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6. 아카데미의 천재칼잡이 -完- >
#316
“···벌써 아침인가.”
로난이 눈을 떴다. 반투명한 커튼 너머로 어스름한 서광이 스며들고 있었다. 간만에 꿈을 꾸지 않고 숙면을 취해서 그런지 정신이 개운했다.
“흐아아아암···. ”
일정만 아니라면 더 자고 싶었다. 늘어지게 하품을 한 그가 누운 채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오른팔을 베개 삼아 누워 있는 아데샨이 보였다.
‘예쁘군.’
로난이 검지로 머리카락을 빙빙 감았다. 이제는 매일 아침마다 보는 풍경이었다. 때마침 눈을 뜬 그녀가 조금은 쉰 목소리로 물었다.
“으웅···지금 몇 시야?”
“아, 일어났어?”
마구잡이로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꼭 해조류를 연상케 했다. 반대쪽 팔로 협탁을 뒤적거리던 로난이 자명종을 집어들었다.
“어디 보자, 그러니까···8시 30분이네.”
“그렇구나아···그럼 난 조금만 더···잠깐, 뭐라고?!”
갑자기 아데샨이 튕기듯 상체를 일으켰다. 이불이 내려오며 새하얀 나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몇 번을 봐도 끝내주는 광경에 로난이 반사적으로 엄지를 치켜들었지만, 오늘의 그녀는 장난을 받아 줄 여유가 없었다. 아데샨이 머리를 쥐어 싸맸다.
“나, 난 몰라. 완전히 지각이잖아···!”
“엥? 어차피 졸업식은 10시부터 아니야?”
“난 학생회장이었잖아! 교장님이 나한테 송사를 맡기신 거 잊었어?”
“아.”
로난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고 보니 그런 일을 맡았던 것 같았다. 서둘러 몸을 일으키려던 아데샨이 비명을 질렀다.
“아윽!”
“왜 그래?”
“다, 다리에 힘이 아직 안 돌아와서···.”
그녀는 장장 오 분에 걸친 노력 끝에 간신히 기립에 성공했다. 덜덜 떨려오는 다리를 보니 괜한 죄책감이 들었다. 머리를 긁적거리던 로난이 고개를 숙였다.
“그···미안합니다.”
“난 끝이야···틀림없이 늦은 이유를 다들 눈치채고 말 거야···내가 미쳤지, 그러게 왜 분위기를 타서···.”
아데샨은 외출 준비를 하는 내내 혼잣말을 웅얼거렸다. 하얀 얼굴은 당장에라도 터질 것처럼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녀가 씻는 동안 옷을 챙겨온 로난이 큭큭거렸다.
“진정하고 옷부터 입어. 이야, 우리가 다시 교복을 입는 날이 올 줄이야.”
“고마워. 으으···제대로 들어가긴 하려나? 이상해도 웃으면 안 돼···.”
“뭘 입어도 예쁘니까 걱정하지 마. 그런데 어젯밤만 분위기를 탔다기에는 빈도가 너무 잦기는 해.”
“너 정말···이, 일단 준비부터!”
뭐라 한마디를 하려던 아데샨이 등을 돌렸다. 깨가 쏟아지는 말다툼을 하기에는 여유가 없었다. 어찌어찌 그녀는 제시간에 준비를 마쳤다.
“이야. 이걸 성공하네.”
“아하하, 기본이지.”
로난이 혀를 내둘렀다. 과연 전 연합군 총 지휘관 다운 임기응변이었다.
예상대로 아데샨의 교복은 하나도 작아져 있지 않았다. 오히려 어른이 되어 입으니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현관을 나서기 직전 로난에게 입맞춤한 그녀가 환하게 웃었다.
“다녀올게. 사랑해!”
“나도.”
로난이 손을 흔들었다. 쾅!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기지개를 쭉쭉 켜던 그가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제시간에 참석하기 위해서는 슬슬 준비해야 했다. 옷장에서 자신의 교복을 꺼낸 로난이 피식 웃었다. 외투에는 아직도 아데샨이 덧대 준 가죽이 보란 듯이 붙어 있었다.
“필레온이라···정말 오랜만인걸.”
****
로난은 그로부터 한 시간 뒤에 집을 나섰다. 오래간만에 차려입은 교복은 몸에 적당히 맞았다. 아침을 맞이한 거리 곳곳에서 새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날씨 좋고.”
