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5. 결전(4) >
#295
“다들 비켜!”
칼자루를 움켜쥔 마르야가 대검을 내찔렀다. 푸확! 두꺼운 검신이 앞을 가로막던 신도 네 명의 복부를 꿰뚫었다.
“커억!”
등을 찢고 나온 칼날이 붉었다. 쾅! 그녀가 뿌리듯이 검을 휘두르자 꼬챙이가 된 신도들이 저 멀리 내팽겨쳐졌다.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낸 마르야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아···쉴 틈을 안 주네.”
“허억···이렇게 많이 있을 줄은···헉, 나도 예상하지 못했군.”
뒤를 지키던 브라움이 주억거렸다. 그 또한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있었다. 피를 잔뜩 머금은 갑옷과 방패가 눅진한 적색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못해도 각각 백 명씩은 처치한 것 같았다.
그들은 총본산 내부를 헤매고 있었다. 창백한 성의 실내는 웅장한 겉모습 이상으로 드넓고 복잡했다.
다른 일행과는 갈라진 지 오래였다. 아벨이 새롭게 별의 가호를 일으킨 뒤, 특공대는 독 안의 쥐 신세가 되어 네뷸라 클라지에의 협공을 당하고 있었다.
그럭저럭 싸울 만 하기는 했으나 문제는 로난의 피가 거의 다 떨어져 간다는 점이었다. 마주치는 신도들 중 열 명에 한 명은 별의 가호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대로라면 한계가 찾아올 것이 명확했다.
물론 가장 신경쓰이는 것은 따로 있었지만. 마르야가 걱정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다들 무사할까.”
“물론이지. 다들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너도 알고 있잖나.”
“그렇기는 한데.”
마르야가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맞는 말이었지만 그럼에도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내로라하는 인재들이라고는 해도 적의 수가 너무 많았다.
당장 할 수 있는 것이 없는게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이릴 언니는 도대체 어디 있는 걸까. 대검을 내린 그녀가 숨을 고르던 차였다. 복도 모퉁이 너머에서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저쪽에서 소리가 났다. 잡아라!”
“···쳇.”
마르야가 혀를 찼다. 하여튼 상도라는 게 없는 놈들이었다. 발소리로 미루어 보아 못 해도 스무 명은 되는 것 같았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아셀의 울먹거리는 얼굴이 그녀의 눈앞을 스치며 지나갔다.
“보고 싶네···우리 귀염둥이.”
퉷. 손에 침을 뱉은 마르야가 다시 대검을 들어 올렸다. 어쩌면 여기서 죽을 지도 모르겠다는 재수 없는 생각은 치워 두기로 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입버릇처럼 말하고는 했었다. 돌아오는 것까지가 여행이라고. 그 말에는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였다.
“자, 와라.”
마르야가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푸른 오러가 칼날을 휘감기 시작했다. 가까워지던 발소리가 모퉁이를 돌아넘으려던 차였다.
“너, 너는?! 컥···!”
“흐아아악! 살려줘어!”
갑자기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모퉁이 너머에서 토막난 시체들이 연달아 날아오기 시작했다. 마르야가 움찔거렸다.
“뭐, 뭐야?”
“맙소사.”
브라움의 관자놀이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실시간으로 솟구치는 피가 복도를 거칠게 적시고 있었다.
미친 야수라도 날뛰고 있는 듯한 광경이었다. 마침내 잠잠해진 모퉁이 너머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두 사람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슈, 슐리펜?”
“살아 있었군.”
슐리펜이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흩어진 이후로 첫 재회였다. 그의 몸은 두 사람과 다를 바 없는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물론 본인의 피는 아니었다.
그는 마르야나 브라움과는 달리 지친 기색을 일절 드러내지 않았다. 제국의 샛별의 품격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칼날에 묻은 피를 털어낸 그가 질문을 건넸다.
“너희. 아직 로난의 피가 남아 있나.”
“그, 그런데?”
“잘 됐군. 따라와라.”
갑자기 슐리펜이 몸을 돌렸다. 뜬금없는 행동에 마르야가 당혹성을 흘렸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야, 어디 가?”
“의식이 벌어지는 장소를 찾았다.”
****
“더럽게 요란하네.”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번잡하기 짝이 없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괴한 색채로 점멸하는 마법진 아래로 거인들과 날아다니는 돌덩어리가 교전을 벌이고 있었다.
미치광이의 상상화를 보는 것 같았다. 전함 다인하르는 사방으로 붉은 광선을 쏘아 대며 연합군을 공격하려는 거인들의 주의를 끌고 있었다. 평생을 동굴에 살아온 원주민들이 저런 정밀한 기계를 어떻게 조종하는 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거인들은 전함의 도발에 응해 주고 있었다. 빛의 창 수십 개가 쉴 새 없이 돌덩이를 두들기고 있었다. 허나 다인하르를 감싼 방어막은 쉽사리 부서지지 않았다. 구원자가 직접 발동한 별의 가호는 상상을 초월하는 강도를 자랑했다.
