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의 천재칼잡이-296화 (296/333)

< 296. 결전(5) >

#296

통렬한 파열음이 울려 퍼졌다. 지금까지 한 번도 부러진 적 없는, 나바르도제의 비늘을 베어낼 때조차 날이 상하지 않은 검이 산산이 조각났다. 아벨의 얼굴이 급격하게 일그러졌다.

“말도 안 돼.”

지독한 악몽을 꾸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얼을 빼놓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로난은 검을 부숴버렸음에도 멈추지 않았다. 곧바로 달려든 그가 수직으로 검을 내려 벴다.

“뒈져라!”

막거나 받아치고 싶어도 검이 없었다. 아벨은 어깨를 비트는 것으로 간신히 공격을 피했다. 쉬익! 라만차의 칼날이 콧망울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지나갔다.

“제길···!”

“어쭈, 피해?”

로난은 계속해서 검격을 쏟아 부었다.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하던 아벨이 이를 악물었다. 점점 숨이 차오르는 자신과는 달리, 로난에게서는 지친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릴은 아직 멀은 건가.’

대단히 좋지 않았다. 그에게는 이릴을 포함하여 상황을 역전시킬만한 카드가 두 장 남아 있었지만, 카드를 뒤집기도 전에 죽어 버린다면 아무 소용이 없었다.

싸워야 했다. 단 한 번의 빈틈이 생기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한 발자국씩 물러나던 아벨이 결국은 성벽을 등지고 서게 되었다. 불현듯 로난의 몸이 우측으로 크게 회전했다.

“네 망상은 여기서 끝이다!”

“······!”

로난이 외쳤다. 아벨의 눈이 커졌다. 마무리 일격이라 생각했는지 동작이 큰 것이 눈에 띄었다. 비어 있는 옆구리를 본 그가 낮은 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아직 어리구나.”

“뭐?”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몸을 확 낮춘 아벨이 손에 힘을 끌어모았다.

로난과 마찬가지로 그 또한 한번 경험한 기술은 잊어버리지 않았다. 넓은 호를 그리며 날아든 라만차가 아슬아슬하게 아벨의 머리카락을 자르며 지나갔다. 전투를 지켜보던 카인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아, 아들아, 위험하다!”

“늦었다. 같은 기술을 쓰지 말라고 형님이 가르쳐주지도 않았더냐!”

로난의 옆구리는 아직 비어 있었다. 아벨은 창처럼 모은 손을 그대로 내질렀다. 힘이 빠지기는 했지만 이 애송이의 갈비뼈를 부수고 심장을 터트리기에는 차고 넘쳤다.

“이런···!”

로난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아벨의 손이 심장을 노리고 날아오고 있었다. 불현듯 그의 한쪽 입꼬리가 픽 올라갔다.

“이런 등신.”

“어?”

아벨이 멈칫거렸다. 그의 손이 로난에게 닿으려는 찰나였다. 쾅! 지면을 박찬 로난이 수직으로 뛰어올랐다.

“뭣이!”

“내가 그것도 모를 줄 알았냐?”

아벨이 헛숨을 들이켰다. 그는 뒤늦게 자신이 속았음을 알아차렸다. 팡! 공격이 빗나감과 동시에 허무한 파공음이 울려 퍼졌다.

“너···!”

로난이 만들어낸 그림자가 그의 얼굴 위로 드리웠다. 더는 피할 공간이 남아 있지 않았다. 허공에서 검로를 비튼 로난이 제비를 돌며 검을 휘둘렀다. 촤아아악! 거두어지던 아벨의 오른팔이 공중으로 솟구쳤다.

“크아악!”

“드디어 잡았다. 쥐새끼.”

아벨이 비명을 내질렀다. 곧장 바닥에 착지한 로난이 사선으로 검을 올려 벴다. 서걱! 뭘 할 새도 없이 날아온 참격이 아벨의 목울대를 가르며 지나갔다.

“허억···!”

아벨은 목을 움켜쥔 채 앞으로 고꾸라졌다.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목뼈와 혈관이 반 넘게 잘린 것이 느껴졌다.

상처를 붙들고 있는 손가락 틈새로 피가 울걱울걱 새나오고 있었다. 인간도 거인도 아닌 그의 피는 기괴한 보라색을 띠었다.

“시발. 어떻게 살아 있는 거야?”

