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망돌을 살려라 (3) >
1화의 주된 내용은 젤리크러쉬의 사연이었다.
물론 학폭을 한 멤버가 전 대표의 딸이었다느니, 전 대표가 압박을 가해서 회사 대응이 개판이었다느니 등의 뒷사정은 다 잘려나갔지만, 학폭 사건 이후로 멤버들이 얼마나 힘들어했는지는 충분히 전달되었다.
[예리: 사실 막 너무 무섭고 그랬어요. 사람들은 다 우리 욕하고, 뉴스에서도 맨날 학폭돌이라고 하고.]
[예리: 우리 활동을 2주도 못하고 중단했거든요. 이제 시작인데 망한 건가 싶어서···(울음)]
예리가 고개를 푹 파묻고 울음을 터뜨렸고 리더가 그녀를 데리고 나가는 모습이 나왔다.
이어서 따로 찍은 리더의 인터뷰 컷이 들어갔다.
[리더: 그냥 멘붕이었어요. 사실 저 젤리크러쉬 전에 다른 소속사에서 데뷔조에 있었어요. 근데 데뷔 직전에 떨어지고, 여기 알파로 온 거였거든요.]
[리더: 여기서 데뷔하자마자 이런 일이 생겼으니···. 난 그냥 안 되는 애인가? 그런 생각이 들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젤리크러쉬의 사연에 어느새 대학생은 코를 훌쩍이고 있었다.
‘뭔데 이렇게 슬픈 건데.’
젤리크러쉬가 느꼈을 억울함과 절망감이 대학생의 마음속에 파고들었다.
사실 젤리크러쉬의 사연이라고 해봐야 어찌 보면 뻔하디뻔할 수 있는 그런 이야기이다.
다른 사람들이 했다간 감성팔이 한다며 또 욕을 먹을 수도 있는 사연.
하지만 아련하게 깔리는 천마의 목소리는 영상을 보는 사람들이 그 사연에 몰입하게 만들어주었다.
마치 남은 젤리크러쉬 멤버들의 고통이 자신의 이야기인 것처럼.
내공이 담긴 천마의 목소리는 그렇게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우리 애기들 진짜 고생했다.'
천마의 BGM은 역할을 톡톡히 했다. 어느새 대학생의 마음속에서 젤리크러쉬는 또 다른 피해자로 자리 잡았다.
편집도 좋았다.
사연을 설명하는 장면이 너무 과도해져서 신파가 되기 전에 분위기가 바뀌었다.
[천마: 그럼 지금 시작하자]
그 말과 함께 갑자기 벌떡 일어나는 천마.
절절한 BGM이 뚝 끊기며 띠용 하는 우스꽝스러운 효과음이 들어갔다.
당황하는 젤리크러쉬 밑으로 자막이 떴다.
[젤리: 지금요···?]
하지만 천마는 뭐가 문제냐는 표정이었다.
[천마: 야, 리더. 네가 작업실로 안내해라.]
???로 도배된 리더의 얼굴이 화면에 나타났다.
[리더: (님 아직 계약도 안하셨잖아요?)]
이어 곡 작업을 시작하는 장면이 이어졌다.
상황이 왜 이렇게 된건지 모르겠다는 얼굴의 젤리크러쉬, 그리고 퇴근하려다가 붙잡혀온 촬영팀이 유쾌하게 편집된 후,
[Yes I am···.]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와 노래 인트로 부분이 살짝 나왔다.
곡을 듣고 놀라워하는 사람들의 표정을 클로즈업으로 잡은 뒤, 영상은 마무리가 되었다.
“와 대박대박!”
그리고 대학생은 소리를 질렀다.
예상과 다르게 컴백일지가 너무 좋았다.
젤리크러쉬의 사정에 몰입도 되고, 천마는 젤리크러쉬를 구해주는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히어로’같은 모습이 되었다.
조금 전까지 마음을 짓누르던 걱정은 없었다.
그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영상을 보고 젤리크러쉬를 깔 수는 없을 거라고.
