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의 천재칼잡이-291화 (291/333)

< 291. 결전(1) >

#291

나바르도제가 숨을 내뱉었다. 그녀의 목구멍에 머물러 있던 불덩이가 네뷸라 클라지에의 총본산을 향해 쏘아졌다. 찰나 모든 연합군의 동작이 멎었다.

“쏴, 쐈다!”

누군가 외쳤다. 결국에는 이 순간이 찾아오고야 말았다. 태양의 동생이라 해도 믿어질 만큼 밝고 뜨거운 불덩이가 바람을 가르며 미끄러지고 있었다.

“모두 눈을 감고 고개를 숙여라! 마탑에 지원 요청을 보내!”

“침착하게 대응해라!”

여기서부터가 중요했다. 각 부대를 이끄는 지휘관들이 신속하게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미리 연습한 대로 엄폐물을 찾아 숨거나 고개를 깊숙이 숙이고 불덩이로부터 몸을 돌렸다.

[아운 필라 님. 지금입니다.]

[확인했네. 이거 굉장하군.]

아데샨이 마탑주들에게 전음을 보냈다. 여명 마탑주 아운 필라의 감탄사가 돌아왔다. 장거리 화력 지원을 담당하는 그는 휘하의 마법사들과 함께 전황을 쭉 지켜보고 있었다.

우우웅! 동시에 거대한 역장이 연합군이 점거하고 있는 아홉 요새를 뒤덮었다. 비단 여명뿐이 아닌 모든 마탑의 합작품이기도 했다. 나바르도제가 뿜은 불의 반동을 막아내기 위한 방어막이었다.

“제발···!”

여기까지 5초가 걸리지 않았다. 아데샨이 눈을 감은 채 주먹을 움켜쥐었다. 대륙의 평화가 눈앞에 있었다. 작아지던 불덩이가 총본산을 덮고 있는 별의 가호에 부딪히는 순간이었다.

콰아아아앙-!! 굉음이 울려 퍼졌다. 형용할 수 없는 섬광과 열기가 백색 대지를 뒤덮었다. 눈에 보이던 모든 것이 진홍색 불길에 삼켜졌다.

“크윽···!”

“버, 버텨라!”

병사들이 이를 악물었다. 다섯 겹의 방어막을 사이에 두고 있음에도 끔찍한 열기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순식간에 임계점에 도달한 방어막들이 미친 듯이 흔들리고 있었다.

“흐아아아악!”

【잠깐···】

방어막 바깥에 있던 생명체는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살아남지 못했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신도나 인공 거인들은 단말마의 비명을 토해내기도 전에 재가 되어 산화해 버렸다.

풀과 나무,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시체들도 모두 화염 속에서 소멸했다. 대기가 토해내는 비명이 천지를 흔들고 있었다. 태초의 불은 지름이 수천 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화염의 회오리를 그리며 하늘 위로 치솟았다.

신이라 해도 저기서 살아남지는 못할 것 같았다. 머지않아 회오리가 흩어지며 불길이 사그라졌다. 아셀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토, 통했다···!”

그는 방어막에 들어가는 대신 머나먼 상공으로 피신해 있었다. 연기가 날아간 자리에서 모습을 드러낸 총본산은 별의 가호를 뒤집어 쓰고 있지 않았다. 아셀을 태우고 있던 오르세가 헛웃음을 쳤다.

【답도 없는 괴물이로군.】

이쯤 되면 어이가 없었다. 가슴에 한 방 얻어맞고 기절했던 수치심이 조금은 완화된 것 같았다. 뒤늦게 눈을 뜬 병사들이 경악성을 내뱉었다.

“봐, 봐라! 놈들의 방어막이 사라지고 있다!”

“맙소사, 정말로!”

아홉 요새에서 환호가 터져 나왔다. 끝내 열기를 이기지 못한 별의 가호가 바스러지고 있었다. 제대로 보이지 않았던 성 내부의 모습이 드러나고 있었다.

“새, 생각보다 얼마 없는데? 전부 안쪽에 들여 놨나?”

“요새를 아홉 개나 돌렸는데 그럴 만도 하지. 이제 밑천이 다 떨어졌나 보군.”

병사들이 웅성거렸다. 인원을 분산시킨 탓일까. 성벽 위로 배치된 신도들의 수는 각 요새에서 저항하던 병력과 별반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저 성 깊숙한 곳에서 일렁거리는 마나였다. 막대한 양의 마나가 보이지 않는 기둥을 이루며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다.

“저건 뭐지?”

“모르겠어. 뭔가 하는 것 같기는 한데···.”

자세한 건 알 수 없었다. 거의 모든 이들이 동시에 나바르도제를 올려 보았다. 불을 한껏 뱉어낸 그녀는 제자리에서 날갯짓하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아데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바르도제 님···?”

