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런 게 클라스지 (5) >
젤리크러쉬의 순서가 먼저였다.
무대준비를 위해 젤리크러쉬는 먼저 나가고, 에이클라스는 대기실에 남아서 숙덕거렸다.
“무서운 분들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좋으시네.”
“응응. 그러니까. 되게 친절하셔.”
이러니저러니 해도 에이클라스는 아직 미성년자였다.
제일 나이 많은 리더가 19살 고3이고 평균 나이는 17세.
떠도는 소문에 쉽게 흔들릴 수 있는 나이다.
데뷔 전부터 젤리크러쉬랑 엮이면서 안좋은 얘기를 많이 들었던데다, 젤리크러쉬가 워낙 강한 이미지였기 때문에 선입견이 조금 있었다.
하지만 직접 만나서 얘기를 몇 마디 나눈 것만으로도 그 인상들이 와장창 깨졌다.
“그 예리 님? 막내분은 되게 귀여우셨어요.”
“완전 하얗고 찰떡같아. 우리랑 나이도 비슷하고 말도 재밌게 하셔.”
"메인보컬 분도 되게 차분하시고 말도 이쁘게 하시더라."
에이클라스 멤버들은 젤리크러쉬를 꽤 좋게 평가했다. 그때 한 멤버가 말했다.
“그래도 1등은 우리가 하면 좋겠다.”
하지만 성적 얘기가 나오자 방금 전까지 화기애애하던 에이클라스의 분위기가 조금 무거워졌다.
젤리크러쉬와 경쟁이 심해지면서 최근 성적에 대한 압박감이 더욱 심해졌다.
회사에서, 홍보팀에서, 그리고 제이맨까지.
이번 음방에서 무조건 1등을 해야 한다면서 당부했다.
커피를 사러 밖에 잠깐 나간 매니저도 ‘제이맨 님이 처음으로 만든 걸그룹인 거 알지?’ ‘매그넘을 한번 넘어보자’는 식으로 대놓고 기대감을 표출했다.
그럴 만도 한 게 여기서 1등을 하면 데뷔곡으로 지상파 3관왕을 달성하는, 걸그룹 역사 최초 업적이다.
홍보팀에서는 이미 1등을 전제로 모든 홍보계획까지 잡아 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압박도 압박이지만, 에이클라스도 욕심이 났다.
데뷔곡으로 지상파의 트리플크라운.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 걸그룹.
탐나는 타이틀이다.
분명 앞으로 에이클라스의 앞길에 큰 도움이 될 터였다.
에이클라스 멤버들은 손을 모으며 결의를 다졌다.
“잘 해보자. 지금까지 해온 대로 하면 되지!”
“맞아. 우리 잘하잖아. 어? 선배님들 무대 시작해요!”
대기실 안에 놓여진 TV에는 지금 생방송으로 진행 중인 무대가 나오고 있다.
젤리크러쉬의 무대였다.
“와. 엄청 화려하다.”
붉은 레드카펫, 반짝이는 샹들리에와 미러볼, 치렁치렁 늘어진 황금빛 커튼.
마치 무도회장 같았다.
세트에 잡아먹히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들 정도였지만 젤리크러쉬가 올라온 순간 그 생각은 바뀌었다.
젤리크러쉬는 화려한 무대 속에서 더욱 화려하게 빛나며 존재감을 보여주고 있었다.
붉은색과 검은색이 섞인, 탱고 의상 같은 치마였다.
이건 대기실에 있을 때 봤으니 큰 감흥이 없었다. 다만,
“어? 가면 쓰셨네.”
그렇다.
꼬리깃이 달린 고풍스러운 가면을 하나씩 착용하고 있었다.
“아, 가면무도회 컨셉이구나.”
괜찮아 보였다.
‘티키티키’가 라틴 리듬을 베이스로 한 노래라서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이윽고 무대가 시작됐다.
검은 인영만 간신히 보일 정도로 어두운 무대, 그 가운데 들리는 작은 속삭임.
- Yes. I am···.
그 순간 빛이 강하게 터지면서, 아까 보았던 화려한 무대가 등장한다. 이어지는 중독성 강한 훅.
- 티키티키티티키키 loveme loveme
“티키티키티티키키”
노래가 나오자 에이클라스는 자신도 모르게 따라 하고 있었다. 따라 하던 멤버가 멋쩍게 웃었다.
