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에는 OST (2) >
천마신교 레코즈의 총관인 옥수진은 오늘도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
직원이 늘어나며 팀을 나누고 일을 세분화했다.
그래서 예전처럼 옥수진이 직접 모든 실무를 처리하지는 않지만, 결국 전체적인 업무를 총괄하는 역할은 옥수진의 차지였다.
그것만으로도 그녀의 책상에는 하루에도 결재판이 수두룩하게 쌓였다.
게다가 천마는 요즘 정말 잘나갔다.
이제는 겨울이 돼서 행사 무대 섭외는 많이 없었지만, <우리집에 왜왔니>와 <히트메이커> 같은 예능에서 활약한 덕분에 각종 방송 섭외가 끊이질 않고 있다.
아무래도 방송은 대중과의 소통창구가 되기도 하고 천마의 이미지 형성에 영향을 끼칠 수 있어서, 옥수진이 직접 체크하는 편이었다.
오늘도 옥수진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옥수진은 문서작업을 하는 와중에도 친절한 목소리를 장착한 후 말했다.
“네. 천마신교 레코즈의 옥수진입니다."
- 안녕하세요. 김경수 피디입니다.
“네. 김경수 피디님. 안녕하세요!”
상냥하면서도 사무적인 목소리로 대답하던 옥수진은 어디서 많이 들어본 피디의 이름이라는 걸 깨달았다.
‘김경수라면 사극으로 유명한 피디님 아닌가?’
입봉 이후 거의 사극만 연출한 걸로 알고있다.
그만큼 히트작들도 많이 만들어냈고.
3년 전쯤에 재미있게 봤던 ‘홍옥화’라는 퓨전 사극 드라마도 이 피디의 작품이라고 알고 있는데.
'이 사람이 왜 천마에게 연락을 했을까?'
메인 피디가 직접 연락을 한 걸 보면 아무래도 꽤 큰 건인듯싶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옥수진은 컴퓨터에서 시선을 떼고 통화에 집중했다.
김경수 피디는 바로 용건을 말했다.
-이번에 넷플렉스와 함께 제작하는 드라마를 맡게 됐습니다. 아직 가제이기는 하다만, <대한의 검성>이라고 들어보셨는지 모르겠네요.
“대한의 검성이요?!”
옥수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당연히 들어봤다.
그녀는 매일 아침마다 수십, 수백 개의 기사를 모니터링하고 연예계 동향을 놓치지 않으려고 항상 최신 정보를 업데이트한다.
그리고 '대한의 검성'은 최근 기사에 자주 오르내리는 이름이다.
넷플렉스에서 거액의 제작비를 투자했다는 드라마.
심지어 그 드라마가 구한말의 항일운동을 다루는 사극이라고 해서 더욱 화제가 됐다.
'김경수 피디가 이 드라마의 연출을 맡았구나.'
옥수진은 김경수 피디가 왜 전화했는지 슬슬 감이 왔다.
‘그럼 OST를 만들어달라는 건가?’
이걸 음악감독도 아니고 김경수 피디가 직접 연락했다는 게 의아하긴 했지만, 그녀가 예상한 건 얼추 들어맞았다.
김경수 피디는 약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 저희 작가님이 천마 님을 정말로 마음에 들어하셔서요.
신민희 작가는 피디에게 주구장창 천마의 영상을 보내더니, 며칠 뒤 회의에서 천마가 메인테마곡 하나를 작곡해줬으면 한다고 열렬하게 주장했다.
김경수 피디 역시 천마를 좋게 봤다. 천마는 올해 가장 유명한 작곡가였고, <히트메이커>에서 선보인 편곡만큼만 OST가 나온다면 딱 괜찮을 거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관련사항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한 후, 대화가 마무리 되었다.
“피디님께서 좋게 봐주시니 감사하네요. 일단 시놉시스를 보내주시면 저희 대표님에게 함께 제안을 전달할게요.”
통화를 마친 옥수진은 뭔가 신기했다.
'내가 김경수 피디와 통화를 했다고?'
그것도 OST를 만들어달라고 직접 연락을 다 해주었다.
물론 드라마 작가가 천마의 무대에 푹 빠지며 생긴 이례적인 일이긴 했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마치 인정을 받는 기분이랄까?
기분이 좋은 것과 별개로 업무량은 차곡차곡 쌓였다.
최근 무대뽕에 차오른 천마가 콘서트를 하고 싶다고해서 준비하고 있었으며, 여기에 OST 업무까지 처리하려면 얼마나 더 바빠질지 모른다.
힘든 일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지만, 옥수진은 즐겁게 일하고 있었다.
그녀는 천마를 방송으로 처음 봤을 때부터 빛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이제는 다른 사람들도 그걸 알아주는 거 같아서 기뻤다.
‘그러고보니 벌써 1년이 다 되어가네.’
