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의 천재칼잡이-322화 (322/333)

< 외전6. 꿈을 마시는 새(5) >

# A6

“아, 들켰다!”

“시타 너 이 새끼···!”

로난이 으르렁거렸다. 하도 뛰어다니는 탓에 입안에서 피 맛이 날 지경이었다. 뒤늦게 그와 눈이 마주친 이릴이 당혹성을 흘렸다.

“로, 로난?”

“안녕 누나···후우, 장사는 할만 해?”

“그, 그렇기는 한데 무슨 일이 있던 거야? 온몸이 땀 범벅이 되어서는···그리고 갑자기 시타라니?”

“말 그대로 지금 누나한테 안겨 있는 놈이 시타야. 인간으로 변한.”

“뭐어어?!”

이릴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어쩐지 풍기는 인상이 익숙하다 싶었다. 로난은 옆에 있던 손님이 마시던 물컵을 빼앗아 그대로 벌컥벌컥 들이켰다.

“히이익...!”

“푸하···젠장, 이제 좀 살 것 같네.”

찬물이 달궈진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게 느껴졌다. 이렇게 땀을 뺀 것은 네뷸라 클라지에와의 전쟁 이후 처음이었다. 소매로 입가를 닦은 로난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얼굴은 왜 그렇게 빨개? 슐리펜 자식이랑 뽀뽀라도 했어?”

“얘, 얘가 지금 무슨 소리를! 그냥 더워서 그래!”

“깜짝이야. 그냥 농담한 건데.”

로난이 눈썹을 으쓱였다. 이릴은 양손으로 붉어진 얼굴을 감싼 채 고개를 돌렸다. 슐리펜은 완전히 얼어붙은 채 입만 벙긋거리고 있었다. 그때, 웬 미청년 한 명이 현관문으로 들어섰다.

“드디어 찾았나.”

“그래. 고맙다 이르.”

“내가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을 텐데.”

이타르간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나바르도제의 막내아들인 그는 여전히 필레온 아카데미에 재학 중이었다.

“거 대충 좀 넘어가자. 이타르간드 다섯 글자를 매번 어떻게 부르고 앉아있냐.”

“무엄한 놈···.”

날개가 없는 로난이 시타와 술래잡기 비슷한 짓거리를 성립시킬 수 있었던 것은 7할 정도가 이타르간드의 덕이었다. 그는 마법으로 시타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알려 주고, 로난의 달리기 속도를 세 배로 끌어 올려 주었다.

‘우연히 마주쳐서 망정이지 원.’

로난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와중이었다. 간신히 진정한 이릴이 시타를 내려보며 물었다.

“정말로 시타야?”

“응. 들켰네.”

“우와아···너무 귀엽다! 로난이 어릴 때만큼 예쁘게 생겼네.”

이릴이 시타를 끌어안았다. 터무니없는 소리였지만 이상하게도 믿음이 갔다. 눈을 감은 채 갸르릉거리던 시타가 입을 열었다.

“언제나 잘해줘서 고마워.”

“에헤헤, 새삼스럽게 왜 그래?”

“정말이야. 나는 누나랑 같이 지내는게 너무 행복했어. 이제는 덩치가 커져서 집에는 못 들어가지만, 이 말은 꼭 전하고 싶었어.”

시타가 이릴의 품에 다시금 얼굴을 파묻었다. 갑자기 그녀의 눈동자에 물기가 맺혔다. 함께 지냈던 나날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매일같이 함께하던 식사와 잠자리, 무릎에 올라온 시타를 쓰다듬으며 졸던 어느 오후. 이릴이 앞치마를 들어 눈가를 닦았다.

“무슨 소리니···오히려 네가 나를 지켜줬으면서.”

돌이켜 보면 시타는 로난보다 그녀와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리저리 바쁜 로난을 대신하여 이릴을 지키는 것이 시타의 임무였다.

그리고 시타는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감동적인 장면이었지만 로난은 더는 시간을 지체할 용의가 없었다. 폴리모프 마법의 지속시간이 영원하지는 않을 테니까. 팔짱을 끼고 있던 그가 입을 뗐다.

“어쨌든 숨바꼭질은 여기까지다. 이리 와.”

“히이잉···더 놀고 싶었는데.”

시타가 고개를 푹 숙였다. 이릴에게서 떨어진 그가 로난 쪽으로 몸을 돌렸다. 어떻게든 붙잡아서 다행이군. 로난이 막 시타를 연행하려던 찰나였다.

“그러지 말고 우리 조금만 더 놀자!”

“뭐라?”

촤아악! 갑자기 시타의 네 날개가 폭발하듯 펼쳐졌다. 흐릿해진 그의 형체가 앞으로 쏘아졌다.

