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별한 15주년 (3) >
윤재하는 정신을 차렸다.
가장 먼저 보이는 건 낯선 천장이었다.
‘아··· 또 병원인가?’
쓰러진 후 병원에서 깨어난 적이 종종 있었기에, 윤재하는 낯선 천장을 보아도 당황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그는 자신이 병동 침대가 아닌 다른 곳에 누워있다는 걸 깨달았다.
등에서 느껴지는 촉감부터 달랐다.
눈을 또르르 굴리니, 따스한 느낌의 목재 인테리어와 깔끔한 책상이 보였다.
“!”
윤재하는 벌떡 일어났다. 그가 누워있던 곳은 푹신한 소파였다.
배 위에는 누가 올려놓은 건지 귀여운 아기호랑이가 그려진 담요가 덮혀있었다.
"내가 왜 여기에 있는거지?"
분명 처음 보는 장소였다.
윤재하는 일단 담요를 정갈하게 갠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땅에 발을 딛고 기지개를 켜는 순간,
"음?"
몸이 이상할 정도로 개운했다.
평소에 불면증과 스트레스로 인해서 잠을 거의 자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 느낌은 갓 데뷔했을 때, 모든 게 생생했던 그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근래 들어 정신도 가장 또렷하고 몸에서 활력도 돈다.
지금이라면 곡이 술술 써질 듯한 기분이다.
윤재하는 스트레칭을 하며 기억을 더듬어봤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천마신교 레코즈를 향해 무작정 출발했던 거였다.
'아, 이건 기억이 나는군.'
홍대에 있는 빌딩에 도착해서 ‘天魔神敎’라고 멋들어지게 쓰여진 현판을 보았다.
어렸을 때부터 음악만 해서 한자를 잘 모르는 윤재하는, 끝에 조금 작은 글씨로 ‘Records’가 붙어있는 걸 보고 제대로 잘 찾아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윤재하는 노크를 하고 들어갔었다.
막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의 분위기가 생각난다.
방 안에 가득한 열기. 곡에 대해서 뜨겁게 얘기하던 사람들.
그 사이를 차갑게 흘러나오던 슬픈 선율.
그리고 천마.
‘그래. 천마를 만났었지.’
무슨 얘기를 했던 거 같은데,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분명 대화를 나눈 것도 같은데.
어렴풋하게 떠오르는 건 등을 토닥여주는 듯한 허밍뿐.
윤재하는 다시 한번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진짜 내가 왜 쓰러진거지?'
윤재하가 열심히 기억을 더듬고 있는 사이,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들어왔다.
"어? 일어나셨네요?"
사무실의 주인, 차선우였다.
그는 미니롱과 강여름을 깨워서 집에 보내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들은 왜 잤는지 의아해했지만 차선우가 술을 너무 마셔서 그런 거라고 강하게 주장했다.
겨우 맥주 몇 캔에 취해버렸다는 말을 믿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건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냥 넘어갔다.
차선우가 들어오자, 윤재하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괜히 폐를 끼쳤네요. 죄송합니다.”
처음 보는 사람의 사무실에서 쓰러지고 그 이후에 잠까지 자버렸다.
윤재하는 미안한 마음에 일단 사과부터 했다.
그러면서 계속 머릿속을 맴돌던 궁금증을 슬쩍 끼워 넣었다.
"그런데 혹시 제가 왜 쓰러진 건지 아시나요?"
차선우가 시치미를 뚝 뗐다.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사실 갑자기 쓰러지셔서 저도 깜짝 놀랐어요."
"아··· 그렇군요."
일반적으로 사람이 쓰러지면 병원으로 보내는 게 정상이지만, 묘하게 태연한 차선우의 모습과 정신없는 경황에 그는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차선우는 따듯한 차를 건네며 물었다.
"그런데 여기는 어떻게 오신 건가요?"
“그게 태영이가 천마 님에 대해 자주 얘기를 했었는데요. 제가 최근 앨범을 엎으면서···.”
그걸 시작으로 윤재하는 고민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
갑자기 분위기는 고민상담소가 되었다.
[천마의 고민상담소_오프라인 버전]이 갑작스럽긴 했지만, 방송에서 많이 해봤기 때문에 어색하지는 않았다.
나는 차분히 윤재하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요약하자면, 완벽주의 때문에 앨범을 계속 갈아엎었고 그러다 번아웃이 왔다는 거다.
듣다보니 이상한 게 있었다.
“그런데 왜 앨범을 고집하는 거예요?”