천마를 만난 지 1년 가까이 되었다.
그 사이 천마는 점점 지평을 넓혀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음악 방송만 하던 사람이었는데.
작곡가로 이름을 날린 후, 정식 앨범으로 데뷔도 하고, 예능에도 나오고 이제는 프로듀서까지.
단 1년 만에 벌어진 일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옥수진은 연습실을 힐끔 보았다.
천마는 길성진과 함께 무대 연습에 한창이었다.
지난 본선 1차 경연에서 천마와 길성진의 팀이 만든 무대는 대단했다.
아직도 두 사람이 부른 '눈의 별자리'는 음원차트에서 1위를 하고 있다.
덩달아 길성진의 인기도 크게 올라갔다.
전에는 구설수가 많아서 호불호가 크게 갈렸다면, 이제는 좋아하는 사람이 확연히 많아졌다.
‘실수만 안하고 이대로만 간다면 <히트메이커>에서도 무난히 우승하겠는데?’
그리고 천마는 음악에 있어서 실수를 하는 사람이 아니니, 걱정은 전혀 되지 않는다.
한참 일을 하고 보니 <대한의 검성> 측에서 보내온 시놉시스가 도착했다.
옥수진은 제작사에서 보내온 시놉시스와 서류를 검토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마 님이 재미있어하시면 좋을텐데."
시놉시스를 읽어보니 작가가 왜 천마에게 꽂혔는지 알 거 같다.
전혀 다른 시대의 사람이긴 하지만 주인공과 천마는 비슷한 면이 있었다.
다만 이거, 내용이 좀 막장이다.
*
나는 길성진과 함께 준결승전 무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편곡은 진작에 끝났고, 본무대를 위한 트레이닝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길성진은 세 시간을 못 버티고 나가떨어졌다.
나는 이해가 안 됐다.
"이걸 왜 못하지?"
길성진은 인간적으로 이렇게 빡세게 연습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며, 자기는 무대 체질이니 가면 잘 할 수 있다는 개소리를 해댔지만.
나는 그냥 무시했다.
밖에서 옥수진의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 대한의 검성이요?!
“검성?”
옥수진의 입에서 검성이 나오다니?
반사적으로 밖으로 귀를 기울였다.
내력을 귀에 집중시키자 두꺼운 방음벽 너머로 옥수진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작가님 어쩌고··· 피디님 저쩌고···하는 걸 보니 방송 프로그램인 거 같은데.
나는 고개를 기우뚱했다.
‘무슨 방송이길래 검성이 나오는 거지?’
갑자기 무림에서 만났던 검성 새끼가 생각난다.
만날 때마다 여유로운 척 실실 쪼개는 게 마음에 안 드는 놈이었다.
정의의 화신인 것처럼 부르짖으며 ‘무림맹의 협의가 결국 세상을 지배할 것이다’라고 지껄이더니, 뒤로는 사황성에 동맹 제안을 넣은 늙은이다.
뭐, 그러다 사황성주와 나란히 모가지가 따였지만.
그렇게 잠깐 추억에 사이, 길성진은 드러누워서 쉬다가 나에게 걸렸다.
“다시 시작하자.”
“...집에 가고 싶어요.”
옥수진이 방에 들어온 건 길성진이 두 번 정도 더 죽었을 무렵이었다.
그녀의 손에는 두께가 있는 종이 뭉치가 들려있었다.
‘저게 그 검성?’
아까 전화로 말하던 검성과 관련된 방송인 게 틀림없다.
호기심이 불쑥 치밀어올랐지만 태연한 척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
"조금 전에 <대한의 검성> 제작사에서 OST 제작에 참여해줄 수 있냐고 제안이 왔어요."
“OST?”
생각도 해본 적 없는 분야였다.
지금까지 나는 많은 사람을 위해 곡을 썼다.
라방에서 [천마의 고민상담소]를 하며 고민하는 사람을 위해 노래를 불러줬고, 젤리크러쉬나 윤재하와 같이 각자의 사정이 있는 사람을 위해서도 작곡했다.
누군가의 세계에 내 흔적을 남기고 가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그런데 그게 가상의 세계라면?
호기심을 넘어선 흥미가 느껴졌다.
“재미있겠는데?”
“그런데 천마 님이 지금 일이 많아서요. OST까지 하면 바쁠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나는 지금 하고있는 일을 떠올렸다.
먼저, 내년 초에 콘서트를 하기로 결정했다. 세트 리스트를 확정하고 무대 준비도 슬슬 들어가야 하고.
또 며칠 뒤에는 <히트메이커> 준결승전 녹화가 있다.
연습은 길성진이 하면 되고 무대준비는 강여름이 하고 있지만, 전체적인 조율은 나의 몫이다.
마지막으로는 뉴튜브 라이브방송.