로난의 눈이 커졌다. 다급하게 팔을 뻗었지만 시타는 아슬아슬하게 손끝을 스치며 자신을 지나쳤다. 순식간에 이타르간드까지 제치고 식당을 벗어난 시타가 대로변에 멈춰섰다.

“아하하! 이번에는 안 잡힐 거야!”

“빌어먹을, 당장 서지 못해!”

방심하고 말았다. 욕지거리를 내뱉은 로난이 식당 바깥으로 달려나갔다. 장난스레 혀를 빼문 시타가 막 날아오르려 하고 있었다.

오러로 끌어당기기에는 시간이 없었다. 좋든 싫든 도박을 해야 했다. 그런데 이게 잘 될지 모르겠군. 동력력원을 전환한 로난이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내가 멈추라고 했지!”

“어?”

그 순간 시타의 세상이 어두워졌다. 어둠이 내려앉은 세계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바람마저도 침묵한 채 그의 곁을 떠나 있었다.

“아, 아빠?”

섬뜩한 기시감에 시타가 울먹거렸다. 혼자 남았다는 압박감이 그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런 적이 오늘 한번 더 있었던 것 같았다.

“응···?”

문득 찌르는 듯한 살기를 느낀 시타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로난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거대한 흑사(黑巳) 한 마리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내려와.”

“뺘아앗!”

뱀이 말했다. 시타의 입에서 새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의식을 잃은 몸뚱어리가 힘없이 추락했다. 재빠르게 몸을 날린 로난이 시타를 잡아냈다.

“뺘우···삐아아아···.”

“제기랄, 설마 이걸 여기서 쓸 줄이야.”

시타는 악몽이라도 꾸는 것처럼 경기를 일으키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았다.로난이 자조적인 웃음을 머금었다.

나비로제에게 배웠던 만사. 언젠가 쓸 날이 올 거라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설마 술래잡기를 하다 쓰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어쨌든 잡았으니 됐나.’

그래도 덕분에 시타를 붙잡을 수 있었다. 일차적인 목표를 달성한 그가 돌아가려던 차였다. 등 뒤에서 들려온 기괴한 음성이 다리를 붙들었다.

“으거거걱···커억.”

“아.”

고개를 돌린 로난이 석상처럼 굳었다. 만사를 발동할 당시 그의 전방에 있던 사람들이 졸도한 채 경기를 일으키고 있었다.

“어, 어머니···.”

바로 앞에 있던 이타르간드는 아예 거품까지 물고 있었다. 그 뒤편으로는 이릴과 슐리펜, 요제프가 벙찐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린 로난이 작게 중얼거렸다.

“시발.”

****

예상외로 사태는 금방 수습되었다. 만사에 대한 로난의 숙련도가 아직 낮았던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로난은 이릴과 손님들에게 사과를 한 뒤 자리를 떴다.

“미안. 장사 다 망쳤네.”

“아니야. 왠지는 모르겠는데 다들 불쾌해하시기는커녕 좋아하시던걸? 다음에도 꼭 오겠다면서.”

기절했던 손님들은 오히려 더 단골이 되겠다 선언하며 돌아갔다. 그들은 모두 짧게나마 이릴의 간호를 받았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을 가까스로 삼킨 로난이 등을 돌렸다.

“쉽지 않네···일단 가야겠다. 잘 지내 누나.”

“로난도 참. 어차피 이틀에 한 번 꼴로 오면서. 다음에도 시타가 사람으로 변하면 꼭 데려와!”

로난은 기절한 시타를 업고 필레온으로 향했다. 어느새 뉘엿뉘엿한 노을이 하늘과 거리를 물들이고 있었다. 교문 앞에 도달했을 즈음이었다. 신음하던 시타가 눈을 떴다.

“우우웅···.”

“일어났냐.”

“···아빠?”

시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난기류 속을 날아다니다 온 것처럼 머리가 어지러웠다. 머지않아 상황을 파악한 시타가 로난의 등판에 얼굴을 파묻은 채 웅얼거렸다.

“잡혔네. 솔직히 자신 있었는데.”

“아빠를 우습게 보니까 그렇···아니 잠깐, 내가 왜 니 아빠야. 자꾸 그럴래?”

“그렇게 부르면 안 돼?”

시무룩해진 시타가 고개를 숙였다. 어째 순식간에 나쁜 놈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입술을 이리저리 비틀던 로난이 한숨을 내쉬었다.

“흥, 마음대로 해. 어차피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면 말도 못할텐데.”

“이히히, 응.”

“그런데 내가 아빠면 엄마는 누구냐. 설마 그 털북숭이 짹짹이?”

