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0. 결전(8) >
#300
“거인들의 왕이란다. 성에 갇힌 걸 내버려 둬서 미안하구나. 도저히 구하러 갈 틈이 없었어.”
구원자의 말을 들은 사람들이 얼어붙었다. 불규칙하게 작렬하는 섬광과 굉음이 전장을 뒤흔들고 있었다. 가쁘게 숨을 몰아쉬던 마르야가 입을 열었다.
“충분히 이해해요···그런데 방금 뭐라고 하셨죠?”
“거인들의 왕이라고 했다. 아마 놈들이 ‘그분’이라 칭하는 존재일 게야.”
“그럴 수가···.”
그녀가 다시 굳었다. 잘못 들은 줄 알았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왕이라니, 설마 거인들에게도 그런 존재가 있었을 줄이야. 하늘을 올려 보던 구원자가 혀를 찼다.
“아벨 녀석을 놓친 게 통탄할 따름이군. 설마 이렇게 과감한 전략으로 나올 줄이야.”
“아, 아벨이라면···설마 네뷸라 클라지에의 교주와도 싸웠던 건가요?”
“싸우는 것은 물론 목을 베기 직전까지 갔었단다. 족쇄를 벗어던진 내 아들이 제대로 활약을 해 주었었지.”
“족쇄? 저기···도대체 저희가 없는 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거죠?”
마르야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자리를 비웠던 시간에 비해 너무 급진적인 변화가 일어나 있었다. 그녀를 비롯한 특공대원들은 성에 갇혀 있어서 그간 벌어졌던 일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하긴 너희는 모르겠구나. 그러니까, 핵심만 이야기하자면···.”
고개를 주억거린 구원자가 입을 뗐다. 다소 번거롭더라도 이런 주요 전력에게는 상황을 명확하게 전달해줄 필요가 있었다.
그는 특공대의 부재 중에 벌어졌던 일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로난의 해주와 전함 다인하르의 난입, 갑작스러운 거인 왕의 강림과 아벨의 도주까지. 마르야는 경악을 금치 못한 채 입만 벙긋거렸다.
“세상에, 로난이 그렇게 강해졌다고요?”
“그래. 표정을 보아하니 내 아들의 상태에 관해서는 알고 있던 것 같구나. 장담하건대 로난은 지금 이 별에서 태어난 생물 중에는 가장 강한 존재일 거란다. 물론 남아 있는 저주까지 전부 사라진다면 말이지.”
“대단해···결국은 저주가 문제였군요. 그렇게 매달리던 이유가 있었어요.”
마르야가 중얼거렸다. 더할 나위 없이 경이로운 상황이었지만 한편으로는 허무하기도 했다. 나는 몰라도 쟤는 정말로 열심히 했는데.
지금까지의 역경과 노력은 결국 헛수고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쓴웃음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녀를 빤히 응시하던 구원자가 고개를 내저었다.
“꼭 그렇지만도 않단다. 본인의 노력이 뒷받침되어주지 않았다면 내 아들이 저 정도로 강해지는 것은 불가능했을 테니까.”
“네? 어, 어떻게 제 생각을···.”
“늙은이의 몇 없는 재주지. 나와 아벨을 보면 알지 않느냐. 헤아릴 수 없이 오랜 세월을 살아왔지만 이제 막 성인이 된 내 아들에게 미치지 못한다. 너희의 땀과 피로 얼룩진 나날은 결코 헛된 게 아니야.”
구원자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진지했다. 그는 실제로 로난이 노력을 할 줄 아는 사람으로 자란 점이야말로 진정한 기적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솔직히 놈팡이로 자라날 거라 예상했거늘.’
아무리 갓난아기 시절에 저주로 힘을 눌렀어도 사자는 사자다. 카샤는 머리가 좋은 여자였으니 로난은 분명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양이나 사슴에 불과하다는 것을 일찍이 눈치챘을 터였다.
나태와 오만에 절여진 삶을 살았을 가능성이 압도적으로 높았을 텐데, 로난이 두 번째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구원자로서는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빙긋 웃어 보인 그가 말을 맺었다.
“나는 금자탑의 관석을 올려놓은 것뿐이란다. 그러니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말려무나.”
“네, 네에···감사합니다.”
마르야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별 건 아니었지만 어쩐지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 헛수고였을 리가 없지.
“···다만 저것과의 승부는 나도 장담할 수가 없구나. 강해도 너무 강해.”
그때 다시 하늘로 시선을 돌린 구원자가 침음을 흘렸다. 지켜보는 것만으로 몸에 부담이 오고 있었다. 거인들의 왕이 마법진을 찢으며 모습을 드러내던 광경은 모두의 뇌리에 잊을 수 없는 충격을 주었다.
아벨은 그 찰나의 혼란을 틈타서 도망쳐 버렸다. 뒤쫓고 싶었지만 곧바로 거인 왕의 공격이 들어와서 방법이 없었다.
