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음공으로차트올킬-61화 (61/191)

< 작곡가인데 왜 검술을 잘해? >

나는 조금 전부터 혼자서 얼굴색이 파래졌다 빨개졌다 하는 최기훈을 보았다.

생각이 표정에 모두 드러나는 사람이라 놀려먹기 좋을 듯했다.

그래서 그쪽이 만든 곡을 좀 들어보자고 하니, 최기훈 감독이 기겁하며 손을 내저었다.

“에? 그···제 건 안들으셔도 될 거 같습니다.”

태세전환이 아주 우디르급이다.

이럴 거면 견제는 왜 했냐.

먼저 기싸움을 걸어온 것치고 최기훈 감독은 너무 재빠르게 꼬리를 말았다.

이러면 재미가 없는데.

“그러지 마시고 한번 들려주시죠. 감독님이 생각한 주인공은 어떤지 궁금하네요.”

“어휴, 시안이라서 정말 별 거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그냥 천마 님 곡으로 진행하시죠.”

“원래 곡 수집은 많을수록 좋다잖아요.”

"아니, 아니요. 촬영 일정도 빠듯한데 그냥 넘어가는 걸로 하죠."

촬영 일정이 빠듯한 거랑 음악 하나 듣는 거랑 무슨 상관인지는 모르겠다.

쿡쿡 찌를 때마다 시뻘게지는 얼굴이 재미있었지만 이쯤에서 넘어가기로 했다.

어쨌든 최기훈 감독은 세션 섭외를 비롯한 지원을 전폭적으로 약속하며 재빠르게 회의를 마무리 지었다.

얼렁뚱땅 끝나버린 회의에 나는 시계를 보았다.

'이거 너무 빨리 끝난거 아닌가?'

적어도 한두 시간은 걸릴 줄 알았는데, 무슨 삼십 분도 안 돼서 끝나버리다니.

회의를 마무리 지은 최기훈 감독은 급한 일이 있다며 허둥지둥 나가버렸고, 나도 이제 집에 돌아갈 채비를 하려는 때였다.

웬 여자가 헐레벌떡 들어왔다.

“천마 님!”

“누구세요?”

“<대한의 검성>을 집필중인 작가 신민희라고 합니다. 대본집에 싸인이랑 같이 보내드렸는데.”

나는 대본 앞장에 있던 친필사인을 떠올렸다.

- 좋은 곡 부탁드려요♡십만교인 신민희

···누군지 기억났다.

아까 회의 전에 신민희 작가가 사고가 나서 늦게 온다는 말을 들었긴 했다.

“사고난 건 좀 괜찮으신가요?”

“가벼운 접촉사고라서요. 보험 불러서 잘 해결했어요. 혹시 회의는 벌써 끝난 건가요?”

“네. 방금 끝났어요.”

“그렇군요···.”

신민희는 대놓고 아쉬워했다.

'천마님이 작업하는 걸 직접 보고 싶었는데. 그럼 이제 돌아가시려나?'

천마와 좀 더 얘기해보고 싶던 신민희는 이내 잡아둘 명분을 생각해냈다.

마침 지금 촬영이 진행 중이다.

그리고 오늘 찍는 씬이 천마의 곡이 쓰일 ‘그 장면’이었다.

‘촬영현장을 직접 보면 곡 작업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영감을 받아서 더 좋은 노래를 만드실수도 있는 거잖아.’

물론 그런 마음만 있었던 건 아니지만, 신민희는 일단 제안했다.

“천마님! 혹시 뒤에 일정이 있으실까요? 괜찮으시면 촬영장에 한번 구경오실래요?”

영감이 어쩌고 하는 장황한 설명을 들은 나는 궁금해졌다.

곡이야 이미 다 나왔지만, 주인공이 적을 쓸어버린 후 표식을 남기는 장면은 나도 어떻게 연출될지 궁금하긴 하다. 그리고 드라마 촬영현장은 내가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곳이기도 하고.