초봄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다시 싹을 틔우기 시작하는 초목을 보니 시간이 흐른 것이 확실히 체감되었다. 네뷸라 클라지에와의 전쟁이 끝난 지도 벌써 1년이 지났다.
‘까마득하게 느껴지는군. 시간 참 빨라.’
기억을 회상하던 로난이 입맛을 다셨다. 뭘 어떻게 보냈는지도 모를 정도로 세월이 빠르게 흘러갔다. 많은 일이 있었지만, 시간 대부분은 파괴당한 세상을 복구하는 데 투자했다.
세상의 3할을 날려버렸다는 아벨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치고, 여러 나라와 공동체가 멸망했다.
심각한 피해를 본 것은 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필레온 아카데미의 휴교는 도시가 어느 정도 제 모습을 찾고 안정될 때까지 연장되고 말았다.
로난이 아데샨과 동거를 하게 된 계기도 필레온의 기숙사가 파괴당한 탓이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가 휘파람을 불었다.
“오, 그래도 많이 고쳐놨네.”
저 멀리서 한창 복원 공사가 진행 중인 황궁이 눈에 들어왔다. 다른 건물과 시설을 모두 고친 뒤 마지막으로 하는 공사였다.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 발론 44세는 머리가 온통 하얗게 셀 때까지 제국의 안정과 복원에 전념했다. 전쟁이 끝나고 몇 달간은 정말 나라고 뭐고 다 망하는 줄 알았는데, 능력 하나는 걸출한 사람이었다.
“황제 아저씨도 오늘 오려나···.”
로난이 중얼거렸다. 작위 수여식 때 본 것이 마지막이었으니 이번 졸업식에 참석한다면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이었다.
그래도 망가진 세상이 제 모습을 되찾기까지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공통된 재앙을 겪은 사람들은 한마음이 되어 뭉쳤다.
‘심지어는 전함 다인하르도 공사에 동원됐지.’
원래는 속세에 관심이 없는 드래곤과 흡혈귀들이 복구 작업을 도운 것이 시간 단축에 큰 도움이 되었다. 어느새 필레온에 도착한 로난이 자연스레 대광장으로 향했다.
“젠장, 원래 이렇게 많았던가?”
인파를 가로지르던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휴교가 끝남과 동시에 열리는 졸업식이라 그런지 여느 때보다 많은 사람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뺘아아아!"
먼저 도착한 시타가 대광장의 상공을 선회하고 있었다. 간신히 관중석에 도착한 로난이 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리던 와중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로난! 여기야!”
“뭐야, 벌써 다 와 있었냐?”
마르야와 마주친 로난이 눈썹을 으쓱였다. 익숙한 면면들이 그녀의 곁에 포진해 있었다.
이제 아르말렌 백작이 된 마르야는 다른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한층 어른스러워져 있었다. 자리에 도착한 로난이 과장된 몸짓으로 그녀에게 인사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마르야 백작님.”
“뭐래. 너도 같은 귀족이면서.”
마르야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녀는 전생과 마찬가지로 황제 아저씨에게 아르말렌 영지를 하사받고 귀족이 되었다.
전쟁에서 보여준 무위도 한몫을 했지만, 그녀의 가족이 운영하는 카라벨 상단이 연합군의 보급책 역을 훌륭하게 수행한 공이 컸다.
이제 카라벨 상단은 당당하게 대륙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거대 상단으로 등극해 있었다. 문득 그녀의 뒤편에서 호탕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와하하! 그것도 맞는 말이지, 로난 데 발투아 공. 영지는 잘 관리하고 있나?”
“브라움? 니가 왜 여기 앉아 있어?”
로난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브라움의 교복은 당장에라도 터질 것처럼 팽창해 있었다.
“완전히 털보가 되어 버렸네. 졸업장 안 받게?”
“당연히 받을 거지만 그 전에 인사를 하러 왔지! 오필리아 양과 대공님도 함께!”
그리 말한 브라움이 옆으로 비켜섰다. 가려져서 보이지 않던 오필리아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당연한 소리였지만, 흡혈귀인 그녀의 외모는 이전과 달라진 부분이 전혀 없었다.
“오랜만이네 로난. 그동안 잘해줘서 고마웠어···네 동아리에 들어갔던 게, 내 인생···최고의 선택이었어.”