“가수라면 앨범을 내야 하지 않을까요? 음악 하는 사람이라면 아무래도 정규에 가치를 좀 더 두게 되니까요.”
“저는 그냥 곡을 만드는 대로 뉴튜브에 올려버리는데요.”
“···!”
윤재하는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뻐끔거리다가 말했다.
“어, 그게 올해는 제 15주년이라서요. 제대로 된 정규 앨범을 내야할 거 같아서요.”
윤재하는 서른두 살로 젊은 나이지만 15년 전, 그러니까 2000년대에 데뷔했다.
당시에는 디지털 음원보다 실물 앨범 위주였고, 윤재하 역시 아직 아날로그적인 면모가 있었다.
가수의 정체성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것.
윤재하는 그걸 정규 앨범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그런 면모는 성적에서 또한 잘 드러났다.
신곡을 발매하면 잘 쳐줘도 차트에서 50위권을 맴돌지만, 앨범판매량은 웬만한 아이돌에 비견될 만하다.
나는 윤재하의 고민을 이해했다.
15주년을 기념하는 완벽한 정규 앨범.
이건 음악이 아니라 무거운 짐이다.
심지어 10주년 앨범을 내는 걸 실패하고, 무려 5번이나 엎어졌으니.
이번에 더더욱 압박감이 심했겠지.
그런데 내가 무림에서 느낀 게 있다.
내 음악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 음악을 좋아해주는 사람이라고.
그래서 나는 윤재하에게 물어봤다.
“지금과 비교했을 때 17살의 윤재하 씨는 어땠나요? 그러니까 음악적으로.”
“사실 그때는 싱어송라이터라고 하기에 모자란 감이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어리다 보니 작곡에 대해서 잘 모르기도 했고, 1집 타이틀을 보면 주제를 구현하는데 아쉬움이 느껴져 리패키지 때···.”
갑자기 자아 성찰 모드로 들어가길래 나는 중간에 끊어버렸다.
“예. 모자란 감이 있었겠죠. 그런데 그때도 팬이 있었잖아요.”
“네?”
“윤재하 씨의 덜 완벽한 음악을 좋아해 준 팬말입니다.”
윤재하는 눈을 천천히 깜박였다.
무언가 잊고있던 걸 기억해낸 사람처럼.
완벽한 음악에 매몰되느라 잊고 있었던 건, 15년 동안 그의 곁을 지켜준 팬이었다.
“팬은 완벽한 윤재하 씨를 좋아하는 게 아니에요. 그냥 당신의 음악이 좋은거지.”
나는 말을 이었다.
“너무 정규에 집착하지 말고 가볍게 디지털 싱글부터 시작해보는 게 어때요?”
윤재하는 확신이 안 선다는 듯 망설였다.
“어, 음···. 15주년인데 그래도 될까요?”
나는 피식 웃었다.
“15주년이니까 다른 걸 도전해봐요.”
윤재하는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대충 이 정도면 얘기는 끝난 것 같고.
[천마의 고민상담소]에는 오랜 전통이 있다.
고민을 다 들어주고 난 후, 노래를 불러주는 거다.
윤재하의 고민을 듣다보니 즉흥적으로 떠오르는 멜로디가 있다.
이게 윤재하의 스타일에 맞을지, 아닐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윤재하의 팬이라면 이런 노래를 듣고 싶을 것이다.
나는 기타를 잡았다. 코드를 몇 번 돌리자 감이 온다.
윤재하와 시선이 마주쳤고 씩 웃었다.
그 순간 윤재하의 눈앞에 환상이 펼쳐졌다.
.
.
.
메마른 땅이었다.
자연이 돌보다 만 척박한 땅.
윤재하가 그 풍경을 바라보고만 있을 그때, 어디선가 멜로디가 들려왔다.
멜로디를 듣는 순간.
윤재하는 땅에 피어난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거기엔 들꽃이 있었다.
화려하지도 않고 이름도 없지만,
그는 그것이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저 멀리 갈라진 틈새에도,
서 있던 발 아래에도,
시선이 닿는 모든 곳에,
들꽃이 있었다.
그걸 깨달은 순간 모든 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어쿠스틱한 기타 반주.
동요 같은 멜로디였다.
곱고 순한 마음으로만 빚은 듯한.
윤재하는 입을 열었다. 노래가 흘러나온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갑작스럽게 시작된 노래였다.
- 너는 내게 온다
무심히 피어나 내게 온다
처음 듣는 멜로디였지만 윤재하는 따라가는 게 어렵지 않았다.
마치 마음속에 오랫동안 머무르고 있던 걸 꺼내주는 것 같아서.