로난이 눈썹을 치켜떴다. 목을 베었는데 살아 있다니, 역시나 괴물이었다. 물론 별다른 상관은 없었기에 그는 묵묵히 검을 치켜들었다. 까짓꺼 한 번 더 자르지 뭐.

“커억···안 된다···헉, 이대로는···!”

아벨이 애원하듯 몸부림쳤지만 그건 로난이 알 바가 아니었다. 그가 마지막 일격을 날리려던 차였다.

콰아아아-! 갑자기 머리 위에서 천지가 뒤집히는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니미, 뭐야?”

무시할 수 있는 소리가 아니었다. 형용할 수 없는 불길한 기운이 온몸을 짓누르고 있었다. 로난을 비롯한 모든 이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저, 저게 뭐지?”

“마법진이···.”

하늘을 올려본 로난이 눈썹을 치켜떴다. 난생 처음 보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거인의 세계와 이쪽 세계를 잇는 마법진 수십 개가 서서히 분해되고 있었다.

다만 완전히 소멸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문자와 그림의 형태로 나누어진 마법진의 요소들은 거대하게 소용돌이치며 또 하나의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다지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풍경은 아니었다. 사라졌던 구름도 다시금 모여들고 있었다. 하늘을 올려보던 구원자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저건···!”

백색 구름 속에서 뇌명이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번갯불 같은 섬광이 한 번 번쩍일 때마다 마법진 안쪽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언뜻언뜻 내비치고 있었다.

날개 같기도 했고, 사람의 팔다리 같기도 했다. 전함 다인하르를 공격하던 거인들이 일제히 동작을 멈췄다. 침묵하던 거인 한 명이 천천히 입을 뗐다.

『그분께서 오고 계신다.』

****

“허억···아직···헉, 멀었어?!”

“이제 금방이다.”

슐리펜이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똑같은 거리를 달렸음에도 그는 땀 한 방울 흘리고 있지 않았다. 이를 악문 마르야가 다리에 힘을 더했다.

“젠장···!”

갑옷이 가슴이 흔들리는 것을 잡아 줘서 다행이었다. 세 사람은 창백한 성의 최정상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거인을 부르는 의식이 진행되는 장소도, 이릴이 갇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도 그곳이었다. 원하는 대답이 나올 때까지 신도들의 팔다리를 하나씩 자르는 슐리펜의 취조 방식은 나쁘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워낙에 규모가 커서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들이 지나온 길에는 토막 난 시체들이 산더미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체력에는 나름의 자신이 있는 마르야와 브라움을 지치게 한 인간의 벽이었다. 마르야가 말했다.

“그나저나···헉, 이릴 언니가 이 광신도들의 성녀라니, 뭐가 어떻게 된 걸까?”

“그건 나도 모르겠군···후욱.”

브라움이 고개를 내저었다. 어쩌다 보니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된 그들은 적잖은 충격에 빠졌다. 이릴을 납치한 이유가 그녀를 교단의 성녀로 추대하기 위해서라니.

물론 배신 의혹 따위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모두 이릴을 만나본 적이 있었으니까. 다만 워낙 기묘한 사건이니만큼 반드시 진위를 알고 싶었다.

“이제 슬슬 피도 다 떨어져 가는데 큰일이군···후, 서둘러 결판을 내야 할 터인데.”

“그러게.”

브라움이 근심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마르야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말마따나 이제 슬슬 로난의 피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말하지 않았을 뿐이지 슐리펜도 비슷한 상황 같았다. 이건 굉장히 심각한 일이었는데, 별의 가호는 실력이 뛰어나다고 해서 파훼 가능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자칫하다가는 가호만 겨우 쓸 줄 아는 잡졸들에게 패배할 수도 있었다. 누구도 그런 결말을 원하지 않았기에 그들은 말없이 속도를 높였다. 마침내 최상층에 도착한 세 사람이 복도로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브라움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다들 위험하네!”

“뭐?”

마르야가 뭐라 말하려던 차였다. 다짜고짜 앞을 가로막은 브라움이 방패를 쳐들었다. 동시에 거대한 폭발이 굉음과 함께 작렬했다. 콰아아앙-! 화염과 전광으로 이루어진 구름이 방패 앞으로 펼쳐진 풍경을 모조리 뒤덮었다.

“크윽···!”

“브라움!”