“나야말로. 너는 졸업하면 뭐 할거냐?”
“복구공사도 대강 끝냈으니···이번에야말로 새로운 혈마법의 연구에 매진해볼까 해. 다행히도 대공님이 정신을 차리셔서···.”
오필리아가 웃었다. 입술 사이로 반짝이는 송곳니가 귀여웠다. 대공이라는 말을 들은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맞아. 그 아저씨는 어디 있어? 같이 왔다 하지 않았나?”
【나는 여기 있다.】
그때 어디선가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필리아는 말없이 옆으로 비켜섰다. 키가 로난의 절반에도 미치지 않는 소년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로난이 설마하는 심정으로 질문했다.
“···대공님?”
【그래. 꼴이 우습게 됐지. 너와 오필리아만 아니었어도 오지 않았을 텐데.】
소년이 된 대공이 혀를 찼다. 뺨이 말랑말랑해 뵈는 것이 외모로는 열 살도 안 된것 같았다. 일곱 개 있던 선혈의 정수 중 여섯 개를 희생하고 살아난 대가였다.
“아하···그래도 살아서 다행이네요. 머리 만지면 화 낼 거죠?”
【당장은 내지 않을 거다. 너는 나보다 훨씬 강하니까. 하지만 죽은 뒤에 네 시체가 어떻게 쓰일지는 각오하는 게 좋아.】
대공의 답변을 들은 로난이 큭큭거렸다. 성깔을 보니 자신이 아는 사람이 맞았다. 그때, 근처에서 학생들의 술렁거림이 들려왔다.
“저기···저 분, 혹시···불의 어머니 아냐? 재작년 입학식 때 본 적이 있어···.”
“에이 설마···그런데 옆에는 누구지? 수, 숨이 잘 안 쉬어져.”
동시에 범상치 않은 살기를 감지한 로난이 고개를 돌렸다. 바로 앞줄에서, 붉은 머리카락의 귀부인과 온통 시커멓게 차려입은 사내가 나란히 서 있었다.
사내의 어깨에서 피어오르는 살기가 심상치 않았다. 눈알만 굴려 주변을 둘러보던 그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웃기지도 않군. 내가 왜 이런 자리에 있어야 하는 거냐.”
“너무 그러지 말거라. 어차피 일 년 주기로 계속 와야 할 텐데.”
“빌어먹을, 그때는 분명 파괴와 절망을 선사하기 위해 오는 거겠지? 그래야 할 거다.”
“아니. 로난과 그 친구들의 졸업식이거든.”
귀부인이 웃음 지었다. 한순간 사내의 어깨 위로 살기가 솟구쳤다. 보통 사람들이 접촉하는 것만으로 까무러칠 수준이었지만, 귀부인은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강타함으로써 피해의 확산을 막았다.
“커억!”
“어머, 갑자기 왜 그러니 오르세?”
콰직! 뼈가 으깨지는 소리와 함께 사내가 무릎을 꿇었다. 귀부인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부채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그 장면을 감상하던 로난이 실소했다.
“둘 다 거기서 뭐 해요?”
“이런, 들켰나. 기껏 뿔도 감췄는데.”
“···솔직히 나바르도제 님은 뿔이 문제가 아니죠.”
로난은 진심으로 놀라는 나바르도제를 얼척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경이로울 정도로 풍만한 그녀의 흉부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로난이 물었다.
“어쨌든 반가워요. 아드렌은 어쩌고요?”
“아지다하카와 알리브리헤가 공사를 주도하고 있단다. 둘 다 아주 일을 잘해. 엘시아 그 아이도 함께 있어서 금방 일이 끝날 것 같더구나.”
“아하. 거 다행이네.”
로난이 주억거렸다. 하긴 셋 다 각자의 분야에서 천재적인 인물이니 곧잘 해내고 있을 터였다. 그때 통증에 신음하던 오르세가 고개를 쳐들었다.
“크으으···네놈···!”
“그러게 왜 깝쳐서 맞고 그래.”
“네게는 관심이 없다. 살인 기계는 어디 있지? 놈을 데려와라!”
오르세가 외쳤다. 목소리가 너무 커서 대광장에 있는 사람들이 다 들을 지경이었다. 마르야의 옆에 앉아 그녀의 팔 받침대 역할을 수행하던 아셀이 어깨를 움츠렸다.
