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의 천재칼잡이-302화 (302/333)

< 302. 결전(10) >

#302

[아데샨. 위험하다.]

“아윽!”

정신을 집중하던 아데샨이 움찔거렸다. 한동안 잠잠하나 싶더니 또 난리였다. 익숙한 여인의 목소리가 뇌리를 쿡 찔렀다.

이제는 뭐가 위험한지 묻는 것도 지긋지긋했다. 그림자의 마나가 흐트러진 것을 확인한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다시 집중하기 위해서는 주의를 환기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하아아···정말이지.”

아데샨이 신경질적으로 눈을 떴다. 대열을 갖춰 모여 있는 연합군과 사방을 뒤덮은 별의 가호, 그 너머의 번쩍거리는 하늘이 보였다. 로난과 거인 왕의 전투는 아직 진행 중인 것 같았다.

“로난.”

하늘을 올려 보던 그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번 싸움의 승패를 너무 로난에게만 맡겨 놓은 것 같아서 마음이 무거웠다. 물론 왕을 상대할 수 있을 만한 강자는 그 아니면 나바르도제밖에 없었지만.

‘뭔가 더 도울 방법이 없을까.’

심지어 나바르도제는 아직도 행방이 묘연했다. 생사를 파악하기 위해 별동대를 조직해 보냈지만 아직도 발견했다는 연락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지원 사격이라도 해줄 수 있다면 좋을 터였으나 그마저도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아마 마법으로 공격을 해야 할 텐데, 자신을 비롯한 연합군 전원의 마나는 전부 구원자에게 전달되고 있었으니까.

“어쩔 수 없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지금은 이게 최선이었다. 아데샨이 다시 임무에 열중하려던 차였다. 그녀의 뒤편에서 나지막한 웃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하하···그럼 못 써 로난.”

“뭣.”

아데샨이 황급히 몸을 돌렸다.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천천히 연합군 틈새를 가로질러 걷고 있었다.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모습에,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이릴 님?”

틀림없는 이릴이었다. 분명 의식을 잃은 상태라고 보고받았었는데 그새 깨어난 건가? 문득 시선을 옮긴 아데샨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 이릴이 발을 내디딜 때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픽픽 쓰러지고 있었다.

“뭐, 뭐지?”

생명 신호가 정상인 걸로 보아 죽거나 다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이릴이 지나온 방향의 사람들도 이미 다들 쓰러져 있었다.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본능적으로 불길함을 느낀 아데샨이 조처를 하려던 차였다. 갑자기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지금 뭐가 어떻게 되어 가는···”

쿵. 휘청거리던 그녀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쓰러졌다. 몽롱해지는 의식 속에서 원인 모를 행복감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어?”

뭔가 이상했다. 오감이 하나둘씩 뒤틀리고 있었다. 참혹한 전장의 풍경은 사계의 언덕에서 바라본 필레온 아카데미의 전경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코를 찌르던 재와 피의 냄새는 벚꽃의 내음으로 변해 있었다.

“선배. 왜 그래요?”

불현듯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려 퍼졌다. 당황한 아데샨이 이마를 부여잡은 채 고개를 돌렸다. 교복을 입은 로난이 양손을 주머니에 꽂은 채 서 있었다.

“로, 로난?”

“힘든 일이라도 있었어요? 학생회 일이 거지 같았다든가.”

로난이 걱정 섞인 투로 물었다. 그는 둘이 있을 때만 보여주는 다정한 눈빛으로 자신을 내려보고 있었다. 아데샨이 더듬거렸다.

“나, 나는···그러니까.”

“무리하지 마요. 지금도 엄청 잘 하고 있으니까.”

그리 말한 로난이 아데샨을 가볍게 포옹했다. 아늑하면서도 뜨거운 품은 틀림없는 연인의 것이었다. 그녀의 사고가 잠시 멎었다.

“아···.”

아데샨은 알고 있었다. 지금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은 가짜에 불과했다. 다만 인지와는 별개로 차오르는 행복감이 판단력을 흐리고 있었다. 별안간 멀지 않은 곳에서 웬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힘들면 조금 쉬면서 하려무나. 그간 열심히 달려오기만 했잖니.”

“···엄마?”

