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의 천재칼잡이-303화 (303/333)

< 303. 귀환 >

#303

『그대의 피에서는, 선왕과 같은 냄새가 난다.』

“뭐라?”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 대머리가 갑자기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왕이 말을 이었다.

『어쩐지 필멸자의 용력이 말이 안 되는 수준이다 싶었지. 그 힘을 빼앗은 것이 분명하구나.』

“그러니까 그게 무슨 헛소리···아.”

욕지거리를 내뱉으려던 로난이 눈썹을 치켜떴다. 선왕인지 지랄인지는 모르겠지만 왕이 뭘 말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망령의 바다 깊숙이 파묻혀 있던 거인. 로난의 저주를 없애 준 그 날개 여덟 장 달린 거인의 행색은 눈앞에 있는 왕과 매우 닮아 있었다. 로난이 말했다.

“설마 너처럼 날개 여덟 장 달린 놈 말하는 거냐?”

『역시.』

왕의 눈이 커졌다. 처음으로 보는 표정 변화였다. 대검을 쳐든 그가 로난을 겨누었다.

『선왕은 수만 년 전에 이 행성에 왔다가 실종되었다. 우리 종족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강력한 전사였지. 이제 말하라. 무슨 비열한 수를 써서 그를 시해한 것이냐.』

“그건 내가 안 했는데.”

『헛소리. 그렇다면 누가 감히 그런 짓을 한 거지?』

로난이 미간을 좁혔다. 구원자도 모르는 것을 그가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전에 봤을 때 시체에 남은 상흔을 보니 무언가에게 살해당했던 것 같기는 한데, 딱히 짐작 가는 범인은 없었다.

‘내가 알 게 뭐야 씨발.’

하지만 잘만 하면 이 기회를 활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잠시 고민하던 로난이 입을 열었다.

“으음, 그러니까 기억이 날 것도 같은데···.”

로난이 말꼬리를 끌었다. 대화를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애초에 그는 선왕이 어쩌고 하는 정보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이 자리에서 사멸하고 싶지 않다면 어서 떠올리는 게 좋을 거다.』

“으음···그러니까···.”

왕이 위협적인 어조로 말했다. 거구에서 배어나오는 살기가 피부를 쿡쿡 찌르고 있었다. 슬슬 움직이던 로난의 몸은 어느새 그의 정강이 정도의 높이까지 내려가 있었다.

이 정도 위치면 될 것 같았다. 일부러 과장되게 침음을 흘리던 로난이 온 힘을 다해 손뼉을 쳤다. 짝-! 경쾌한 소리가 하늘 위에 울려 퍼졌다.

“아, 기억났다!!”

『···!』

갑작스러운 행동에 대검의 끄트머리가 살짝 흔들렸다. 찰나의 빈틈을 포착한 로난이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지금.’

허리를 비튼 그가 있는 힘을 다해 검을 던졌다. 손을 떠난 라만차가 왕의 턱밑을 향해 쏘아졌다. 퍼엉-! 소리의 속도를 초월한 검신의 뒤편으로 충격파가 발생했다. 피를 잔뜩 마신 라만차는 왕의 피부를 찢고 파고들 만큼 날카로워져 있었다.

『어리석기는.』

하지만 왕은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검이 목울대에 닿으려던 찰나 여덟 장의 날개가 단번에 펼쳐졌다.

화아악! 광풍이 불어닥침과 동시에 왕의 몸이 옆으로 이동했다. 직선으로 뻗어 나가던 라만차는 허무하게 밤하늘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로난이 탄식했다.

“아!”

『조금 더 살 수 있는 기회를 져버리다니. 필멸자의 열등함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군.』

오러를 잃은 로난은 지상으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처절한 비명을 들은 왕이 한숨을 내쉬었다. 대검의 칼자루에서부터 새하얀 빛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뭐, 됐으니 그만 사라져라.』

제법 짜증나는 상대였지만 이걸로 끝이었다. 로난을 이 장소째로 날려버리기로 마음 먹은 왕이 대검을 휘두르려던 차였다. 한창 추락하던 로난이 허공을 향해 팔을 쳐들었다.

“닿아라!”

『음?』

처음 시도하는 도박수였다. 심장을 타고 올라온 열기가 로난의 손을 주홍빛으로 물들였다. 파아아···! 일직선으로 쏘아진 광선이 저 멀리 밤하늘을 가르고 있는 라만차에 닿았다.

“서, 성공했다!”

잡히는 감촉을 느낀 로난이 쾌재를 불렀다. 신체를 본인의 오러를 발동하는 매개체로 사용하는 것은 처음이었는데 정말로 될 줄은 몰랐다.