윤재하는 여전히 환상 속에 있었다.
들꽃을 보며 노래를 불렀다.
- 흑백이던 하루를
넌 다가와 눈부시게 물들여
또다시 설레게 하는
가득 피어난 데이지
차선우는 과연 알았을까.
윤재하의 팬클럽 이름이 ‘데이지’였다는 것을.
.
.
.
어느새 기타 소리가 멈추고, 윤재하의 노래도 멈추었다.
그의 얼굴은 한결 편안해보았다. 나는 그걸 보며 미소를 지었다.
“어때요. 이걸로 신곡을 내도 될 거 같은데?”
*
그날, 윤재하는 기쁜 마음으로 내가 만들어 준 곡을 가지고 갔다.
이런 식으로 곡을 만든 건 처음이었지만, 윤재하는 오히려 후련하게 마음속에 있는 걸 뱉어낼 수 있었다.
이제 윤재하에게는 곡이 완벽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지금 그의 마음을 담은 노래를 하루라도 빨리 팬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윤재하는 꾸벅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태영이 말을 듣고 천마님을 찾아뵙길 잘한 것 같아요.”
윤재하를 도운 건 잠깐의 변덕이었지만, 나도 그 모습을 보니 어쩐지 보람찼다.
윤재하는 이 노래를 ‘15주년 팬송’으로 발매하고자 했다. 자세한 사항은 실무진끼리 만나서 협의하기로 했고, 옥수진이 또다시 바빠졌다.
‘진짜 직원을 더 뽑아야겠다.’
구인공고를 올린 다음, 나는 미니롱에게 ‘눈의 별자리’ 편곡 버전도 보내줬다.
이제 작업이 착착 마무리되는 느낌이다.
그때였다.
“어!”
강여름이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이게 찍혔네요!”
나는 지난번 ‘둠챌린지’를 떠올리며 흠칫했다.
이번에는 또 뭐가 찍혔길래?
강여름이 들고 있는 카메라를 봤더니, 내가 윤재하와 곡을 만드는 과정이 고스란히 찍혔다.
“???”
이게 왜 여기에 찍힌 거지?
의아해하고 있자 강여름이 말했다.
“원래 미니롱 님이랑 작업하는 걸 찍으려고 촬영했는데, 윤재하 님이랑 작업하는 게 찍혔네요!”
나는 순간 당황했다.
‘설마 그럼 그전에 자장가 불러서 다 쓰러뜨리는 것도 잡힌 건가?’
강여름이 아직 거기까지 돌려보지는 않은 것 같으니, 나중에 기회를 봐서 몰래 지우기로 했다.
어쨌든 강여름은 좋은 영상을 하나 건졌다고 희희낙락했다.
내 데뷔일지 영상을 올린 이후 거의 한 달 이상 방치되던 컴백일지를 진행할 수 있는 기회였다.
“한달 동안 컴백일지에 아무 영상도 안 올라갔거든요. 이걸 편집해서 올려도 좋을 것 같아요.”
“그럼 한번 물어보죠.”
윤재하에게 연락을 해서 콘텐츠 협업 제의를 했고,
- 저희가 곡을 만드는 영상이 촬영되었다고요? 오히려 제가 감사하죠. 이참에 저한테도 그 영상 좀 보내주세요.
선뜻 반기며 컴백일지에 올리는 걸 허락해줬다.
“네. 원본이랑 편집본 둘 다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보통 컴백일지는 신곡 발매일에 맞춰서 올라가는데, 날짜는 잡혔나요?”
- 네. 발매는 일주일 뒤에 하기로 했습니다.
“??? 네?”
- 하하하, 그렇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지지부진하던 작업이 거짓말이라는 듯 윤재하는 엄청난 추진력을 발휘했다.
내 말을 따라 디지털 싱글로 내기로 했고, 이미 며칠 전만 해도 앨범 작업준비를 다 마친 후에 엎었다가 재개된 거다.
그래서 크게 많이 준비할 게 없는 모양이다. 녹음만 하고 바로 발매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렇게 미니롱 컴백 이전에 계획도 없이 나의 새로운 노래가 뚝딱 만들어졌다.
윤재하 - DAISY
작곡: 천마
작사: 윤재하
15주년 기념으로 발표된 팬송은, 오랫동안 기다린 팬들을 미친 듯이 설레게 했다.
그들은 윤재하의 컴백일지가 나오자마자 천마의 채널로 달려갔다.
< 특별한 15주년 (3) > 끝
ⓒ 연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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