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러포즈하고 차인 썰 푼다 >
하루 라이브 방송을 해본 결과, 나는 어떤 시간대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들어오는지 알게 되었다.
퇴근 시간이나 이른 저녁은 아니다.
대신 밤늦은 시각부터 새벽녘까지 그나마 시청자들이 들어왔다.
해리코털이 잠수를 탄 이후에 시청자가 계속 0명이라서 접으려고 했는데, 밤 10시쯤부터쯤 해서 사람들이 하나둘씩 들어왔다가 나갔다.
심지어 새벽 1시쯤에는 동시 시청자가 무려 4명이나 있었다.
딱히 노린 건 아니었지만, 어쩌다 보니 내 방송 내용은 사연을 들어주고 알맞은 노래를 들려주는 식으로 가닥이 잡혔다.
‘사연도 역대급이었지.’
나는 어제 방송 내용을 떠올렸다.
새벽 1시경, 나와 시청자 3명이서 노닥거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사람들과 음악을 나누면서 교류한다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뭐만 하면 무공이랑 연결 짓는 미친놈들 없이 순수하게 내 노래를 즐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기뻤다.
[thkw123]: ㅘ,,,, ㄹㅇ힐링이다 아니 노래를 무슨···
[수수깡]: 노래 진짜 잘부르시는데ㄸㄷ
[수수깡]: 이것때문에 고민이 많았는데 천마님덕분에 좀 풀렸습니다ㅠ
[수수깡]: 정말 감사드려요
이런 말을 들으면 마음이 다 뿌듯해진다.
‘수수깡은 공손한 편이군.’
꼬박꼬박 존댓말도 잘하고, 감사 인사도 할 줄 안다.
가끔 분탕종자들이 들어와 ‘ㅇㅇ','노잼ㅅㄱ’ 같은 채팅이나 치고 가니, 수수깡같은 정상인이 천사처럼 보였다.
그때였다.
슬슬 방송일 끝낼까 하는 시점에 한 사람이 들어왔다.
[‘LL’님이 입장하셨습니다.]
'새벽에 은근 많이 들어오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반갑게 LL을 맞이했다.
“LL님 어서와요!”
그런데 LL은 다짜고짜 사연을 털어놨다.
[LL]: 오느ㄹ 여친한테 결ㅎㅗㄴ하자고 했는데 차였네요. 생일ㄹ인데···.
“...아.”
이런.
순간 채팅창이 얼어붙었다.
우리 착한 시청자들이 안타깝다는 반응을 해주자 LL은 어떤 일인지 풀어놓았다.
한 문장을 칠 때마다 오타가 하나씩 있는 걸 보면, 속앓이하던 와중에 술 먹고 아무 라방이나 들어와서 하소연하는 것처럼 보였다.
요약하자면 이랬다.
생일날 여자친구에게 프러포즈를 하기 위해서 호텔을 예약했다.
남자의 나이는 33살이고 여자도 32살이라 나이도 적당했다.
그리고 호텔에서 프러포즈 반지를 주며 고백을 했다. 결혼하자고.
그런데 여자 측에서 조심스럽게 거절했다는 것.
이유를 물어보니 당뇨병이 있어서 더이상 사귀기 힘들 것 같다고 했다고 한다.
‘그냥 핑계군.’
솔직히 당뇨로 결혼을 포기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죽을병에 걸린 것도 아니고, 그냥 관리만 꾸준히 잘해주면 되는 건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프러포즈도 정상적이었다고 한다.
친구들을 불러서 부끄러운 서프라이즈 파티를 해준 것도 아니고, 프러포즈 링도 일반적인 반지였으며, 그전까지는 여자친구와 사이도 좋았다고 한다.
이건 그냥, 차인 거다.
나는 어떤 노래를 불러줄지 고민했다.
교인의 사기를 불러주기 위해서 만든 노래가 대략 36개 정도가 있어서 그걸 불러줄까 했지만,
'이럴 때는 그냥 위로를 해주는 게 최고지.'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것보다는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네주는 게 경험상 더 큰 도움이 된다.
사부님이 아내를 떠나보내고 시름에 잠겼을 때, 위로해드리기 위해 만든 노래를 부르려고 했다.
그때 한 시청자가 물었다.
[thkw123]: 그런데 여자친구분이랑 얼마나 사귀신 거예요?
[LL]: 2개월이요.
또다시 채팅방이 얼어붙었다.
한 마디도 올라오지 않았지만 다들 어이없어하는 게 여기까지 느껴질 정도다.
“...이거 미친놈인가?”
그리고 즉시 강퇴 조치를 내렸다.