그녀는 신나서 댓글을 달러 댓글창으로 내려갔다.
- 말랑젤리 갓기들 고생했어ㅠㅠ 꽃길만 걸어!
- 왜 천마가 젤리크러쉬 도와줬는지 알 거 같다 이건 쌉인정
- 인트로만 들어도 띵곡의 예감이 든다
- 진짜 애들 고생 많이 한 거 같음 솔직히 쟤네도 피해자잖아
- ㅠㅠㅠㅠㅠ휴지 백통 쓰겠네
역시, 그녀의 예상대로였다.
사람들은 모두 젤리크러쉬를 응원하고 있었다.
물론 중간중간에 초치는 댓글이 없는 건 아니었다.
- 나만 좀 불편한가
ㄴ 이새끼 백퍼 영상 안보고왔네
ㄴ 비추 보면 님만 불편한듯ㅋㅋㅋㅋㅋ
ㄴ 불편하면 자세를 고쳐 앉으세요ㅋㅋㅋ
- 신파 역겨워ㅠ 천마는 왜 저런 애들이랑 하는거야?
ㄴ 너도 참 알만하다ㅋㅋㅋㅋ
천마를 걸고넘어지는 댓글에 빡친 대학생은 그 댓글에 대댓을 달아줬다.
ㄴ 영상도 안보고 역겨워 ㅇㅈㄹ···. 그럼 애들이 뭘 잘못했는데?
ㄴ 막상 물어보니까 대답 못하쥬?ㅋㅋ
“아, 이제 좀 속이 시원하네.”
여론 반전에도 성공하고, 젤리크러쉬는 이제 걱정 없이 정말 꽃길만 걸으면 될 것처럼 보였다.
*
“이거 큰일이네요.”
알파 엔터 대표가 말했다. 회의실에 모인 실무진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우리 이번 컨셉, 완전히 바꿔야겠는데요?"
이번에 젤리크러쉬는 기존의 걸크러쉬를 버리고 ‘청순’으로 노선을 잡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제이맨의 에이클라스도 똑같은 청순을 컨셉으로 나갔던 것이다.
심지어 저쪽은 10대의 퓨어한 이미지를 그대로 살리며 나가기 때문에, 똑같은 컨셉이라면 젤리크러쉬가 밀릴 게 뻔했다.
‘이번에 컴백일지로 동정여론까지 확보했는데.’
대표가 그토록 원했던 이미지 변신은 일단 성공했다.
적어도 컴백일지를 본 사람들은 ‘그래 회사가 잘못이지, 애가 무슨 잘못이냐’라고 하며, 젤리크러쉬에게 응원을 보내고 있는 상황이다.
그때 이번 프로젝트를 맡은 메인 프로듀서가 말했다.
“차라리 천마 님의 곡을 타이틀로 쓰는 게 어떨까요?”
“티키티키를? 타이틀로?”
"네. 그때 천마님이 만든 곡이면 타이틀로 내놔도 충분할 것 같은데요."
"솔직히 컨셉이 너무 갑자기 바뀐 감이 있잖습니까. ‘티키티키’가 타이틀로 가면 그 변화에 설득력이 생길 듯합니다.”
천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무겁던 회의실 분위기는 금새 훈훈해졌다.
천마는 그날 한 시간 만에 기가 막힌 곡을 내놓고 집에 갔다.
노래의 제목은 '티키티키'.
이번 앨범에서 컨셉으로 잡은 청순한 느낌을 남겨두면서도, 기존의 젤리크러쉬가 가지고 있던 강한 이미지를 살린 곡이다.
또한 후렴구에서 ‘티키티키 - 티티키키’가 반복되면서 리듬감이 살아나 묘한 중독성을 일으키기도 했다.
머릿속에서 계속해서 그 부분만 반복재생될 정도다.
노래를 듣자마자 ‘이거 뜨겠는데?’라고 생각한 만큼, 보너스트랙이 아니라 타이틀 곡으로 가지고 가도 충분하다.