사실 정말 중요한 건 지금부터였다. 방향을 전환한 라만차가 로난을 향해 칼 끝을 돌렸다. 왕은 여전히 그의 머리 위에 떠 있었다.

“하아아압!!

기합을 내지른 로난이 당기듯이 팔을 굽혔다. 마지막까지 왕은 로난의 저의를 눈치채지 못했다. 퍼억-! 혜성처럼 날아온 라만차가 그의 목을 꿰뚫었다.

『커억!』

벌어진 입에서 푸른 피가 터져 나왔다. 척! 완전히 돌아온 라만차의 칼자루가 로난의 손에 쥐어졌다. 너는 정말 미친 인간이라 중얼거리는 린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칼을 한 바퀴 돌려 잡은 로난이 중지를 쳐들었다.

“맛이 어떠냐, 이 대머리야.”

『커흐, 이게 무슨···.』

왕의 얼굴이 처음으로 일그러졌다. 설마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그는 왼손으로는 목을 부여잡은 채 물기 섞인 기침을 토해내고 있었다.

척 봐도 치명상이었다. 하지만 로난은 확실히 승부를 맺고 싶었다. 다시금 발동된 그의 오러가 이번에는 왕을 휘감았다. 라만차를 쥔 로난의 몸이 그를 향해 쏘아졌다.

『크윽···!』

왕이 황급히 방어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로난이 조금 더 빨랐다. 무방비한 품으로 파고든 그가 넓게 검을 휘둘렀다. 촤아아아악! 하얀 몸뚱어리 위로 길고 깊은 선이 그어졌다. 다시 한 번 솟구친 푸른 피가 밤하늘을 적셨다.

『허어억!』

“이제 그만 뒈져라!”

로난이 외쳤다. 이번에는 확실히 느껴졌다. 그의 검격은 놈의 살을 찢고 내장까지 헤집어 놓았다.

그럼에도 거인 왕은 쓰러지지 않았다. 로난이 완전히 끝을 내기 위해 추가타를 날리려던 차였다. 대검을 내던진 왕이 그에게 주먹을 내질렀다.

『네놈이 감히-!』

“이런 씹···!”

로난이 헛숨을 들이켰다. 피하거나 흘릴 수 없는 거리였다. 그는 서둘러 검을 쳐들었지만 튕겨내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거대한 주먹이 라만차의 칼배를 강타했다.

“커억!”

콰아아앙! 로난의 몸뚱어리가 벼락처럼 지상으로 내리꽂혔다. 그는 이번에도 구원자가 설치한 별의 가호 위로 떨어졌다. 방어막과 충돌한 로난이 피를 토했다. 등 아래 깔려 있는 뼈가 모조리 으깨진 것 같았다.

『크윽, 크아아악-!』

“이, 이런 제기랄···.”

저 위에서 고통 어린 비명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통증 때문인지 마무리 일격은 아직 날아오지 않고 있었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이대로라면 놈은 지상과 자신을 함께 공격할 터였다. 로난이 다시 몸을 일으키려던 차였다. 갑자기 방어막 아래쪽에서 메마른 신음이 들려왔다.

“로···난.”

“엉?”

로난이 다급하게 시선을 내렸다. 구원자가 하늘로 양팔을 뻗은 채 비틀거리고 있었다. 얼굴의 모든 구멍에서 피를 줄줄 흘리는 것이 상태가 매우 나빠 보였다.

“뭐야, 갑자기 왜 그렇게 됐어요?!”

“허···허어억···우웁!”

뭐라 대답하려던 구원자가 피를 게워냈다. 로난의 얼굴이 굳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었는데 왜 저렇게 됐는지가 의문이었다.

“어?”

문득 주변에 시선이 닿은 로난이 눈썹을 치켜떴다.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사람들이 죄다 누워 있었다. 그것도 그냥 누워 있는 것이 아니라, 잠꼬대 같은 헛소리를 지껄이며 낄낄거리고 있었다.

“으하하! 역시 내가 최강이지!”

“하하하···어머니. 저도 보고 싶었어요.”

“이히히, 오줌 발사!”

“뭔 씨발···.”

할 말을 잃은 로난이 벙쪄 버렸다. 그때 몸을 뉘이고 있던 방어막에서 무언가 쪼개지는 소리가 났다. 충돌 지점에서 발생한 균열이 빠르게 넓어지고 있었다.

“어엇?!”

원래대로라면 거인 왕의 일격도 막아내는 방어막이 터무니없이 약해져 있었다. 로난이 무언가를 하기도 전이었다. 콰장창! 점점 넓어지던 균열을 이기지 못한 방어막이 끝내 깨졌다.

