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의 천재칼잡이-306화 (306/333)

< 306. 결전(13) >

#306

“용왕...!”

로난이 탄성했다. 오래간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아드렌의 군주, 갱생한 뒤 드리무어를 지키는 임무를 위임받았던 용왕 아지다하카였다.

황금빛 거체는 흉터로 뒤덮여 있음에도 여전히 빛을 잃지 않았다. 그에게 시선을 맞춘 용왕의 두 머리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구나-】

【용의 도시를 구한 아이야.】

기묘한 말버릇도 여전했다. 왼쪽 머리가 운을 떼면 오른쪽 머리가 말을 맺었다. 벙쪄 있던 로난이 큭큭거렸다.

“···빨리도 오셨군. 심지어 건강해 보이네.”

솔직히 진작 거인들에게 다 죽은 줄 알았다. 너무 늦기도 했고, 아무리 유동적으로 대처하라 지시를 받았어도 거인의 수가 너무 많았으니까. 왼쪽 머리가 입꼬리를 올렸다.

【늦은 건 미안하구나-】

【뒷수습을 하고 오느라 말이지.】

용왕은 저항 세력을 모으고, 나바르도제를 구조하느라 늦었다 설명했다. 그러고 보니 아데샨도 아직 찾지 못한 나바르도제의 위치를 어떻게 알아냈는지가 의문이었다. 로난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온 것만으로 감사한 일이지. 그런데 나바르도제 님은 어떻게 찾은 거야?”

【그야말로 천운이었다. 너도 익히 아는 자가···】

용왕이 질문에 답하려던 차였다. 콰아아아앙-! 나바르도제와 거인의 왕이 추락한 자리에서 산과 산이 격돌하는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고개를 내리자 야만스러운 난전을 펼치고 있는 왕과 나바르도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그만 사라져라, 이 괴물아!】

『감히 열등 종족의 불멸자 따위가···!』

보는 것만으로 압도되는 풍경이었다. 나바르도제의 이빨이 번득이고, 대검을 놓친 왕이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붉고 푸른 피가 튀기고 있었다. 연합군을 공격하던 거인들은 하나둘씩 진로를 바꿔 왕을 도우려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저걸 먼저 처리해야 할 것 같군.】

“동감이야.”

용왕의 말을 들은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시콜콜한 설명이야 나중에 들으면 될 일이었다. 쩌렁쩌렁한 외침이 밤하늘을 흔들었다.

【고한다! 드리무어에서 온 모든 이는 짐의 명을 받들어라!】

【더러운 침입자들을 처치하고, 세상의 종말을 막아라!】

이어서 폭이 천 미터에 달하는 금빛 날개가 폭발하듯 펼쳐졌다. 화아아악! 맹렬한 강풍이 구름을 찢어발겼다. 하늘을 가리던 백색의 바다 뒤편에서, 수백 마리의 드래곤이 모습을 드러냈다.

【크라라라라-!】

【크하하하, 긴 삶을 맺기에 적합한 장소군!】

포효성이 메아리쳤다. 정말로 다 몰려온 것 같았다. 용왕을 필두로 한 드래곤들이 일제히 강하하기 시작했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광경이었다. 당황한 거인들이 빛의 창을 던져 댔지만, 두아루와의 싸움을 겪은 그들은 이전처럼 호락호락하게 격추당하지 않았다.

『그 움직임은···.』

【우리가 당하고만 있을 줄 알았느냐-】

【이 괴물들아!】

거인들의 얼굴에 당혹이 깃들었다. 지상의 연합군과 공중에서부터 내려오는 드래곤 군단은 망치와 모루 역할을 하며 그들을 깨부수기 시작했다. 문득 로난의 뒤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난. 전에는 신세를 졌다.】

“너는···.”

로난이 고개를 돌렸다. 온몸이 새하얀 드래곤 한 마리가 자신을 내려보고 있었다. 금속 재질의 은백색 비늘. 용왕의 최측근인 강철의 용, 나란소니아였다.

【네 누이에 관한 소식은 방금 전달 받았다. 어쩐지 대부분 맛이 가 있더군. 우리도 지원 병력을 보내도록 하지.】

“고맙다. 대장군님이 전달해 줬나 보네. 그런데 너, 날개가···.”

문득 나란소니아의 날개를 본 로난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 거인 두아루와 싸우며 뜯겨 나갔던 날개가 다시 돋아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용왕의 왼쪽 뒷다리도 멀쩡하게 돌아와 있었다. 아무리 드래곤이라도 이런 재생이 가능한가 의문을 품던 와중이었다. 나란소니아의 등 위에서 웬 청년 한 명이 머리를 불쑥 내밀었다.

“어때, 감쪽같지 않느냐? 내가 생각해도 참 잘 만들었단 말이지.”

“에잇 빌어먹을, 깜짝이야.”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란 로난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저 새끼는 뭔데 저기 타 있는 거지? 로난을 바라보던 청년이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으하하하, 겁먹기는. 망나니 같은 놈이 귀여운 면도 있구나.”