만약 그 순간 방어가 아닌 아벨의 추격을 택했다면 연합군의 절반 정도는 그대로 쓸려나갔을 터였다. 마르야가 물었다.
“그런···저희가 할 수 있는게 없을까요?”
“있다. 하지만 너희는 한창 곤욕을 치르고 왔지 않느냐. 조금은 쉬어 두고, 나중에···커억!”
불현듯 구원자가 크게 기침했다. 철퍽! 검붉은 핏덩이가 바닥을 적셨다. 옆에 있던 아셀이 허겁지겁 다가왔다.
“괘, 괜찮으세요?!”
“그래···후우, 아직은.”
구원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입을 틀어막은 손바닥 아래로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허둥거리던 아셀의 어깨 위로 마나가 일렁거리며 올라왔다.
“여, 역시 힘이 부족한 거죠. 제가 조금 더···!”
“아니. 다들 충분히 잘해주고 있으니 괜찮단다. 결판이 언제 날지 모르니 무리하지 말고 지금처럼만 해 주려무나···.”
구원자는 손을 들어 마나를 더 짜내려는 아셀을 제지했다. 문득 마르야는 구원자가 왜 자신을 비롯한 대원들에게 쉬어 두라 했는지 눈치챘다.
그는 아셀뿐만이 아니라 전장에 있는 모두에게 마나를 공급받아서 별의 가호를 유지하고 있었다. 소매로 입가를 닦아낸 구원자가 아데샨을 돌아보았다.
“···특히나 너희 둘에게는 더욱 신세를 지고 있지. 아데샨이라고 했던가, 너와 저 아이가 없었다면 나는 진작에 무너졌을 거란다.”
아데샨은 높게 솟은 잔해더미 위에서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로난과 거인 왕의 충돌음이 울려 퍼질 때마다 그녀의 길고 검은 머리카락이 나부끼고 있었다.
생물의 심리를 장악하는 그림자의 마나가 그녀를 중심으로 들불처럼 번져 나가고 있었다. 그림자의 마나를 보지 못하는 마르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아데샨 언니는 뭘 하고 있는 거지?”
“사, 사람들이 마나를 이끌어내는 것을 돕고 있어. 굉장한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는데 설마 이번에도 연합군 전체를 대상으로 저런 일을 해낼 줄이야···.”
아셀이 더듬거리며 답했다. 그의 말마따나 아데샨은 겁에 질린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구원자에게 마나를 전달하기 용이한 심리 상태로 유도하고 있었다.
별의 가호 안쪽에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바깥은 아비규환이었다. 거인들은 어지럽게 날아다니며 방어막에 창을 던져대고, 슐리펜의 폭풍은 점점 커져만 가고 있었다.
이런 혼란 속에서 마나 전달이 부드럽게 이루어지는 것은 사실상 그녀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마르야가 결의에 찬 표정으로 입을 뗐다.
“이럴 게 아니라 얼른 이릴 언니부터 안전한 곳에 옮기고 올게요. 제 마나도 쓰세요.”
“그리 말해주니 고맙구나. 그렇다면 내 딸을···”
구원자가 뭐라 말하려던 차였다. 콰아아앙-! 별안간 하늘에서 떨어진 무언가 방어막을 강타했다.
“커어억!”
“로, 로난 아버님!”
구원자의 입에서 다시금 피가 터져 나왔다. 장막 전체가 진동할 정도로 엄청난 위력이었다. 놀란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뭐,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운석이라도 떨어진 건가···!”
거인 왕의 공격은 아닌 것 같았는데 도대체 뭐에 맞은 건지 의문이었다. 불현듯 누군가의 목소리가 연합군의 머리 위에서 울려 퍼졌다.
“크아아악! 이런 니미, 진짜 더럽게 아프네···!”
“이 목소리는?”
일행이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매우 낯익은 청년 하나가 장막 위에 대자로 드러누워 있었다. 비록 뒷모습뿐이었지만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아셀이 외쳤다.
“로, 로난!”
“엉?”
로난의 눈이 커졌다. 그는 누운 자세 그대로 고개만 돌렸다. 하늘로 두 손을 뻗은 채 방방 뛰고 있는 친구들이 눈에 들어왔다.
“뭐야, 니들 다 살아 있었구나.”
“괜찮아? 다, 다친 거 아니야?!”
“아프긴 한데 아직 괜찮아. 다들 반갑네.”
퉤, 부러진 이빨을 뱉어낸 그가 히죽 웃었다. 워낙에 난 놈들이니 죽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저렇게 건강한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폭풍을 보아 하니 슐리펜 녀석도 아직은 살아 있는 듯했다. 문득 마르야를 돌아본 로난이 헛숨을 들이켰다. 이릴이 그녀의 품에 안긴 채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아벨에게 납치된 이후로 처음 보는 것이었다.
“누나도···자는 거 맞지?”