[‘LL’님을 강제퇴장했습니다.]
공손한 시청자였던 수수깡마저 욕을 퍼붓고 첫 방송은 그렇게 마무리가 됐다.
재미있었다.
진심으로.
사람들과 편안하게 이야기를 하고 음악을 나눌 수 있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른다.
'무림에 있을 때는 말도 편하게 못 했는데.'
그놈의 천마가 뭔지, 뭐만 하려고 하면 다들 지존께서 어쩌구 하면서 호들갑을 떨던 걸 생각하면 진절머리가 났다.
그리고 상태창이 준 보상.
'이게 뭔가 작용을 하는 것 같은데.'
아직 확신할 순 없지만, 분명 효과가 있는 것 같다.
결국 방송 종료를 할 때까지 해리코털은 답이 없어서 확인할 수 없었지만, 추측건대 내 노래를 듣고 잠이 든 모양이다.
상태창이 준 보상이 정말 제대로 작동하는 것이라면 나에게는 큰 선물이다.
내공이 없어도 시청자들에게 좋은 음악을 들려주는 데 문제는 없지만, 이왕이면 제대로 들려주는 게 낫지 않겠는가?
하지만 문제라면.
‘내공이 너무 부족하군.’
그렇게 많은 내공을 실어서 음공을 펼친 것도 아닌데 방송이 끝나고 나니 몸이 후덜덜 떨렸다.
아무래도 제대로 심법 수련을 해야겠다.
나는 그대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운기를 시작했다.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20세 차선우의 몸은 쓰레기였다.
혈맥은 막힐 대로 막혀있었고, 각종 노폐물은 몸 구석구석에 쌓여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내공을 움직였다.
막힐 대로 막혀있는 혈맥은 갑자기 들어오는 내공에 저항했다.
그러나 나의 내공을 제어하는 능력만큼은 하늘에 닿아 있다.
미세한 진동을 내력만으로 조절해서 상대를 쓰러뜨리던 게 나였으니까.
한 줌의 내력만으로도 결국 커다란 혈도를 뚫는 데 성공했다.
혈도를 뚫어낸 내공은 작게 한 바퀴를 그리곤 단전으로 돌아왔다.
몸을 순환하는 하나의 작은 고리가 완성된 것이다.
이제 만들어진 고리를 따라서 계속 내공을 순환시키면 단전에 내공이 조금씩 쌓이게 된다.
조금씩 내공을 늘려 혈도를 계속 뚫다 보면 내공이 쌓이는 속도도 늘고, 금세 소주천과 대주천도 완성이 될 것이다.
현대에서는 영약을 구할 수 없으니 이렇게 시간이라도 투자해야 한다.
한번 해봤던 일이라서 그런지 내공은 무림인들이 보면 경악할 만큼 빠르게 증가했다.
그렇게 만족할 만큼 내공을 쌓고 보니 어느새 하루가 또 지나고 밤 10시가 되었다.
잠을 한숨도 자지 못했지만 피곤하지 않았다. 오히려 오늘은 어떤 방송이 있을지 기대가 되기도 했다.
나는 다시 방송을 켰고,
[‘해리코털’님이 입장하셨습니다.]
[‘수수깡’님이 입장하셨습니다.]
눈에 익은 닉네임을 가진 시청자들이 들어왔다.
음공천마의 이틀 차 방송이 시작되었다.
*
강해리는 상쾌하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어, 강 피디님. 오늘 컨디션 좋아 보이네요?”
잠을 푹 자니 절로 인사가 나오고 얼굴이 밝아졌다.
회사에 도착한 그녀는 컴퓨터를 켜고 장비를 세팅했다.
강해리는 레이블 ‘BLACKSHIP’의 전속 작곡가이다.
그리고 그녀는 최근 프로젝트 하나를 맡게 되었다.
소속 가수가 싱글을 내는데, 그 작업의 프로듀싱을 맡게 된 것이다.
하지만 지금 곡을 스무 개쯤 보냈는데도 가수는 번번이 퇴짜를 놓았다.
‘프로듀서님.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이번에 정말 이미지 변신을 하고 싶어요. 멜로디는 좋긴 한데···제 목소리가 잡아먹힐 거 같아서요. 조금 더 쉽게 들을 수 있고 제 음색이나 보컬적인 면모를 살릴 수 있도록 해주셨으면 하는데요.’
아이돌 출신인 그 가수는 군백기를 거치고 컴백할 예정이었다.
앞으로 솔로 활동을 적극적으로 할 예정인지라 이미지 변신을 원하기는 하는데···. 너무 과격한 변화는 오히려 지금까지 쌓은 디스코그래피, 이를 좋아하는 팬에 대한 배신이라는 느낌을 줄 수 있다.