“넌 뭐야?”

“설마 기억 못하는 건가? 이거 서운한걸.”

청년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피식거렸다. 묘하게 짜증 나는 상판데기가 어쩐지 눈에 익었다. 지상에서 그들을 올려보던 구원자가 눈을 부릅떴다.

“알리브리헤?”

“···구원자.”

구원자와 눈이 마주친 청년이 시선을 피했다. 뭔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는 사람의 표정이었다. 알리브리헤라는 이름을 들은 로난이 눈썹을 치켜떴다.

의수 제작의 달인이자 네뷸라 클라지에의 원로 중 한 명. 아드렌에서 만나고 헤어졌던 블랙 드래곤이었다.

그러고 보니 구원자의 기억 속에서 본 알리브리헤는 지금과 같은 젊은이의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폴리모프로 노인의 행색을 연출하고 있었을 뿐, 저게 본모습이었군. 그를 응시하던 구원자가 입을 뗐다.

“반갑군. 벗이여.”

“···그렇게 부르지 말게. 내가 무슨 염치로 자네에게 벗이라는 소리를 듣겠나.”

알리브리헤가 입술을 비틀었다. 엘시아와는 달리 오랫동안 네뷸라 클라지에에 협조해 왔다는 사실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듯했다. 구원자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비는 피해 가야지 뭘 그러나. 나바르도제 님은 자네가 풀어준 건가?”

“···뭐, 그렇지. 아벨 녀석이 사용한 봉인석은 애초에 내가 설계하고 만든 거거든.”

알리브리헤가 주억거렸다. 천재 발명가이기도 한 그는, 언젠가 아벨의 명령으로 아무리 강력한 존재라도 봉인할 수 있는 마도구를 만들어냈다고 했다.

“두 번 다시는 구할 수 없는 재료들이 대거 투입됐지. 내 인생 최고의 역작이었거늘···설마 불의 어머니를 봉인하는 데 쓰일 줄이야.”

“원래는 그 용도가 아니었다는 건가?”

“자세히는 모르지만 아마도 그럴 걸세. 아벨은 애초에 나바르도제 님을 변수로 보고 있지도 않았으니까···아벨은 죽었나?”

“아마도. 솔직히는 모르겠군.”

구원자가 미간을 좁혔다. 애매모호한 대답에 알리브리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죽었으면 죽은 거지 아마도는 또 뭐란 말인가?

“뭐, 차차 확인해 보면 될 일이지. 그······카인.”

“왜 그러나.”

“···미안하네. 정말로.”

알리브리헤가 고개를 숙였다. 많은 회한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슬쩍 웃은 구원자가 괜찮다는 듯이 손을 들어 보였다.

로난은 일부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거인의 피를 마신 괴물이건, 드래곤이건 수컷들의 자존심은 다 똑같으니까. 머지않아 머리를 든 알리브리헤가 피식 웃었다.

“하하···그나저나 내 생에 이런 난장판은 처음 보는군.”

사방천지가 끔찍하고 요란해서 눈을 둘 곳이 없었다. 알에서 깬 뒤로 이런 걸 본 적은 없었다. 미리 상황을 전달받았음에도 경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난공불락을 자랑하던 총본산의 곳곳에서는 불길이 솟구치고 있었다. 정체 모를 폭풍이 성탑의 최정상을 휘감은 채 포효하고 있었다.

네뷸라 클라지에의 파멸이 눈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무슨 수를 써도 아벨을 이기지는 못할 것이라고, 희망 따위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기어코 사람들이 해내고 만 것이었다.

‘정말로 지켜내다니.’

감격에 젖은 알리브리헤가 주먹을 움켜쥐던 와중이었다. 그와 구원자를 번갈아서 쳐다보던 로난이 입을 열었다.

“방관자로 남겠다지 않으셨수?”

“···감동할 시간도 안 주는구나. 뭐, 그러려고 했는데···생각이 좀 바뀌었단다.”

“갑자기 왜?”

“너와 네 친구들을 보고 희망을 얻었거든. 주책 맞게도 말이지, 어쩌면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못된 생각이 자꾸만 떠오르지 뭐냐.”

알리브리헤가 끌끌거렸다. 그는 용왕의 다리와 나란소니아의 날개는 물론, 불구가 된 다른 모든 드래곤에게 인공 신체를 만들어 주었다고 했다.

“그거 잘 됐네.”

로난이 히죽 웃었다. 상황이 조금 전보다 훨씬 더 나아졌다.

나바르도제와 용왕이 이끄는 군단은 이 별에서 가장 강력한 전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신 로난이 말을 이었다.

“좋아. 그럼 어서 끝을 내자고.”

알리브리헤는 웃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동시에 오러를 발동한 로난이 나란소니아의 등에 올라탔다.