놀라운 전과를 거두었음에도 어째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여전히 창백한 성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그걸 모르는 병사들은 승리를 확신한 채 돌격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 분 정도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으르렁거리던 나바르도제가 툭 내뱉었다.

【한 발 더 쏘겠다.】

“네?”

사람들의 눈이 커졌다. 당황한 지휘관들이 뭐라 말하려던 찰나였다. 콰아아앙! 그녀의 입이 쫙 벌어지며 다시 한 번 불이 뿜어져 나왔다.

“잠깐, 나바르도제!”

슐리펜이 다급하게 외쳤다. 방어막이 사라진 지금, 혹시라도 이릴이 저 안에 있다면 휘말릴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주사위는 이미 던져진 뒤였다. 화염의 격류는 이미 창백한 성의 목전에 도달해 있었다.  당황한 병사들이 다시금 눈을 감고 몸을 돌리려는 찰나였다. 콰아아아! 성과 충돌하려던 불길이 좌우로 갈라졌다.

“빌어먹을, 저게 뭐야!?”

“부, 불이 갈라졌다!”

병사들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보면서도 믿을 수 없었다. 갈라진 불길은 성에 닿는 대신 양옆으로 비껴서 지나가고 있었다.

무언가 그녀의 불을 막아내고 있었다. 찰나 위기를 감지한 아데샨이 그녀를 향해 외쳤다.

“위험해요!”

【음?】

나바르도제가 미간을 좁혔다. 동시에 화염이 갈라지던 자리에서 초승달 하나가 쏘아져 나왔다. 기괴한 색채로 일렁거리는 초승달은 연합군이 주둔하고 있는 요새만큼이나 거대했다.

“검기···!”

아데샨의 눈이 커졌다. 형태로 보나 뭘로 보나 틀림없는 검기였다. 다만 그 크기와 위세가 도저히 현실성이 없었다.

나바르도제가 신경질을 내듯 화력을 더했지만 검기는 멈추지 않았다. 화염을 가르며 날아온 초승달이 그녀에게 적중하려던 찰나였다.

【제길.】

결국 나바르도제가 먼저 몸을 뒤틀었다. 동시에 검기가 그녀의 날갯죽지를 가볍게 스치며 지나갔다. 촤악! 검기가 스친 자리에서 피가 튀었다.

“나, 나바르도제 님!”

아데샨이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인공 거인의 창에 직격당하고도 멀쩡하던 붉은 비늘이 깔끔하게 잘려 있었다. 충격에 빠진 연합군 진영 위로 침묵이 내려앉았다. 불현듯 성 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두 번은 곤란하지. 아가씨.”

【너는···.】

나바르도제의 눈이 커졌다. 새하얀 성벽 위, 불길이 완전히 사그라진 자리에 웬 사내 한 명이 서 있었다. 오른손에 쥐어진 장검과 입고 있는 옷만큼이나 새하얀 머리카락이 인상적이었다. 그의 얼굴을 본 아데샨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로난?”

사내의 얼굴은 로난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나이가 좀 있고, 머리카락 색이 다른 것만 제외하면 동일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불현듯 로난이 말해준 누군가의 인상착의가 머릿속을 스쳤다. 사내의 정체를 유추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가 비명을 지르듯 읊조렸다.

“교주 아벨···!”

“뭐, 뭐라구요?”

옆에 있던 마르야가 눈썹을 치켜떴다. 저 사내가 교주라는 사실은 순식간에 전군으로 퍼져 나갔다. 그들이 잠시 얼어 있던 와중이었다. 콰아아앙! 나바르도제의 날개가 폭발하듯 펼쳐졌다.

【끼어들지 마라. 저 자는 내가 맡겠다.】

아벨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드래곤의 감각이, 곤두서는 비늘이 그가 누구보다 위험한 적수임을 경고하고 있었다.

축소시켰던 몸이 점점 부풀어 오르며 원래의 크기로 돌아가고 있었다. 새롭게 자라난 비늘이 어깻죽지에 났던 상처를 덧씌우고 있었다.

날개를 접은 그녀가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거의 동시에 아벨의 형체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콰아아앙! 충돌음은 정확히 중간 지점에서 울려 퍼졌다. 아벨이 픽 웃었다.

“성격 한 번 급하시군.”

【닥쳐라, 사악한 것.】

나바르도제가 경멸 섞인 어투로 말했다. 아벨은 대꾸하는 대신 검을 한 바퀴 돌려 잡았다. 그녀와 합을 겨룬 손이 당장에라도 부서질 것처럼 떨려오고 있었다.

“힘은 또 쓸데없이 세고 말이지.”

괜히 불의 어머니라 칭송받는 것이 아니었다. 이걸 어떻게 잡아야 하나 그가 이런저런 고민을 하던 차였다. 불현듯 나바르도제의 뿔이 번쩍거리더니 거대하고 반투명한 구체가 두 사람을 감쌌다. 아벨이 눈썹을 으쓱였다.

