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별한 15주년 (2) >
어차피 잠도 안 왔기 때문에 윤재하는 천마의 채널에 들어가 보았다.
채널에는 수십 개의 영상들이 카테고리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가 가장 먼저 들어간 코너는 [싱포유]
그곳에는 천마가 부른 자작곡 영상이 쌓여있었다.
윤재하는 감탄했다.
'나이도 어려보이는데 작업량이 엄청나네.'
자신과 너무나 비교되는 작업량이다.
누구는 5년 동안 앨범 1개도 못 내고 있는데, 천마는 근 6개월 동안 벌써 수십 곡을 만들어냈다.
윤재하는 가장 상단에 있는 곡을 클릭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다섯 개의 영상을 연달아보았다.
그는 한태영이 왜 그렇게 천마를 극찬했는지 알게 되었다.
'완벽하다.'
곡의 짜임새, 악기의 구성과 사운드, 원하는 주제를 선명하게 그려낼 수 있는 보컬.
그가 추구하는 이상향을 그대로 재현했다.
장르도 다양하다.
처음 들은 노래는 속이 뻥 뚫리는 락이었는데, 다음으로는 감미로운 발라드가 나왔다.
이후에는 정통 R&B가 나오고 청량한 트로피칼 하우스에 이어 뽕끼 넘치는 디스코까지.
작곡의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었다.
음악의 신이 이상적인 뮤지션이 갖출 덕목을 다 넣어 만든 피조물을 보는 듯하다.
윤재하는 그 순간을 기점으로 천마에게 빠져들었다.
[싱포유]에서 시작해서 [고민상담소]와 [주간곡소리]까지.
천마에게 입덕하는 코스를 그대로 밟은 윤재하는, [컴백일지]에서 천마 본인의 앨범을 프로듀싱하는 과정까지 섭렵했다.
윤재하는 확신했다.
'무조건 이 사람이다.'
5번 엎은 앨범을 심폐소생하기 위해서는 천마가 꼭 필요하다고.
그때 라이브 알람이 떴다.
[BJ음공천마 스트리밍ㅣ주간곡소리: 작작해라 이것들아]
오늘은 주말. 마침 천마의 [주간곡소리]가 시작됐다.
윤재하는 자연스럽게 천마의 방송에 참여했다.
라이브 방송의 분위기는 왁자지껄하니 좋았다.
[감성버찌 님이 10,000원을 후원했습니다.]
- 판소리ㄱ?
“이건 뭔 개소리?”
천마가 이 분위기를 좋다고 생각할지는 의문이었지만.
[CENTER 님이 100원을 후원했습니다.]
- ㅇㅇ판소리를 알앤비로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꽁치맛사탕 님이 1000원을 후원했습니다.]
- 이거다ㅋㅋㅋㅋ 가자 천마야
천마는 극혐했지만, 결국 시청자들이 이겼다.
이번에는 판소리를 R&B로 바꾸는 미션이 채택되었다.
윤재하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이거 진짜 재미있네."
거의 몇 달만에 지어보는 웃음이었지만, 윤재하는 그 사실도 모르고 낄낄거리며 방송에 빠져들었다.
말도 안 되는 주제에 궁시렁거리던 천마는 언제 그랬냐는 듯 심청가 R&B 버전을 만들어냈다.
윤재하는 입을 떡 벌렸다.
“?”
이게 왜 진짜?
곡을 완성한 천마는 승리자의 웃음을 지으며 곧바로 방송을 종료해버렸고, 윤재하는 아쉬운 마음에 입맛만 다셨다.
"후원을 했었어야 했나."
윤재하는 한태영이 예전에 ‘천마 방송에서 후원한 썰’을 풀어놨던 걸 떠올렸다.
은근한 관종인 한태영은 후원을 하며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걸 즐겼지만, 윤재하는 아니었다.
그래서 대신 윤재하는 일대일 채팅을 남겼다.
[안녕하세요 천마님. 저는 가수 윤재하라고 합니다. 친구인 한태영에게 천마 님의 이야기를 인상 깊게 듣고 이렇게 채팅을 남겨봅니다. 먼저 제 소개를 드리자면, 저는 15년 전에 1집 앨범인···.]
간략한 포트폴리오부터 시작해서 지금 어떤 상황이고, 도움을 줄 수 있냐는 이야기를 편지 쓰듯이 정성스럽게 남겼지만.
“···?”
‘읽음’ 표시는 뜨지 않았다.
하루, 이틀, 사흘···. 윤재하는 초조해졌다.
한태영 같으면 바로 후원을 날렸겠지만, 윤재하는 대신 인터넷에 천마의 회사를 검색했다.
