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국산 드릴 (1) -무료 마지막 >
H 대학교 재학생은 기숙사에서 열심히 덕질을 하고 있었다.
[칸댕댕]이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하는 그녀는 매그넘의 팬이었고, 최애는 닉네임에서 알 수 있듯이 칸이었다.
기숙사생은 이번에 금발로 염색한 칸을 보며 말했다.
“역시 칸은 금발이지. 매그넘도 빨리 완전체로 돌아오면 좋겠다.”
기숙사생은 인별그램에 올라온 최근 착장 사진을 저장하면서 외로운 덕질을 하고 있었다.
같은 방을 쓰던 룸메가 돌판에 빠삭한 언니여서 통하는 게 있었는데, 아쉽게도 얼마전에 취업해서 떠났다.
좋아하던 아티스트의 회사에 들어갔다고 들었을 때는 얼마나 부러웠던지.
‘나도 펄 엔터에 들어가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며 기숙사생은 타임라인을 훑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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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매그넘 칸 음원총공팀 총대입니다 (하트)
멜롱 집중 스밍 타임 !
(체크) HOT 일간차트 진입
(체크) 기존 2시간 스밍리스트로 진행
평일 "오전 7시"는 가장 중요합니다
출근 시간인 데다, 멜롱 탑백 8시 차트는 실시간 차트가 포함되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내일 칸의 모든 곡이 높은 순위에 있을 수 있도록 특히 신경써주세요!
* 멜론을 주력으로, 모든 음원사이트에서 진행
#/KHAN_황제귀환 해시태그를 이용하여 인증샷을 올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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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원총공팀을 비롯한 투표팀, 서포터즈에서 팬들의 응원과 격려를 구하는 글이 많았다.
홈마였던 룸메와 달리 기숙사생은 라이트팬이었지만, 최근 분위기는 알고 있었다.
차트 최상단에서 칸과 박희찬이 죽어라 싸우고있었기 때문이다.
'박희찬은 왜 하필 지금 나오고 그러냐.'
두 사람의 경쟁 때문에, 원래 차트 최상위권에 있던 곡들이 다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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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희찬 - 무제 (타이틀)
2. 칸 - 오래된 연가 (타이틀)
3. 칸 - Beside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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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젤리크러쉬 - 티키티키
8. 에이클라스 - MY CLASS
9. 박희찬 - falling in depth
10. 박희찬 - 문득 너를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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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이런 식이었다.
이번에 강력한 경쟁자인 박희찬이 등장하면서, 팬들은 더 결집했고 분위기는 점점 과열되고 있었다.
때문에 음원 차트는 난장판이 되었고, 사람들에게서 ‘무지성 스밍’이라며 비판을 받기도 했다.
기숙사생은 칸이 좋기는 하지만, 밤새 스밍을 돌리고 투표에 꼬박꼬박 참여하고 앨범을 몇백 장씩 살 정도의 열정은 없었다.
피곤한 건 딱 질색이다.
딱 자신이 즐길 정도로만 하면 된다.
‘차라리 그 시간에 예능이나 다시 봐야지. <우리집>에 칸이 나왔다던데 한번 볼까?’
마침 중간고사가 끝났기 때문에 기숙사생은 마음 편히 넷플렉스에 들어갔다. 물론 그 뒤에 과제 폭탄이 있긴 하지만 무시하기로 했다.
이번에 칸이 나왔다는 <우리집에 왜왔니>부터 조지고, 새로 나온 좀비 영화도 봐야지.
그렇게 <우리집에 왜왔니> 최신화를 틀었다. 가정집 거실처럼 꾸민 세트장에 세 명의 게스트가 들어왔다.
가장 먼저 들어오는 사람을 보고 기숙사생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천마네?”
룸메에게 주입식에 가깝게 보고 들었던 게 있어서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그렇게 잘생겼다고 노래를 부르더니. 진짜 잘생기긴 했네. 그리고 되게 어린데?’
딱 봐도 20대 초반 같아 보이는 외모이다.
그리고 칸과는 결이 다른 미남이다.
칸이 꽃사슴 같다면, 천마는 선이 굵어서 아기호랑이 같았다.
‘천마를 섭외한 게 신의 한수였네. 제작진이 잘 생각했다.’
칸과 박희찬 둘이서만 나왔다면 은근히 견제하느라 피곤했을 거 같다.
우리 애가 쟤한테 밀리지는 않을까 하고 마음 한구석이 괜히 불편했을 텐데, 천마가 중간에 끼어서 완충재 역할을 잘 해줬다.
거기에 재미도 있었다.
천마가 묘기를 부리며 제기를 50개 넘게 찰 때, 기숙사생은 그 부분만 몇 번 되감아 볼 정도였다.
‘아니 어떻게 제기를 이렇게 잘 차지?’
저렇게 잘 차는 사람은 태어나서 처음 봤다.
그리고 대망의 양궁이 나왔다.
‘양궁하면 우리 칸이지!’