‘마침 다음 스케줄도 없으니 한번 가볼까?’

“그럼 한번 방문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아싸!"

“?”

그렇게 우리는 경기도에 있는 한 세트장에 방문했다.

대규모 액션씬을 촬영하고 있는지, 전통 마을처럼 생긴 세트장에는 주인공이 일본 무사를 상대로 다대일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주인공 역을 맡은 배우는 진지한 표정으로 칼을 휘두르고 있었는데.

아주 가관이었다.

“하반신에 빈틈이 대놓고 보이는데 왜 엄한 곳을 찌르냐.”

“허리에 단검을 차고 있는데, 왜 검을 던져?”

무림이었으면 검을 던지는 순간 주인공은 죽었다.

긴장감이라고는 손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다.

이후 검을 던진 주인공이 단검으로 싸우며 치열한 근접전이 연출됐지만,

“칼 저렇게 잡으면 손가락 다 짤리는데.”

파지법부터 잘못됐다. 마지막으로 남은 적을 향해 단검을 던질 때는··· 자세는 엉망이었지만 맞는 사람이 잘 맞아줘서 멋있게 보이긴 했다.

그렇게 속 빈 강정 같은 대규모 전투씬이 끝나고, 내가 제일 기대하는 일장기에 오망성을 박아넣는 씬이 시작되었다.

“이게 뭐야?”

멋대가리가 없다.

심지어 오망성을 그리는 장면을 한번에 촬영하는 게 아니라, 컷으로 잘라서 붙이고 있다.

이건 무슨 색종이도 아니고.

피디 역시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연신 '다시'를 외치며 촬영장의 분위기를 무겁게 만들고 있었다.

대본으로 읽을 때는 멋있게 느껴졌는데, 실제로 촬영되는 모습을 보니 김이 팍 샌다.

‘누가 요령만 알려주면 훨씬 나아질 것 같은데.’

그때였다.

“어억!”

주인공 역할을 맡은 배우가 손목을 붙잡고 주저앉았다.

*

이도형은 <대한의 검성>에서 주인공을 맡은 배우이다.

그는 무명 시절이 길었지만 연극판을 전전하면서 탄탄한 연기를 쌓아왔고, 이후 사극 드라마에도 몇 번 출연하며 이름을 알렸다.

그런 그에게 날아온 <대한의 검성> 캐스팅 제의.

예전에 찍은 사극에서 합을 맞춰본 피디가 이도형을 눈여겨보고 불렀다고 한다.

이도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콜을 외쳤다.

대본도 재미있었고, 피디와도 호흡이 척척 맞았으며, 뛰어난 동료 배우들까지.

모든 게 최고였다.

하지만 이 완벽한 조건 사이에서도 아쉬운 게 딱 하나 있었으니.

'액션씬이 유난히 어렵네.'

이도형도 사극 짬밥이 있으니 기본적인 액션은 할 줄 안다. 드라마를 찍기 전에도 액션스쿨을 다니며 필요한 장면을 연습했다.

다만 이도형은 <대한의 검성> 액션이 이렇게 본격적일 줄은 몰랐다.

예전에 사극 드라마를 몇 번 찍었을 때는 인물 간의 갈등이나 러브라인이 주된 흐름이었다면, 이번에는 진짜 ‘검성’이 액션을 펼치는 게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말을 타면서 활 쏘는 건 기본이고, 담장을 타고 지붕 위를 날아다니기도 했다.

방금 전에 한 대규모 액션씬에서 합을 맞추는 것도 어려웠다.

잘못 빗맞기라도 하면 시퍼렇게 멍이 들어 온몸이 멍투성이였다.

그리고 대망의 오망성 표적 만들기.

‘아, 이건 너무 어려운데.’

씬을 찍기 전에 무술 감독에게서 특훈을 받았다.

하지만 벽에 붙어있는 깃발을 칼로 베어 제대로 베는 게 쉽지가 않다.