그때 대표가 말했다.
“그런데 그러면 바꿀 게 너무 많아질 텐데요.”
만약 타이틀곡으로 올리려면 안무도 처음부터 다시 짜고, 뮤비도 찍어야 한다.
거기에 당장 만든 앨범이 청순 일변도라서, 강한 느낌의 ‘티키티키’가 혼자서만 튀지 않도록 밸런스를 맞춰야 한다.
아마 수록곡의 절반을 걸크러쉬한 노래로 다시 채워야 하지 않을까?
돈과 인력을 갈아 넣는다고 해도 불가능한 일이 있다.
이대로라면 예정보다 늦게 컴백을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더 늦어지면 에이클라스랑 경쟁해야 합니다."
대표의 말에 사람들의 안색이 다시 어두워졌다.
에이클라스의 데뷔일은 7월 중순.
젤리크러쉬의 컴백이 2주만 늦어져도 지금까지 피해온 정면승부를 벌여야 한다.
그때 메인 프로듀서가 이야기를 꺼냈다.
“차라리 천마님께 여쭤보는 건 어떨까요?"
"천마 님한테요?"
“‘티키티키’가 컨셉의 중심을 잡았으니까, 천마 님과 한번 같이 의논해보는 게 좋아 보입니다.”
천마의 이름이 다시 한번 나오자, 같이 회의에 참여한 젤리크러쉬 리더도 바람을 넣었다.
“맞아요. 교주님 곡이니까 누구보다 더 잘 아실 거예요. 워낙 대단하신 분이잖아요!”
“교주님?”
“아, 그러니까 작곡가님이요.”
무협 웹툰을 보는 게 취미인 막내가 맨날 교주교주 불러대서 어느새 입에 붙어버렸다.
대표가 분위기를 보니 다른 사람들도 천마를 다시 부르는 일에 대해 찬성인 듯 싶었다.
그렇게 천마로 시작했던 알파 엔터테인먼트의 회의는, 천마를 다시 모시는 걸로 끝이 났다.
*
나는 대표의 간곡한 부탁으로 알파 엔터에 다시 방문했다.
연습실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젤리크러쉬가 단체로 포권을 취하며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교주님!”
주먹 쥔 손과 감싸 쥔 손의 위치가 바뀌기는 했지만, 사소한 건 넘어가기로 했다.
“그래. 연습은 잘들 하고 있었느냐.”
“교주님께서 친히 가르침을 내려주신 덕분에 일취월장하고 있사옵니다.”
애들은 사극 말투를 흉내 내며 상황극을 하다가 도저히 못 하겠다며 낄낄거렸다.
“그런데 나는 또 왜 부른 거야?”
리더가 대표로 말했다.
“아, 그게 문제가 좀 생겼어요.”
“또? 여기는 뭔 놈의 회사가 맨날 문제가 생기냐.”
리더가 해준 말을 요약하자면 이랬다.
에이클라스랑 컨셉이 겹쳤다.
그래서 청순 컨셉을 바꿀 거다.
내가 만든 곡을 더블타이틀로 올리고, 1집의 걸크러쉬를 이어가도록 했다.
막내 예리가 행복해하며 말했다.
“우리 이제 청순 안해도 돼요!”
리더가 그 말을 정정했다.
“아예 안 하는 건 아니지만, 청순하면서도 카리스마가 넘치는 쪽으로 바꾸기로 했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했어.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너네 원곡은 청순한 게 아니라 밋밋한 거야. 그런데 지금 바꾸려면 좀 바쁠 텐데?”
“네. 그래서 컴백 일정을 2주 정도 미루려고요. 그러려면 에이클라스랑 정면에서 맞붙게 될 텐데···. 천마님께서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요컨대 앨범 프로듀싱에 참가해줄 수 있느냐가 주된 요지였다.
내 마음은 이미 젤리크러쉬를 도와주는 방향으로 기울고 있었다.
