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4. 결전(11) >
#304
“간만이군. 상병.”
아데샨이 말했다. 차갑게 내리깔린 목소리가 로난의 귓가에서 맴돌고 있었다. 한참이나 벙쪄 있던 그가 겨우 입을 뗐다.
“···대장군님? 정말 대장군님이에요?”
“그래. 이렇게 대화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군. 잘 지냈나?”
“네. 저야 잘 지냈기는 한데, 도대체 어떻게···.”
아직도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일단 기존의 아데샨이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럴 이유가 없을 뿐더러 풍기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으니까.
“어떻게···.”
로난이 되뇌었다. 설마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눈앞이 부옇게 변하려 하고 있었다. 주머니에서 손을 뺀 아데샨이 자신의 가슴을 짚으며 말했다.
“나도 예상하지 못했다. 회귀의 재보에 아직 여력이 남아 있던 거지. 시간을 되돌리는 힘은 완전히 잃어버렸지만, 나는 이 아이의 몸속에서 내 인격과 기억을 보존할 수 있었다.”
“그럴 수가. 그럼 선배의 인격은 어디로 간 거죠?”
“내 안에 무사히 있으니 걱정하지 마라.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행복한 꿈을 꾸고 있으니까···아주 행복한 꿈을 말이지.”
아데샨이 픽 웃었다. 그녀는 원래의 인격이 잠들어 버린 틈을 타서 몸을 차지했다고 말했다. 로난은 당황을 감추지 못한 채 질문을 던졌다.
“그럼 계속 안쪽에 있던 거에요? 지금의 선배가 태어난 날부터?”
“그건 아니다. 이번 삶에서의 내 기억은 귀관과 만나는 순간부터 시작됐어. 나비로제 교관님에게 기절당하고, 양호실에서 손···을 잡았을 때부터 말이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손이라는 단어가 나온 시점부터 목소리가 작아졌다. 로난을 빤히 바라보던 그녀가 갑자기 시선을 돌렸다.
어쩐지 얼굴이 아까보다 붉어진 것 같았다. 입술을 달싹이던 아데샨이 입을 열었다.
“···상병. 잠깐만 이리 와 보겠나?”
“네?”
뭔가 긴히 할 말이 있는 듯했다. 별 생각 없이 다가간 로난이 얼굴을 들이미는 차였다. 철썩! 찰기 있는 타격음이 울려 퍼짐과 동시에 그의 고개가 훽 돌아갔다.
“크억!”
“이 나쁜 놈.”
뺨이 불에 데인 것처럼 얼얼했다. 재회의 감동은 통증과 함께 날아가 버렸다.
로난은 따귀 맞은 자리를 만지작거리며 다시 그녀를 돌아보았다. 아데샨의 얼굴은 이제 바늘로 찌르면 터질 것처럼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후우···마음만 같으면 더 하고 싶지만 이걸로 끝내도록 하지. 귀관은 나와 마찬가지로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으니까.”
“가, 갑자기 왜 때려요?!”
로난이 당혹성을 흘렸다. 얼굴을, 그것도 상당히 강하게 맞았는데도 화가 나기보다는 어이가 없었다. 조용히 숨을 몰아쉬던 아데샨이 도끼눈을 치켜떴다.
“귀관은 말이다. 내가 왜 귀관에게 시간을 되돌릴 권리를 양보한 줄 아나?”
“어···대머리들을 무찌르고 세상을 구하게 하기 위해서 아니었어요? 제 무재를 믿으신다고 하셨잖아요.”
“맞다. 아주 잘 해주었지. 내가 세 번의 삶을 살아가면서도 실패했던 일은 귀관은 한 번에 해냈다. 그런데···.”
“그런데?”
갑자기 아데샨이 말꼬리를 끌었다. 다시 찾아온 어색한 침묵에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른 세수를 서너 번씩 반복한 그녀가 쥐어짜내듯 말했다.
“그런데, 도대체 왜 나와 귀관이 연인 사이가 된 거냐···!”
“아.”
로난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그녀의 비정상적이던 행동이 단번에 이해되었다.
‘좆됐군.’
몸 안에서 인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대목부터 이 상황을 눈치챘어야 했는데. 간신히 정신을 차린 그가 손발짓을 해 가며 설명을 시작했다.
“그, 그건 어쩔 수 없었어요. 선배는 정말로 좋은 사람이란 말이에요. 안에서 보셨으니 아시겠지만 저희는 정말로 잘···.”
