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마의 세계로 (1) >
타임랩스.
시간의 흐름을 압축해서 보여주는 영상 기법이다.
마치 빨리 돌리기를 하는 것처럼.
또한, 차선우의 2집 앨범 타이틀곡 제목이기도 했다.
「Time Lapse」
차선우는 찰나의 순간에 70년 인생을 살았다.
그리고 이번 타이틀곡에 그 찰나이자 70년을 담기로 했다.
주제가 정해지니 곡 작업은 언제나 그렇듯 금방이었다.
다음날 출근한 옥수진은 하룻밤 사이에 2집 앨범이 만들어진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 어제 드라마 메인테마곡 미팅하러 가지 않으셨어요?”
그런데 돌아와 보니 드라마의 메인테마곡은 당연하다는 듯이 완성되어 있고, 따끈따끈한 신상 앨범까지 나와 있다.
옥수진은 벌써 1년 가까이 천마를 봐왔지만, 경이로운 작업속도를 볼 때마다 아직도 감탄이 나온다.
속도가 빠르다고 해서 퀄리티가 떨어지는 건 아니었다. 분명 이번에도 그의 노래는 사람들을 사로잡겠지.
차선우가 말했다.
“한번 들어볼래?”
“당연히 좋죠.”
옥수진은 평소에 천마가 만들어준 안마송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안마송을 들으면 몸이 개운하고 머릿속이 맑아지는 기분이라 상쾌하게 아침을 맞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 아침은 신상 곡으로 시작하기로 했다.
천마의 신곡이라니.
가슴이 두근거리기까지 한다.
'이게 바로 덕업일치의 제일 큰 장점이 아닐까?'
자신이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곡을 누구보다 빨리 들을 수 있는 특권.
옥수진은 그 설렘을 만끽하기로 했다.
부푼 마음을 안고 헤드셋을 끼는 순간, 눈앞에 새로운 풍경이 펼쳐졌다.
.
.
.
그녀는 거리에 있었다.
사람들이 여유롭게 지나다니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거리.
귓가에는 멜로디가 들려왔다.
- 멈춘 시간 속 홀로 나아가
Take my life, Take my time
몸을 나른하게 만드는 느긋한 선율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거리가 멈춰버렸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던 사람도, 벤치에 앉아 신문을 읽던 사람도, 산책로를 따라 조깅을 하던 사람도.
모두 멈춰있었다.
온통 무채색으로 정지한 거리.
그 사이에서 한 청년을 발견했다.
모두가 멈춘 시간 속에서 그는 홀로 움직이고 있었다.
유일하게 색을 지닌 청년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 시간은 빛을 잃고
알고 있던 세상이 사라져도
live my life live my time
단순하고 여유로운 피아노 루프가 텅 빈 시간 곳곳을 메운다.
톡
하얀 도화지 위에 물감이 떨어지듯.
청년은 자신의 색으로 거리를 채워나간다.
느긋하게 반복되던 멜로디가 갑자기 빨라지기 시작한다.
빠르게, 빠르게, 빠르게.
거리에 색이 채워진다.
청년의 노래 역시 빨라지며 이제는 흡사 주문을 외우는 것처럼 들린다.
- take my life take my time
my life my time
life time life time life time···.
멜로디가 점점 고조되며 절정에 이루던 순간
딱!
핑거스냅과 함께 곡이 전환된다.
인생이 바뀌듯이.
멈춰있던 시간이 침묵을 깨고 움직이는 순간이었다.
.
.
.
옥수진은 눈을 떴다. 노래가 주는 여운이 온몸 가득 쌓였다.
갇혀있던 시간 속에서 막 풀려난 듯한 느낌에, 옥수진은 가볍게 고개를 한번 흔들었다.
천마의 1집 앨범이 주는 느낌과는 완전히 달랐다.
1집 ‘둠둠둠’은 패기가 넘치는 곡이다.
북을 난타하는 것처럼 반복되는 ‘둠둠둠’은, 세상 모두에게 자신을 주목하라고 알리는 노래였다.
2집 ‘Time Lapse’에는 1집과 같은 박력은 없었다.
대신 자연스럽게 사람을 끌어당긴다.
단순한 멜로디 루프 하나로만 이어지지만, 그 멜로디가 핑거스냅과 함께 화려하게 변주되는 게 인상적인 곡이다.
특히 절정으로 치닫기 직전, 주문을 외우듯 멜로디가 점점 빠르게 반복되는 부분에서 몰입감이 장난 아니었다.
마치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가, 어디론가 알지 못하는 세상으로 떨어질 것같은 기분이 들게 한다.
옥수진이 말했다.
“그러니까 이 노래를 콘서트에서 최초 공개를 하자는 거죠? 저는 좋은 거 같아요.”
콘서트에서 신곡을 공개하는 건 종종 있는 일이기도 하고, 첫 콘서트에서 팬들에게 신곡을 먼저 공개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다만 음원이 아니라 무대에서 공개하는 만큼, 시각적인 연출을 신경 써서 곁들여야 하는데.