“크억!”

다시 한 번 핏덩이를 토한 구원자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제비를 돌며 착지한 로난이 그에게 달려갔다. 등을 망치로 두들기는 듯한 통증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썅.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엉?!”

“이, 이릴···.”

로난이 구원자를 부축했다. 피 냄새가 아찔했다. 누이의 이름을 들은 그가 눈을 부릅떴다.

“이릴? 누나가 왜요?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요?!”

“마, 막아야···허윽.”

“잠깐만요. 잠깐, 이봐요!”

그때 말을 잇던 구원자가 의식을 잃었다. 로난이 신경질적으로 어깨를 흔들었지만 일어나지 않았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죽은 것은 아니었다. 구원자를 조심스레 눕힌 로난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누이와 연인은 다른 곳에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머지않아 친구들을 발견한 그가 큰 소리로 외쳤다.

“아셀! 마르야!”

“마, 마르야···여기서 이러면 안돼. 나, 나는 마탑주로서의 품위를 지켜야...”

“우히히···맞아요. 제가 바로 아르말렌 백작이에요.”

하지만 그들 역시 다른 이들과 같은 몰골이 되어 있었다. 아셀과 마르야, 브라움은 사이좋게 모여 누운 채 헤실거리고 있었다. 꼭 좋은 꿈을 꾸는 사람 같았다.

“아하하···그래. 맛이 어떠냐, 이 고양이야···이제 누가 검성이지?”

“시발.”

로난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철의 여인 나비로제도 대태도를 끌어안은 채 잠꼬대를 지껄이고 있었다.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은 상황에 그가 머리를 쥐어싸매던 와중이었다. 구름 뒤편에서 노기 충만한 포효가 울려 퍼졌다.

『크아아아아아-!!』

왕의 목소리였다. 로난에게 당한 상처가 어지간히도 고통스러운 듯했다. 별이 태어날 때 나는 소리라 해도 믿어질 굉음이었지만 사람들은 그 누구도 깨어나지 않았다.

로난의 얼굴이 와락 굳어졌다. 머지않아 수십 개의 빛덩이가 구름의 바다를 찢으며 쏟아졌다.

“젠장, 안 돼!”

로난이 절규했다. 그토록 경계하던 왕의 공격이었다. 여러 개로 분산된 만큼 위력은 약해졌지만 그래도 하나 하나가 일반 거인들이 던지는 창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력할 터였다.

‘주변 사람들이라도..!’

빠르게 판단을 내려야 했다. 어차피 방어막이 박살난 마당에 모두를 지키는 것은 무리였다. 로난이 이를 악문 채 베어버릴 빛덩이를 고르던 와중이었다. 자신의 앞에서 누워 있던 아셀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셀?!”

“······”

로난이 불렀으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셀은 로난이 뭐라 할 새도 없이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주변으로 반짝거리는 마나가 소용돌이치며 모여들기 시작했다. 공간이 일그러져 보일 정도로 막대한 양이었다.

이윽고 빛덩이들이 지면에 충돌하려던 차였다. 파아아-! 아슬아슬하게 생성된 별의 가호가 연합군 전체를 뒤덮었다. 콰과과광! 사나운 폭발음이 간격 없이 울려 퍼졌다.

“얌마, 너 괜찮아?!”

아무리 약해졌다고는 해도 구원자도 겨우겨우 감당하던 공격이었다. 하지만 아셀의 표정에는 일말의 변화도 드러나지 않았다. 가느다란 코피 한 줄기만이 작은 콧망울 아래로 미끄러지고 있었다.

“너···!”

감겨 있던 눈은 게슴츠레 떠져 있었다. 원래 보랏빛을 띠는 눈동자는 탁한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로난은 이런 현상을 분명히 예전에 본 적이 있었다. 불현듯, 뒤쪽에서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러니까 계속 위험하다고 경고했거늘.”

“뭐?”

로난이 황급히 몸을 돌렸다. 어느새 모습을 드러낸 아데샨이 코트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하늘을 올려 보고 있었다. 바짝 세워진 옷깃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아데샨?”

로난이 말했다.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데샨의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해진 그림자의 마나가 그녀의 어깨 위로 넘쳐 흐르고 있었다.

“···설마.”

로난의 눈이 커졌다. 그는 이 기운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벌어질 수 없는 일이었기에, 로난은 입만 벙긋거리며 차마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그럴 리가 없어.’

그때 웅얼거리던 아데샨이 고개를 내렸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로난이 굳어 버렸다. 웅얼거리던 그가 저도 모르게 참던 말을 내뱉었다.

“···대장군님?”

“간만이군. 상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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