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의 천재칼잡이-294화 (294/333)

< 294. 결전(3) >

#294

과거를 청산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하유테의 머리가 하늘로 솟구쳤다. 전장에 있는 모두가 충격에 입을 다물었다. 로난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추락하는 숙적의 시체를 지켜보고 있었다.

“뭣이···!”

아벨의 얼굴이 굳어졌다. 거인을 단칼에 베어내는 것은 그에게조차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아하유테는 날개가 두 장 달린 거인 중에서는 굉장히 강한 편에 속했다.

『아하유테···!』

『오만한 자여, 바위처럼 멈출지어다.』

머지않아 침묵이 깨졌다. 아하유테의 근처에 있던 거인들이 달려들었다. 자세를 고쳐 잡은 로난이 혀를 내밀었다.

“좆까.”

그는 소매에 묻은 오물을 털어내듯 검을 휘둘렀다. 하늘 위에서 싸울 생각은 없었다. 촤아악! 검로를 따라 쏟아진 검기가 거인들을 덮쳤다.

『크윽···!』

물보라를 연상케 하는 예기 덩어리들은 그대로 별의 가호를 부수고 거인들의 몸에 적중했다. 푸른 피가 허공을 적셨다. 치명상을 입히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몸을 경직시키기에는 충분했다.

“엇차.”

쾅! 로난은 먼저 떨어진 아하유테의 시체 위에 착지했다. 원래대로라면 몸이 박살나 버릴 높이였음에도 아무렇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저주가 사라지고 있는 것이 실감 났다.

머리 없는 아하유테의 몸뚱어리는 물에 젖은 자루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허무하리만치 간단한 결착이었다. 절단면에서 흘러나온 푸른 피가 강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맛이 어때, 이 대머리야.”

퉤, 로난이 그 위에 침을 뱉었다. 부활의 여지는 보이지 않았다. 전생의 원한을 생각하면 당장에 회를 쳐서 씹어먹고 싶었지만 그럴 만한 여유는 없었다.

몸을 돌린 로난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의 연인이 전장 한복판에 주저앉아 있었다. 눈가를 한 번 문질러 닦은 아데샨이 입을 열었다.

“로난.”

“오래 기다렸죠.”

로난이 입술을 비틀었다. 폭발에 휘말린 아데샨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군데군데 찢어진 제복 틈새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떨리는 손은 아직도 석궁을 움켜쥐고 있었다. 별다른 노력 없이도 아데샨이 벌인 사투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전생과는 달리 사지는 멀쩡하다는 점이었다. 로난은 말없이 외투를 벗어 그녀의 어깨 위에 걸쳐 주었다.

“미안해요, 늦어서.”

“···아.”

아데샨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천이 몸을 감싸 주는 감각이 정겨워서 더는 견딜 수가 없었다. 눈을 감았다 뜨는 것을 반복하며 물기를 짜내던 그녀가 입을 뗐다.

“···무슨 일이 있던 거야?”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로난의 어깨 위로 배어 나오는 기운은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져 있었다.

고작 사흘 만에 이루어진 성장이라기에는 너무 급진적이었다. 그와 함께 나타난 거대한 바위는 아직도 거인들을 향해 광선을 쏘아 대고 있었다. 로난이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으음. 많은 일이 있었죠.”

여기서 설명하기에는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자신의 두뇌로는 요약할 수 없다 판단한 로난이 다시 몸을 돌렸다. 그가 검 끝으로 거인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일단 저것들부터 치우고 올게요. 잠깐만 기다려요.”

“잠깐, 그래도 혼자서는···!”

“괜찮아요. 혼자도 아니고요.”

로난이 히죽 웃었다. 그게 무슨 소리인지 아데샨이 물어보려던 차였다. 익숙한 울음소리가 하늘 위에 울려 퍼졌다.

“뺘아아아앗-!!”

“시타?”

아데샨이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머리 위의 상공에서, 시타가 네 장의 날개를 펼친 채 울부짖고 있었다. 전장에 만연하던 혈흔이 모두 방울의 형태가 되어 떠오르고 있었다.

시타의 몸에서는 안개처럼 자욱한 마나가 퍼져 나오고 있었다. 붉은 마나는 전장을 뒤덮으며 부상당한 연합군 병사들을 감싸고 있었다. 머지않아 곳곳에서 감탄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사, 상처가 낫고 있다!”

