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9. 종막(1) >
#309
“드디어···.”
아벨이 중얼거렸다. 다리 두 쪽만 제대로 붙어 있었어도 이렇게까지 오래 걸리지는 않았을 텐데 생각보다 시간이 길어졌다. 차가워진 몸에는 이제 거의 감각이 남아 있지 않았다.
‘빨리 끝내야겠군.’
총본산에서 피신한 그는 어느새 거인들의 세계에 당도해 있었다. 제국의 황궁만큼이나 거대한 구체 하나가 아벨의 눈앞에서 맥박치고 있었다.
구체의 정체는 거인들이 ‘근원’이라 부르는 에너지 덩어리였다. 아벨은 거기에 남아 있는 손 한 쪽을 집어넣고 있었다. 형용할 수 없는 강력한 기운이 몸 전체로 번져나가고 있었다.
“엄청난 힘이야···.”
거인들이 받들어 모시는 이유가 있었다. 고즈넉하게 흐르기만 하던 백색 구름은 근원을 중심으로 거칠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주변에서 낮고 굵은 목소리가 쉴 새 없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우매한 필멸자여, 당장 그곳에서 나와라.』
『참람하기 짝이 없군. 충성을 맹세한 이가 어찌하여 금기를 저지르려 하는가!』
한 마디 한 마디가 고막을 찢어 놓을 것처럼 시끄러웠지만 아벨은 반응하지 않았다. 족히 수천 명은 되어 보이는 거인이 그의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감히 그분의 심장에 손을 대려 하다니!』
어느 거인이 외쳤다. 늘 침착하던 놈들도 이번만큼은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당장 아벨을 끄집어내야 마땅했지만, 행여나 근원이 손상될까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기분이 어떠냐. 대머리들. 이게 바로 필멸자의 힘이다.”
거인들의 면면을 살피던 아벨이 큭큭거렸다. 부산스럽게 퍼덕거리는 날개가 그들의 다급한 심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오만하던 놈들이 절망에 빠진 모습을 지켜보는 만큼 재미있는 것도 없었다.
아벨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 작전을 계획했다. 죽을 위기와 치 떨리는 수모를 겪으면서도 거인들에게 머리를 조아렸던 것은 바로 지금을 위해서였다.
거인 종족 전체의 심장 역할을 하는 이 덩어리는 왕이 자리에 없을 때만 손을 댈 수 있었다. 촤악-! 한 발자국을 더 걸어 나간 아벨이 근원에 팔을 완전히 집어넣었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거인들의 얼굴이 다시 한 번 일그러졌다. 아벨은 대답하는 대신 비릿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순간을 위해 포기해온 것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카인과의 추억을 회상하던 그가 비장하게 입을 뗐다.
“거기서 똑똑히 지켜봐라. 우리가 불멸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을.”
****
『···아벨!』
거인의 왕이 탄식했다. 그는 공유되는 감각을 통해 아벨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더러운 배신자는 눈을 잠시 뗀 사이에 근원까지 도달해 있었다.
그는 근원 안쪽으로 서서히 자신의 몸을 밀어 넣고 있었다. 무슨 짓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느낌이 좋지 않았다. 별의 아이들은 차마 근원에 피해를 줄까 공격하지 못하고 있었다.
『감히···우주의 먼지만도 못한 무지렁이가···.』
왕이 이를 악물었다. 불현듯 얼마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자신의 세계에 찾아온 아벨은 이 행성에 강림하는 것이 두려우냐고 소리 내어 도발했었다.
사실상 그 한 마디가 사태의 발단이었다. 선왕의 실종을 경계하여 원래는 내려오지 않으려던 왕은 그 도발에 응하여 강림한 것이었다. 콰아앙-! 여덟 장의 날개가 단번에 펼쳐졌다.
『비켜라!』
“도, 도망간다!”
전투를 지켜보던 사람들이 경악성을 터트렸다. 왕은 그들을 무시하고 하늘로 솟구쳤다. 더없이 수치스러웠지만 일단은 아벨을 막아야 했다.
“싸우다 말고 어디를 튀려고!”
왕과 검을 겨루던 로난이 버럭 소리쳤다. 하도 다쳐서 못 날게 된 줄 알았는데 아직 여력이 남아 있던 모양이었다.
왕에게는 유감스러운 일이었지만, 로난을 비롯한 사람들은 그를 순순히 돌려보내 줄 생각이 없었다. 마나로 강화된 로난의 허벅지가 터질 듯이 부풀었다.
“서라!”
로난이 땅을 박차며 수직으로 도약했다. 아슬아슬하게 왕을 따라잡은 그가 널찍한 등판 검을 꽂아 넣었다. 푹! 살을 파고든 검의 끄트머리가 왕의 날개 뼈에 박혔다.
『크으으···!』
왕의 몸체가 크게 휘청거렸다. 하지만 그는 고도를 높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예상을 벗어나는 반응에 로난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 새끼가···.”