'무대에서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옥수진은 동영상을 보듯이 생생하게 그려지는 그림을 떠올렸다.
멈춰버린 시간, 멈춰버린 사람들.
그 속에서 혼자 노래를 부르는 청년.
그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가는 생각을 옥수진이 내뱉었다.
“조각상은 어떨까요?”
뜬금없는 단어에 차선우는 감이 안 온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조각상? 무대 위에 조각상을 세우자고?”
옥수진은 빙긋 웃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방금 떠오른 건데요···.”
천마신교 역사에 길이 남을 엔딩 무대의 시작이었다.
*
2집 앨범과 공연 준비는 원활하게 진행되고 있었었다.
천마신교 레코즈의 직원들은 매일같이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했다.
그리고 얼마전에 <히트메이커> 결승전도 끝났다.
길성진은 그토록 바라던 미니롱과의 합동 무대를 하고, 결국 우승을 이뤄냈다.
벌여놓은 모든 일이 하나씩 마무리되고, 천마는 느긋하게 공연 준비에 몰두하는 사이.
<대한의 검성> 편집실에서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김경수 피디, 신민희 작가, 최기훈 음악감독, 무술 감독까지.
드디어 완성된 클라이맥스 장면을 감상하러 온 것이다.
계속된 밤샘 근무로 정신이 살짝 이상해져 버린 피디가 음침하게 웃었다.
“흐흐흐. 이렇게 잘 빠질 줄은 몰랐습니다. 천마 님을 모셔오길 잘했어요.”
“어때요. 제 말이 맞죠?”
천마를 데려오자고 강력히 주장한 신민희 작가의 콧대가 조금 높아졌다.
피디가 장면을 재생했다.
해당 장면은 중간보스급인 적과 주인공이 대결하는 장면이다.
이완용을 모티브로 한 매국노가 주인공의 정체를 알아낸다.
그리고 스무 명의 낭인 무사를 보내 주인공 척대광을 척살하는 계획을 세운다.
척대광을 둘러싼 스무 명의 일본 낭인 무사.
말 한마디 없이 격돌한다. 대화는 오가지 않는다.
그저 수십 개의 칼날이 휘둘러지고 그 자리엔 선혈만이 피어난다.
다만 그 뒤에 깔리는 노래가 주인공의 마음을 대변하는듯했다.
바로 천마가 만든 메인테마곡인 ‘눈물겨워 하노라’이다.
전기장치를 쓰지 않은 기타와 현악 반주가 어딘가 우울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 잠들 수 없는 밤
험한 길에 올라서
눈물겨워 하노라
천마는 척대광이 느끼는 감정을 정확하게 잡아냈다.
노래 전체에 깔린 비통함이 서서히 짙어질 때는, 척대광이 직접 노래를 부르는 듯한 착각까지 들게 만들었다.
그 속에서 척대광의 화려한 액션씬이 펼쳐진다. 무술 감독이 옆에서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 부분 다시 찍기를 잘 했습니다.”
당시 천마는 손볼 게 너무 많다며 대충 입으로만 어쩌고저쩌고 떠들고 가버렸다.
무술 감독은 아쉬웠지만, 그렇다고 작곡을 하러 온 사람에게 무술 조언을 해달라고 잡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대신 천마가 가기 전 남겨준 몇 개의 조언은 큰 도움이 되었다.
무술 감독은 천마의 조언을 나름대로 분석해서 액션씬을 대폭 수정했다.
그 결과, 롱테이크로 찍은 대규모 액션씬이 만들어졌다.
이렇게 대규모 인원이 동원되는 장면에서 롱테이크로 가기 쉽지 않은데, 천마의 조언 덕분에 가능해졌다.
특히 주인공 척대광이 자신만의 신념을 가지고 묵묵히 나아가는 모습을 더욱 강조할 수 있었고, 덕분에 극의 가장 상징적인 부분이 탄생했다.
무술 감독은 생각했다.
‘다음에는 꼭 천마 님에게 같이 작품을 해보자고 해야겠다.’
무술 감독이 턱도 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 화면 속 주인공은 적을 다 쓸어버리고 매국노의 관저에 들어갔다.
휘파람 소리와 함께 타악기가 곁들어진다. 매국노를 향해 걸어가는 발걸음이 더욱 강조된다.
- 눈물아 파도가 되어라
울분아 대지를 덮쳐라
뒤에 은은히 흐르던 국악 요소가 본격적으로 전면에 나선다.
관현악 협주를 지원받아서 더욱 풍성해진 사운드.
매국노를 처단하는 장면에 대한 기대감이 살리려는 듯이 ‘워-워-워-워’하는 함성과 함께 고조되는 음악.
마침내 나라를 팔아먹은 악적과 척대광이 만났다.
매국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 역시 네놈이었군.
그 순간 장면이 끝났다.
화면에 몰입하던 음악감독은 생각했다.
'...천마가 대단하기는 하네.'
천마의 노래는 드라마의 흐름 속에 완벽하게 어우러졌다.