어조가 낯익었다. 고개를 돌린 아데샨의 얼굴이 굳어졌다. 어린 시절에 전사했던 어머니와 두 오빠가 언덕을 올라오고 있었다.

“많이 컸구나. 아데샨.”

“내 동생, 이제 오빠보다 키가 더 큰 것 같은데?”

두 오빠가 손을 흔들었다. 두 사람과 어머니의 외모는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아데샨이 홀린 듯 중얼거렸다.

“말도 안 돼···.”

이건 정말 너무했다. 사무칠 정도로 반가운 면면에 그녀의 시야가 부옇게 물들었다. 그녀는 뒤늦게 자신도 교복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말이 안 되잖아···응?”

물론 이제 와서 별 상관은 없었다. 옆으로 넘어진 아데샨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고개를 푹 숙인 그녀의 어깨가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아하하···하.”

****

바람 소리가 거칠었다. 발치 머나먼 곳에서 새하얀 구름의 바다가 흘러가고 있었다. 머리 위로 펼쳐진 야청색 하늘과의 조화가 아름다웠다.

더할 나위 없는 절경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로난에게 그런 것을 감상할 여유는 없었다. 가래침을 뱉어낸 그가 짜증 가득한 투로 물었다.

“그만 끝내자. 지겹지도 않냐, 엉?”

하지만 이번에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앞에서는 거인의 왕이 날개를 퍼덕이고 있었다. 날지 못하는 로난은 오러를 상시로 발동하며 그의 주변을 위성처럼 맴돌고 있었다.

‘더럽게 크네. 진짜.’

왕을 지켜보던 로난이 혀를 찼다. 일반적인 거인의 열 배에 달하는 덩치는 뒤쪽의 풍경을 아예 가리고 있었다. 특히 여덟 장의 날개는 고개를 돌려도 전체를 보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새하얀 거구에는 로난이 낸 상처가 몇 개 새겨져 있었으나 아직까지 결정타라 부를 만한 것은 없었다. 압도적인 덩치만큼이나 방어력도 뛰어난 탓이었다.

뭐가 됐던 간에 슬슬 결판을 내고 싶었다. 혹사당한 팔다리가 부서질 것처럼 떨려오고 있었다. 칼자루를 움켜쥔 로난이 큰 소리로 외쳤다.

“이제 그만 뒈져라!”

동시에 라만차가 한결 더 짙은 주홍색으로 물들었다. 화아악! 끌어당기는 힘이 강해지며 로난의 몸이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넓은 호를 그린 라만차가 거인왕의 목을 노리며 그어졌다. 칼날이 그의 목울대를 가르려는 찰나였다. 콰앙-! 사나운 충돌음이 울려 퍼졌다. 징징 울리는 손을 부여잡은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젠장···!”

넓고 두꺼운 대검이 라만차를 가로막고 있었다. 왕의 주 무기인 존나 큰 칼은 병기라기보다는 토목 공사에 쓰이는 장비 같았다.

다른 거인들이 다루는 것처럼 빛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실체가 있는 물건이라 로난이 손쉽게 베어낼 수 없었다. 역시 목을 노린 건 너무 뻔했나. 심호흡한 그가 작위적인 웃음을 지어 보였다.

“덩치에 안 맞게 잽싸기는. 물건은 제대로 달려 있냐?”

『······.』

허나 왕은 로난의 도발에 응하지 않았다. 거인 종족 특유의 냉소적인 면모가 누구에게서 유래되었는지 알 것도 같았다. 긴장감 어린 침묵이 유지되던 와중이었다. 말없이 몸을 뒤튼 왕이 대검을 넓게 휘둘렀다.

“윽!”

궤도를 읽어낸 로난이 허리를 뒤로 제쳤다. 후우우웅! 대검은 붕 뜬 그의 앞머리를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지나갔다.

검이 지나간 궤적을 따라 발사된 빛무리가 지평선 너머로 날아갔다. 콰아아앙-! 머지않아 일어난 폭발이 구름바다를 찢으며 솟구쳤다.

“니미.”

뒤늦게 찾아온 충격파가 일대를 휩쓸었다. 로난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여기가 외진 곳이라 다행이지 어지간한 도시 하나는 통째로 날려버리고도 남을 위력이었다.