“히에엑! 오, 오르세 님?!”
“크하하하, 거기 있었군! 나와 함께 가자. 우리를 위한 새로운 피의 제전이 저 남쪽에 준비되어 있다!”
아셀과 마주친 오르세가 광소를 터트렸다. 그는 사람들을 밀치며 막무가내로 다가왔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아셀이 비명을 내질렀다.
“시, 싫어어엇!”
그는 눈을 질끈 감은 채 팔을 휘둘렀다. 퍽! 순식간에 날아온 보이지 않는 주먹이 오르세의 턱을 후려쳤다. 눈알이 뒤집힌 마룡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아,안돼! 나도 모르게 그만···!”
아셀이 벌떡 일어섰다. 기절한 오르세를 본 나바르도제가 한숨을 내쉬었다. 완전히 의식이 없어진 것을 확인한 로난이 감탄하며 손뼉을 쳤다.
“끝내주는데. 보이지도 않았어.”
“로, 로난···! 그게 아니라!”
아셀이 뭐라 변명하려던 차였다. 입구 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 저기 있어요! 로난! 얘들아!”
목소리만 들어도 몸에 활력이 도는 것 같았다. 고개를 돌리자 좌우로 갈라지는 학생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사람으로 만들어진 벽 사이로 이릴과 슐리펜이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사방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우와.”
“제, 제국의 샛별이다···옆에 분은 누구지?”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같아···!”
학생들은 이릴에게서 도통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둘이 자연스레 팔짱을 끼고 있는 것을 본 로난의 이마에 핏대가 솟구쳤다.
‘아니야. 진정해.’
그는 이를 악무는 것으로 분노를 억눌렀다. 정말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슐리펜은 이 별에서 누나와 교제할 자격이 있는 유일한 생물이었다. 머지않아 다가온 이릴이 동생을 와락 끌어안았다.
“로난! 잘 지냈지? 에헤헤, 요즘 집에 안 들어오는걸 보니 아데샨이랑 즐거운가봐?”
“뭐···그렇지. 누나는 잘 지내고 있어? 이 놈팡이가 잘 해주고?”
“그럼! 요즘들어 손님이 자주 와서 좋아. 슐리펜 님도 매일 아침마다 오시고!”
이릴이 생글생글 웃었다. 그녀는 몇 달 전부터 작은 식당을 차려서 운영하고 있었다. 감자 스튜처럼 제도와는 어울리지 않는 투박한 메뉴가 주를 이뤘지만, 어째서인지 손님들의 발길은 끊일 줄 몰랐다.
“···이릴 양. 슬슬 앉아야 합니다.”
슐리펜은 아무 말 없이 얼굴만 붉히고 있었다. 정신이 나가서 청혼한 것이 벌써 1년이 다 되어 가지만, 팔짱을 붙잡혀서 끌려다니는 것조차 그에게는 아직 지나치게 자극적이었다. 슬그머니 슐리펜의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댄 로난이 속삭였다.
“뭘 상상하든 결혼하기 전까지는 안 돼. 알았냐?”
“···나는 그렇게 형편없는 인간이 아니다.”
슐리펜이 말했다. 세상을 지키겠다 결의하는 듯한 진지한 어조에, 로난이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그 또한 슐리펜이 그러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겠지. 간만에 봐서 좋다. 있다가 보자.”
“그래. 새 학기도 시작해야 하니.”
“나중에 봐 로난! 안녕!”
이릴과 슐리펜은 조금 떨어진 자리에 나란히 착석했다. 그녀가 재잘거리며 팔짱을 끼거나 어깨를 때릴 때마다 슐리펜의 정신이 혼미해지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나타난 소녀 한 명이 이릴의 앞에 멈춰 섰다.
“나 여기 앉을래.”
“웅? 꼬마 아가씨는 누구니?”
“린.”
사자의 갈기처럼 풍성한 백발이 허리까지 흘러내리고 있었다. 린을 본 슐리펜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너는···!”
“잘생긴 엉덩이 2호네. 안녕.”
틀림없이 예전에 본 기억이 있었다. 검의 제전에서 시도 때도 없이 엉덩이를 만지려 들던, 로난이 들고 다니는 성검의 현신체였다.
힘을 충분히 되찾은 그녀는 이제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다닐 수 있었다. 이릴의 무릎 위에 제멋대로 걸터앉은 린이 감탄을 흘렸다.