그러니 모두가 그 변화를 납득할 수 있도록 방향성을 잘 잡아야한다.
이전의 이미지와 최소한의 연관성도 있고,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대중성을 잡을 수 있는 그런 곡을 쓰라니!
‘으아. 너무 어렵잖아!’
그녀는 쌩쌩한 정신으로 열심히 작업을 해보았지만 딱히 떠오르는 건 없었다.
잠을 잘 자는 것과 음악적 영감이 떠오르는 건 별개의 문제니까.
그렇게 저녁도 거르고 작업실에 틀어박혀 있었건만, 결국 유의미한 결과물은 만들어내지 못했다.
시간은 어느새 밤 10시.
그녀는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어구구, 죽겠다 진짜."
슬슬 집중력이 떨어져가고 있었다.
열심히 딴생각을 하던 그녀는 어제 무심코 들어갔던 ‘BJ음공천마’를 떠올렸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본좌의 노래를 들려주는 방이지.
-그쪽 이야기를 듣고난 후 적절한 곡을 선택해주겠네.
천마라는 괴랄한 컨셉을 쓰던 남자 BJ였다.
어떻게 보면 소년 같아 보이기도 하는 풋풋한 외모여서 ‘이런 애가 고민상담을?’이란 생각을 했는데,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저도 모르게 직장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털어놓았다.
마지막으로 자장가 아닌 자장가를 들으며 꿀잠을 잔 건 또 어떻고.
퍽퍽한 직장생활에서 오랜만에 얻은 힐링이었다.
그녀는 잠들기 전, 천마가 들려줬던 자장가를 떠올렸다.
나른한 듯 편안했던 허밍이 아직도 귀에 울리는 듯했다.
'분명 처음 듣는 멜로디였는데. 꽤 좋았단 말이지.'
자작곡인 모양이었는데, 다시 한번 그의 노래를 들으면 영감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해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기분전환도 할 겸 근처에 있는 24시간 패스트푸드점에 들어가서 햄버거 세트를 시켰다.
그리고 방송에 들어갔다.
‘오늘도 노래를 듣고 꿀잠 자면 좋겠다.’
물론 밤을 새워서라도 곡을 완성해야 하니 혹시라도 그런 일이 있으면 안 된다.
들어가니 오늘은 이미 다른 시청자들도 네다섯 명 있었다. BJ음공천마는 그들과 먼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늘의 사연은 짝녀에게 고백을 하고싶다는 남자의 사연이었다.
천마가 말했다.
-흠. 본좌는 직접 고백해본 적은 없지만 고백을 많이 받아봤지.
“풉!”
강해리는 콜라를 뿜을 뻔했다.
‘...되게 재수없기는 한데.’
천마가 말하니 납득이 간다. 솔직히 외모는 당장 아이돌을 시켜도 될 만큼 잘생겼기 때문이다.
‘그러고보니 저 외모에 저 노래 실력이면 당장 캐스팅돼도 됐을 텐데. 음악 BJ를 하는 걸 보면 이쪽에 관심이 있는 것 같고. 캐스팅 팀에 한 번 말해볼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가볍게 방송을 봤다.
천마가 말했다.
-어쨌든 고백을 많이 받다보니 깨달은 게 있지. 고백에는 분위기가 중요하다는 걸.
“···?”
의아함을 느낄 새도 없이 멜로디가 훅 치고 들어왔다.
-오늘 뭐해 나 좀 만나줄래
이런 말 나도 처음해봐 떨리지만
어쩌면 할 수 있을 것같아
통기타만으로 표현하는 어쿠스틱한 사운드.
담백한 목소리는 어릴 때 읽은 청춘 소설을 떠올리게 한다.
꼼지락거리며 고개를 내미는 추억 한 조각.
수채화처럼 물드는 세상.
봄날 연인에게 고백하면 딱 좋을 이지 리스닝의 고백 송이다.
어딘가 들어본 것 같은 익숙한 멜로디인데, 듣다 보면 신선한 느낌도 든다.
'설마 자작곡인가?'
강해리는 벌떡 일어났다.
“어, 이거 우리 가수한테 주면 좋을 거 같은데.”
생각해보니 자신이 맡은 가수에게 딱 어울린다. 컴백 예정 날짜가 마침 봄이니 계절에도 딱 좋다.
가사와 멜로디를 기억한 강해리는 먹던 햄버거를 내려놓고 회사로 뛰어갔다.
< 프러포즈하고 차인 썰 푼다 > 끝
ⓒ 연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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