콰아아! 로난을 매단 채로 상승하던 왕은 눈 깜짝할 새 마법진 바로 아래까지 도달했다. 이제 진입하기까지 두세 번의 날갯짓만이 남아 있는 상황이었다. 불현듯 아찔한 통증이 그를 덮쳤다.
『윽···!』
도무지 무시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몸이 무거워지는 감각에 왕의 미간이 구겨졌다.
고개를 돌리자 거대한 얼음 가시 두 개가 각각 날개 한쪽과 허벅지를 꿰뚫고 자라나 있는 것이 보였다. 명중을 확인한 아셀이 어깨를 움츠리며 기겁했다.
“마, 맞았다!”
『너···마법사.』
지상을 내려본 왕이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붉은 머리카락의 마법사는 감각 공유를 통해 익히 본 적이 있었다. 필멸자 주제에 감히 별의 권능을 훔쳐 쓰는 괘씸한 것.
찢어 죽여야 마땅했으나 그럴 여유가 없었다. 마법에 피격당한 부위가 서서히 얼어붙고 있었다. 가까스로 고통을 떨쳐낸 왕이 다시금 날아오르려던 차였다.
파아아앙-! 사각에서 날아온 검은 혜성 같은 것이 그의 오른쪽 세 번째 날개를 관통하며 지나갔다. 거의 같은 타이밍에 반대쪽에서 날아온 시커먼 그림자가 왼쪽 네 번째 날개를 완전히 절단해 버렸다.
【쓰레기, 잘도 내게 그따위 환상을 보여줬겠다!】
【유혈은 유혈로 매듭지어야 하는 법.】
오르세와 그림자 대공이었다. 이릴이 보여준 환각에서 깨어난 그들은 머리끝까지 화가 나 있었다. 그때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이 하늘에서부터 왕을 짓눌렀다.
『커헉!』
일찍이 경험한 적 없는 압력이었다. 거진 백 미터를 추락하던 왕이 가까스로 균형을 잡으며 공중에서 정지했다. 그 광경을 본 로르혼이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탄식했다.
“이런, 비장의 수였는데.”
모든 여력을 다해서 눌렀음에도 억제할 수 없었다. 허나 무의미한 시도는 아니었다. 견디다 못한 왕이 노성을 터트렸다.
『감히-!!』
화아아악! 남아 있는 다섯 장의 날개가 폭발하듯 펼쳐졌다. 산도 뿌리째 뽑아 버릴 만큼 강력한 바람에, 오르세와 그림자 대공의 몸이 튕겨 나갔다.
【크아아아악!】
『맹세한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 별은 반드시 멸망시키겠다!』
왕이 외쳤다. 이제 돌이키기에는 너무 늦었다. 억누를 수 없는 분노가 그의 가슴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고 있었다.
방해꾼을 모조리 떨쳐낸 왕이 다시 마법진을 향해 솟구쳤다. 이번에야말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그가 마법진 안쪽으로 머리를 들이밀려는 찰나였다.
불현듯 그의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아직 여기 있다.”
『뭐···.』
그때, 왕은 난생처음으로 공포라는 감정을 느꼈다. 모든 날개의 깃털이 한 번에 곤두섰다. 하도 정신이 없어서 깜빡 잊고 있었다. 로난은 아직 그의 등에 매달려 있었다.
“그러니까···까먹을 걸 까먹었어야지.”
로난이 짓씹듯이 중얼거렸다. 칼자루 바로 앞부분까지 깊숙하게 박아 넣은 라만차는 여지껏 본 적 없는 강렬한 적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얇은 검신 안에는 로난이 지금껏 아껴온 힘이 모조리 담겨 있었다. 힘을 해방하는 순간 응축되어 있던 검기가 왕의 심장을 찢어발길 터였다.
『네놈···네놈이 감히!!』
“여기서 끝이다. 오래도 걸렸어.”
왕이 으르렁거렸지만 로난은 무시했다. 그가 모아 왔던 힘을 방출하려던 순간이었다. 파아아아-! 갑자기 하늘을 뒤덮은 마법진 안쪽으로부터 눈부신 파장이 터져 나왔다.
“뭐야?”
영문 모를 현상에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하얀 빛무리는 넘실거리며 전장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불현듯, 칼을 박아넣고 있는 왕의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억···.』
“어?”
갑자기 바위가 진흙이 된 것 같은 감촉에 로난이 당혹성을 흘렸다. 이거 왜 이래. 나 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
“이거 왜 이래 시발.”
왕은 그가 뭐라 할 새도 없이 지상으로 추락했다. 콰아아앙! 지면에 처박힌 거체가 굉음을 토해냈다.
아직 남아 있던 거인들도 하나둘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쾅! 콰앙! 충돌음이 연속적으로 울려 퍼졌다. 지상에서 마지막 싸움을 지켜보던 병사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노, 놈들이 추락한다!”
“···이긴 건가?”