[천마신교 레코즈]
- 서울특별시 마포구······천산빌딩 7층
요즘에는 주소가 인터넷에 나와 있으니까.
고민하던 윤재하는 ‘오늘 방문하겠습니다’라는 채팅만 남기고 무작정 그곳으로 찾아가 버렸다.
*
나는 본격적으로 미니롱과 작업을 시작했다.
미니롱의 앨범 발매일은 12월 1일.
지금이 10월 말이니 슬슬 준비해야 한다.
참, 내가 첫 앨범 준비로 바쁜 동안 미니롱에게도 몇 가지 변화가 있었다.
‘sour candy’가 대박 나고 작업실을 옮긴 것이다.
반지하의 월세 작업실에서, 숙소 겸 작업실이 딸려 있는 곳으로 이사했다.
아침 라디오도 고정을 맡아 순조롭게 진행 중이고, 얼마전에는 작은 팬싸인회를 열었다고 한다.
그때 찍은 사진을 봤는데, 작민지(작은 김민지)는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팬들이 준 선물을 머리 위에 쌓고 있었다.
얼마 전 정산을 받은 금액으로 부모님 여행도 보내드렸다고 한다.
"자 그럼 시작해볼까."
내 작업실에 모두 모여 본격적으로 작업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롱서아가 다급하게 막아 세웠다.
"앗! 잠시만요 천마님!"
"응? 갑자기 왜?"
"에이, 이런 걸 바로 시작하시면 어떻게 해요."
“?”
그럼 뭐 고사라도 지내야 하나?
내가 멀뚱히 바라보고 있자 작민지가 부연설명을 해줬다.
"시작 전에 이제 셋이서 본격적으로 작업에 들어간다는 느낌의 셀카를 찍어서 올리면 좋을 것 같아서요. 요즘은 이런 식으로 신곡 마케팅을 시작하거든요."
"맞아요! 이제 천마님도 스타니까, 사진 한 장만 올려도 반응이 올거라구요. 인별 팔로워가 백만이었던가요?"
삼백만이다.
지난번 챌린지가 뜬 이후로 사람들이 -특히 외국인이- 엄청 붙었다.
셀카 정도는 어렵지 않지.
미니롱은 얼빡샷을 피하기 위해, 얼른 내 뒤로 가서 예쁜 척을 해대기 시작했다.
"···그럼 찍는다. 하나 둘 셋!"
만족스러운 결과물이 나왔다.
그걸 본 두 사람이 할 말을 잃을 정도로.
롱서아는 대놓고 놀랐고, 작민지의 무덤덤한 얼굴에도 당황한 빛이 스쳐지나갔다. 작민지가 조심스레 말했다.
"천마 님. 혹시 셀카를 찍어본 적이 없으신가요?"
별로 없기는 하지만··· 이게 어때서?
그때 두 사람을 구원해줄 강여름이 도착했다.
"치킨이랑 맥주 도착이요!"
작업에는 치킨과 맥주가 꼭 있어야 한다는 미니롱의 확고한 철학에 따라, 강여름이 포장해온 것이다.
롱서아가 강여름에게 달려가 내 폰을 내밀며 말했다.
"여름 님, 여름 님. 대박! 이 사진 좀 보세요!"
“푸하하하핳!”
내가 찍은 사진을 본 강여름은 바닥을 뒹굴 정도로 비웃더니,
“천마 님 그 얼굴 그렇게 쓸 거면 그냥 저 주세요.”
다시 찍어줬다.
음. 확실히 다르긴 했다.
그렇게 미니롱과의 작업이 시작됐다.
미니롱의 3집 앨범은, 천마신교 레코즈 소속 가수가 내는 첫 앨범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도 특별히 신경 쓰고 있었다.
지난 초여름 싱글로 대박친 ‘sour candy’와 이번에 준비한 노래를 더블 타이틀로 내세워, 총 5개의 곡이 수록된 미니 앨범을 낼 것이다.
오늘 모인 건, 내가 피처링할 또다른 타이틀곡을 듀엣으로 편곡하기 위해서였다.
술기운에 얼굴이 붉어진 작민지가 노래를 틀면서 말했다.
"이번 타이틀 곡 제목은 '눈의 별자리'에요."
이윽고 차갑고 슬픈 발라드가 흘러나왔다. 롱서아가 가이드를 했는데, 섬세하고 여린 보컬은 다소 우울하게 들렸다.
곡의 주제는 선명했다.
사랑하던 사람의 죽음.
눈이 부실 정도로 빛나다가 사라진 그는 별자리가 되었고,
이내 거기서 떨어져내리는 눈송이가 겨울밤을 적신다.
‘사연이 있는 노래인 건가?’