“이거 근데 중독성 진짜 쩐다. 솔직히 우리 노래보다 더 많이 부르는 거 같아.”
이어 첫번째 벌스가 시작된다.
- 시끄러운 얘기 날 둘러싸
이러쿵 저러쿵 나더러 어쩌라고
상관없어 다 던져버려
동시에 젤리크러쉬가 쓰고 있던 가면을 동시에 집어 던졌다.
마치 가사의 내용처럼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논란을 집어 던지는 모양새이다.
가면을 잡는 손동작부터, 던지는 각도까지 한 치의 오차 없이 맞아 떨어진다.
같은 아이돌인 에이클라스는 알 수 있었다.
저 동작 하나를 위해 젤리크러쉬가 얼마나 연습을 했을지.
절도가 넘치는 동작에 에이클라스는 감탄했다.
“와, 칼각 쩔어. 연출 누가 하신거지?”
“진짜 연습도 많이 하신 거 같아. 준비기간도 짧았다고 들었는데 대단하시다.”
하지만 칭찬을 하는 에이클라스의 표정은 굳어갔다.
입에서는 칭찬을 하고 있지만 속에서는 점점 초조함이 올라온다.
‘우리 1등 할 수 있을까?’
가면 뒤에 숨어있던 눈빛은 장난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어떻게든 성공하고야 말겠다는 독기가 화면을 뚫고 여기까지 느껴질 정도다.
- 빛났던 나를 찾아 (whoa-oha-oha)
뜨거운 불속에 몸을 던져 (whoa-oha-oha)
티키티키 티티키키 loveme, oh loveme
젤리크러쉬가 가진 힙한 느낌은, 이 곡을 통해 더없이 완벽하게 나타났다.
하지만 이전처럼 무조건 힙하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젤리크러쉬가 가진 건강함이 언뜻언뜻 드러나 이전과는 다른 그룹처럼 보인다.
수 없이 반복했던 연습을 통해 만들어진 무대는, 빈틈이 하나도 없었다.
완벽했다.
‘···젤리크러쉬가 이 정도였어?’
학폭이라는 굴레를 벗어던지고, 손가락질하던 사람들 앞에 서서 무대를 보여주는 젤리크러쉬는,
지금까지의 한을 풀듯 무대를 박살 내고 있었다.
- 티키티키 티티키키 티키티키 티티키키
그저 챈트만 남은 후렴구와 함께 댄스 브레이크가 시작됐다. 동시에 무대 앞쪽 장치에서 화염이 치솟으며 열기를 더했다.
“와···. 이건 좀···와.”
속으로 승산을 재보던 에이클라스는 어느새 그냥 넋 놓고 감탄만 하고 있었다.
에이클라스 리더는 조용히 음원 스트리밍 차트를 찾아보았다.
1. 젤리크러쉬 - 티키티키
2. 에이클라스 - MY CLASS
순위가 뒤바뀌었다.
아까 봤을 때는 분명 에이클라스가 1등이었는데.
이제는 젤리크러쉬가 1등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에이클라스 리더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TV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숨을 헐떡이며 엔딩포즈를 취하는 젤리크러쉬가 보였다. 후련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인정해야겠지.’
젤리크러쉬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
나는 젤리크러쉬의 초대를 받아서 음악방송 무대에 갔다.
팬들의 엄청난 열기와 함성.
대학 축제 때보다 훨씬 더 뜨거운 밀도를 가진 공간이었다.
무대와 팬 사이의 거리는 멀었지만, 노래로 그들은 충분히 교감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대에서 젤리크러쉬는 자신들의 모든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함께 만든 무대.
젤리크러쉬는 거기서 빛나고 있었다.
나는 젤리크러쉬가 1위를 하고 수상소감을 하는 것까지 지켜보았다.
폭죽이 터지면서 1위가 됐을 때, 젤리크러쉬는 단체로 입을 떡 벌리곤 똑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얼빠진 애처럼 보였다는 뜻이다.
“1등 해놓고 왜 저렇게 바보처럼 구냐.”
투덜거리면서도 왠지 기분은 좋았다.
내가 만든 곡으로, 함께 준비를 한 녀석들이 인정받는 걸 보니 뿌듯하기도 하고.
리더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더듬거렸다.
“어, 아··· 저희, 그러니까 저희 1등··· 정말 감사합니다. 생각도 못 했는데, 정말 큰 행복을 주셔서 감사···아.”