“제법이군. 아버지도.”
물론 한계는 명확히 존재할 테니 이대로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불현듯 시야의 앞쪽에서 굵직한 신음이 들려왔다.
『···무슨 수를 쓴 거냐. 필멸자여.』
“아, 일어나셨어?”
로난이 시선을 내렸다. 조금 전에 끌어 내린 거인들이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들과 눈이 마주친 로난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이래야지. 이제야 눈높이가 맞네.”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더는 대면을 위해 고개를 들 필요가 없었다. 그때 가장 먼저 몸을 일으킨 거인이 빛의 창을 던졌다. 로난은 먼지를 털어내듯 가벼운 동작으로 검을 휘둘렀다.
스각! 두 동강이 난 창이 입자로 화하며 사라졌다. 곧바로 다음 창이 날아왔지만 이번에도 결과는 다르지 않았다. 그 짓거리를 두 번 더 반복한 로난이 입을 열었다.
“뒈지기 전에 잘 들어 이 멀대들아. 난 니들이 싫어.”
『뭐라고?』
“맨질거리는 대머리도, 유령이 싸갈긴 오줌마냥 희멀건 피부도 싫어. 쓸데없이 멋진 목소리도 불쾌하기 짝이 없고.”
불현듯 로난의 팔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퍼억-! 계속해서 창을 던지던 거인의 얼굴에서 작은 폭발이 일어났다. 막 빛을 끌어모으던 거인이 고꾸라졌다.
『크억!』
“그런데, 가장 좆같은 건 따로 있어. 뭘 거 같냐?”
로난이 말했다. 다른 거인들이 움찔거렸다. 고꾸라진 거인의 두 눈이 터져 있었다. 안구가 으깨진 자리에서는 푸른 피가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으윽···크으으···.』
거인이 고통 어린 침음을 흘렸다. 그는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쉽사리 일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불멸의 존재라 할지언정 눈은 상처의 회복이 느린 급소에 속했다.
“뭘 거 같냐니까?”
로난이 다시 물었지만 답변은 돌아오지 않았다. 감각을 공유하는 다른 거인들의 표정이 급속도로 썩어 가고 있었다.
콰아앙! 갑자기 날개를 펼친 거인들이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음푹 파이고 뒤집힌 지면과는 달리 새하얀 몸뚱어리에는 생채기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로난의 입꼬리가 옅게 올라갔다. 베는 보람이 있을 것 같았다. 물론 그것과는 별개로 기분은 나빴지만. 거인들을 따라 시선을 올린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 바로 그 깔아 보는 눈빛이야.”
아직 공중에 뜨지는 않았지만 키 차이가 워낙에 많이 나서 고개를 들어야 했다. 로난은 그것이 지독하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전생의 경험에서 기인한 혐오였다. 당시의 로난은 하늘을 나는 아하유테에게 검이 닿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을 지키지 못했다. 그때, 가장 앞에 있던 거인이 입을 열었다.
『강한 자여. 그대의 방종도 여기까지다.』
낮고 깊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로난은 대답하지 않고 그들을 물끄러미 쳐다만 보았다.
작전을 머릿속으로 공유한 거인들이 일제히 날아오르려던 차였다. 다시금 노을을 닮은 빛무리가 라만차의 검신을 타고 차올랐다. 파아아아···! 방사형으로 뻗어 나간 광채가 하늘을 뒤덮었다.
『억···!』
쾅!! 동시에 떠올랐던 거인들이 바닥에 처박혔다. 아까는 범위에 들어와 있지 않던 거인 몇 명도 추가적으로 떨어졌다. 로난이 픽 웃었다.
“왜, 날개가 굳어 버리기라도 하셨나?”
『어떻게···이런···!』
거인들이 당혹성을 흘렸다. 안간힘을 써서 날개를 퍼덕여 봐도 몸이 떠오르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무언가 자신을 지면으로 끌어당기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분명히 경고했어. 뒈지고 싶으면 오라고.”
저주로부터의 해방은 상대를 끌어당기는 그의 오러도 폭발적으로 강화시켰다. 지금도 강해지고 있는 오러는 날개 넷 달린 거인들을 끌어 내리기에는 충분한 위력을 자랑했다. 칼을 한 바퀴 돌려 잡은 로난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무시하고 왔으니까, 이제 뒈져야지.”
『그대는···!』
거인들이 뭐라 말하려던 차였다. 쾅! 로난이 앞으로 치고 나감과 동시에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공격을 눈치챈 거인들이 반격에 나섰으나 로난은 기본적으로 그들보다 빨랐다.
서걱! 가장 앞에서 달려오던 거인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졌다. 기우는 육체를 밟고 도약한 로난이 바로 뒤에 있던 거인의 가슴에 찌르기를 쏘았다.
