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백송 (2) >
노래를 듣고 꿀잠을 잔 강해리는 다음 날 아침에야 답장을 할 수 있었다.
-저는 시간은 상관없어요. 당장 오늘도 괜찮고요. 장소만 정해주시면 제가 천마 님 자택 근처로 갈게요.
그리고 강해리가 답장을 한 지 5분도 채 되지 않아 차선우에게 답장이 왔다.
-그럼 오늘 오후 2시에 홍대 근처 카페에서 뵙죠.
이렇게 빨리 답장이 올 줄 몰랐던 강해리는 화장을 하다가 놀랐다.
‘잠을 안 자나?’
분명 차선우의 방송은 새벽 3시가 넘어서 끝났었는데.
'하긴, 나도 한창때는 새벽까지 술 마시고 A 교시 수업을 들으러 갔었지.'
차선우가 방송이 끝난 뒤에는 내공 수련을 하느라 깨어었다는걸 모르는 그녀는 그저 그 젊음이 부럽기만 했다.
어쨌든 그렇게 시간은 흘러 오후 2시.
강해리는 회사 근처에서 점심을 먹고 차선우가 알려준 카페로 갔다.
다행히 바로 옆동네라서 그렇게 멀지 않은 곳이었다.
먼저 음료를 시켜놓고 기다리는데 딱 2시에 맞춰서 한 남자가 들어왔다.
화면 너머로만 봤던 훤칠한 얼굴. 소년미가 가득한 얼굴과는 다르게 여유로운 분위기가 가득했다.
강해리는 벌떡 일어나서 그를 부르려고 했다.
“천ㅁ···.”
천마라고 부르려고 했지만 곧이어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카페 같은 공공장소에서 상대를 ‘천마’같은 닉네임으로 부르기는 좀 쪽팔렸다.
그래서 강해리는 재빠르게 단어 선택을 바꿨다.
“아, 비제이님. 여기에요!”
하지만 그녀의 노력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차선우가 웃으면서 말했다.
“해리코털 님. 반갑습니다.”
“.......”
쓸데없이 발성이 좋은 또렷한 목소리는 근처에 앉아있던 사람들의 귀에도 그대로 꽂혔다.
그들이 힐끔거리는 눈빛에 강해리는 오늘따라 자신의 닉네임이 더욱 부끄러웠다.
*
차선우는 조금 들떴다.
무림에서는 음공을 익히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음악적 교류라는걸 나눈 적이 거의 없었다.
간혹 음공의 고수를 초빙해서 얘기를 나누더라도 어떤 음을 쓰면 쉽게 사람의 내장을 곤죽으로 만들 수 있는지, 정신을 파괴시킬 수 있는지 따위의 무식한 이야기가 전부였다.
즉, 바로 오늘이 70년 만에 처음으로 순수한 음악인을 만나는 날이다!
차선우는 머릿속으로 행복한 상상을 하며 약속장소로 향했다.
‘일단 내 노래가 어떤지 물어봐야겠다. 그러다 친해지면 해리코털이 다른 가수나 음악인을 소개해줄 수도 있는 거고. 이런 식으로 교류의 장을 늘려가는 거지.’
차선우가 카페에 들어가자 한 여자가 벌떡 일어났다.
“아, 비제이님. 여기에요!”
단정하고 깔끔해 보이는 사람이다.
갈색 웨이브가 들어간 머리를 올려묶었고, 옷은 캐주얼한 정장을 입고 있었다.
차선우는 그쪽으로 걸어가 반갑게 인사했다.
좋은 첫인상을 위해 목소리에 내공도 살짝 담았다.
“해리코털 님. 반갑습니다.”
강해리의 귀가 살짝 붉어졌다.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강해리라고 이름을 불러주세요. 그런데 비제이 님은 이름이 어떻게 되실까요?”
그러고보니 차선우는 자기의 이름을 말해주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차선우라고 불러주세요.”
통성명을 나눈 이후 둘은 본격적으로 음악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했다.
강해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 아침에 회사와 얘기를 나눴어요. 다행히 회사 측은 긍정적이었어요. 일단 가수에게 곡을 먼저 보낸 후에 다시 얘기해보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런데 어제 들었던 노래를 1절 정도만이라도 다시 들어볼 수 있을까요?”
“그건 어렵지 않지.”
음악 얘기를 시작하는 차선우의 말투는 어느새 천마의 그것으로 변했다.
차선우는 이날이 오기를 바랐다. 같은 음악인에게 노래를 들려주고 객관적인 평가를 들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차선우는 바로 내공을 끌어올리며 노래를 불렀다.
-오늘 뭐 해 나 좀 만나줄래
이런 말 나도 처음해봐 떨리지만
어쩌면 할 수 있을 것같아
강해리는 당황했다.
당연히 그녀는 녹음 파일이나, 적어도 악보의 형태로 건네줄 줄 알았는데.
이렇게 카페에서 직접 노래를 부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컨셉도 천마로 잡더니 되게 특이한 사람이네.’
그런데 그 노래가 좋았다.