듣고 있다보니 무림에서 떠나보낸 사람들이 떠올라 괜히 감성적이게 된다.
어떤 식으로 편곡하면 좋을지 벌써 머릿속에 그려진다.
곧 깨어질 듯한 섬세한 선율 속에 힘을 불어넣고 싶다.
파스스 흩어지려는 눈송이를 단단하게 뭉쳐놓듯이.
중요한 추억이 담겨있다면 그러고 싶을 테니까.
그렇게 미디 프로그램을 열어 바로 편곡을 시작했다.
강여름은 그 모습을 촬영했고, 미니롱은 옆에서 열띤 토론을 벌이기 시작했다.
편곡이 거의 끝나가고, 집중력도 비슷하게 닳아갈 때쯤.
똑똑똑
노크와 함께 누군가가 회사로 들어왔다.
멀대같이 큰 키와 다소 파리한 얼굴.
날카로운 눈매는 고집이 있어보였지만, 또한 피곤해 보이기도 했다.
"누구시죠?"
내 물음에 대한 대답은, 남자가 아니라 미니롱에게서 나왔다.
“헐? 윤재하 님이다!”
윤재하라고?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분명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 같은데.
취기가 돌아서 살짝 미쳐있던 미니롱은 윤재하에게 다가갔다.
“저 진짜 팬이에요! 1집부터 앨범 다 갖고있는데 나중에 사인 좀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여기에는 왜 오셨어요?”
“그게 천마 님께 채팅을 남겼는데 읽지를 않으셔서···.”
“아핫 천마 님 또 씹었구나! 곡 받으시려고요?”
미니롱의 질문에 꼬박꼬박 답해주던 윤재하는 어색하게 웃었다.
“네. 작업 관련해서 얘기를 나눠보고 싶어서요.”
나는 미니롱에게 당하고 있는 윤재하를 살펴보았다.
‘이 사람 상태가 이상한데?’
눈빛이 흐릿하고, 기혈도 탁하며 군데군데 막혀있다.
꼭 심마에 잡아먹혀 폐인이 되기 직전의 사람 같았다.
보통 심마는 자신의 한계를 만난 사람들에게서 나타난다.
한계를 넘으려 계속 도전하기는 하지만 원하는 걸 성취하지 못한다.
하지만 ‘도전’은 개인이 가진 자원을 소비한다. 그게 돈이든, 시간이든, 정신력이든.
결국 모든 자원을 탕진해버린 사람은 황폐해진다.
지금 윤재하가 딱 그 상태이다.
나에게 곡을 받으러 온 듯한데, 이 상태로는 곡을 줘도 제대로 써먹지도 못한다.
지금 곡이 문제가 아니라, 이대로 내버려 뒀다가는 곧 쓰러질 것 같았다.
윤재하의 모습 위로 무림에서 심마에 빠져 허우적대던 부하들이 겹치며, 내 목소리에 내공이 담기기 시작했다.
“흠. 자네 최근에 잠은 언제 잤는가?”
윤재하는 ‘그 모드’에 당황했지만, 목소리에 담긴 힘에 이끌려 저도 모르게 대답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가끔 일하다가 쪽잠을 자지만 푹 자본 지는 오래돼서요. 수면제를 복용해도 개운하지도 않고···. 최근 들어 사람들과 만나는 것도··· 힘들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기 상태에 대해 술술 대답하던 윤재하의 목소리가 느려졌다.
갑자기 들려온 허밍음 때문이었다.
- hmm mm hmm
온몸의 감각이 나른하게 풀리는 느낌.
눈이 감긴다. 머리가 핑 돌며 어디론가 빨려들어가는 듯했다.
이내 온몸에서 힘이 풀린다.
“읏차”
나는 쓰러지는 윤재하를 받쳐 들었다.
‘역시 효과가 좋네.’
예전에 강해리에게 불러줬던 자장가인데 잠을 재우는 게 제일 시급한 듯해서 불러줬다.
그냥 돌려보낼 수도 있었지만, 위태로워 보여서 그냥 사람 하나 살려준다는 셈 치고 변덕을 부려봤다.
‘소파에서 재우고 그동안 곡 작업이나 마쳐야겠다.’
윤재하를 옮기려고 짐짝처럼 들쳐멨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는 순간, 내 실수와 맞닥뜨렸다.
“······.”
내 노래가 광역기라는 걸 깜박했다.
뒤를 돌아보니 같이 있었던 미니롱과 강여름도 모조리 잠들어 있었다.
어쩐지 조용하더라.
나는 바닥을 굴러다니는 맥주캔과 치킨의 잔해를 황망히 바라보았다.
"···언제 다 치우지?"
< 특별한 15주년 (2) > 끝
ⓒ 연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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