다섯 번 칼을 휘두르는데, 세 번쯤 찢고 나면 깃발이 흐물흐물해져서 칼이 잘 들어가지도 않는다.

이도형이 긴장한 표정으로 서자 무술 감독이 어깨를 두드렸다.

“연습한 대로만 합시다.”

···연습할 때도 제대로 못 했는데요.

그가 너무 굳어있자 김경수 피디도 말했다.

“들어와서 수장의 목을 따고 깃발에 표식을 남기는 것까지 롱테이크로 가는 게 제일 좋지만, 정 안되면 컷을 잘라 붙이면 됩니다. 너무 부담 갖지 마시고요.”

하지만 말을 하는 피디의 눈빛에는 기대감이 가득했다.

그리고 이도형도 욕심이 났다.

칼질하는 시늉만 하거나 대역을 써도 되지만, 극의 하이라이트인 만큼 제대로 해보고 싶었다.

물론 마음만 그랬다는 것이다.

“컷. 다시!”

“컷. 다시!”

“커어어엇. 다시!”

무술 감독이 축 늘어진 이도형을 달래주었다.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은데요? 두 번 휘두른 다음에 손목 스냅을 이용해서 확 올려버리세요.”

“그런데 힘을 준 채로 손목을 돌리면 아프던데요.”

“물론 그때는 살짝 힘을 빼야죠. 촤-착-한템포 쉬면서 스냅을 줘서 돌리고 다시, 타닥탁! 아셨죠?”

“알겠습니다. 다시 해보겠습니다.”

이도형은 힘없이 대답했다.

계속되는 NG에 이도형은 심적으로 부담이 있었고, 하필 날씨도 추워서 주변 관절과 근육이 굳었다.

거기에 직전 씬이 대규모 액션씬이라 몸에 피로가 누적되었다.

그 결과,

“어억!”

부상으로 이어진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이도형은 손목을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하지만 고통보다는 걱정이 먼저 들었다.

‘나 때문에 촬영이 지연되면 어떡하지?’

이도형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자기가 못해서, 촬영을 망쳐버린 것만 같았다.

사람들이 우르르 그를 향해 몰려오며 손을 뻗었다.

“도형 씨, 괜찮아요?”

“다친 데가 손목이에요? 느낌은 있어요?”

그리고 정신없이 들려오는 웅성거림 사이로, 묘하게 시선을 잡아끄는 목소리가 있었다.

“잠시 손 좀 봅시다.”

이도형은 저도 모르게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차선우였다.

차선우는 손목을 만지더니 혀를 찼다.

“무리하게 동작을 이어나가니까 이렇게 되죠.”

“죄송합니다.”

“저한테 죄송할 건 없고요. 뭐, 크게 다친 건 아닙니다. 추운 날씨에 과하게 움직여서 근육이 좀 꼬였네요.”

“그런 것치고 너무 아픈데요.”

누가 손목을 송곳으로 후벼 파는 것처럼 아프다.

“엄살 피우지 마시고.”

“...엄살 아닌데.”

차선우가 한숨을 푹 쉬더니, 내공을 밀어 넣어 주변 근육과 관절을 살살 풀어줬다.

따뜻한 기운이 손목을 타고 올라오는 순간 통증이 깨끗하게 사라졌다.

이도형은 눈을 끔벅거렸다.

“진짜로 아프···지가 않네?”

이도형은 조심스럽게 손목을 돌려보았다.

누적된 피로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기름칠이라도 한 것처럼 부드럽게 돌아가는 손목.

“혹시 의사 선생님?”

“작곡가입니다.”

“...네?”

갑자기 작곡가라니?

이도형은 당황했지만, 메인테마곡을 만들려고 왔다가 촬영현장에 들렀다는 설명을 듣고 납득했다.

‘경락마사지를 진짜 잘하시는 작곡가님이구나.’

덕분에 손목이 쌩쌩하게 돌아왔다. 컨디션이 좋아지니 자신감도 돌아왔다.