후우욱! 곧바로 거인의 연격이 날아왔으나 받아칠 엄두는 내지도 못했다. 흘리거나 피하는 식으로 간격만 유지하던 로난이 입술을 비틀었다.

‘좆됐군. 이걸 어떻게 잡지.’

솔직히 말하자면 답이 보이지 않았다. 왕을 인기투표로 정한 건 아닌 듯했다. 가끔씩 서로에게 유효타를 먹이기는 했지만 보통은 로난 쪽이 훨씬 큰 손해를 봤다.

당장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연합군에게 불똥이 튀기지 않도록 시간을 끌며, 몸 안에 남아 있다는 저주가 마저 소멸하기를 기다리는 것 뿐이었다. 문득 로난의 머릿속에 익숙한 소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쉽지 않네.]

“뭐야, 린?”

[단단해. 어떻게 저런 존재가···.]

로난의 눈이 커졌다. 참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라만차에 깃든 성검의 혼, 린이었다. 다시 한 번 왕의 참격을 피한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무슨 일이야?”

[네가 죽는 걸 보고 싶지 않아서 왔어. 누가 뭐래도 너는 내 친구니까.]

그녀가 말할 때마다 검신이 웅웅 울리고 있었다. 로난이 미간을 좁혔다. 의미하는 바가 자명한 말이었다.

“···못 이길 것 같냐?”

[확언은 못 하겠지만 이대로라면 힘들어. 네가 저 괴물의 전투법을 읽는 것처럼 저쪽도 너를 읽고 있잖아. 정말로 이기고 싶다면 새로운 방법을 강구해야 해.]

“새로운 방법이라.”

로난이 침음을 흘렸다.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 왕은 로난의 공격 패턴을 모조리 외우고 있었다. 어지간히 변칙적으로 공격하는 게 아니면 유효타를 먹일 수 없었다.

단 한 번 제대로 허를 찔러서 격침시켜야 했다. 로난의 머리가 빠르게 뜨거워지고 있었다. 새로운, 지금까지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방법. 몇 초를 침묵하던 그가 손가락을 튕겼다.

“아하.”

[뭐야, 좋은 생각이라도 났어?]

“실패할 가능성이 크기는 한데 시도해볼만 한 것 같아. 한번 해 보자.”

[도대체 뭘 하려···잠깐!]

린이 뭐라 외치려던 차였다. 로난이 갑자기 자신의 왼쪽 허벅지에 검을 대고 그었다. 촤아악! 칼날이 살을 파고든 자리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타는 듯한 통증에 로난이 이를 악물었다.

“썅, 너무 깊게 베었나.”

[너 미쳤어? 지금 뭐 하는 거야?]

린이 어이가 없다는 투로 물었다. 로난은 대답하는 대신 칼날을 살 안쪽으로 더 강하게 밀어 넣었다.

피가 죽지 않을 정도로만 나오게. 다리 정도는 나중에 조금 절어도 되니까. 뒤늦게 로난의 뜻을 눈치챈 린이 당혹성을 흘렸다.

[잠깐, 너 설마···.]

“그래. 이 정도면 저 새끼도 아파할 거야.”

로난이 낄낄거렸다. 라만차의 검신을 타고 붉은 예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피를 마실수록 날카로워지는 무기의 특성 때문이었다.

비장의 일격을 날리기 전에 필요한 준비였다. 일단 검이 살가죽을 확실하게 찢어발기고 들어가야 할테니까.

이제 본 단계였는데, 사실 여기서부터가 도박이었다. 로난이 린에게 귓속말로 작전을 설명하려던 찰나였다. 낮고 굵은 목소리가 하늘 위에 울려 퍼졌다.

『멈춰라.』

“뭐?”

로난이 저도 모르게 멈춰섰다. 골수가 징징 울리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들어왔던 거인의 목소리와는 차원이 다른 목청이었다.

로난은 그것이 왕의 목소리임을 본능적으로 눈치챘다. 호흡을 추스른 그가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대검을 내린 왕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 말도 할 줄 알았냐?”

『필멸의 생을 살아가는 미물이여, 내게 자비심이 남아 있을 때 선왕의 행방을 고하라.』

“선대를···뭐?”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선왕이라면 저 자식 이전에도 왕이 있었다는 건가? 왕이 말을 이었다.

『그대의 피에서는, 선왕과 같은 냄새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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