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의 천재칼잡이-297화 (297/333)

< 297. 슐리펜 >

#297

“이릴 양.”

슐리펜이 말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릴은 거대한 의자 가운데 파묻힌 채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녀의 모습을 본 마르야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공주님 같다.”

“허, 이건 정말이지···눈부시군.”

옆에 있던 브라움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눈을 뗄래야 뗄 수 없었다. 거적데기를 입어도 아름다운 이릴이었지만 오늘은 격이 달랐다.

황궁의 무도회에서나 보일 법한 화려하고 우아한 드레스가 그녀의 몸에 걸쳐져 있었다. 첫눈처럼 새하얀 드레스는 그녀만을 위해 만들어진 물건 같았다.

“이건 왕관인가? 예쁘다···.”

잘 빗어진 머리 위에는 아름다운 티아라가 하나 얹어져 있었다. 성녀로 추대하기 위해 데려왔다 하더니 정말로 그에 걸맞는 대우를 해준 듯했다.

실로 치명적인 아름다움에 슐리펜의 두뇌가 잠시 굳었지만, 그는 이내 이성을 되찾고 이릴의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슐리펜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군.”

면밀하게 살펴봐도 상처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호흡도 일정했고, 몹쓸 병에 걸린 것 같지도 않았다.

다만 몇 번을 불러 봐도 깨어나지 않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아무래도 수면 마법 같은 걸로 재운 모양이었다. 어서 군의관에게 데려가야 할 것 같았다. 그때, 슐리펜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서 있는 것을 발견한 마르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왜 그래? 안 옮겨?”

“···들어라.”

“내가? 직접 드는 편이 더 낫지 않겠어? 이릴 언니도 그걸 더 좋아할 것 같은데.”

“나는···아니, 그냥 잠자코 들어라.”

시선을 피한 슐리펜이 고개를 내저었다. 세 자릿수의 적을 베고도 변화가 없던 그의 얼굴에 처음으로 홍조가 드리워 있었다. 이유를 알아채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마르야가 큭큭거렸다.

“하항. 어울리지 않게 귀엽기는.”

“···닥쳐라.”

“고작 안아 드는 것도 못해서 청혼은 어떻게 하려고? 어쨌든 비켜 봐. 이 누님이 해 줄 테니까.”

“섬세하게 안아라. 유리구슬을 다루듯이.”

슐리펜이 일갈했다. 마르야는 그의 요구사항대로 해 주었다. 그녀의 몸보다 큰 대검을 한 손으로 휘두르는 마르야에게 이릴의 몸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별안간 잠들어 있던 이릴이 배시시 웃음을 흘렸다.

“에헤헤···.”

“앗, 언니 웃는다. 뭔가 좋은 꿈을 꾸고 있나봐.”

마르야가 덩달아 미소지었다. 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따스해지는, 아기처럼 평온한 웃음이었다.

하지만 아직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구출이라는 것은 인질을 데리고 적진을 탈출할 때 까지를 일컫는 행위였다. 더군다나 그들에게는 아직 거인 강림 의식을 막아야 한다는 임무가 남아 있었다. 마르야가 말했다.

“이제 어쩌지? 의식은?”

“지금까지 찾아내지 못했다면 아마도 이 위에서 진행되고 있겠지. 내가 놈들을 처치할 테니 너희들은 이릴 양을 데리고 어떻게든 탈출해라.”

슐리펜이 검지를 뻗어 위를 가리켰다. 마르야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대주교들을 혼자서 상대한다고?”

“놈들은 의식을 치를 때 무방비한 상태가 된다. 그리고 나는 이미 대주교를 둘 잡아 봤지. 합리적인 판단이라 생각하는데.”

“그, 그건 그렇지만···.”

슐리펜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실제로 그는 아드렌에서 거인을 부르는 의식을 지켜본 적이 있었다. 많은 기력을 소모하는 행위인 만큼 빈틈을 찾기도 쉬울 터였다.