“닥쳐라. 그 이상 말하지 마.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잘도 그런 짓거리들을···.”
“어···설마 안에서 다 보신 거에요? 처음부터 끝까지?”
“그렇다면 어쩔 테냐. 이 파렴치한 놈!”
“끄아아악!”
갑자기 손을 뻗은 아데샨이 로난의 양쪽 귀를 쭉 잡아당겼다. 미처 반응하지 못한 그가 비명을 내질렀다. 얼굴을 눈앞까지 가져다 댄 아데샨이 따박따박 말을 이었다.
“그래, 다 봤다! 전부 다! 아주 그냥 둘이서 좋아 못 죽는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봐야 했지!”
“그, 그럴 때는 주무시거나 하지 그랬어요···.”
“안에서 지낸다는게 무슨 하숙 생활인 줄 아느냐? 허, 다시 생각해도 기가 막히는군. 갑자기 입을 맞추더니 그냥 예뻐서 그랬다고? 그딴 요사스러운 대사는 도대체 어디서 배워 온 거냐···!”
“아악! 귀 잡아당기지 마요!”
로난이 발버둥쳤다. 인격이 바뀌어서 그런가 어째 손맛이 더 매워진 것 같았다. 아데샨은 멈추지 않고 쌓였던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안 봐도 뻔하다. 그 말재주로 지금까지 수많은 아가씨를 울려 왔겠지. 그 나이 먹도록 남자 손 한번 잡아보지 못한 멀대를 꼬시는 건 코를 푸는 것만큼이나 쉬웠을 거야. 그렇지 않나?”
“제, 제기랄···제가 그렇게 능력이 좋았으면 전생에 여한 없이 죽었겠죠. 누구랑 사귀는 건 정말로 이게 처음이에요!”
“내게 거짓을 간파하는 능력이 있는 걸 알고 말한 거겠지? 만약 나를 기만하는 거라면···.”
아데샨이 으르렁거렸다. 이렇게 사나워진 눈매는 아하유테와의 최종 결전을 지휘할 때를 제외하고는 본 적이 없었다. 눈을 질끈 감은 로난이 억울함을 호소했다.
“젠장, 그럴 거면 사귀자고도 안 했어요. 대장군님이 뭘 안다고 그래요!”
“······!”
아데샨이 굳었다. 뭘 안다고 그래요. 그 한 마디가 잠잠해진 전장에 울려 퍼졌다. 잠시 침묵하던 그녀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고 있다.”
“예?”
“그 말이 사실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내가 귀관을 살려 두는 거야. 만약 귀관이 지조도 없이 아무데나 들이대고 다니는 놈팡이었다면 처음으로 입을 맞춘 날에 그리폰에서 밀어 버렸을 거다.”
무시무시한 이야기에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아데샨이 로난의 귀에서 손을 뗐다. 가까스로 풀려난 로난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청문회는 이걸로 끝난 건가요?”
“그래. 나답지 않게 흥분했군. 미안했다.”
“아니에요. 알아주셔서 고마워요. ”
로난이 히죽거렸다.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아데샨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하려던 말을 삼킨 그녀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그럼 이제 일 이야기를 해볼까.”
“좋아요. 그 뭐야, 아셀은 대장군님이 조종한 거죠?”
“그래. 네 부친을 제외하면 아군 중 별의 가호를 일으킬 수 있는 유일한 인재니까. 물론 이렇게나 강력할 줄은 몰랐지만.”
아데샨은 기가 찬다는 눈빛으로 하늘을 올려보았다. 아셀이 혼자 일으킨 별의 가호는 구원자가 사용했던 것과 별 차이가 없어 보였다. 방어막의 두께를 가늠하던 그녀가 말을 이었다.
“이 정도라면 놈의 공격을 세 번 정도는 더 막아낼 수 있을 거다. 구원자 님처럼 보조를 받는다면 훨씬 더 오래 버틸 수 있을 거고. 하지만 우리의 목적은 버티기만 하는 게 아니지.”
“그쵸.”
로난이 주억거렸다. 확실히 아셀의 능력은 가공할 수준이었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한계가 찾아올 터였다.
먼저 쳐서 죽여버려야 했다. 다만 반격에 나서기 전에 퍼질러 자는 사람들부터 깨우는 것이 우선이었다. 구원자의 말을 떠올린 로난이 손가락을 튕겼다.
“맞아.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죠? 아버지는 누나가 어쩌고 하던데.”