드라마의 중심이 되는 주인공의 심정을 천마가 부르는 순간, 주인공이 느끼는 분노와 슬픔이 더욱 뚜렷하게 다가왔다.
이쯤 되니 음악감독은 천마를 만나서 괜히 기싸움을 벌였다는 사실이 부끄러워졌다.
음악감독은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천마 덕분에 작품의 긴장감이 훨씬 살아났다. 클라이맥스 장면을 짧게 본 것만으로도 손에 땀이 난다.
음악감독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번에 진짜 대박의 냄새가 나는데. 나도 외신과 인터뷰 할 수 있겠지?'
신민희 작가 역시 눈을 또랑또랑하게 빛냈다.
“와! 제가 상상한 그대로예요! 역시 우리 피디님!”
김경수 피디도 뿌듯했다.
“다들 고생해주셨죠. 이걸 만들면서 예고편 티저로 쓰는 건 어떨까 생각해봤는데 어떠세요?”
“저는 완전 찬성!”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대한의 검성> 티저영상이 마침내 공개되었다.
*
커뮤니티에서 [빛태영]으로 활동했던 직장인은, 한태영이 군대에 간 후 천마로 완전히 갈아탔다.
얼마 전까지 회사에서 하던 대규모 프로젝트 때문에 <히트메이커> 방청도 못 가고 야근에 시달리던 그녀는 상사의 모가지를 따버릴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러나 마침내 프로젝트 론칭이 이루어지고, 그 이후에도 마무리 작업으로 한참을 바쁘게 지내다가 드디어 휴가를 쓸 수 있었다.
토요일과 일요일 양옆으로 하나씩 휴가를 낸 직장인은 외쳤다.
“나는 이제 자유다!”
물론 그건 사실이 아니다. 휴가가 끝난 화요일에는 출근해야 하니까.
하지만 그녀는 오늘 무척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바로 오늘!
천마 콘서트 예매를 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피시방에 자리 두 개를 예약하고, 혹시 모를 참사를 막기 위해 친구에게 지원사격을 요청했다.
H 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밟는 친구인데, 윤재하의 팬이라서 콘서트 티켓팅에 일가견이 있었다.
바쁜 친구지만 치킨과 맥주를 사준다고 꼬시니 바로 콜을 외치며 나왔다.
티켓팅 40분 전.
랩실에서 빠져나온 대학원생이 초췌한 모습으로 기어들어 왔다.
“죽겠다 진짜. 세팅 다 해놨네?”
“응응. 고맙다 야. 꼭 성공하자.”
인터넷 창을 3개 띄어놓고, 간편결제도 미리 연동해서 결제취소가 되는 일이 없도록 준비했다.
“언제로 할거야?”
“금요일꺼!”
“음. 조금 빡세겠는데.”
“아니야. 우리는 할 수 있어!”
실패했을 때를 대비해서 플랜B의 날짜와 좌석까지 꼼꼼하게 확인했다.
서버 시간을 띄어놓고 10초 전부터 켜둔 창마다 들어가서 새로 고침을 누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시간이 정각이 되었을 때,
“시작했다!!!”
"빨리빨리! 아씨 대기중 화면은 왜 안넘어가는거야!”
“야 나 됐어!”
“뭐? 결제. 얼른 결제 해!!"
"어어? 잠시만. 왜 결제버튼이 안눌리지?"
타다다다다닥
필사적인 손가락 싸움이 시작했다.
"진짜 빡셌다."
"천마 티켓팅 뭐야? 거의 아이돌 급인데?"
대학원생은 생각보다 빡센 천마 콘서트 티켓팅에 놀라워했다. 직장인도 얼떨떨하긴 마찬가지였다.
“나도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는데.”
그래도 광클 끝에 결국 둘 다 성공했다.
그것도 같은 날짜에 옆 좌석에 예매할 수 있었다.
기분이 좋아진 직장인이 이제 치맥을 먹으러 가자고 외쳤다.
대학원생은 치킨을 뜯으면서 말했다.
“근데 나 천마 콘서트 티켓 필요 없는데. 그냥 취소할까?”
직장인이 펄쩍 뛰었다.
“야! 그걸 왜 취소해. 내가 사줄테니까 그냥 같이 보러가자. 응?”
“근데 나 바빠서 시간이 될까 모르겠네.”
윤재하 팬인 대학원생은 천마에게 큰 관심이 없었다.
이번에 팬송을 써줘서 고맙긴 한데 딱 그정도랄까.
하지만 직장인은 친구를 천마의 세계로 영입하고 싶어 했고,
“너 <히트메이커>에서 천마 무대 못봤어? 완전 무대 장인이라니까. 후회 안 할거야.”
“그때 가서 생각해보고?”
대학원생은 여전히 시큰둥했다.
그러면서 각자 치킨을 뜯다가 폰도 보다가 얘기도 하다가···를 반복하던 와중.
“어? <대한의 검성> 티저영상이 나왔네?”
직장인에게 친구를 꼬실 기회가 찾아왔다.
< 천마의 세계로 (1) > 끝
ⓒ 연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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