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에는 한팀 (3) >
문 너머에서 걸어 나오는 차선우를 보며, 길성진은 턱이 빠질 만큼 놀랐다.
“처, 처, 처, 천마?”
길성진은 표정 관리를 할 생각조차 못 했고, 원하는 그림을 얻은 제작진은 신이 나서 그 모습을 촬영했다.
세상에, 천마라니.
하필 와도 천마라니.
머릿속으로는 제작진이 왜 천마를 데리고 왔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제작진이 대단한 사람을 섭외했다고 했을 때 그를 떠올리지 못했다는 게 스스로도 의아할 만큼.
올해 차선우의 폼은 말 그대로 미쳤으니까.
뉴튜브를 시작한 지 반년 만에 200만 구독자를 만들어냈다.
또한 한태영, 미니롱, 젤리크러쉬, 마지막으로 본인까지.
그가 작곡한 모든 노래가 차트인은 기본이고, 만드는 족족 1위를 하며 작곡가로서 명성도 날렸다.
최근 <우리집에 왜왔니>에 나가서 정신 나간 퍼포먼스를 선보인 이후에는, 각종 예능에서도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거기에 작곡 속도가 유난히 빠른 것으로도 유명하다.
길성진도 천마의 라이브 방송에 몰래 들어가서 봤는데, 삼십 분도 안되는 짧은 시간에 곡을 찍어내다시피 했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현 상황에 확실한 퀄리티를 보장할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코 천마만한 사람이 없다.
사실 이건 길성진에게도 유리했다.
‘숨은 고수를 찾아라’에서 천마와 얽힌 적이 있었으니, 이 서사를 이용하면 화제성을 쭉 빨아먹을 수 있다.
제작진이 천마를 뽑은 게 신의 한 수라고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천마를 본 길성진의 가슴은 쿵쿵 뛰기 시작했다.
트라우마에서 벗어난 줄 알았는데, 막상 천마를 마주하니 그때 기억이 떠오른다.
천마가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가져가고, 자신은 사람들에게 조롱을 당하던 기억이.
이름을 검색하면 악플밖에 안 보였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자기를 비웃는 것 같아 밖에 나갈 수도 없던 때가 있었다.
두려웠다.
이제 한 팀이 됐으니 그때와 같은 일이 벌어질 리가 없는데, 길성진은 논리적인 사고를 이어나가지 못했다.
그때였다.
“길성진 씨, 오랜만에 보네요.”
안정적이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이상하게도 길성진은 마음이 편안해지는 걸 느꼈다.
그제서야 길성진은 차선우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었다.
차선우는 어쩐지 따뜻해 보이는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마주하자 길성진은 자신이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다는 걸 깨달았다.
벗어난 줄 알았는데 자신은 아직도 과거에 얽매여있었다.
길성진은 여기서 조금 더 멋진 모습을 보여주기로 결심했다.
과거의 패배를 받아들이고 담담하게 서로를 마주 보는 그런 모습을.
'어쩌면 이건 좀 멋질지도?'
마음을 다잡은 길성진이 먼저 손을 내밀려고 했다. 그때 차선우가 악수를 건넸다.
"방송 잘 보고 있어요. 여전히 노래 잘하시던데요?"
‘어어? 잠시만 내가 먼저 인사하려고 했는데?’
차선우에게 타이밍을 완전히 빼앗겨버렸다. 길성진은 차선우의 손을 어색하게 잡으면서 대답했다.
"아, 네넵... 그... 저도 바, 반갑습니다."
바보같이!
말을 더듬어버렸다.
차선우는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제작진한테 들으니 시간이 얼마 없다면서요? 일단 작업부터 빠르게 시작하죠."
"네. 알겠습니다."
길성진은 차선우에게 리드를 완전히 빼앗겨버렸다.
'에이 씨. 이게 아닌데.'
저기 돌아가고 있는 카메라에 쿨한 모습이 잡혀야 하는데.