“돌아왔나···.”

흘린 피가 몸으로 돌아오며 부상이 낫고 있었다. 병사들 중 몇 명은 이미 경험해 본 시타의 치유 마법이었다. 꿈새의 신통한 혈마법은 죽음에 이를 정도의 중상이 아니라면 그럭저럭 고칠 수 있었다.

“이거 참···기가 막히는군.”

숨을 고르던 로르혼이 웃음을 흘렸다. 사람들의 얼굴이 밝아지고 있었다. 뭐가 뭔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로난이 돌아왔다는 것, 그리고 역전의 기회가 찾아왔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여전히 급박한 상황인 것은 변하지 않았다. 로난과 거대한 돌덩이가 거인들을 붙들어 놓고 있었지만, 전장에는 아직 깃털에서 태어난 사역마들이 남아 있었다.

“키헤에에엑!”

“고오옥!”

다채롭게 생겨먹은 사역마들이 연합군과 교전하고 있었다. 포효와 비명이 버무려진 음성이 사방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사기를 어느 정도 회복한 병사들이 무기를 쳐들었다.

“진형을 가다듬어라! 아직 승산이 있다!”

“수가 적다고 겁먹지 마라! 우리는 실체도 없는 괴물들에게 패배하지 않는다!”

아데샨의 말마따나 이제 물러설 곳은 없었다. 본격적으로 전투가 시작되려던 차였다. 쿵. 웬 엘프 여인 한 명이 그들 사이에 착지했다.

“가세하겠습니다.”

“다, 당신은···?”

병사들이 당혹성을 흘렸다. 새하얀 머리카락과 붉은 눈이 인상적이었다. 거의 어깨까지 늘어진 기다란 귀가 그녀의 고귀한 혈통을 증명하고 있었다.

빛으로 이루어진 사역마들은 이빨과 손톱을 앞세우며 달려들고 있었다. 그 흉측한 짐승들의 앞에서 여인의 몸은 너무나도 가녀려 보였다.

“아, 아가씨. 위험합니다!”

“피해!”

뒤늦게 정신을 차린 병사들이 당황하며 소리쳤다. 하지만 여인은 피하지 않았다. 노랫말 같은 문장을 읊조리던 그녀가 사역마들을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화아아악! 지면이 뒤집힐 정도로 거센 바람이 적진을 휩쓸었다.

“키엑···!”

“캬아아아!”

바람에 휩쓸린 사역마들은 토막이 나며 찢겨 나갔다. 단번에 수백 마리의 사역마가 빛으로 화하며 소멸해 버렸다. 병사들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이, 이건···?”

갑자기 못 보던 게 나타났다. 거대한 독수리 한 마리가 여인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칼처럼 날카로운 바람이 반투명한 몸뚱어리 주변으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엘시아가 독수리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말했다.

“함께 싸워줘요. 하이란.”

“퓌요오오!”

하이란이 회답하듯 포효했다. 거대한 회오리 수십 개가 사역마들의 무리 중간중간에서 솟구쳐 올랐다. 이어서 주변의 대기가 일렁거리더니 각양각색의 정령들이 튀어 나왔다.

“저, 정령?!”

“맙소사. 이런 대규모 소환이라니···!”

병사들이 기겁했다. 이렇게 많은 정령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순식간에 세를 불린 정령들은 그대로 사역마들에게 달려들었다.

거인이 많은 만큼 사역마의 수도 많았지만, 최고의 정령사인 엘시아에게 그만한 머릿수를 소환하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되려 수에서 압도된 사역마들이 밀려나기 시작했다. 정령 또한 그들처럼 죽음을 두려워하는 존재가 아니었기에, 상황은 더욱 겉잡을 수 없는 난전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하이란.”

그 광경을 지켜보던 아벨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시선은 거대한 독수리에게 머물러 있었다. 사역마들을 무자비하게 찢어발기고 있는 독수리는 분명 폭풍의 황태자 하이란이었다.

이전에 날개를 잘라 버린 적이 있는데 이렇게 재회할 줄은 몰랐다. 시선을 옮긴 그가 이번에는 엘시아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친 엘시아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아벨.”

“교단을 배신하더니 얼굴이 좋아 보이는군. 이제 교주님이라 부르지도 않는 건가.”

“애초부터 당신을 교주라 생각한 적은 없어요. 그쪽은 별로 안 좋아 보이네요.”