일주일에 2회 있는 [천마의 고민상담소].
이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간이다. 사람들의 사연을 듣고 노래를 부르는 건 힐링하는 느낌이다.
그리고 주말마다 하는 [주간곡소리].
어? 이건 안 해도 될 거 같은데.
“그럼 주간곡소리를 뺄까?”
“조회수가 가장 잘 나오는 게 주간곡소리인 건 아시죠?”
쳇.
옥수진이 칼같이 잘라냈다.
나는 말했다.
“OST 작업까지 충분히 소화할 수 있을 거 같아. 곡 쓰는 데 오래 걸리는 것도 아니고.”
“하긴. 천마 님이라면 몇 시간 만에 뚝딱 만들어내니까요. 그러면 이거 한번 읽어보시겠어요?”
옥수진이 종이 뭉치를 건네며 말했다.
맨 첫 장에는 <대한의 검성 - 시놉시스>가 적혀있었다.
내가 그렇게 궁금해하던 그놈의 검성이었다.
“대한의 검성? 대한민국에 검성이 워프하는 현대 무협 판타지인가?”
“아니요. 구한말을 배경으로 한 시대 액션활극이에요.”
시놉시스를 읽기 전 옥수진이 간략하게 설명해줬다.
대한제국이 망해가고 일제의 암운이 드리우던 시기.
곡산 척씨 가문의 마지막 후손인 주인공은, 척준경이 남긴 비급을 읽다가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리고 비급 안에서 조상인 척준경의 도움으로 검술을 배우고 고수가 된다.
돌아와 보니 시간은 하나도 흐르지 않았다.
비급 안에서 얻은 힘으로 주인공은 일제의 앞잡이들과 대한제국을 먹어 치우려는 세력들을 부순다.
“주인공이 일본에 남아있던 사무라이와 백 대 일로 싸우고도 이겨내고, 검으로 총알도 베어내고···. 여튼 개연성은 막장인데 시원시원해서 좋더라고요.”
“...?”
그런데 잠깐. 이거 어디서 들어본 이야긴데?
내가 무협지 ‘음공천마’에 들어가서 무공을 배우고 돌아온 과정이랑 똑같잖아!
나는 시스템 창의 도움을 받았고, 저쪽은 척준경이라는 조상의 도움을 받았다는 점이 다르지만 어쨌든.
묘하게 내 이야기와 겹치면서 동질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러고보니 같은 검성이라도 한자가 다르다.
무림맹주 개새끼는 이룰 성이고, 이쪽은 별 성이다.
거기에 시놉시스를 읽으니 ‘검성’이 붙은 이유도 있었다.
일본을 쓸어버리고 난 후 주인공이 항상 오망성 표식을 남겨둬서 검성이라는 별호가 붙은 모양이다.
‘호쾌하고 의로운 면이 꼭 나를 닮은 것 같군.’
왠지 정이 간다.
그때 옆에서 옥수진의 이야기를 듣던 길성진이 배를 잡고 웃었다.
“하하핰, 책 속으로 들어가서 무공을 배운다고요? 우리 엄마가 보는 아침드라마도 이정도는 아닌데. 그런 거 있으면 나도 벌써 무림일통 했···켁! 왜 때려요!”
*
<대한의 검성> 음악감독은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갑자기 천마는 왜 부르는 거야.'
오늘 아침 회의에서 천마에게 메인테마곡을 맡겨보자는 말이 나왔다.
이번 드라마에 들어갈 메인테마곡은 -당장 정해진 것만- 8개쯤 된다.
OST 제작회사에 맡긴 것도 있지만, 그중에는 음악감독이 직접 쓴 곡도 있다.
그런데 하필 천마에게 맡긴다는 곡이, 주인공이 적들을 쓸어버리며 오망성 표식을 남기는 순간마다 나오는 곡이다.
당연히 드라마에서 서사적으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장면에서 나오는 주제곡인 만큼, 음악감독도 욕심을 내고 있던 파트다.
“천마가 히트곡을 많이 냈긴 했지만! OST는 예술이란 말입니다. 아이돌 음악을 찍어내는 거랑 달라요. 극의 서사를 녹여내고 작중인물의 마음을 대변하는···.”
음악감독이 열변을 토했지만 천마에 꽂힌 작가의 귀에는 도달하지 않았고, 김경수 피디도 천마를 마음에 들어했다.
“에이, 감독님. 그래도 한번 만나봅시다! 천재작곡가래요!”
나도 왕년에 천재 소리 들었거든요!
그러나 작품을 이끌어가는 두 주역이 콜을 외치니, 음악감독은 더 반대할 수가 없었다.
‘미팅한다고 바뀌는 건 없을 거다.’
그는 굴러온 돌이 아니꼬웠다.
< 이번에는 OST (2) > 끝
ⓒ 연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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