결국 터져나오는 눈물에 말을 제대로 못 잇고, 메인보컬 가은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가은을 제외한 다른 멤버도 다 울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은은 떨리는 목소리로 끝까지 소감을 이어나갔다.
“끝까지 저희 믿어주신 팬분들 감사드리고요. 천마 님 보고 있으시죠? 좋은 곡 써주시고 도와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잊지 않을게요.”
별거 아닌데도, 내 이름이 언급되니 웃음이 나왔다.
젤리크러쉬와 같이 작업하기로 한 건, 좋은 결정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무대가 마무리되고 나는 기분 좋은 마음으로 밖으로 나왔다.
그때였다.
“어, 작곡가님!”
나를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뺀질뺀질한 얼굴. 이승호였다.
“네가 여기는 웬일이냐?”
“에이~ 저야 여기에 항상 볼일이 많죠.”
신기하다. 방금 막 무대가 끝나서 사람이 엄청나게 쏟아져 나왔는데, 어떻게 나를 딱 알아본 거지?
“그래 만나서 반갑다. 그럼 이제 갈 길 가라.”
나는 발걸음을 돌렸지만 이승호는 이번에도 친한 척을 하면서 치댔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같이 식사라도 하시죠. 제가 술 한 잔 사겠습니다. 오늘 저녁 어떠신가요?”
“나 오늘 방송해야돼.”
“아, 그러셨죠. 그런데 이번에 티키티키 노래 엄청 좋던데요. 젤리크러쉬 1등도 축하드립니다. 저도 그런 곡 하나 있으면 좋을텐데.”
참. 이 새끼는 아직도 곡 달라고 징징대고 있다.
아직까지도 매일 일대일채팅으로 곡 달라고 보채는데, 옥수진이 ‘이쯤 되면 줘도 되지 않을까요?’라고 은근슬쩍 물어볼 정도다.
생각난 김에 나는 지난번에 이새끼 몸속에 넣어둔 기운이 잘 있는지 보았다.
‘어? 뭐야? 조금 줄어들었네?’
그러고보니 흡연자 특유의 냄새도 나지 않는다.
“너 연습 좀 했나 보다?”
“어유 당연하죠. 제가 요즘 폐활량 늘리려고 등산하면서 노래도 부르고, 보컬 트레이닝도 열심히 받고 있습니다. 아, 담배도 끊었고요. 작곡가님이 그때 시키신 것들 다 하고있어요.”
나는 딱히 시킨 적이 없지만, 좋은 게 좋은거지.
사람이 바뀐다는 게 쉽지 않은데. 처음 만났을 때 한마디 했던 보람은 있다.
그러고보니 내가 얼마 전에 만들었던 노래가 생각났다.
최근에 무림에서 만들었던 노래를 정리하다가 1절 부분만 완성해서 클라우드에 업로드 해놨었는데.
한 번 더 시험해볼까?
“너한테 어울리는 노래가 하나 있는데 받아볼래? 일단 1절까지만 있기는 한데.”
내 말이 떨어지자 이승호가 눈을 반짝이며 온갖 호들갑을 다 떨었다.
“아이고 우리 작곡가님, 천마 님, 아니 교주님! 당연히 주신다면 받아야죠. 제 마음을 이제 알아주시다니 감개무량합니다 정말.”
“그런 건 평생 모르고 싶은데.”
“하하하! 제 명함을 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연락해주시면 돼요.”
“지금 바로 보내줄게.”
“헉! 감사합니다!”
이승호는 이 자리에서 탭댄스를 출 것처럼 신나했다. 나는 클라우드에서 곡을 찾아서 명함에 있는 메일주소로 보냈다.
“방금 보냈다. 확인해봐.”
“아, 왔네요. 감사합니다.”
그러면서 이승호는 싱글벙글하며 바로 곡을 다운받아 열었다.
“저도 이제 차트 1위하는 거 아닙니까? 하하···?”
그리고 곡을 보는 순간 굳었다.
이승호가 악보를 훑어보더니 말했다.
“저···. 작곡가님 이거 사람이 부를 수 있는 게 아닌 거 같은데요.”
맞다. 내가 방금 이승호한테 보내준 곡은 어려운 곡이다.
상당한 보컬 컨트롤이 필요하면서 어마무시한 연습이 필요한 곡.
“내가 직접 불러봤어. 사람이 부를 수는 있긴 해.”
하지만 나는 부를 수 있는 걸?
“······.”