하지만 차선우는 이미 제작진과 이야기를 하며 작업실을 향해 가고 있었다.
"같이 가요!"
길성진은 허겁지겁 차선우의 뒤를 쫓아갔다.
*
길성진은 따로 작업실이 없으니, 차선우의 작업실에서 작업하기로 했다.
차선우는 허둥대는 길성진을 보며 생각했다.
'얘는 어떻게 된 게 지난번보다 더 얼빵해졌냐.'
숨고찾에서 봤을 때는 이정도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래도 꼬맹이가 관심 없는척하면서 열심히 회사를 기웃거리는 걸 보니 조금 귀엽기는 했다.
무튼, 시간이 5일밖에 안 남아서 빨리 준비하기로 했다.
아예 새로운 곡을 쓰는 팀도 있는 모양이고, 이쪽도 그럴 수는 있다.
하지만 문제는 길성진이 곡을 익히고 연습하는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차라리 길성진이 잘 부르는 곡을 선택한 후 그걸 편곡하는 게 나아 보였다.
“천ㅁ···.”
“길성진 씨는 부르고 싶은 노래가 있나요? 아니면 최근에 가장 많이 들은 노래라던지?”
차선우와 비슷한 타이밍에 뭔가를 말하려던 길성진은 다시 한번 뻘쭘한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아, 그게. 최근에는 미니롱 님의 '눈의 별자리'를 가장 많이 들은 것 같아요."
“오? 그래요?”
미니롱의 이름이 튀어나와서 의외였지만 차선우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노래가 잘 빠지긴 했죠.”
자기 얼굴에 금칠을 하며 차선우는 생각했다.
‘대신 감정 잡기가 어려울텐데.’
작민지가 돌아가신 아버지를 추억하며 쓴 곡이다. 감정선이 무겁고 깊다.
길성진이 쉽게 이해할만한 감성은 아닌 듯했다.
그래도 길성진은 미니롱의 팬이라며 소심하게 주장했고, 한번 불러보기로 했다.
"흠흠. 그럼 불러보겠습니다."
길성진은 약간은 긴장한 표정으로 악보지를 들었다.
아직 소년의 티를 벗지 못한 미성이 흘러나왔다.
- 시리도록 빛나던 너는 떠올라
별자리가 되어
차선우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지난 숨고찾에서보다 발성도 탄탄해지고 호흡도 좋아졌다.
원래 음역대가 높은 편인지 원키로 부르는데도 흔들림 없이 쭉쭉 올라갔다.
그리고 무엇보다, 길성진이 전달하고 싶은 말이 명확하게 그려졌다.
그건 누군가에 대한 그리움은 아니었다.
- 영원히 아물지 않겠지만
하얗게 떨어지는 눈송이에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눈의 별자리가 되어
소복이 쌓여가네요
자신의 아물지 않는 상처에 대한 이야기였다.
상처는 낫지 못했지만, 별자리가 되어 방향을 제시해준다.
그 해석은 설득력이 있었다.
"괜찮네요. 이 곡으로 합시다."
선곡은 금방 끝났다.
아직 손을 볼 구석은 많았지만, 이 노래의 원래 편곡자가 차선우다.
방금 길성진의 노래를 듣고 난 후 방향성이 확실하게 잡혔기 때문에, 편곡은 빠르게 진행이 되었다.
차선우는 미디 프로그램을 열었다.
복잡한 점들이 화면에 찍히기 시작한다.
마치 흩날리는 눈송이처럼.
길성진은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는 미디가 익숙하지 않지만, 이 점들이 모여 얼마나 아름다운 멜로디를 이루는지는 알고있다.
길성진은 차선우가 작업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와 진짜 잘한다.'
같은 눈의 별자리였지만, 미니롱과는 느낌이 확연하게 달라졌다.
미니롱이 부른 노래는 섬세하고 슬픈 느낌이 들었는데, 천마는 거기에 국악적 요소를 약하게 추가하여 동양풍의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게끔 했다.
