께 내부의 저항 세력을 소탕하고 있었다. 성벽 바깥쪽을 바라보자 이미 함락된 여덟 개의 요새가 눈에 들어왔다.
“···해냈어.”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광경이었다. 드높은 성벽 위로는 여덟 개의 연합군 깃발이 펄럭거리고 있었다. 오르세와 그림자 대공이 하늘을 헤집으며 남아 있는 인공 거인들을 격추시키고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아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 다들 죗값을 치루셔야 해요!”
“···귀염둥이.”
마르야가 수치심에 얼굴을 붉혔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선언했던, 아셀을 지켜 주겠다는 말이 얼마나 오만한 발언이었는지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셀은 오르세의 등에 탑승한 채 사방으로 거대한 얼음 가시들을 난사하고 있었다. 에르제베트의 오러로 강화된 마법은 평소보다 훨씬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커억!】
【크아아악!】
푹! 푹! 녹지 않는 얼음에 적중당한 거인들이 피를 토하며 추락하고 있었다. 보통은 한 방에 죽었고, 세 방 이상을 버티는 개체는 아무도 없었다. 드래곤의 모습으로 변한 오르세가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하! 바로 그거다, 살인 기계!】
“히에에엑! 너, 너무 빨리 날지 마세요!”
아셀이 새된 비명을 내질렀다. 마르야가 웃었다. 지금까지 해온 모험, 그리고 필레온에서의 배움은 헛되지 않았다.
나도 더 열심히 해야지. 마음을 다잡은 그녀가 몸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성채 깊숙한 곳에서 다수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제, 제국의 샛별이 온다!”
“보, 본성으로 도망쳐라! 문을 걸어 잠궈!”
결사 항전을 펼치던 신도들이 전부 내성으로 퇴각하고 있었다. 나름 비장하던 그들의 얼굴에서는 이제 두려움과 절망밖에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이 달려온 방향으로 시선을 옮긴 마르야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지옥도가 펼쳐져 있었다. 갈가리 찢겨나간 시체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저런 건 없었는데.
“슐리펜.”
마르야는 저 깔끔한 절단면이 모두 슐리펜의 폭풍검에 당한 흔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오늘 가장 많은 살생을 저지른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슐리펜은 자신이 만들어낸 시체의 길을 짓밟으며 내성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왼손에 쥐어진 페일 로드가 서늘한 청색광을 흩뿌리고 있었다. 그가 한 번 바닥을 찰 때마다 간격은 빠르게 좁혀지고 있었다.
“닫아! 닫아! 닫으라고!”
“드, 들어오지 못하게 해!”
신도들은 아이라도 된 것처럼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쿠르르릉···! 내성의 대문이 빠른 속도로 닫히고 있었다. 특수 설계된 대문은 파괴하기 위해서는 연합군 측에서도 제법 수고를 들여야 하는 물건이었다.
“아, 안 돼!”
하지만 슐리펜은 문이 닫히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안쪽으로 침투했다. 쿵! 그가 내성으로 진입하는 순간 대문이 닫혔다.
“흐아아악!”
“사, 살려 주세요!”
한층 처절해진 비명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 중간마다 바람 부는 소리가 섞여서 들려왔다. 진격하던 연합군조차 걸음을 멈춘 채 침을 삼키고 있었다.
“······!”
그러던 어느 순간 비명이 멎었다. 더는 대문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어느 병사 한 명이 입을 열었다.
“끄, 끝났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서로의 시선을 교환한 병사들이 앞으로 발을 내딛는 차였다. 콰아아아앙! 내성의 천장이 박살나며 거대한 회오리가 솟구쳐 올랐다.
“허어어억!”
“미, 미친···!”
칼바람으로 이루어진 회오리는 지름이 수십 미터는 되는 것 같았다. 건물의 파편, 갈가리 찢긴 시체들이 사방으로 뿌려졌다.
그 회오리의 중심에서 인영 하나가 치솟았다. 탁! 가장 높은 망루 위에 착지한 슐리펜이 목청 높여 외쳤다.
“나바르도제여! 다 끝냈습니다!”
언제나 조용하던 슐리펜이 냈다고는 믿을 수 없으리만치 우렁찬 목소리였다. 전장을 타고 퍼져 나간 외침이 대기 중이던 나바르도제에게 닿았다.
【확인했다.】
요새들이 만들어내던, 총본산을 가로막던 별의 가호가 사라지고 있었다. 나바르도제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의 벌어진 입 사이에는 작은 태양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뜨겁고 밝은 불덩이가 맺혀 있었다.
이제는 때가 되었다. 줄곧 들이마시기만 하던 나바르도제가 처음으로 숨을 내뱉었다. 화염의 구체가 창백한 성을 향해 발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