“으, 으응. 지금 바로 치료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혹시 우리가 도와줄 게 있다면···!”
“난 됐으니까 니들이나 신경 써. 우리 누나랑.”
로난이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마음만 같으면 당장 가서 누나와 친구들을 살피고 싶었지만 그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가 누운 채로 기력을 회복하던 와중이었다. 갑자기 먹구름 가운데가 백색으로 물들었다.
“이런, 빌어먹을!”
꼭 벼락이 떨어지기 직전의 하늘을 보는 것 같았다. 의미가 자명한 현상에 로난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몸을 일으킨 그가 라만차를 휘두르는 찰나였다. 콰아아아아-! 구름이 갈라지며 지름이 수십 미터는 될 법한 빛줄기가 쏟아져 나왔다.
“맙소사···!”
“로, 로난!”
빛줄기는 정확히 로난을 향해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역광에 짙어진 그림자가 길게 드리웠다. 친구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들은 저것이 거인들이 던져 대는 빛의 창과 궤가 같은 공격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눈치챘다.
“죽는다···!”
마르야가 읊조렸다. 도저히 피하거나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로난은 물러서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촤아악! 수백 번의 검격은 촘촘한 그물망을 만들며 섬광을 갈가리 찢어 놓았다.
“끄으으윽···적당히 해라 좀···!”
태양을 눈앞에 가져다 놓은 것 같은 열기가 전장을 짓눌렀다. 로난이 발을 디디고 있는 자리에 거미집 같은 균열이 발생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감탄을 흘렸다.
“저, 저걸 막아내고 있어.”
“말도 안 돼.”
보면서도 믿을 수 없었다. 로난이 응수하고 있는 덕에 아래쪽에는 일절 피해가 가지 않았다. 그의 정교하면서도 예리한 검격은 단 한 가닥의 빛줄기도 용납하지 않고 베어 버렸다.
머지않아 빛의 마지막 편린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온통 새하얗게 물들었던 세상이 원래의 색채를 되찾기 시작했다. 로난이 턱밑까지 차오른 숨을 고르던 와중이었다. 쿠르르릉···! 다시 자욱해지는 구름 아래로 거인 왕의 상반신이 불쑥 튀어나왔다.
“나, 나타났다!”
“세상에, 저, 저게···!”
곳곳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거인 왕의 첫 번째 일격은 마법진 안쪽에서 내리꽂혔고, 구원자가 방어하자마자 로난이 요격에 나섰기 때문에 실제 모습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얗다거나, 대머리라든가 하는 생김새는 다른 거인들과 비슷했으나 크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이 거대했다. 로난은 물론이요 일반적인 거인들은 한 입에 삼킬 수 있을 것 같았다. 구름 속에 감춰진 날개는 모두 여덟 장이었다.
“저건···.”
불현듯 구원자의 눈이 커졌다. 그는 과거 저것과 비슷한 존재를 본 적이 있었다.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버린 별똥별. 무저갱에 처박힌 거인과 놀라우리만치 닮아 있었다.
“이 개좆같은 대머리 새끼가!”
그때 숨 다 고른 로난이 노기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앞머리가 눌러붙은 이마에 굵직한 핏줄이 불거져 있었다. 그의 손에 쥐어져 있던 라만차가 노을빛으로 물들었다. 상대를 끌어당기는 로난의 오러가 전장을 휘감았다.
“로, 로난?! 여기서는 위험하다!”
그 모습을 본 브라움이 기겁했다. 거인을 추락시키는 것은 좋지만 저런 거대한 게 떨어진다면 도저히 감당이 안 될 터였다. 그가 뭐라 외치려던 차였다. 파아아! 노을색 광채가 하늘을 물들임과 동시에 로난의 몸이 하늘로 쏘아져 나갔다.
“죽여주마!”
꼭 거대한 폭죽을 보는 것 같았다. 거인 왕이 구름 뒤편으로 모습을 감춤과 동시에 그와 같은 궤도로 쏘아진 로난이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콰아앙-! 다시 한 번 충돌음이 작렬했다.
“어?”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브라움이 당혹했다. 놀란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자이파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왜 저 애송이가 움직이는 거지? 원래는 상대가 내려와야 맞지 않나?”
“내 아들의 오러는 빛이 닿는 범위 내의 적을 끌어당기는 것 같더군. 하지만 이번에는 상대가 너무 강해. 끌어당기는 힘이 달리니, 끌려가는 거야.”
“어쩐지. 그렇게 공중전을 치르고 있던 거였군.”
구원자의 대답을 들은 자이파가 헛웃음을 쳤다. 로난은 오러 사용을 반복하며 거인 왕과 겨루고 있던 것이었다.
머지않아 정신을 차린 그들이 본격적으로 구원자에게 협조하려던 차였다. 저 멀리서 소름끼치도록 익숙한, 메마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있었나. 한참 찾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