“말 그대로다. 이건 이릴 양이 한 짓이야.”
“···네?”
로난이 굳어버렸다. 아데샨이 끄덕였다. 그녀는 대태도를 끌어안은 채 실실거리는 나비로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귀관의 누이는 위험하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세상에 자신의 의지를 투영하거나 하는 그런 능력이겠지. 이 아이에게 누누히 경고를 보냈지만, 전달할 수 있는 말에 한계가 있어서 그런지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
아데샨이 자신을 가리키며 이야기했다. 그녀는 이전부터 내부에서 감지한 위협을 지금의 아데샨에게 경고해 왔다고 했다. 그녀로부터 이릴의 행보를 설명 들은 로난이 짧게 탄식했다.
“살다보니 별일이 다 있군. 설마 우리 누나가···.”
“안타깝지만 그게 현실이다. 어서 찾아서 막아야 한다. 시간이 없어.”
“그래야죠. 그런데 그냥 이 사람들을 대장군님의 능력으로 정신 차리게 하는 건 안 될까요?”
로난이 물었다. 생각해 보면 지금 아셀도 멀쩡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데샨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미 시도해봤지만 불가능했다. 이릴 양의 힘은 나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력해.”
“엥? 그럼 아셀이랑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움직이는 거죠?”
“몸만 명령을 듣게 한 거지. 정신이 행복한 꿈에 취해 있다고 해도 몸에 이상이 생긴 건 아니니까. 하지만 꿈에 빠진 인격을 깨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릴 양부터 원래대로 되돌려야 한다.”
요컨대 꼭두각시 인형과 비슷하다는 뜻이었다. 의사 없이 실을 따라 춤추는 존재. 물론 그것만으로도 전력에는 큰 도움이 될 터였지만, 사람이 병기도 아니고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요컨대 누나를 막지 않으면 답이 없다 이거군요.”
“그래. 이게 교주가 귀관의 누이를 납치한 이유다. 먼저 그녀에게 행복한 꿈을 꾸게 한 뒤, 온 세상 사람의 생각을 동기화시키는 거야. 그래서 종말에 아예 저항할 수 없게 만드는 거지.”
“찢어죽일 자식···.”
로난이 이를 악물었다. 거인왕의 강림 때문에 놓친 게 화근이었다. 피해를 감수해서라도 완전히 썰어 버렸어야 했나. 주변을 둘러보던 아데샨이 입을 열었다.
“사람들을 깨운 다음에는 나바르도제 님을 찾는다. 따로 수색대를 편성해야겠군.”
“뭐야, 아벨에게 당한 거 아니었어요?”
“뭔가 문제가 생긴 것 같기는 하지만 엄연히 살아 계신 게 느껴진다. 다만 위치는 제대로 파악할 필요가 있겠어.”
로난의 눈이 커졌다. 하도 오래 안 돌아와서 죽은 줄로만 알았다. 일이 척척 진행되는 느낌이 썩 나쁘지 않았다. 그래, 대장군은 이런 사람이었지.
“그리고 지금까지 말한 건 모두 나와 다른 사람들이 할 일이다. 귀관이 해줘야 할 일은 따로 있어. 뭔지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지?”
“···당연하죠.”
로난이 끄덕였다. 오직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남아 있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휴식했다 여긴 로난이 칼자루를 만지작거리던 차였다. 낮고 굵은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메아리쳤다.
『감히 그분을 상처입힌 자에게 심판을.』
『오만함에 걸맞는 대가를.』
“빨리도 오시는군.”
한숨을 내쉰 로난이 고개를 들었다. 거인 대여섯 마리가 저 멀리서 날아오고 있었다. 왕이 강림하는 바람에 미처 잡지 못한 놈들이었다.
『필멸자들을 말살하라! 티끌 하나도 남기지 말 지어다!』
이어서 몇 배는 더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구름의 아랫면이 폭발하며 거인의 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아직도 목과 가슴에서 푸른 피를 뚝뚝 흘리고 있었다. 조금 전에 로난에게 입은 상처였다. 아데샨이 말했다.
“재회의 기쁨은 일이 끝난 뒤에 나누도록 하지, 상병.”
“좋은 생각이에요.”
로난이 웃었다. 저번 삶에 봤을 때와 그대로였다. 정신을 집중한 아데샨이 기묘한 손짓을 해 보였다.
“일어나라.”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그림자의 마나가 전장을 휘감으며 번져 나갔다. 넋을 놓고 헤죽거리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