“이건 또 뭐야?”

【네 야망은 여기까지다.】

나바르도제가 으르렁거렸다. 전투의 여파를 외부로 발산하지 않기 위한 방어막이었다. 아벨이 뭐라 말하려던 찰나, 둘의 모습이 방어막과 함께 사라졌다.

“사, 사라졌다.”

“아까 그게 교주였다고? 상황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이건 또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혼란에 빠진 병사들이 웅성거리던 와중이었다. 갑자기 하늘 위에서 나바르도제의 외침이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모두 진격하라! 추악한 공상을 실현시키려고 하는 악의 무리를 모조리 척결해라!】

“나바르도제 님···!”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명하게 들렸다. 아마 이 공간 내에서 교주와 전투를 벌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불현듯 나바르도제가 있던 자리의 공간이 뒤집히며 로르혼이 튀어나왔다.

“자, 그럼 우리도 가 보도록 하지.”

“대마법사님?”

병사들의 눈이 커졌다. 노인의 모습으로 돌아온 그의 손에는 이미 시전 중이던 마법이 맺혀 있었다. 짝! 주문 몇 마디를 읊조리던 그가 손뼉을 쳤다. 모든 연합군의 발아래에 자그마한 마법진이 그려졌다.

“이건···?”

“저 먼 거리를 걸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잖나. 폭풍이 되어 보게나.”

병사들의 당혹성에 로르혼이 웃음 지었다. 이어서 모든 마법진이 일제히 빛을 발하더니 연합군 개개인이 있는 자리의 공간이 뒤집혔다.

“허어억!”

파아아아-! 다시 눈을 뜬 사람들이 헛숨을 들이켰다. 아홉 요새에 분산되어 있던 연합군이 한 자리에 모여 있었다. 그들은 진형까지 완벽하게 갖춘 채 창백한 성을 포위하고 있었다.

“세상에.”

“시, 십만 명을 동시에 옮긴 거야?”

드높은 성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먼발치에서 보이던 마나의 기둥도 손에 닿을 듯 가까워져 있었다. 성벽 위에 배치되어 있던 신도들이 경악했다.

“젠장, 갑자기 뭐야!?”

“대, 대주교님!”

대마법사라는 호칭이 아깝지 않은 마법이었다. 적응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전음으로 전략을 공유한 지휘관들이 돌격 명령을 내리려는 차였다. 별안간 성벽 위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서 오세요. 여러분.”

“응?”

아데샨이 고개를 들었다. 화려한 로브를 걸친 여인 하나가 연합군을 내려보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젊고 아름다운 처녀에 불과했으나 어깨 위로 피어나는 기운이 심상치가 않았다.

“다들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 많았어요. 여러분의 저력에는 정말 감탄했답니다. 가짜라고는 해도 설마 그 많은 거인들을 다 해치우실 줄은 몰랐어요.”

여인이 말을 이었다. 당황한 사람들은 뭐라 대답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아데샨이 석궁을 겨냥하는 순간이었다. 대주교 르탄시에가 싱긋 미소지었다.

“그럼, 이제 잘 가요.”

간드러지는 웃음이었다. 이어서 아까부터 눈에 거슬리던, 성 위로 솟구치던 마나 기둥이 수십 배로 증폭되었다.

화아아악! 그와 동시에 하늘을 뒤덮고 있던 구름이 단번에 흩어졌다. 연합군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거대한 마법진 수십 개가 빼곡하게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안 돼.”

누군가 읊조렸다. 그것은 한 번만 봐도 영원토록 잊을 수 없는 풍경이었다. 기이한 문양이 꿈틀거리는 마법진들은 익히 본 적이 있었다.

그를 방증하듯 새하얀 거인들이 마법진을 찢으며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적게는 네 장, 많게는 여섯 장의 날개가 달린 그들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가짜 따위가 아니었다.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준비한 것이 분명했다. 그제야 사람들은 아홉 개의 요새가 단순히 방어만을 위한 것이 아닌, 시간을 끌기 위해 지어진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데샨의 입술 사이로 절망 어린 탄식이 새나왔다.

“구름 뒤에 감추고 있었나···!”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날개 퍼덕거리는 소리가 불타버린 땅 위에서 메아리치고 있었다. 나무도 통째로 뽑아버릴 광풍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도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슐리펜도, 두 검성도, 심지어는 로르혼마저 굳어 버린 채 거인들이 내려오는 하늘을 바라볼 뿐이었다.

절망에 압도된 이들은 자신들이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 버렸다. 그때 가장 먼저 내려온 거인이 손을 뻗었다. 네 장의 날개를 달고 있었지만 두아루나 바사기아보다 훨씬 덩치가 컸다.

모여든 입자가 그의 손에 빛으로 이루어진 창을 쥐여 주었다. 지상을 겨냥한 거인이 입을 열었다.

『아하유테가, 형을 집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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