이대로라면 오망성을 한번에 그릴 수 있을 거 같다.

이도형이 다시 촬영을 준비하려는 순간, 차선우가 먼저 떨어진 칼을 집어 들며 말했다.

“그리고 오망성 그릴 때 말입니다. 파지법이 잘못돼서 계속 실수가 생기더라고요.”

차선우의 독문 무공이 음공이기는 했지만, 검술에도 조예가 깊었다.

천마에게만 전승되는 무공에 검술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차선우가 본격적으로 검을 잡았다.

이도형은 검도를 해본 적은 없지만, 차선우의 자세에서부터 남다른 기세가 느껴졌다.

“두 번 칼질한 후 중지에 힘을 빼고, 손에서 칼을 굴린다는 느낌으로 올려치세요. 이렇게.”

촤촥 - 촤촤착

차선우의 검이 물 흐르듯 휘둘러졌고, 깃발에는 예쁜 별 모양이 그려졌다.

그 순간 김경수 피디는 대본을 떨어뜨렸고, 옆에 있던 무술 감독도 깜짝 놀랐다.

마지막으로 이도형이 턱을 툭 떨어뜨렸다.

“...왜 작곡가세요?”

*

자세를 몇 번 잡아주자, 이도형은 금방 오망성을 새겨넣었다. 그는 좋아하며 나한테 속삭였다.

“저희 무술 감독님보다 잘 가르치시는 거 같아요.”

피디 또한 내가 처음에 새긴 별 모양을 보고 연신 감탄을 해댔다.

“와, 대칭이 완벽한 것 좀 보세요. 자로 재서 자른 줄 알았습니다. 이거 소품으로 쓰려고 하는데 몇 개만 더 만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무술 감독은 나와 액션에 대한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고 싶어 했다.

“20명 이상 투입되는 난투에서는 사람이 워낙 많다 보니 손발 맞추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천마 님이 실전 무술에 뛰어나신 것 같은데 조언을 구하고 싶습니다.”

나는 대형 액션씬에서 난 개판을 떠올리고 조언을 해주려고 했다. 그랬더니 손볼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다 뜯어고쳐야 할 판이라서 그냥 포기했다.

“드라마잖아요. 진짜로 싸울 것도 아닌데 대충하시죠?”

나는 그 길로 사무실에 돌아왔다. 피디가 고맙다며 소고기를 사준 덕분에 배가 빵빵했다.

푹신한 의자에 몸을 기대고 쉬고 있는데, 책상 위에 올라온 새로운 서류가 보였다.

‘내 콘서트 건이구나.’

지난번 <히트메이커> 1차 본선이 끝나고서 무대뽕이 차올라서 옥수진에게 콘서트 준비를 해보자고 말했었다.

'그게 얼마 안 된 거 같은데.'

나는 옥수진의 일처리 속도에 다시 한번 놀라며 서류를 읽어보았다.

무대 대관 현황부터, 음향 팀 컨택과 무대장치 대여 업체 리스트까지 상세하게 적혀있었다.

척척 진행이 되고 있군.

총관 하나는 확실히 잘 뽑았다는 생각이 다시 한번 든다.

‘콘서트 무대라.’

<히트메이커>에서 무대를 하며 확실히 느꼈다.

무대에서는 노래 그 이상을 보여줄 수 있다는 걸.

내가 노래를 만들 때 떠올린 심상을, 시각적 연출을 통해 관객에게 구체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건 큰 장점이다.

그리고 나는 콘서트를 찾아온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게 있다.

내 인생의 장르가 바뀌었던 순간에 대해서.

20살의 평범한 청년이 천마가 되었던 그 순간을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

“생각난 김에 한번 해볼까.”

아주 충동적인 일이었다.

콘서트에서 2집 앨범을 공개하기로 한 일은 말이다.

< 작곡가인데 왜 검술을 잘해? > 끝

ⓒ 연태량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