무엇보다 나는 제이맨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거절했다고 뒤에서 언플로 음흉하게 까는 새끼라니.
이거 꼭 무림맹 같잖아.
이왕이면 내 곡을 받아간 젤리크러쉬가 제이맨의 에이클라스를 이겼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거 재미있을 것 같은데?'
곡 하나가 아니라 앨범 전체를 프로듀싱한다니.
새로운 경험은 언제나 환영이다.
“좋아. 그럼 끝까지 한번 가보자.”
‘티키티키’의 뮤비와 안무는 회사에서 알아서 할 거니까 상관없고, 내가 할 일은 앨범 전체의 밸런스를 맞추는 것이다.
미니앨범 2집은 타이틀곡 1개와 수록곡 3개로 구성되어 있었다.
여기에 원래 보너스트랙으로 들어가려다가 타이틀로 신분 상승한 ‘티키티키’까지 치면, 총 5개의 곡이 들어간다.
내가 만든 ‘티키티키'는 건드릴 필요가 없으니 내버려두고,
"기존의 타이틀 곡을 바꿔줘야 하는데."
유명한 작곡팀에서 받아왔다는 타이틀곡인, ‘탈바꿈 (I Fly)’
나는 처음으로 노래를 다 들어봤다.
“이걸 왜 천만원이나 주고 사온거야?”
아까도 말했듯이 이건 청순이 아니라 밍숭맹숭이다.
어쨌든 나는 편곡을 시작했다.
타이틀곡은 뮤비를 이미 다 찍어놨기 때문에 완전히 다 들어내면 안된다.
기본 멜로디 구조는 그대로 두는 대신, ‘청량’한 느낌을 강조하는 식으로 악기 구성을 바꿨다.
건강하고 밝은 느낌으로.
이제 곧 여름이니까 이런 느낌의 곡이 하나 있으면 좋다고 생각된다.
뚝딱뚝딱
대충 손을 본 후 한 번 들어보았다.
젤리크러쉬가 감탄했다.
“우와···. 뭔가 생동감이 넘쳐요.”
“이대로 가면 딱 괜찮을 거 같은데요?”
“아니, 마음에 안 들어.”
“네?”
후렴구가 너무 밋밋하다.
웬만하면 기본 골조를 바꾸지 않으려고 했지만, 후렴구는 곡의 클라이맥스를 담당하니 이대로 두면 안 된다.
“후렴구 파트 뮤비는 다시 찍어라.”
“...?”
뚝딱뚝딱
나는 그냥 후렴구를 새로 써서 들려줬다.
그리고 새로 탄생한 후렴구는 좋았다.
전에 있는 곡은 생각도 나지 않을 정도로.
“...대표님도 이걸 들으면 다시 찍는 게 낫다고 하지 않으실까?”
“후렴구만인데 뭐! 바꿔버려!”
“우리 타이틀곡 두 개 다 좋은 거 같아.”
이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후렴구만 고치면 된다고 생각했다.
“마음에 안 들어.”
1절 후렴구가 끝난 후 2절이 시작될 때까지의 간주 부분이 휑하니 비어있는 느낌이랄까.
후렴구가 바뀌니 전체적으로 밸런스가 안 맞는다.
“간주까지만 바꾸자.”
뚝딱뚝딱
근데 만들고 보니 인트로도 마음에 안 드는데?
"...대표님께 뮤비 다시 찍을 거라고 말씀드리고 올게요."
천마의 프로듀싱 하에 젤리크러쉬의 미니앨범은 개조가 되고 있었다.
이 모든 일이 컴백 6주 전에 이루어진 일이다.
*
그리고 6주 후,
[제이맨의 에이클라스, 신곡 MV 공개!]
에이클라스가 데뷔했고 동시에,
[젤리크러쉬 중독성 넘치는 라틴팝으로 컴백!]
젤리크러쉬도 컴백을 예고했다.
올해의 썸머퀸이 누가 될지 경쟁이 시작됐다.
< 망돌을 살려라 (3) > 끝
ⓒ 연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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