특히 차선우가 집어넣은 대금이 인상적이었다.
노래의 시작부터 끝까지 이어지는 가락은, 시련에도 끊임없이 꿈을 쫓는 모습을 그리게 한다.
그것은 길성진이 '눈의 별자리'를 부를 때 생각한 감정과 같았다.
차선우는 마치 길성진의 마음속에 들어가서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직접 보고 온 사람 같았다.
길성진은 천마랑 하게 된 걸 내심 좋아하면서 생각했다.
‘그럼 미니롱 님이 피처링 해주시려나?’
길성진은 미니롱을 좋아했다.
5년 차 무명 가수가 고난을 딛고 성공하는 모습에 반했고, 자신과 서사적으로도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나도 숨고찾에서의 실패를 딛고 우승할거니까!’
언젠가는 미니롱과 같은 무대에 서보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고, 마침 미니롱은 천마 레코즈의 소속 가수였다.
그래서 방금도 미니롱과의 콜라보를 기대하면서 선곡한 게 있었다.
원곡자와 파트 바꿔 부르기는 자주 나오는 콜라보 형식이니까.
그런데 편곡을 들으면 들을수록···
‘...이거 왜 남자 듀엣 같냐?’
아무리 들어도 여자가 부를만한 음역대가 아니다.
길성진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천마님”
“네.”
“근데 피처링은 없나요?”
“있는데요.”
그 말에 길성진이 눈을 반짝였다.
‘그럼 그렇지.’
그는 반쯤 확신하며 말했다.
“그럼 미니롱 님은 언제 뵐 수 있을까요? 빨리 같이 연습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 연습은 저랑 해야죠?”
“네?”
예쁜 누나들과의 연습은 사라졌다.
대신 천마의 지옥에서 온 트레이닝이 시작됐다.
*
천마의 합류가 확정되자마자 홍보팀에서는 관련 보도자료를 뿌리기 시작했다.
쏟아지는 기사량을 보면 하루라도 빨리 이호준의 병크를 묻어버리겠다는 의지가 느껴질 정도였다.
[‘히트메이커 2’ 천마 합류 확정···길성진과 합을 맞출 것]
[숨고찾에서는 악연···‘히트메이커 2’에서 한팀으로?]
[상금 1500만원 뜯어간 천마, 이번에는 구원투수로 등판!]
특히 ‘숨은 고수를 찾아라’에서 있었던 두 사람의 인연을 강조했다.
상금을 뺏겼다느니, 한때 맞짱을 떴다느니 온갖 자극적인 제목을 달았고, 덕분에 병크는 묻혔다.
사람들이 이호준이 터뜨린 병크보다, 천마와 길성진의 스토리를 더 재미있어했기 때문이다.
- 이야ㅋㅋㅋㅋㅋㅋ이게 이렇게 되네
- 제작진이 웬일로 깔끔하게 처리했냐
- 이호준보다 천마가 백배 낫지 솔직히 이호준 히트곡 뭐있음?
ㄴ말은 똑바로 하자··· 이호준이 히트곡은 더 많이 써냈음;;;;
ㄴ 응 올해 천마 차트 1위만 3개야
- 와씨 길성진은 천마 볼때마다 천오백만원 생각날 거 같은데ㅋㅋㅋㅋ
그러면서 예전에 ‘숨고찾’에서 길성진과 천마가 대결했던 장면도 재조명되기까지 했다.
- 숨고찾 링크: https://www.newtube.com/watch?v= ytaeryang114
ㄴ그때 영상입니다
- ???천마 노래 잘하네?
ㄴ뭔 당연한 소릴 하고 있어 지금 차트1등 하고 있는데
- 천마가 부른 노래는 뭔가요?ㅠㅠㅠㅠㅠ
ㄴhea입니다 1집 보너스트랙임
ㄴ감삼다!!!!
덕분에 제작진은 한숨 돌렸다.
“이호준 문제는 잘 마무리된 것 같네요.”