자그마한 목소리로, 조근조근 시를 읊듯이 노래를 부른다.
그런데 그 소리가 강해리의 귀에 선명하게 들어온다.
발성에 감탄하는 사이, 차선우의 노래가 이어졌다.
-온종일 기다렸잖아
너라는 계절을 만나 꽃을 틔우잖아
이제 그럴 때가 됐잖아
역시나 좋은 멜로디다. 하지만 어제와는 다른 느낌이 들었다.
어제는 짝사랑하는 남자에게 당장이라도 고백해야 할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 드는 노래였다.
그런데 반대로 오늘은 누군가 자신에게 고백하는 느낌이었다.
너무 좋아서, 고백하지 않고서는 못 견뎌하는 애태우는 마음이 그대로 전달되었다.
달콤함이 치사량까지 들어가 강해리의 마음을 간질였다.
그때였다.
딴 따안 딴 딴 따딴
차선우가 탁자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박자를 맞춰 넣었다.
나무를 두드리는, 특별할 거라곤 하나도 없는 간단한 노킹음.
그게 들어가는 순간 단조로울 수 있는 곡에 변화를 주며 멜로디를 고조시킨다.
그렇게 프리코러스를 지나서 노래는 코러스로 들어갔다.
-상관없어, 이제 내게로 와
어디까지 가게 될지는 몰라도
일단은 시작해보자. 그거면 돼.
드라마틱한 변화 없이 절제된 목소리 덕분에 화자의 메시지에 더욱 집중하게 된다.
이건 사랑이 피어나는 봄이었다.
차선우의 노래가 끝났다. 차선우는 기대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어땠어요?”
“좋아요. 진짜로. 어제 잠깐 들었을 때도 좋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들으니 확신이 생기네요. 이건 무조건 될 거에요.”
차선우는 흐뭇한 미소를 들었다.
전문가에게 대답을 들으니 확신이 들었다.
자신이 70년 동안 해온 음악은 현대에서도 확실하게 먹힌다.
그때 강해리가 물었다.
“그런데 지금 들려주신 건 보컬 멜로디뿐인데, 혹시 인스트루먼트 파일은 없나요? 아니면 악기 구성에 대해서 생각해놓으신 거라던가.”
“악기요?”
이 노래에 정해놓은 악기는 없다.
사실 차선우는 대부분의 노래를 자신의 목소리만을 이용해서 불렀다.
종종 퉁소나 금 같은 악기를 이용해서 변주를 주기도 했지만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수단이었다.
“어··· 가끔 금을 튕기면서 이 노래를 부르기도 했는데요.”
차선우는 그의 62살 생일 축하연을 떠올렸다.
그때 금을 튕기며 이 노래를 불렀었는데 무희들이 좋아했던 기억이 났다.
강해리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금? 혹시 뭐 가야금 같은 거요?”
“현의 개수에는 차이가 있지만 비슷한 종류의 악기라고 볼 수 있겠네요.”
그러다가 차선우는 생각났다는 듯이 덧붙였다.
"금 말고 퉁소도 종종 쓰기는 했어요."
“.......”
지금 금을 쓰든 퉁소를 쓰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같은 멜로디라도 편곡에 따라서 느낌이 확확 달라지기 마련인데, 지금은 주선율을 구성하는 악기도 정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 노래를 이대로 두기에는 너무 아쉬웠다.
강해리가 제안했다.
“일단 제 작업실 한번 구경해 보실래요?”
*
나는 강해리의 작업실로 갔다.
강해리가 다니는 ‘BLACKSHIP’은 원래 작은 연예기획사였는데, 대형 엔터테인먼트에 인수되면서 독립 레이블이 되었다고 한다.
그녀의 작업실은 내가 사는 곳의 바로 옆에 있었던지라 택시를 타니 금방 도착했다.
강해리의 작업실은 넓고 쾌적했다.
그리고 그녀의 모습처럼 깔끔했다.
기다란 책상 위에는 모니터 두 대가 놓여져 있고, 밑에는 건반을 수납할 공간도 있었다.
건반 악기를 주로 사용하는지, 책상 옆에 커다란 건반이 하나 더 놓여있었다.
양옆에는 보조 책상을 놔둬서 오디오 인터페이스와 머신을 비롯한 장비들을 놓았다.
내가 셀프로 만든 방음벽과는 차원이 다른, 고급스러워 보이는 목재 방음재로 인테리어를 해두었다.
'와, 가지고 싶다.'
탐이 났다.
내 작업실도 나름대로 공을 들여서 만들었지만, 강해리의 작업실과 비교하자니 허접하기 짝이 없었다.
무림에 있을 때 나에게는 장비병이라는 게 있었다.
최고의 재료로 최고의 장인이 만든 악기들을 방 안 가득 채워놓으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는데.
강해리의 작업실을 보는 순간 나에게 작은 목표가 생겼다.
‘나도 돈을 벌어서 저런 작업실이나 하나 만들어야지.’
택시를 타고 오는 동안 강해리가 뭘 해야 하는지 설명해줬다.