더군다나 슐리펜이 잡았던 대주교들은 최강급 전력이라 불리우던 판타시온과 알론이었다. 조심스레 접근해서 기습에 성공한다면 의외로 쉽게 끝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브라움이 천천히 주억거렸다.

“확실히···그게 제일 나은 것 같군.”

“···알았어. 다치지만 마.”

마르야가 뒤따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이릴을 조금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계획을 세웠으니 이제 실행할 때였다. 그들이 막 발걸음을 옮기려던 차였다. 섬칫한 기운을 느낀 슐리펜이 다급하게 외쳤다.

“다들 위험하다!”

“뭐?”

일행이 멈춰 섰다. 그 순간 강렬한 폭발음과 함께 바로 앞의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콰아아앙-! 쏟아져 내린 흙먼지가 실내를 뒤덮었다.

“어억!”

“뭐, 뭐야?!”

마르야와 브라움이 당혹성을 토했다. 모두 반사적으로 마나 실드로 몸을 감싼 덕에 피해는 입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이릴은 곤히 잠들어 있었다.

【멈춰라.】

별안간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흙먼지 속에서 다섯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세 사람은 그들이 대주교임을 본능적으로 눈치챘다. 구둣발 또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한 여인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너는···!”

그녀와 눈이 마주친 마르야가 헛숨을 들이켰다. 화려한 로브와 아름다운 외모가 인상적이었다. 기억에 있는 얼굴이었다.

【그쯤 하시죠. 쥐새끼 여러분.】

대주교 르탄시에가 말했다. 일찍이 세 사람은 그녀를 개전 초기에 만난 적이 있었다. 성벽 위에서 비웃음을 흘리며 연합군에게 절망을 선사한 대주교였다.

다만 그때와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몸에서 피어나는 기운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해져 있었다. 우아하게 머리카락을 귀 뒤쪽으로 쓸어넘기는 몸짓조차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크윽···!”

“무, 무슨 수를 쓴 거지?”

브라움이 어깨를 움츠렸다. 인간이 아니라 거인과 마주하는 것 같았다. 소탕 작전을 진행하며 만났던 대주교들과는 완벽히 다른 존재였다.

어떻게 이런 강함을 얻었는지 영문을 모를 지경이었다. 그때 다른 사내 한 명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당장 성녀님을 내려놔라. 고통 없이 죽여줄 테니까.】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대주교의 직책을 맡고 있는 버미니온이었다. 르탄시에가 고개를 내저었다.

【다른 분들과 함께 가세요 버미니온. 이 생쥐들은 제가 처치할 테니까. 원래 성녀님을 보살피는 건 제 임무였는 걸요.】

【그러지 말고 좀 나눠 줘. 어차피 이제 의식도 할 필요가 없잖아.】

버미니온이 앙탈을 부리듯 말했다. 마르야가 이를 악물었다. 이 자식들은 우리를 싸움의 상대로조차 보고 있지 않았다. 나머지 세 대주교도 말을 하고 있지 않을 뿐, 마찬가지였다. 잠자코 있던 슐리펜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의식을 할 필요가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지?”

【쥐새끼처럼 엿듣기는···뭐, 말 그대로다. 갑자기 하늘과의 연결이 끊어졌거든.】

“하늘과의 연결이···?”

【그래. 하지만 나쁜 건 결코 아니야. 별빛의 힘은 더욱 강해졌으니까.】

버미니온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현재 상황을 말해 주었다. 슐리펜이 짐작한 대로 대주교들은 거인을 부르는 의식을 하고 있었다.

순조롭게 진행되던 의식은 어느 순간 중단되었다. 갑자기 모든 마법진이 무너지며 하나로 합쳐지기 시작했다고 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하늘과 지상을 오가던 별의 힘이 풀려난 것은 대주교들에게 굉장한 행운으로 작용했다.