브라움이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 팔이 뜯겨나갈 것 같았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큰 변을 당했을 터였다. 그때, 폭발이 가라앉은 자리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막혔나.”

“누구냐!”

정신을 집중한 마르야가 대검을 넓게 휘둘렀다. 콰아아-! 초승달 형상의 검기가 쏘아짐과 동시에 복도를 뒤덮은 연기가 모조리 날아갔다. 웬 호리호리한 사내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자이파가 걸린 줄 알았는데···나도 참 운이 없군.”

“너는···.”

마르야가 미간을 좁혔다. 소매자락에 달린 뱃지를 보아하니 주교급의 강자였다. 뒷짐을 진 사내가 눈을 부릅떴다.

“애송이들아. 여기가 감히 어디인 줄 알고 온 거냐.”

“큭···!”

마르야와 브라움이 어깨를 움츠렸다. 사내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살기가 심상치 않았다. 지금까지 상대해온 신도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내가 묻고 있지 않느냐. 길을 잃어서 온 건 아닐 텐데?”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사내가 짜증스레 되물었다. 조금 전에 본 것과 같은 전광과 화염이 그의 주변에서 일렁거리고 있었다. 마르야와 브라움이 빠르게 시선을 교환했다. 전략적으로 몰아쳐야 승산이 있었다.

“내가 신호하면 가는 거야.”

“알았다.”

마르야가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끄덕거린 브라움이 뛰쳐나갈 준비를 하던 차였다. 침묵하며 복도를 훑어 보던 슐리펜이 입을 열었다.

“저 너머에서 의식이 진행 중인 건가?”

“뭐라고?”

사내가 눈살을 찌푸렸다. 슐리펜의 시선은 그의 등 뒤에 있는 거대한 문짝에 머물러 있었다. 더는 올라갈 곳이 없었으니 정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의식은 분명 저곳에서 진행되고 있을 터였다.

“저 너머에서 거인들을 부르는 의식이 진행되고 있냐 물었다.”

“···하, 당돌한 애송이구나. 알았다. 그것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거군.”

사내가 헛웃음을 쳤다. 태도로 미루어 보아 조금은 지루함을 달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긴 지금껏 제국의 샛별이라 칭송받으며 살아왔다면, 자신의 실력을 과신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차기 대주교인 그는 절대로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대주교 몇 명이 그에게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듣기는 했지만, 언제나 당시 슐리펜의 곁에는 로난이나 자이파 같은 변수들이 있었다.

하지만 옆에 있는 떨거지들이 그럴 만한 인재로는 보이지 않았다. 자이파가 올 때까지 데리고 놀면 되겠군. 그리 생각한 사내가 입을 열었다.

“유감스럽지만 아니다. 그런 명예로운 임무라면 나도 기쁜 마음으로 맡았겠지. 빌어먹을, 곧 대주교가 될 이몸에게 웬 계집 돌보는 일이나 시키고 말이야···.”

“···뭐라고?”

“계집 돌보는 일이라 했다. 뭐, 조금은 놀아 주마. 나도 마침 심심하던 차···”

사내가 말을 이으려던 차였다. 갑자기 슐리펜의 형체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가 미처 대응하기도 전이었다. 후우웅···! 바람 부는 소리가 들려오나 싶더니 슐리펜이 자신의 뒤에서 나타났다.

“뭐···!”

“알려줘서 고맙군.”

슐리펜이 말했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푸르스름한 빛을 흘리는 장검 한 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사내는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굳어버린 육신 위로 붉은 선 몇 가닥이 그어졌다.

“커···억.

“하지만 그녀를 낮춰 부른 건 용서할 수 없다.”

철컥. 납도한 슐리펜이 말을 맺었다. 동시에 토막이 난 몸뚱어리가 무너져 내렸다. 콰장창! 페일 로드로 인해 얼려진 사지는 바닥과 충돌하는 순간 산산이 부서졌다. 곧바로 치고 나간 슐리펜이 문짝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쾅! 문이 부서짐과 동시에 내부의 풍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황녀가 지낼 법한 화려한 방이었다. 옥좌를 연상케 하는 거대한 의자가 그 가운데 놓여 있었다.

그리고 의자 위에는 익숙한 여인 한 명이 앉아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옷차림이 달라지기는 했지만 분명히 그가 찾던 사람이었다. 슐리펜의 눈이 커졌다. 천천히 다가간 그가 입을 뗐다.

“···이릴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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