엘시아가 싱긋 웃었다. 아벨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쳤다. 앞머리를 쓸어넘긴 그가 로난을 보며 말했다.

“···그래, 네가 저 애송이를 도와준 거군. 그렇다면 갑자기 강해진 것도 이해가 돼.”

“저만은 아니에요.”

“뭐?”

“저는 어디까지나 조언자일 뿐, 주역은 따로 있어요. 인사라도 나누시는 게 어때요?”

그 말을 남긴 엘시아가 등을 돌렸다. 영문 모를 소리에 아벨의 미간이 좁혀졌다. 칼자루에 손을 얹은 그가 망루에서 뛰어내리려던 차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이구나. 아벨.”

“형님?”

아벨의 눈이 커졌다. 틀림없는 카인의 목소리였다. 황급히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돌아보자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는 돌덩이가 눈에 들어왔다.

돌덩이는 여전히 사방으로 광선을 갈겨 대며 거인들을 견제하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카인이 저 돌덩이 안에 있었다. 감정을 가라앉힌 아벨이 입을 열었다.

“···살아 있었소?”

불가능한 일이었다. 자신의 검에 찔린 상처는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결코 고칠 수 없었다. 머지않아 카인의 회답이 돌아왔다.

“그래. 동생과 아들을 잘 둔 덕에 말이지. 네 피가 나를 구했단다.”

“내 피라고? 그걸 어디서···아.”

뭐라 말하려던 아벨이 눈썹을 치켜떴다. 제도에서 이릴과 벌였던 교전이 뇌리를 스쳤다. 갑작스러운 기습 탓에 몇 방울의 피를 흘렸었다.

“그래···대충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겠군.”

정황을 알 것 같았다. 총본산의 위치를 들킨 것도 그것 때문일 터였다.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한 아벨이 쓴웃음을 지었다. 바윗덩이를 응시하던 그가 기가 막힌다는 투로 말했다.

“그래도 설마 그 배까지 가져올 줄은 몰랐는데. 언젠가 별이 망할 무렵에 방주로 쓴다 하지 않으셨소?”

“그랬었지. 하지만 지금 상황을 보니 방주보다는 전함이 어울릴 것 같더구나. 원래 물건이라는 건 용도에 맞게 사용하는 것이지.”

“부질없는 저항이요, 형님. 가장 찬란하던 시대의 유산을 이런 식으로 낭비하다니···정말로 형님에게 승산이 있다 생각하시오?”

아벨이 말했다. 하늘은 여전히 거인들을 부르는 마법진으로 뒤덮여 있었다. 대주교들의 의식이 멈추지 않는 이상 거인들은 끈임없이 강림할 것이었다.

더군다나 의식이 진행 중인 총본산은 자신이 직접 세운 별의 가호로 보호받고 있었다. 연합군에서 제일가는 강자들은 저 안에 갇힌 채 죽음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당장 자신이 나선다면 노쇠한 카인이나 구시대의 전함 따위는 순식간에 처리해 버릴 수 있었다.

“정말로?”

아벨이 되물었다. 그의 어깨 위로 숨조차 쉬기 힘든 살기가 넘실거리며 흘러 나왔다.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기는 했지만 상황은 여전히 교단에 유리했다.

카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벨이 입꼬리를 올렸다. 아무래도 슬슬 주제 파악이 된 모양이었다.

이거 희망을 꺾어 놓을 필요가 있겠군. 그리 판단한 아벨이 칼자루를 움켜쥐는 차였다. 파아아아···! 강렬한 노을빛이 전장 한복판에서 터져 나왔다.

“큭.”

아벨이 반사적으로 눈을 가렸다. 망막이 익어 버릴 정도로 강렬한 섬광이었다. 그가 뭐라 말하기도 전이었다. 하늘을 선회하던 거인들이 일제히 추락하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아벨이 헛숨을 들이켰다. 보면서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쾅! 콰앙! 거대한 몸뚱어리가 땅에 처박힐 때마다 굉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다급하게 시선을 돌린 그가 빛의 발원지를 쳐다보았다. 자신을 똑 닮은, 웬 싹퉁머리 없게 생긴 청년 한 명이 검을 뽑아들고 서 있었다.

노을빛은 그 검신을 타고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쾅! 비틀거리던 거인 한 명이 다시금 지면에 처박혔다. 카인의 회답이 돌아왔다.

“그래.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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