“그런데 언니 진짜 예쁘다···내가 본 인간 중에 가장 예뻐.”
“어머, 고마워라. 꼬마 아가씨도 진짜 귀여워.”
이릴이 생글생글 웃었다. 그녀는 슐리펜이 뭐라 만류할 새도 없이 린을 안아 들었다. 풍성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던 이릴이 슐리펜을 돌아보며 말했다.
“있죠, 만약 제가 나중에 아이를 낳는다면 이런 머리 색이 나올까요? 너무 예뻐요.”
“커억!”
침을 삼키던 슐리펜이 사래에 들려 콜록거렸다. 이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라? 왜 그러세요?”
"아, 아이라니···그런···!”
뭐라 말하려던 슐리펜이 시선을 피했다. 달아오른 그의 얼굴을 본 린이 재미있다는 듯 키득거렸다. 불현듯 웅장한 목소리가 대광장에 울려 퍼졌다.
“그럼, 졸업식을 시작하겠습니다. 모두 정숙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의 이목이 쏠렸다. 어느새 필레온 아카데미의 교장인 크라바 크라티르가 연단에 올라가 있었다. 그의 뒤에는 전 학생회장 아데샨이 다소곳이 서 있었다.
“어, 언니가 정말로 졸업을 하다니···아데샨 언니이···.”
로난의 앞자리에 앉은 에르제베트가 코를 훌쩍였다. 그녀는 아데샨을 제대로 보기 위해 쌍안경까지 착용하고 있었다. 로난이 말했다.
“자주 보러 오면 되잖아. 어차피 우리 집에 있는데.”
“말 걸지 마세요, 이 악당! 세상에, 아침에 눈을 뜨면 옆에 아데샨 언니가 있는 삶이라니··· 당신이 세상을 구한 영웅만 아니었다면 가만두지 않았을 거라고요!”
에르제베트가 다시 눈물을 터트렸다. 그녀의 무릎에는 슐리펜의 여동생인 시온 시니반 데 그랑시아가 앉아서 과자를 먹고 있었다. 과연 그랑시아와 아칼루시아 가문의 관계를 극적으로 완화시킨 교두보에 걸맞는 모습이었다.
아데샨의 뒤편으로는 익히 아는 얼굴들이 포진해 있었다. 바렌, 나비로제, 자로딘과 이번에 새로 체술 교수로 들어온 그의 아내 수냐까지. 크라티르가 말을 이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겠지만, 지난 일 년간 정말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 고귀한 생명을 바친 용사들을 위해 잠시 묵념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일제히 눈을 감고 묵념했다. 이어서 본격적으로 졸업식이 진행되었다. 크라티르의 지루한 연설을 듣던 로난이 옆에 있는 아셀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아셀. 너는 앞으로 계획이 어떻게 되냐.”
“계, 계획? 그러니까···아마 당분간은 황혼 마탑에 있을 것 같아. 방학 때는 마르야랑 같이 다른 대륙에 가볼 것 같고···로난 너는?”
“글쎄다···뭐부터 해야 하나.”
로난이 턱을 매만졌다. 실로 오랜만에 평화가 찾아왔건만, 놀면서 지내기에는 할 일이 너무 많이 남아 있었다.
먼저 자이파와 세크리트가 있는 북부에 들러야 했고, 돌아온 사란테가 새로 지은 신전에도 한번 찾아가야 했다. 행여나 그랑시아의 귀족 나리들이 누나를 우습게 보지 못하게 기강도 한 번 잡을 필요도 있었다.
징벌병으로 구르던 시절에 같이 놀던 동기들도 대부분 살아 있을 터였다. 로난은 그 등신들을 갱생시킬 수 있는 건 자신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어째 생각할수록 일이 늘어나기만 하는 것 같아서, 로난은 당장 눈앞의 일에만 집중하기로 판단을 내렸다. 머리를 긁적이던 그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일단 졸업장부터 따야지.”
로난이 웃었다. 크라티르의 연설이 끝나자 전 학생회장 아데샨의 송사가 시작되었다. 조용해진 군중 위로 잔잔한 봄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바람결에 묻어나는, 새 학기의 시작을 알리는 봄꽃의 향기가 로난은 썩 마음에 들었다.
아카데미의 천재칼잡이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