로난이 긴장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일단 시타의 알을 낳은 것은 바렌이 기르는 꿈새인 마르페즈였다.

하다하다 조류와의 스캔들에 연루되는 건가 우려하던 차였다. 시타가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마르페즈는 친구. 그리고 전승자.”

“전승자?”

“응. 인간 말로는 뭐라 할지 모르겠어. 그러니까···태어날 집을 제공해준 사람?”

“어렵네. 그럼 엄마는 누구야?”

“없어. 로난이 아빠이자 엄마야. 내게 꿈을 전해줬으니까.”

영문 모를 말에 로난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꿈새와 인간의 상식은 여러가지 면에서 차이가 있는 듯했다. 오늘 있던 일을 회상하던 시타가 로난의 등에 뺨을 비볐다.

“히히, 어쨌든 오늘 너무 즐거웠어. 이제 바렌한테 돌아가는 거야?”

“엉. 그래야지.”

“우웅···저기 아빠, 어디 좀 들르면 안 될까?”

“어디를? 오래만 안 걸리면 상관없기는 한데.”

“걸어서는 못 가. 잠깐만!”

그리 말한 시타가 갑자기 날개를 펼쳤다. 화아악! 로난의 몸이 순식간에 공중으로 떠올랐다. 갑자기 하늘을 날게 된 그가 기가 막힌다는 듯이 웃었다.

“너 힘 더럽게 세구나.”

“히히히, 그치?”

시타가 키득거렸다. 폴리모프하면서 덩치는 작아졌어도 힘은 어느 정도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유영하듯 하늘을 가로지르던 두 사람은 필레온 아카데미의 어느 탑 위에 착륙했다.

“비밀 기지야?”

“응! 여기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곳!”

시타가 웃었다. 과연 완만하게 경사진 지붕 위에는 새카만 깃털들이 듬성듬성 널브러져 있었다.

“···괜찮네.”

주변을 둘러본 로난이 휘파람을 불었다. 드넓은 필레온 아카데미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가 수 년간 신세를 져 온 풍경이 석양 아래 타오르고 있었다.

해를 등진 건물과 첨탑들은 땅에서 뽑혀 나온 그림자처럼 보였다. 식어가는 저녁 바람이 머리카락을 헤집고 있었다. 로난이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그 절경을 감상하던 와중이었다.

“있지. 내가 아직 알이었을 때, 아빠의 기억이 내게 흘러들어왔어.”

“뭐라고?”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어. 그때의 아빠는 언제나 슬픔에 젖어 있었어. 아빠는 아직 잠을 자던 내게, 이렇게 말했어.”

로난이 움찔거렸다. 돌아본 시타는 눈을 지긋이 감고 있었다. 조막만한 입술이 천천히 달싹였다.

“살리고 싶었어. 눈앞에서 동료들이 죽는 게 싫었어. 피만 멈출 수 있다면, 내가 이 상처만 고칠 줄 알았더라면 아무도 죽지 않아도 됐을 텐데.”

“뭐···.”

“하늘을 날고 싶었어. 하늘을 날아다니는 거인 앞에서 나는 무력했어. 나만 저 대머리를 벨 수 있는데 내 검은 저기까지 닿지 않아.”

로난의 눈이 커졌다. 전생의 지옥을 겪고 회귀한 그가 마음 속에만 담아두던 말이었다.

“나는 피투성이가 되어도 상관없어. 모두를 지킬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해. 그러니까 이제 더는 내 앞에서 죽지 말아 줘.”

파아아···! 갑자기 시타의 몸이 빛나기 시작했다. 폴리모프 마법이 해제되려 하고 있었다. 시타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나는 태어났어. 살리기 위해서, 날기 위해서, 모두를 위해 피투성이가 되기 위해서. 내가 아빠의 꿈을 마셨어."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시타의 능력은 모두 자신이 갈망하던 것이었다. 죽어가는 동료를 살릴 수 있는 치유 능력과, 하늘을 나는 거인을 벨 수 있는 비행 능력까지. 실로 꿈새라는 이름에 걸맞는 능력이었다.

"꿈을 보여줘서 고마워. 짧았지만 정말로 즐거웠어. 영원히 오늘을 잊지 않을거야...."

갑자기 시타가 말꼬리를 흐렸다. 탑의 지붕 위로 긴 그림자가 드리웠다. 묵묵히 석양을 바라보던 로난이 입을 뗐다.

“나도 그럭저럭 즐거웠어."

“뺘아아.”

익숙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본모습으로 돌아온 시타가 눈에 들어왔다. 로난은 자신에게 뺨을 부벼 대는 시타를 쓰다듬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너는 나였구나. 시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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