푸확! 심장을 꿰뚫은 검격이 등을 찢으며 빠져나왔다. 그대로 뒤로 제비를 넘으며 검을 휘두르자 뒤통수를 노리고 창을 던지려던 거인의 얼굴이 반으로 쪼개졌다.
로난은 세 거구가 쓰러지기도 전에 네 번째 시체를 만들었다. 제비를 넘고 착지한 그가 오러를 발동하자 멀리서 창을 던지려던 거인 하나가 눈앞까지 끌려왔다. 칼자루를 양손으로 쥔 로난이 수직으로 검을 내려 벴다. 촤아아악! 두꺼운 목은 방어를 시도한 팔뚝과 함께 썰려 나갔다.
『이런 일이···』
거인들이 당혹성을 흘렸다. 전장을 종횡무진하며 검을 휘두르는 로난은 서너 배 빠른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 같았다.
이런 상대는 만난 적이 없었다. 날 때부터 포식자로 살아온 불패의 종족이 일방적으로 학살당하고 있었다. 그것도 칼 한 자루에.
촤악! 오 분도 채 지나지 않아 마지막 거인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졌다. 니르바나라는 이름의, 원래대로라면 로르혼의 영혼과 함께 동귀어진해야 할 거인이었다.
“후우.···”
제자리에 멈춰선 로난이 성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인이 아직 절반 정도가 남아 있기는 했지만 지금 치워야 할 상대는 따로 있었다. 그가 검 끝으로 아벨을 겨누며 말했다.
“내려와. 못 배워먹은 새끼야.”
“너···!”
아벨이 미간을 좁혔다. 그는 카인의 존재도 잊어버린 채 로난의 학살극을 지켜보고 있었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것을 확인한 로난이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내려오라니까?”
파아아! 다시금 노을빛이 터져 나왔다. 아벨은 뭘 할 새도 없이 로난의 바로 앞까지 끌려왔다. 뒤늦게 위기를 직감한 그가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 드는 순간이었다. 카아아앙! 날카로운 금속음이 눈앞에서 울려 퍼졌다.
“큭···!”
아벨이 이를 악물었다. 조금만 늦었다면 그대로 목이 날아갔을 터였다. 검격을 막아낸 반동만으로 손이 터져 나갈 것 같았다. 자세를 다잡은 그가 로난에게 물었다.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무슨 수를 쓴 거냐?”
“그건 댁이 알 바가 아니지.”
하지만 로난은 더는 시간을 끌 생각이 없었다. 오러를 거둔 그가 몰아치듯 검격을 쏟아 부었다. 카각! 캉! 허공에서 날붙이가 부딪힐 때마다 불씨가 거칠게 튀어 올랐다. 마침내 아벨의 얼굴에서 여유가 사라졌다.
“젠장, 망아지 같은 놈이···!”
거의 검을 놓칠 뻔한 아벨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속도에서도 힘에서도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었다. 그가 서둘러 몸을 뒤로 빼려던 차였다.
“그렇게는 안 되지.”
다시금 로난의 검이 노을빛으로 물들었다. 아벨의 몸이 확 끌려왔다. 실수를 깨달은 그가 서둘러 대응하려 했지만 로난의 몸은 이미 넓은 원을 그리며 회전하고 있었다.
“···내게 훔쳐간 검술이군.”
불현듯 나비로제가 읊조렸다. 자신이 고안해낸 기술인 회전검이었다. 그녀는 대주교 티에리아와 겨루는 중간 중간 제자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흘러가듯 뇌리를 스치는 기억이 눈앞을 부옇게 물들였다. 필레온의 입학 시험을 치르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언제 이렇게 성장했는지. 티에리아가 비명을 내지르듯 외쳤다.
“교, 교주님!”
대충 봐도 알 수 있었다. 저건 정말 위험했다. 황급히 손을 거둔 그녀가 교주를 지원하기 위해 도약하려던 차였다. 갑자기 주변의 소리가 사라지더니 그녀의 눈앞이 확 어두워졌다. 어둠 속에서 나비로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끼어들지 마라. 한창 좋을 때인데.”
“이, 이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린 티에리아가 헛숨을 들이켰다. 거대한 독사 한 마리가 혀를 날름거리며 자신을 내려보고 있었다.
“만사···!”
티에리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죽음을 애도하는 뱀. 역대 최강의 오러 중 하나로 꼽히는 나비로제의 만사였다. 분명 자이파에게 패배하며 오러를 잃어버렸다 들었는데,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망할 년이!”
물론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뱀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필사적으로 감각을 되찾은 그녀가 달려드는 차였다.
서걱! 나비로제의 대태도가 티에리아의 목을 가르며 지나갔다. 동시에 원을 그리며 날아든 라만차가 아벨의 검을 강타했다.
"뭐...!"
아벨의 눈이 커졌다. 통렬한 파열음이 울려 퍼졌다. 파카아앙-! 충격을 이기지 못한 아벨의 검신이 폭발하듯 부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