그제야 슐리펜은 대주교들이 갑작스레 강해진 이유를 깨달았다. 아드렌에서 본 용왕이 그랬듯이, 이들 또한 그 넘쳐 흐르는 별빛의 힘을 흡수한 것일 터였다. 버미니온이 클클거렸다.

【자세한 건 우리도 지금부터 알아볼 생각이다. 물론 그 전에···】

갑자기 버미니온의 손이 올라갔다. 일행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가 팔을 휘두르는 순간 반달 형상의 검기가 세 사람을 향해 쏘아졌다.

“다, 다들 위험해!”

황급히 앞을 가로막은 브라움이 대방패를 쳐들었다. 검기가 방패와 충돌하려던 차였다. 본능적으로 팔을 뻗은 마르야가 브라움의 뒷덜미를 잡아당겼다.

“멍청아, 피해!”

“컥!”

쾅! 브라움이 뒤로 넘어짐과 동시에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한 발 늦게 넘어진 방패가 그의 배 위로 떨어졌다.

“허어억···!”

방패를 본 브라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검기에 직격당한 부분이 가위로 잘린 것처럼 사라져 있었다. 하마터면 몸이 반 토막 날 뻔했다. 버미니온이 말을 이었다.

【네놈들을 모두 죽여야겠지만.】

고오오···그의 발치에서 기괴한 색채의 장막이 일렁거리며 올라왔다. 지겹도록 보아 온 별의 가호는 지금껏 일행이 상대해온 것과 차원이 다르게 단단해 보였다. 뒤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르탄시에가 한숨을 내쉬었다.

【후...그럼 얼른 치워 버리죠.】

악동 자식을 둔 어머니 같았다. 나머지 세 명의 대주교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들 역시 버미니온보다 더 강하면 강했지 약해 보이지는 않았다.

“···끝인가.”

마르야가 헛웃음을 쳤다. 도저히 승산이 보이지 않았다. 성 어딘가를 헤매고 있을 자이파가 도우러 와도 이길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불현듯 슐리펜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이봐. 피가 남았나.]

“응?”

마르야가 눈을 치켜떴다. 갑자기 머릿속에 슐리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다시 한 번 전음이 날아왔다.

[로난 녀석의 피가 남아 있냐고 물었다.]

[그, 그거야···조금 남아 있기는 한데.]

마르야가 끄덕거렸다. 눈치 빠른 그녀는 슐리펜이 무언가 작전을 세우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뭔가 비책이 있는 건가? 조금은 희망을 품은 마르야가 허리춤에 매달린 혈액 병을 건드리는 차였다.

확! 갑자기 손을 뻗은 슐리펜이 그녀의 허리춤에 매달린 혈액 병을 잡아챘다. 그리고 자신의 검에 모조리 부어 버렸다. 마르야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이, 이게 무슨 짓이야?!]

[너희는 이릴 양을 데리고 도망쳐라. 여기는 내가 어떻게든 해 볼 테니까.]

[노력한다고 어떻게 되는 상대가 아니잖아!]

마르야가 내적 비명을 질렀다. 바보가 아닌 이상 알 수 있었다. 지금 눈앞의 대주교들은 자기네들끼리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잠시 침묵하던 슐리펜이 말을 이었다.

[우리는 이릴 양을 탈출시키기 위해 왔다.]

그리 말한 슐리펜이 벽을 향해 눈짓했다. 의미를 깨달은 마르야가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대주교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다가오고 있었기에 빠르게 판단을 내려야 했다.

이게 맞나? 정말로 이게 맞는 건가?

머리와 가슴이 다른 주장을 내세우고 있었다. 이미 답을 알고 있음에도 결심하기가 쉽지 않았다. 머지않아 결론을 낸 마르야가 고개를 푹 숙였다.

“···알았어. 다시 올 때까지 죽지 마.”