퉁소든 가야금이든, 연주할 수 있는 악기로 간단하게 주선율을 만들어볼 수 있냐는 거다.
강해리는 작곡 프로그램을 열어서 나에게 간단하게 설명해주었다.
“웬만한 가상 악기랑 외장 악기는 다 들어있는데, 금은 써본 적이 없어서··· 일단 찾아볼게요.”
그 후 여러 가지 소리를 들어봤지만 제일 마음에 드는 것은,
“일단 피아노로 화성진행부터 해보죠.”
“아? 근데 피아노 칠 수 있어요?”
“...? 방송에서도 쳤었는데?”
내 집에도 전자피아노가 있었다.
그리고 무림에 있을 때는 서역에서 건너온 장인을 닦달해서 피아노 비슷한 물건을 만들었던 나다.
그걸 꾸준히 연주했기 때문에 연주법을 잊어버리지 않았다.
그렇게 간단한 작업이 시작되었다.
어차피 멜로디는 내 머릿속에 들어있다.
여기에 악기를 추가하는 건, 어렵지 않지.
그게 금이든 퉁소든 피아노든 큰 상관이 없다.
나는 간단하게 손을 풀었다.
강해리의 피아노를 몇 번 두드려보고 목도 풀었다.
내 머릿속에서 멜로디가 차근차근 피아노 악보로 쓰여져나갔다.
이내 내공이 손끝을 타고 흐르고, 목소리만 있었던 멜로디에 피아노 반주가 더해진다.
그리고 그 순간,
강해리가 맡고 있던 가수, 이승호가 들어왔다.
*
이승호는 최근 기분이 좋지 않았다.
군백기를 깨고 복귀를 하려고 하는데 마음에 드는 곡이 좀처럼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이승호가 소속된 6인조 보이그룹인 ‘TRICKER’는 중소돌 치고는 잘 나갔던 편이고, 이승호 또한 메인보컬로 그룹에서 한 축을 담당하는 중심 멤버였다.
TRICKER는 이미 3년 전부터 군대 때문에 솔로나 유닛 활동으로 전환했고, 다른 멤버들은 각자 앨범을 낸 상태였다. 이제는 이승호 차례.
회사에서는 군대를 갔다 온 직후를 활동 시기로 잡았고, 지금 곡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이승호는 뚱하게 생각했다.
‘다른 프로듀서를 붙여주지. 제이맨이랑 하고 싶었는데.’
이승호가 군대를 갔다 오는 동안, 회사는 대형 엔터테인먼트에게 인수되었다.
제이맨은 그 엔터테인먼트의 메인 프로듀서였다.
독립 레이블이기는 하지만 TRICKER가 나름 성적이 좋았던 아이돌이었기 때문에, 제이맨과 작업하는 걸 은근히 기대했는데 강해리가 붙었다.
물론 강해리도 나쁘지 않다.
유명 작곡팀 출신에 히트곡도 몇 개 낸 프로듀서였으니까.
하지만 이미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있었던 이승호의 눈에는 차지 않았다.
‘제이맨이라면 더 좋은 곡을 뽑아냈을 텐데.’
아쉬움이 머리를 맴돌던 와중에, 회사로부터 강해리가 웬 뉴튜버를 데리고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갑자기 웬 뉴튜버? 홍보할 일이라도 생겼나? 아니면 콜라보?’
그렇다고 해도 그건 기획이나 홍보팀에서 신경 쓸 일이지, 강해리가 할 일은 아니었다.
의아해서 회사에 물어봤더니 그 뉴튜버에게서 곡을 받을 거라고 한다.
어이가 없었다.
‘하다 하다 이제 내 싱글을 뉴튜버에게 맡긴다고?’
얼마나 대단한 놈이길래 강해리가 찾아갔는지 궁금해서 검색했더니,
[BJ음공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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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꼬 중에 하꼬였다. 심지어 채널 이름도 BJ음공천마라는 극한의 중2병스러운 놈이다.
“아니. 급도 안 맞게 왜 그딴 새끼한테 곡을 맡겨, 맡기기를!”
이승호는 눈이 뒤집혀서 강해리에게 따지러 갔다.
노크도 하지 않고 문을 열어젖히는 순간,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상관없어, 이제 내게로 와
어디까지 가게 될지는 몰라도
일단은 시작해보자. 그거면 돼.
마지막 코러스가 귀에 훅 감긴다. 순간적으로 치밀어오른 짜증이 가라앉을 정도였다.
‘잘 부르네.’
듣자마자 드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승호는 이내 그런 생각을 털어냈다.
‘지깟 놈이 잘 부르면 얼마나 잘 부른다고.’
괜히 한순간이라도 인정을 했던 자신에게 짜증이 났다.
이승호는 저 음공천마도, 강해리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강해리 때문에 모든 게 지지부진한 것 같다.
'그래. 차라리 잘됐어. 이참에 한 번 엎어버려야지.'
저 이상한 BJ를 빌미로 강해리까지 엮은 다음, 자신이 원하는 프로듀서를 넣어달라고 해야겠다.
< 고백송 (2) > 끝
ⓒ 연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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