퍼덕거리던 날개가 몸에 들러붙듯 접혔다. 콰아아아! 아드렌에서 가장 빠른 드래곤이 거인의 왕을 향해 급강하하기 시작했다.

****

【크하하하! 내가 최강이다!】

【크헤헤, 크헤헤헤!】

쾅! 콰앙! 행복한 꿈에 빠진 드래곤들이 하나둘씩 추락했다. 뼈가 부러졌음에도 낄낄거리는 용들은 모두 이릴을 잡기 위해 파견된 병력이었다. 그녀의 능력은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종족의 머릿속조차 헤집어 놓았다.

“아하하하···그래, 거기서 놀까?”

이릴은 여전히 해맑은 웃음소리를 흘리며 전장을 활보하고 있었다. 비상식적으로 걸음 속도가 빨라서 잡기가 힘들었다. 하늘에서는 드래곤의 편대가, 지상에서는 아데샨이 조종하는 연합군이 그녀를 추격하고 있었다.

[방심하지 말고 일정 거리를 유지하시오!]

아데샨이 전음으로 외쳤다. 그녀는 잠시 왕에게서 눈을 떼고 이릴에게 집중하는 중이었다.

화아악! 무작정 이릴을 뒤쫓던 드래곤들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그들은 실시간으로 얼간이가 되는 동족들을 보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제기랄, 도대체 저게 무슨 능력이야?! 그 머리 좋은 울프랑시타가 완전히 병신이 돼 버렸잖아!】

【귀찮은데 그냥 태워 버리면 안 되는 건가?】

“이건 진심인데, 두 번 다시 그런 말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아데샨이 엄중하게 경고했다. 다행히도 로난의 이름을 언급하자 드래곤들은 별 불만 없이 고분고분해졌다. 그들은 두아루를 죽이고 아드렌을 구한 것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알았다. 알았어. 시키는 대로 하면 될 것 아냐!】

그때 추격자 드래곤 하나가 마법을 발동했다. 그의 뿔이 번쩍거림과 동시에 이릴의 주변에서 거대한 바위벽들이 솟아났다. 쿠르릉! 하나의 높이가 10m에 달하는 벽은 그녀의 퇴로를 완전히 가로막았다.

[지금이다, 에워싸라!]

기회를 포착한 아데샨이 명령했다. 주변에서 이릴을 뒤쫓던 병사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정신을 장악당한 그들은 멍청한 웃음을 흘리면서도 제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다. 그들이 바위벽 안쪽으로 뛰어드는 것을 본 아데샨이 구원자에게 물었다.

“이걸 마시면 확실히 괜찮아지는 겁니까?”

그녀의 손에는 작은 유리병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안쪽에서는 붉은 액체가 찰랑거리고 있었다. 구원자가 심장 부근에서 뽑아낸 피였다.

“그래. 아마도 그럴 거야. 어리석은 동생이 무슨 방법을 썼는지는 모르지만, 아마 저주의 일종일 테니까.”

“알겠습니다. 해결 방법 자체는 나름 간단해서 다행이군요.”

아데샨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나 방법이 없어서 기절시키거나 어딘가에 유폐시켜야 하나 싶었는데, 그런 거친 일까지는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이제 바동거리는 그녀에게 약을 어떻게 먹일지 고민하던 차였다. 콰아아앙-! 갑자기 이릴을 에워싼 바위벽 안쪽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뭐?!”

아데샨과 구원자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포위벽의 모든 면이 무너져 내린 채 흙먼지를 토해내고 있었다. 깔끔한 단면을 본 아데샨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생각보다는 더 어렵겠군요.”

투입되었던 인원들이 전부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이윽고 널브러진 사람들 위로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이릴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우, 우리한테···왜 이러시는 거에요?”

“젠장.”

아데샨이 탄식했다.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이릴의 오른손에는 장검 한 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눈꺼풀 너머의 세계에서, 그녀는 동생과 아이들을 위협하려는 적에게 필사적으로 저항하고 있었다.

“···환각을 보고 있는 건가. 그 와중에 아무도 죽이지 않았군.”

구원자가 중얼거렸다. 널브러진 병사들 중에서는 간혹 검에 베이거나 찔린 사람도 있었지만, 사망자는 아무도 없었다.

‘기어코 거친 방법을 써야 하는 건가.’

아데샨이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라면 더욱 많은 병력을 공격적으로 투입해야 했다. 로난에게는 정말 미안하지만 이릴이 다소 다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다른 방법을 모색하고 싶었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아무리 그녀라 하더라도 거인을 상대하는 병력과 추격대를 동시에 운용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결단을 내린 아데샨이 전음을 보내려던 차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하지.”

“뭐?”

익숙한 목소리는 네 번의 삶을 살아오는 내내 들은 적이 있었다. 고개를 돌린 아데샨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슐리펜 시니반 데 그랑시아. 어떠한 변수 속에서도 대륙제일검의 자리에 등극하던 그 천재가, 피투성이가 된 채 서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