기숙사생은 부심을 뿜뿜하며 칸이 우위를 점하는 걸 지켜보았다.
박희찬 팬들은 ‘양궁 잘하는 애를 섭외해서 양궁을 하다니! 이건 공정성에 어긋나!’라고 부들부들하겠지만, 그건 그쪽 사정이고.
우리 애가 잘하니까 은근히 뽕이 차오른다.
역시나 칸은 박희찬을 큰 점수 차로 따돌렸다.
'역시, 양궁하는 모습이 찐이라니까.'
그녀가 다시 한번 칸을 생각하는 사이, 천마가 나섰다.
그 순간 뒤로 웅장한 BGM이 깔렸다.
귀에 쏙쏙 박히는 비트였는데, 기숙사생은 이때만 해도 몰랐지만, 천마 신곡 ‘둠둠둠 (replay)’를 편곡한 버전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집중하게 된다.
출연진 한 명 한 명이 천마만을 바라보는 컷이 들어간다.
기숙사생은 몰랐지만, 이때 긴장이 풀려서 굉장히 방만한 분위기였기 때문에 연출 PD가 다른 장면에서 컷을 따와서 편집했다.
어쨌든 편집의 마법이 부려진 덕분에 천마에게 시선이 쏠리는 효과가 나긴 했다.
천마가 시위를 당김과 동시에 놓았다.
화살은 순식간에 과녁 한가운데에 꽂힌다.
2배속이라도 했나 싶을 정도로 빠르게 연사한다.
기숙사생은 눈을 의심했다.
“...내가 뭘 본 거지?”
화면에 과녁이 줌인으로 잡힌다.
네가 본 게 맞다고 확인이라고 시켜주는 듯이.
거기에는 그린 듯한 하트 모양이 있었다.
“와 대박!”
기숙사생은 그제서야 감탄을 모조리 토해냈다.
“천마 이거 뭐야? 미친거 아니야? 왜 이렇게 잘해?”
천마가 태릉에 가면 앞으로 십 년 동안은 올림픽 금메달 확정이다.
기숙사생은 너무 재밌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해서 몇 번 돌려보다가 문득 사람들의 반응이 궁금해졌다.
자기와 같은 반응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기숙사생은 뉴튜브를 틀어 ‘천마 양궁’을 검색했다.
<우리집> 제작진이 단체로 직무 태만에 걸리지 않은 이상, 이 클립을 편집해서 올렸을 거라고 확신했고 그 예측은 정확히 맞았다.
하지만 기숙사생이 맞추지 못한 건 댓글 상태였다.
[우리집☆하이라이트] 활 쏴서 하트♡ 만들었어요ㅣ천마 신곡 최초공개
- 양궁보러왔다가 노래만 반복재생;;;;;
- 힙합댄스같은데 의외로 안무가 없네요?
- 제작진 개부럽다···.진짜 이걸 1열에서 보다니ㅋㅋㅋㅋ
- 둠둠둠에서 내 심장이 멈췄다
- "나 남자 좋아하네"
- 아 놔봐 저 오빠가 나 꼬시잖아
- 아씨 나 매그넘 스밍해야하는데
- 별론데요··· 48562번 밖에 안봤는데 질리네요
- 대단하다는 말밖에 못하겠다;;;;양궁도 양궁인데 노래진짜 뭐냐
의외로 양궁 얘기는 없었다.
가뭄에 콩 나듯 한두 개씩 보일 뿐, 댓글은 전부 신곡에 대한 반응뿐이었다.
‘뭐지?’
궁금해진 기숙사생은 댓글에 나온 타임라인을 클릭했다.
- 14:09 노래 시작
소파와 탁자를 다 밀어내고, 천마가 마이크를 들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풀샷으로 잡다가 둥둥 울리는 반주가 재생되는 순간, 천마의 얼굴이 클로즈업됐다.
둥둥 두둥 둥둥둥
기숙사생은 어딘가 익숙한 비트를 기억해냈다.
‘아 이거 방금 활을 쏠 때 나왔던···.’
그 순간 천마의 목소리가 나왔고, 기숙사생은 생각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 또 한번 시작해볼까
멈추지 않고 switch on
짜릿한 느낌 스치는 thrilling
다가와 다가와 다가와
저절로 몸을 흔들고 싶은 비트.
단순하고 쉬운 멜로디.
한번 듣고도 따라부를 수 있을 정도로 중독적이다.
노래를 부르던 천마가 씩 웃는다. 그게 왠지 얄미워 보였다.
‘이래도 안 듣고 배길거야?’
그런 의도가 분명히 느껴지지만,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다.
- 둠둠둠둠둠둠둠둠둠
replay replay
I play once again
마지막 아카펠라에서 나온 보컬 하모니에서 1절은 멈췄다.
‘왜 여기서!’
아쉬움에 기숙사생은 다시 14분 9초를 클릭하려다가 생각을 바꿨다.
'아니지. 그냥 음원사이트에서 풀로 들으면 되잖아?'
그녀는 어느새 멜롱 사이트에 들어갔다.