마르야가 육성으로 말했다. 슐리펜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작전을 전달받은 브라움이 눈썹을 치켜떴다.

“잠깐, 그게 무슨···.”

“닥쳐, 간다!”

쾅! 갑자기 브라움의 뒷덜미를 움켜쥔 마르야가 땅을 박차며 도약했다. 대문이 아닌 벽을 향해서였다. 그녀가 하려는 짓을 눈치챈 르탄시에가 다급하게 손을 뻗었다.

【잠깐, 멈춰요!】

보이지 않는 창 일곱 개가 두 사람을 향해 쏘아졌다. 하지만 그것들이 마르야의 등을 꿰뚫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카가각! 연쇄적인 파열음과 함께 일곱 개의 창이 모조리 잘려나갔다. 원거리에서 쏘아진 슐리펜의 검기였다.

“고마워!”

마르야가 외쳤다. 동시에 그녀와 벽이 충돌하며 굉음이 울려 퍼졌다. 콰아앙! 폭발하듯 부서진 벽면 너머로 바깥의 풍경이 펼쳐졌다. 이릴을 더욱 강하게 끌어안은 마르야가 구멍 바깥으로  뛰어내렸다.

【아뿔사!】

르탄시에의 얼굴이 굳어졌다. 설마 이걸 놓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황급히 몸을 날리려고 하는 순간 그녀의 앞에서 회오리가 솟구쳤다. 콰아아아-! 칼바람으로 이루어진 회오리는 벽면에 난 구멍을 완전히 막아 버렸다.

【당신···!】

르탄시에가 슐리펜을 노려보았다. 비단 그녀뿐만이 아니라 모든 대주교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견디지 못하고 정신이 무너져 버릴, 어마어마한 살기가 전신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곱게 죽을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겁니다.】

【이거 완전히 미친놈일세. 주제 파악을 못 하는 건가?】

슐리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문득 이릴과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모퉁이를 돌아섬과 동시에 그녀와 마주쳤던 순간은 아마 영원히 잊을 수 없을 터였다. 대문 앞을 가로막은 그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천사를 만난 줄 알았지.”

【뭐라고?】

느닷없는 읊조림에 버미니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슐리펜이 부드럽게 검을 휘둘렀다. 서걱! 그와 동시에 맨 앞에 서 있던 버미니온의 목에서 핏줄기가 솟구쳤다.

“커억···.”

【버, 버미니온!】

버미니온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쓰러졌다. 절단된 동맥에서 피가 울걱울걱 솟구치고 있었다. 물론 저 정도의 상처는 금새 회복할 테지만 슐리펜의 목적은 시간을 버는 것이었다.

검을 거꾸로 쥔 슐리펜이 검 끝을 바닥에 박아 넣었다. 콰직! 옅은 파쇄음과 함께 일어난 바람의 장막이 실내를 휘감았다. 그가 죽거나 해제하기 전까지는 사라지지 않는, 폭풍의 결계였다.

【감히 네놈이!】

【멍청한 것. 스스로를 가두다니.】

다양한 반응이 돌아왔다. 누군가는 격분했고, 누군가는 비웃음을 던졌다. 허나 유폐되었음에도 두려워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슐리펜이 한 짓은 그만큼 무모한 행동이었다.

슐리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도 알고 있었다. 승산은 없었다. 공포로 달아오른 머릿속에서는 웬 질문이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정말 네가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느냐?

너 따위가 별의 딸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으냐?

아마도 환청일 터였다. 그러지 않고서야 목소리가 자신과 같을 리가 없을 테니까. 대주교들은 저마다의 무기를 꺼내 들며 자신을 찢어 죽일 채비를 하고 있었다. 한참을 침묵하던 그가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네.”

떨림이 멎었다. 푸르스름한 검신을 타고 폭풍이 휘감기고 있었다. 대주교들에게 검을 겨눈 슐리펜이 말을 이었다.

“저는 당신을 지킬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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