“그거 안정적으로 부를 수 있으면 내가 완성본을 줄게.”
그런데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다.
이승호를 보내버리고, 나는 평소처럼 방송을 키려고 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가슴 한구석이 간질간질 한 게 답답했다.
젤리크러쉬의 강렬했던 무대를 보니 나도 나가서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싶다는 열망이 불타올랐다.
관객의 환호성과 열기가 머릿속에 자꾸 맴돈다.
‘이참에 버스킹을 한번 해볼까.’
예전에 대학축제에서 미니롱 무대를 본 후 버스킹 얘기가 한번 나왔었다.
하지만 옥수진이 최근에 졸업 때문에 너무 바빠졌고, 동시에 나도 젤리크러쉬 앨범을 프로듀싱하면서 어느새 뒷전이 되었다.
그래.
아무래도 생각난 김에 지금 해야겠다.
옥수진은 졸업한 지금도 무슨 학원에 다닌다며 바빴기 때문에, 미니롱에게 연락해서 버스킹을 어떻게 하는지 물어봤다.
[롱서아]: 아 그거 예약 어플 있어요!
[미니민]: 근데 언제 하시려구요?
[미니민]: 홍대나 대학로 쪽은 당일 예약은 힘들수도 있어요.
[미니민]: 비인기지역에도 은근히 목이 좋은 곳이 있어서 알려드릴게요.
[나]: ㄱㅅ
나는 일단 미니롱이 알려준 대로 어플을 다운 받았다. 혹시 몰라서 오늘 홍대 자리를 봤는데,
“어? 있네?”
마침 딱 한 자리가 있었다.
[롱서아]: 헐??? 그럴리가 없는데?
[롱서아]: 천마님 운 짱좋으신데여!
[미니민]: 누가 급하게 취소했나봐요
[미니민]: 일단 자리를 잡았으면 다음에는 장비를 대여하면 되는데···.
나는 미니롱의 지도 아래 버스킹 준비를 했다.
일단 필요한 게 마이크랑 앰프.
집에 있는 마이크는 이동이 어려워서 미니롱이 알려준 업체에 연락을 해봤다.
갑작스레 장비를 빌려달라는 말에 업체에서는 난색을 표했지만,
- 어··· 당장 장비가 필요하시다고요? 지금은 남는 장비가 없는데요?
"대여비 두배를 드리죠. 장비도 제일 좋은 걸로 빌리죠."
- 하하하 장비 준비해 놓겠습니다. 언제든 방문해 주십쇼!
나는 금융창조를 해버렸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돈이 있으면 편하다.
음방을 한지 3개월. 방송에서 터지는 후원금과 작곡료, 저작권료를 포함하면 한달에 못해도 천만 원이라는 돈이 들어온다.
악기는 지난달에 산 신상 기타 하나면 충분하다.
나는 뚝딱 준비를 마치고 버스킹을 하러 갔다.
부푼 마음을 안고 홍대 버스킹 거리에 도착했는데,
“뭐야???”
내가 예약한 자리에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한두 명도 아니다. 딱 봐도 수십 명은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심지어 무대를 설치하는 중이었다.
스텝이나 촬영팀으로 보이는 사람도 많고, 카메라도 여러 대 돌아다닌다.
규모가··· 나랑은 다르게 커 보였다.
‘뭐지? 분명 오늘 내가 예약했는데.’
시각을 확인해봤지만 분명 내가 예약한 시각이 맞았다.
나는 무대를 설치하는 사람에게 가서 물었다.
“저기요. 제가 여기 이 시각에 예약했는데요.”
스탭이 어리둥절해하며 말했다.
“네? 저희 여기 3주 전부터 예약했는데요? 예약 명세를 한번 봐도 될까요?”
나는 어플을 켜서 보여주었다. 스탭이 웃으며 말했다.
“내일 날짜로 예약하셨네요.”
“내일? 오늘 28일 아닌가요?”
“오늘 27일인데요.”
“.......”
···젠장.
어쩔 수 없지. 방송 늦는다고 말하고 돌아가서 하던 거나 해야겠다.
그때 누군가가 나를 붙잡았다.
“저기, 혹시 BJ음공천마 님 아니세요?”
바로 오늘 '숨은 고수를 찾아라' 컨텐츠를 준비하던 대기업 음악 뉴튜버, 용우였다.
< 이런 게 클라스지 (5) > 끝
ⓒ 연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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