천마의 노래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검색할 필요도 없었다.
사이트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보이는 HOT 100.
차트 상위권에 있었기 때문이다.
*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숙사생과 같은 경로로 유입됐다.
특히 이번에 <우리집에 왜왔니>를 시청한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다.
기존의 고정 시청자들뿐만 아니라, 칸과 박희찬의 팬들마저 유입됐기 때문이다.
제작진들은 칸과 박희찬을 붙여놓으면 어그로가 제대로 끌릴 거라고 생각했고, 그 예상은 적중했다.
다만 그 수혜는 엉뚱한 사람에게 돌아갔다.
칸과 박희찬의 양궁을 보러 온 팬들은, 천마가 보여준 기행에 경악했다.
- 저게 말이 되는거냐?
- 진짜 몰라서 물어보는데요 국대쯤 되면 저렇게 원하는 모양을 만들 수 있나요?
ㄴ 국대 할아버지가 와도 못합니다
- ㅋㅋㅋㅋ미친 진짜 무림인을 데려왔네
ㄴ 천마 ㄹㅇ 무공쓰는거 아니냐?
ㄴ 사실 화살 쏠때 내공을 담았다고 합니다ㅋㅋㅋㅋ
- 태릉가라 제발
- 체육계는 또 인재를 빼았겼네요 ㅠㅠㅠ
12발 모두 10점 존에 박아넣은 것도 모자라서 과녁에 하트 모양을 만든 사건은 예능 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이건 각종 짤과 쇼츠로 만들어지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채널에서 리액션 영상을 남기며 재생산에 재상산을 거듭했다.
특히 외국인들이 천마가 활 쏘는 모습에 리액션하는 모습은 은은한 국뽕을 남겼다.
- HEART? HEART? HEART? OH GOD!!!!! (하트라고? 및ㅣㄴ!)
- What a crazy heart! it kills me (하트···나 죽어)
- EXPLODED (찢었다)
뽕에 차오른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천마의 ‘둠둠둠 (replay)’ 무대로 넘어갔다.
그리고 진짜 터졌다.
양궁에서 봤던 반응은 바로 뒤에 이어진 천마의 신곡 무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1분 남짓한 시간 동안 1절만 불렀을 뿐이지만, 천마의 무대는 영상을 보는 모든 사람들을 그의 신도로 만들었다.
- 천마! 천마! 천마! 천마! 천마! 천마!
- 교주님이 오셨다!
- spits on me pls i’m begging (침이라도 뱉어줘 제발)
- i’m free tonight at 8 pm, would you like to go for fine dining restaurant hand in hand? (질척)
ㄴNOT YOU STEALING THIS FROM ME (내꺼야)
- 천마님 임시 팬클럽 링크입니다 ㅜㅜ 다들 신도가 되어주세요 https://m.cafe.hiver.com/ca-fe/chunmalove
ㄴ 오늘부터 교인이 되었습니다
ㄴ 22 저도요
ㄴ 333 가입했습니댜ㅏ
- 난 천마 뜰줄 알았다ㅠㅠㅠㅠㅠ 솔직히 작곡 잘해서 노래실력이 묻히는 감이 있었는데 이렇게 세상이 알게돼서 난 너무 행복해ㅠㅠㅠㅠㅠㅠ우리 갓기천마 힘내
- 아 이건 체육계에서 탐내면 안되겠네요
어쩐지 광기까지 흐르는 댓글.
칸과 박희찬을 보러왔던 그들의 팬은, 어느새 플레이리스트에 천마의 노래를 추가했다.
그렇게 그들은 ‘천며들었다.’
천마가 신곡을 발매한 지 열흘.
어느새 그는 차트 9위에 랭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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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칸 - 오래된 연가 (타이틀)
2. 박희찬 - 무제 (타이틀)
3. 박희찬 - falling in depth
4. 칸 - Beside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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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천마 - 둠둠둠 (replay) (타이틀)
10. 젤리크러쉬 - 티키티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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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 전, <우리집에 왜왔니> 제작진은 상상도 못 했던 그림이었다.
화제성을 힘입어 빠르게 치고 올라갔고, 웬만한 기성 가수도 힘든 10위를 뚫어냈다.
아직 이렇다 할 팬덤이 없는 뉴튜버가 이루기에는 큰 업적.
차트를 개판으로 만들었던 팬덤 싸움도 3주 차쯤에는 슬슬 소강상태로 접어들 것이고,
“...아마 그때가 되면 천마 님이 1위를 할 거예요!”
강여름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하지만 차선우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마음에 안들어.”
경쟁자들이 내려올 때까지 기다린다?
그건 천마의 방식이 아니다.
그는 언제나 정상에 있어야 하는 사람이었다.
콘크리트 벽이 있으면 뚫어야지.
그리고 마침, 강여름이 가져온 외국산 드릴이 등장했다.
천마가 던졌던 출사표는 한국을 강타하고, 어느새 해외까지 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 외국산 드릴 (1) -무료 마지막 > 끝
ⓒ 연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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