변화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하늘을 완전히 뒤덮고 있던, 거인들의 세계와 이어져 있던 마법진들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온통 기분 나쁜 백색으로 뒤덮여 있던 총본산의 풍경도 변화하고 있었다.
“이봐, 여기는 우리가 출발했던 곳이잖아!”
“풍경이 변한다···.”
눈이 녹아내린 자리에서 풀과 꽃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하늘과 대지는 머지않아 원래의 색을 되찾았다.
연합군은 어느새 총본산을 향해 진군했던 주둔지를 밟고 서 있었다. 주변을 둘러싼 암록색 숲이 불어오는 밤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어이, 저길 봐!”
그때 누군가 소리쳤다. 널브러져 있던 왕의 몸이 소멸하고 있었다. 신체의 말단부터 빛으로 화하여 사라지는 모습은 꼭 타고 남은 재가 바람에 바스러지는 것 같았다.
다른 거인도 마찬가지였다. 지상을 뒤덮고 있는 거인의 시체들은 모조리 입자로 화하며 날아가고 있었다. 머지않아 왕의 시체가 사라진 자리에서 로난이 몸을 일으켰다.
“빌어먹을,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로, 로난!”
그의 모습을 본 친구들이 입을 가리며 경악했다. 그 높은 곳에서 떨어졌음에도 로난의 몸에는 상처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가장 먼저 달려온 아셀이 울먹이며 말했다.
“고, 고생 많았어···정말로 해낼 줄이야···!”
“대단해, 너는 정말, 정말이지···.”
마르야의 눈에서도 눈물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그들은 로난이 거인의 왕을 처치한 줄 알고 있었다. 로난은 대답하지 않고 입술을 비틀었다.
‘내가 죽인게 아닌데.’
굉장히 미심쩍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불길함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갑자기 왜 이렇게 된 거지? 사건의 진상을 알 리 없는 사람들은 마냥 기뻐하고 있었다.
“우, 우리가 이겼다!”
“만세! 만세!!”
우레 같은 환호성이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었다. 하도 소리가 커서 제도에서도 들릴 것 같았다. 서로가 죽지 않은 것을 확인한 병사들이 전우들을 부둥켜안은 채 소리 내어 울고 있었다. 그렇게 환희에 찬 분위기가 지속되던 와중이었다.
[다들 정신 차려라! 하늘을 조심해!]
불현듯 아데샨의 전음이 모두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지금까지의 전음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렬한 음량에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다급하게 두리번거리던 로난의 시선이 아데샨에게 닿았다.
“뭐야, 왜···.”
그녀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잿빛 시선은 마법진이 사라진 하늘에 머물러 있었다. 형용할 수 없는 불길함에 전신의 털이 곤두서는 것이 느껴졌다. 로난이 그녀를 향해 다가가려던 찰나, 새카맣던 밤하늘이 백색으로 물들었다.
“이게 무슨···.”
로난의 눈이 커졌다. 꼭 세상 전체가 벼락에 휩싸인 것 같았다. 이어서 뭐라 말할 새도 없이 하늘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
로난은 느낄 수 있었다. 거인들이 던져 대던 빛의 창과 같은 궤의 공격이 내려오고 있었다. 다만 그 범위가 터무니없이 넓었다.
‘안 돼.’
자리에 있는 모두가 죽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찰나 속에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오직 로난뿐이었다. 느릿해진 시간 속에서, 그는 풍경을 이루는 요소들이 입자의 형태로 분해되는 것을 보고 있었다.
하늘을 부유하는 구름이, 그다음에는 드높은 바이디안 산맥이. 머리 위로 쏟아지는 빛은 높은 곳에 있는 존재부터 지워가고 있었다. 전함 다인하르의 윗부분이 소멸하며 기계장치로 이루어진 내부가 드러나고 있었다.
‘늦었다.’
로난이 어금니를 악물었다. 일단은 거인들의 공격과 궤가 같으니 썰어서 상쇄시킬 수는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지켜야 할 사람의 수가 너무 많았다. 분명 7할 이상은 죽게 될 터였다.
“이런 썅···!”
물론 계산과는 별개로 로난의 몸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주변에 있는 사람이라도 살려야 했다. 남아 있는 여력을 끌어모은 그가 칼자루를 잡아당기려는 순간이었다.
시야 한 구석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힘을 아끼거라.”
“뭐···.”
로난이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구원자가 그곳에 서 있었다. 그는 무언가를 받아 내려는 사람처럼 양팔을 하늘 높이 쳐들고 있었다.
“아버지?”
로난의 눈이 커졌다. 구원자 또한 느릿해진 시간 속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은은한 미소가 그의 입에 드리워 있었다. 어느새 나타난 반구형의 보호막이 연합군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지금 무슨 짓을···!”
구원자는 다른 이들의 마나를 받고 있지 않았다. 무모한 행태를 목도한 로난이 뭐라 외치려던 차였다. 마침내 당도한 백색광이 보호막과 충돌했다.
콰아아아아-! 세상이 뒤집히는 듯한 굉음과 함께, 온 세상이 하얗게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