이호준 빠르게 손절 잘했다, 천마 잘 데려왔다 등의 긍정적인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이제 밤을 새서 이호준이 나온 파트만 모조리 쳐내면 된다.
편집실 군만두행이 확정된 피디는 조금 짜증을 내며 말했다.
“이참에 그 새끼 이름조차 나오지 않도록 확실히 묻어버리죠.”
그래서 그들은 연달아 새로운 소식을 쏟아냈다.
바로 프로듀서가 데려온 화려한 피처링 군단에 관하여.
마침 본선 무대가 코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에, 사람들은 떡밥에 눈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히트메이커' 시즌 2 본선 라인업 공개··· 역대급 피처링 군단]
[겨울을 뜨겁게 하는 '히트메이커 2'...과연 1차 본선의 주인공은?]
아이돌부터 밴드의 기라성같은 보컬리스트까지.
한자리에서 쉽게 보기 힘든 가수들을 한자리에 모아두었다.
그중 백미는 단연 매그넘 칸의 참가였다.
[프로듀서 명일 “친구찬스”··· 피처링으로 매그넘의 '칸' 소환]
[프로듀서 명일, “본선 1등은 우리의 것” 출사표 던졌다]
[‘히트메이커 2’에 칸이 깜짝 등장! 매그넘 팬덤이 들썩들썩]
국내에서 남돌하면 매그넘, 여돌하면 위캔걸즈가 아니던가.
칸이 출연한다는 말에 매그넘 팬의 눈이 뒤집혔고, 방청 티켓값이 천정부지로 뛰고 있었다.
암표 시세를 확인하던 강여름이 혀를 내둘렀다.
“아이돌 콘서트도 아닌데 무슨 티켓값이 삼십만 원이냐.”
평소에는 5, 6만 원 선에서 거래할 수 있는 정도였는데, 아무래도 지난 시즌의 매운맛을 본 프로듀서 팀이 작정하고 피처링을 섭외한 탓에 암푯값도 덩달아 올라갔다.
거기에 칸까지 가세했으니 불붙은 집에 기름을 끼얹는 격이었겠지.
최근 동향을 쭉 확인하던 그들은 당연한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무대를 잘 해야겠네요.”
이번 본선 1차 무대에서는 한 사람당 두 표를 행사할 수 있다. 한 표만 허락했다가는 최애에게만 줄 게 뻔했고 이는 팬덤 싸움으로 이어진다.
괜한 분란 및 공정성 논란 방지를 위해, 한 사람당 두 팀에 표를 줄 수 있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그들은 각자의 최애에게 주고 남은 한 표를 가져와야 한다.
그러려면 단순히 노래를 잘 부르는 것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
물론 천마 혼자서 한다면 노래 하나로 다 씹어먹겠지만, 이번에는 길성진과 함께 하는 무대이다.
파트를 나눈 만큼 화력이 줄어들었다고 해야할까.
무대에 집중시킬 화려한 볼거리, 시선을 잡아둘 연출이 필요했다.
참고로 전직 홈마였던 강여름은 팬들이 뭐에 치이는지 잘 알고 있다.
“천마 님이 마침 동양풍으로 편곡했더라고요.”
처음 천마가 편곡한 곡을 듣자마자 떠올랐던 풍경이 있었다.
시린 겨울밤 쏟아지는 달빛.
우뚝 서 있는 전각.
그 위에서 대금을 부는 남자.
흩날리는 푸른 도포 자락.
“그리고 마지막으로···.”
강여름의 눈빛에 광기가 어렸다.
차선우는 약간 떨떠름해하며 말했다.
“마지막도 있나요?”
“신비로움 한 스푼을 넣어줘야죠.”
강여름이 등 뒤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탈?”
눈에서 코끝까지 얼굴의 반을 가릴 수 있는,
하얀색 호랑이 탈이었다.
< 이번에는 한팀 (3) > 끝
ⓒ 연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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